316화 그럴 수만 있다면 (2)
처음, 절뚝거리는 기척이 복도 저편으로부터 들려왔을 때 나는 때가 됐나 싶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심문을 받을 때가 됐나 말이다.
‘대화는 내일 하자더니.’
[권력자란 항상 변덕스러운 법이지. 짜증나면 그냥 박차고 나가 버리는 게─ 아, 사슬 좀 그만 던져!]
이럴 줄 알았다면 데스브링거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그렇지만 인퀴지터나 아크메이지, 마이스터 등의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떠나는 걸 어떻게 막아. 나도 그들 소식이 궁금했던 건 매한가진데.
“……?”
하여 나는 데스브링거 없이 손님 맞이를 준비했다. 대접할 차나 다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 방처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기에 거창한 형식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드드득.
대신 나는 두 개의 의자를 벽난로 앞에 적당히 끌어다 놓았다. 본래도 의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흔들의자여서 대화용으론 영 적합하지 않았다.
‘어두운데…….’
[불이라도 지를─ 사슬 좀 그만 던지라고!]
「넌 좀 닥칠 필요가 있어.」
그런데 이렇게 의자를 두고 보니 너무 어둡다.
나는 조금 고민한 끝에 라텔을 이용해서 내 마법등불을 천장에 매달았다. LED 조명처럼 환하진 못해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건 썩 틀린 생각이 아니라서, 나는 만족하며 자리에 앉았다. 터벅. 거의 가까워진 발소리가 뒤로 돈 건 그다음 일이었다.
뭐야. 왜 가. 나는 기껏 다 준비했더니 돌아가는 기척에 괜히 황당해졌다.
이때 방문할 거라고 예고받은 적이 없으니 따지고 보면 내가 화낼 거리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기막힌 건 기막힌 거였다. 상대가 어느 방에 들어가지 않고 왔던 길만 되돌아가서 더더욱 그랬다.
[망할 꼬맹이가……!]
「해 볼 거면 해 봐. 도망치려 든 페널티가 널 옥죄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 감각에 의거하거든, 이 층에 사람이 있는 방은 이곳뿐이다. 그리고 상대가 이 층에 있는 다른 방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자연히 층 방문 목적은 나를 찾아오는 것일 확률이 높다.
내가 가진 의미가 의미인 만큼 추측이 틀릴 여지도 거의 없었다. 나와 대화하려는 것이든, 나를 감시하려는 것이든, 하다못해 뭘 전해 주려는 것이든. 결국 그 모든 건 나와 마주친 후에 이뤄질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걸 그냥 돌아가? 이건 대체 무슨 의미지?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무심코 일어나고 말았다. 평상시였다면 뭐냐 하고 넘겼을 일을 두고 굳이 문을 열어 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여기까지 와 놓고, 얻은 것 없이 돌아가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라도 고개를 바깥에 내밀었다.
“…파샤?”
「…아.」
내가 그를 알아보기 전에, 분노를 쥐 잡듯 잡고 있던 파우스트가 먼저 탄식을 내뱉었다.
“…파샤.”
소성주… 인가?
나는 파샤와 다르게, 반 박자 정도 늦게 그를 알아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소성주를 기억하는 특징은 남청색 머리카락인데, 지금 그 남청색은 등불 특유의 주홍빛에 의해 색이 애매해진 상태였다.
“파샤지.”
반면 내 마법등불은 주홍이 아닌 은색빛을 흘린다. 어둠 속에서도 그럭저럭 원색을 보여 준다는 소리다.
“파샤 맞지?”
하여 그는 나를, 이 몸의 정체를 쉽게 파악했고… 그대로 달려왔다. 다리가 정상이 아닌지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달려온 이가 절박하게 내 팔뚝을 붙잡았다.
“파샤… 파샤 맞잖아.”
후드득. 굵은 눈물이 또다시 비처럼 내렸다. 오늘 타인이 우는 모습을 몇 번째 보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게 매달리듯 선 이에게 그저 오묘한 시선만을 돌려주었다.
“…아니어도 괜찮아. 아니어도 상관없어. 상관없으니까…….”
“…….”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자, 이제 이걸 어쩔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우스트’의 지인인 사람 앞에서 망연히 고민했다. 사실을 말해 줘야 할까? 이 몸은 당신이 아는 그 존재의 것이 맞고, 나는 그 존재로 인해 잠시 불려 온 영혼이라는 걸 말해 줘야 해?
[꼬맹아, 힘이 빠졌어.]
「…….」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이 무수한 감정을 쏟아 낼 게 보이는데, 그걸 또 내가 다 감당해 줘야 하나?
[힘이 빠졌다고, 꼬맹아.]
「…닥, 쳐.」
인간의 감수성은 가끔 귀찮을 때가 있다. 내 문제도 아닌 것에 멋대로 이입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괴로워? 미안해? 아니면… 그와 대화하고 싶어?]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결국 가는 시선이 있다. 귀를 닫고 닫아도 들려오는 단어가 있고.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지점에서 나는… 그냥 이 사람을 대하는 것 자체가 거북하다. 다니엘이라는 커다란 고비를 넘긴 것이 오늘 낮이었기에 그 거북함은 더 크다.
[그레트헨.]
관련도 없는 사람의 감정에 휘말려 소비하는 일말의 기력도 지금 순간에는 너무 버겁다.
[그냥 무시해. 귀찮게 뭘 말해?]
나는 스르륵 나타난 분노의 영혼체를 힐끗 보았다. 제법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귀찮다와는 결이 다른 마음이지만 결국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이건, 휘말린 것에 불과한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파샤, 아탸, 앨랴…….”
[낮에 이단심문관도 말했잖아. 네가 이 아이보다 처지가 나은 건 어찌 보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 아이를 위해 모든 걸 감당할 필요는 없어.]
“어디 있어… 어디로 갔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오늘 낮에, 쟤가 내 허락을 맡고 잠깐 육체의 지배권을 가져갔었지.’
[잠, 잠깐.]
그런데 내가 지금 저이를 외면한다고 해서 그게 완전한 무시가 될까, 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닌지라.
‘그럼 대상만 바꿔서 똑같은 일을 시도해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
[아니…….]
나는 완벽한 방관을 위하여, 세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그동안 난 잘 거야. 문제없게 처리해.’
「그, 그래도 되는…….」
‘여기서 문제없게라는 말은, 신전에서 시비 걸 거리를 만들지 않고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저 사람이 나한테 뭐라 하는 일 없는 것까지 포함이야. 이해했어?’
그냥 지들이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지.
「네, 네.」
‘시간 제한은 따로 안 둘 거야. 그렇지만 데스브링거나 인퀴지터 등 기존 일행이었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바로 바꿔. 신전 사람이 찾아와도 마찬가지야. 알았지?’
「네……!」
문득, 이럴 거면 그냥 9년 내내 얘가 이 몸을 잡고 있고 나는 안에서 계속 자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럼 네가 나와. 아니면 내가 들어가야 나올 수 있어?’
「자, 잠시만요.」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길 꺼내도 되는 상황이냐면 그건 아닌지라. 나는 나중에 이야기 꺼내 볼 것을 다짐하며 눈을 깜빡였다. 분노가 뭐라 하질 않네. 약간의 찝찝함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나 내가 그 위화감에 문제를 제기하기 전, 세상이 뒤바뀌었다. 더는 피가 차 있지 않은 백색 세계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모르겠다.”
파우스트가 밖에 나가는 것을 두고 악마가 묘하게 조용한 것이 걸리기는 하는데, 또 파우스트가 큰 거부감 없이 수락한 걸 보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나는 모호한 상황을 두고 생각을 두어 번 잇다가 이만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긴 귀찮았다.
[…정말 지쳤구나, 그대.]
대신 백색 세계에 걸맞게 백색 의자에 앉아 있던 분노가 내게 속삭였다. 나는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외부 자극에 반응할 체력 자체가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심상을 강하게 떠올리면 되지만… 지금의 그대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 보이는군. 좋아, 친애하는 그레트헨. 이번은 친절을 베풀어 줄게.]
대신 그런 생각은 잠깐 들었다. 표면 의식 바꿀 수 있는데 안 바꾼 걸 알면 다니엘이 개빡쳐하겠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광활한 순백의 지평을 바라보았다.
딱. 손 퉁기는 소리와 함께 대지 일부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내가 쓰던 둥지야. 아, 그대에겐 별로일까? 침대가 나아, 그레트헨?]
울렁거리던 대지는 곧 어떠한 형태로 굳혀져 고정되었다. 마치 지푸라기로 만든 연꽃 같았다. 혹은 뼛조각을 모아 만든 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름 아늑한 곳인데.]
기괴하지만 징그럽지는 않고, 불편해 보이지만 안전해 보인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분노의 친절이니 뭐니 지금은 생각하는 게 더 귀찮았다.
“…좁아.”
[들키면 안 됐으니까.]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아야 딱 맞다. 나는 그 갑갑한 아늑함 속에서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았다. 바닥에 푹신한 것이 깔려 있어서 그런가, 그래도 몇 번 움직이니 대충 자세가 잡혔다.
[그래도 편하지 않아?]
너는, 염병, 이 구겨진 자세가 편해 보이냐.
나는 치솟은 짜증에 감으려던 눈을 괜히 치떴다. 키득. 굴 입구에 걸터앉은 분노가 잘게 웃었다.
[정말 싫었다면 다시 나왔을 거잖아, 그대.]
내가 지금 안 나가는 건 그냥 나가서 드러눕는 행위조차 귀찮아서지만… 됐다. 나는 푹신한 걸 목과 머리 아래쪽에 더 밀어 넣으며 눈을 끔뻑였다.
“야.”
[흐음?]
“…아니다. 됐다.”
내가 그렇게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냐? 나는 물으려 했던 것을 꾹 삼켰다. 돌아올 답을 아는데 아득바득 묻는 것도 웃긴 일이다 싶어서였다.
[오, 그레트헨. 사람을 불러 놓고 말하지 않는 건 죄악이야.]
“어쩌라고.”
물론 분노는 그 철회에 투정을 부렸지만 뭐 알 반가. 나는 말할 생각 없다는 의미로 눈꺼풀을 내렸다. [심술궂긴.] 바깥에 앉아 있던 분노가 혀를 찼다.
[그럼 그대, 부디 좋은 꿈을 꾸길.]
그래도 끝에는 축복을 빌어 줬다. 좀 엿 같은 일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이 시발롬이.
* * *
이래도 되나? 파우스트는 영혼의 자리를 바꾸며 자문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
그렇지만 철회하기엔 상황이 늦었다. 악마의 오묘한 시선을 마지막으로 세계가 뒤바뀌었다.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간 그레트헨이 그런 말을 속삭인 것 같기도 했다.
“보고 싶어…….”
하나 송구하게도 파우스트는 그의 말에 더는 신경을 기울일 수 없었다. 정신이 온전히 깨어난 순간, 덧입은 육체로부터 수십, 수백 개의 정보값이 몰아치며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까닭이다.
“제발…….”
적막 속에서 퍼지는 밤의 소리, 스며드는 바람의 냄새, 닿아 온 사람의 온기,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검푸른 세계.
흐읍. 파우스트는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감각의 홍수 앞에서 버벅거리며 호흡했다. 이것이 제대로 된 호흡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영혼체는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
아, 목구멍을 타고 넘어드는 이것이 공기인가? 이다지도 서늘하고 맑은 것이 바로 숨이었나.
그는 너무도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생경한 행위들을 이어 나갔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그리도 보고 싶었던 존재라는 건 잠시 잊었다.
소년은 진짜 육신이 얼마나 예민한 것인지, 세상에 실체를 가지고 선다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일인지부터 해결을 봐야 했다.
“괘, 괜찮……?”
아, 살아 숨 쉰다는 건 이렇게나 거대한 일이었다.
“괜찮은…….”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손을 끌어와 자신의 귀를 막았다. 눈꺼풀도 내렸다.
진정하려면 감각의 홍수를 제어할 필요가 있는데, 제어하려면 집중할 필요가 있고, 근데 또 집중하려면 이 감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꼬맹아,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
『…잠이 안 와서.』
정확히는, 이 거대한 홍수 속에서 명정한 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소년은 숨을 삼키면서까지 강제로 스스로를 고요에 떠밀었다.
『내일 시험 때문에?』
『네.』
그렇게 하나, 둘, 셋.
『평소처럼 하면 돼. 뭘 걱정해? 항상 잘했잖아.』
『하지만…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떡해요. 그래서 점수가 깎이면… 만약 탈락까지 가면…….』
넷, 다섯, 여섯.
『네가 실수를 대차게 해도 절대 탈락할 점수까진 안 갈 것 같다만… 이렇게 말해도 안심은 안 되지? 내가 정말 통과할 수 있을까, 다들 잘한다고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난 솔직히 아닌 것 같은데, 난 정말 부족한 것 같은데… 뭐 그런 생각만 들고.』
『…어, 어떻게.』
일곱, 여덟, 아홉.
『근데 있잖아. 괜찮아. 괜찮아, 파우스트. 실수해도 돼. 탈락할 리는 없겠지만, 설사 탈락해도 상관없어. 네가 시험에 통과해도 통과하지 못해도, 넌 우리들에게 언제나 자랑스러운 동생이었는걸.』
열.
『그러니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 가지지 마. 그런 조바심은 오히려 널 힘들게 만들어. 어쩌면 그 강박이 너를 더 실수로 내몰 수도 있고.』
『군야 형…….』
『마음 편히 먹어. 실패해도 된다고, 탈락해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어차피 네가 어떤 실수를 하든, 누구에게 패배하든, 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널 응원할 거야. 너도 알잖아? 네가 못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파우스트는 멈췄던 호흡을 이었다. 가빴던 호흡이 평상시의 나지막한 박자를 갖춰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정말 괜찮아. 괜찮을 거야.』
동시에 뭉개지고 부서져, ‘들렸다’라는 사실뿐이 남지 않았던 사위의 소리가 똑바로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넌 괜찮을 거야, 파우스트…….』
“숨 쉬어. 쉬어야 해.”
절박하기 그지없는 그 목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제발, 숨 좀 쉬어…….”
언제 무릎을 꿇었지? 소년은 드디어 제대로 인지되는 세상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마치 밤과 같은 남청색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사람을 불러와야…….”
“형.”
많은 것이 부서지고 사라진 세상임에도, 아직까지 남아 소년의 세계를 유의미하게 만드는 색이었다.
“……?”
“군야 형.”
소년은 자신을 끌어안은 남청색에 손을 올렸다. 깨진 영혼 사이로 그의 천수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으나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레트헨에겐 미안한 말이나,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너.”
“정말 죄송해요.”
그래, 그의 삶에는 여전히 가치가 없다. 살기 위해 수천을 희생시키는 이딴 삶에는 살아야 할 의미랄 게 전무하단 말이다.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요…….”
하나 그런 가치 없는 삶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당신들이겠지.
“아무도, 지킬 수 없었어…….”
당신들이 이토록 빛나는 별이고 밤이니까, 이런 어리석은 것에게조차 구원을 베푸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그저 목메어 우는 것밖엔 할 수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