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그럴 수만 있다면 (1)
데스브링거는 내려오는 기척을 두고 눈을 뾰족하게 떴다가, 각도상으로 처음 보이는 발을 두고 눈썹을 모았다.
부츠의 형태로 하여금 지금 내려오는 사람이 꼰대임을 알아챈 탓이다.
그렇지만 곧 드러난 얼굴은 생각한 것만큼 엉망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눈가가 붉고 퉁퉁 부은 게 질질 짜기라도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상상한 최악의 방향은 아니어서 안도했다.
솔직한 말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다니엘이 뺨에 피 묻힌 채 내려와도 그렇게까지 이상할 게 없는 형태기 때문이다.
물론 납득과 감정은 별개이므로, 뺨에 진짜 피가 묻어 있었다면 데스브링거는 바로 부정검을 던졌을 것이다. 악마기사의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이기에 더욱 그렇다.
악마기사에겐, 최소한 작금의 악마기사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모든 건 나리를 멋대로 데려온 놈과 그 모든 계기를 제공한 빌어먹을 악마에게만 있었다!
“올라가 보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저리 말하는 걸 보면 어떻게 잘 풀긴 한 모양이다. 데스브링거는 그 지점에 정말 안심하며, 망루를 후다닥 올랐다. 누가 보면 ‘과장 좀 보태서 발이 안 보이는데.’라고 감탄할 만한 빠르기였다.
“나리!”
그래도 그 빠른 걸음은 망루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즈음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믿기진 않지만, 악마기사의 뺨이 젖어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데스브링거는 새삼 악마기사의 변화를 자각하며 뻘쭘하게 멈춰 섰다. 자신이 아는 그 성격이 아니라고 해서 상대의 정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좀 겸연쩍다.
데스브링거는 망루 입구에 몸을 반쯤 걸친 채로 악마기사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가도 됩니까?”
그런 그의 소심한 물음에 악마기사가 찡그리듯 웃었다. 누가 보면 인상 찌푸린 줄 알 만큼 희미하고 또 어색한 미소였다.
“상관없다.”
“진짜요……?”
“그래.”
와, 완전 적응 안 되네.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싫어서는 아니고 너무 낯설어서 돋는 소름이었다. 그의 걸음이 살금살금 악마기사 근처로 이어졌다.
“…그, 나리. 좀 지쳐 보이시네요.”
“글쎄…….”
다만 그쯤 되니 젖은 뺨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평상시보다 더 음울한 빛깔의 눈이라거나, 상념에 잠긴 것도 아니고 굳은 표정도 아니고 불쾌한 것과도 결이 조금 다른 무표정이라거나, 귀에 얄팍히 그어진 혈선이라거나. 대충 그러한 것들이었다.
“지쳤다고 하면 저번처럼 악마라 할 건가?”
“제, 제가 언제요!”
“아마 뱃전에서?”
하나 그가 그것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기 전, 악마기사가 어슴푸레한 미소를 띠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것도 아니고,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사람 인상이 더 부드러워 보였다.
“…안 그럴 겁니다요.”
“그런가.”
“절대로 안 그럴 거예요.”
그래도 그가 읽어야 할 무언가가 사라지진 않았다. 데스브링거는 그것을 알고 좀 더 집중을 가했다.
“그럼 눈 좀 붙여도 뭐라 안 할 건가?”
『꼰대라 부르지 좀 마십시오.』
문득, 그가 썩 좋아하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이 악마기사의 잿빛 위로 겹쳐졌다.
데스브링거는 갑자기 목이 막혔다.
“…그럼요.”
왜 그 녀석이 떠올랐지? 색이 겹쳐서인가? 아니면 방금 전 마주쳤던 사람이라서? 그렇지만 악마기사랑 그 꼰대는 머리 색 외에 닮은 구석이 없는데…….
데스브링거는 악마기사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히는 걸 보며 순간 마음이 울렁였다. 무언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그가 절대로 놓쳐선 안 됐던, 그런 무언가를.
스륵.
그사이 악마기사가 눈을 온전히 붙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악마기사는 공개된 장소에서 무방비하게 자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리.”
“…….”
데스브링거는 새삼 그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자신의 짐을 더듬었다. 철렁거린 심장도 그 원인인 찝찝함도 분명 신경 쓰이지만, 그렇다고 악마기사를 요 없이 자게 만들고 싶진 않았던 까닭이다.
“어…….”
한데 담요가 없다. 정확히는 도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악마기사의 마법가방 안에 있던 짐이 죄 들어가 버렸다.
데스브링거의 입이 세모꼴로 모였다.
“큰일 났다.”
악마기사의 마법가방은 오직 악마기사만 사용할 수 있다. 그가 백날 손을 넣어 봤자 그의 짐이 붙잡히는 일은 없을 거란 이야기다.
하니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지금 두르고 있는 망토를 넘겨주는 것뿐인데…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망토 안감을 슬쩍 보았다. 덕지덕지 말라붙은 인퀴지터의 콧물이 보였다. 사막으로 가야 하는데 망토를 빌릴 사람은 없고, 콧물은 말라 있길래 억지로 쓴 결과였다.
“…….”
그의 우상을 먼지와 때가 가득한 망토 바깥 면으로 덮어 줄 것이냐, 콧물이 빽빽하게 말라붙은 안감으로 덮어 줄 것이냐.
데스브링거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 * *
“아직도?”
중천을 지난 해가 기어이 지평선에 닿았을 즈음, 귄터는 병사의 보고에 눈을 껌뻑였다. 망루에 올라간 뒤 내려올 생각을 않는 누군가 때문이었다.
“그, 깨워서 데려올까요?”
“아니, 그러진 말게.”
대악마를 잡은 이가 잠 좀 길게 잘 수도 있지, 그걸 굳이 깨울 필요 있나.
귄터는 그런 마인드로 손을 살짝 휘저었다가, 거의 떨어지고 만 해를 힐끗 보았다. 깨울 필요는 없지만 잠자리는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니 현실적으로도 망루는 좋은 잠자리가 아니었다.
“대신 이 말을 좀 전해 주게. 성의 남는 방을 내줄 수 있는데, 그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냐고. 대화는 내일로 미루고.”
하여 그는 새로운 제안을 떠올렸다.
어차피 대화를 하기엔 날도 너무 늦은 참이 아닌가. 귄터 본인도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느라 체력을 전부 소진해, 대화를 나눌 만한 상태가 영 아니고.
하니 이미 늦었다면 차라리 모두가 편하게 내일로 미루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귄터는 효율과 합리란 이름하에 해당 의견을 내었다. 신전이 찬성해 줄지는 미지수이나, 현 주교의 성향을 보건대 아마 동의해 줄 것 같았다.
“예. 그것만 전하면 되겠습니까?”
“설마 그렇겠나? 나가는 길에 집사에게도 말 전하게.”
그가 성으로 거취를 옮길지 아닐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나 옮긴다면 바로 향할 수 있게 대비해 둠이 맞는 일이리라.
“회색주석 방을… 아니지. 백은 방을 정리해 두고 추후 손님이 찾아오면 바로 쉴 수 있게 안내하라고 하게. 백동 아니고 백은이니까 절대 헷갈리지 말고.”
마음 같아선 백금이나 정금도 내줄 수 있으나 그 두 개의 방에는 각각 문제가 있다.
하여 귄터는 그 두 개 다음으로 제일 좋은 방을 골라 내주었다. 채광은 조금 안 좋지만 모래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아늑한 방이었다.
“그럼 어서 가 보게.”
“예.”
젠장, 백금이 빌어먹을 전 성주의 방만 아니었어도 거길 내줬을 텐데.
귄터는 지금이라도 명령을 철회할까 고민하다가, 영웅이 뭔 죄가 있어서 그딴 쓰레기의 방을 써야겠냐며 포기했다.
진짜로 그곳을 내줬다간 전통이니 뭐니 하며 반발할 이들이 수두룩하단 것도 그의 체념에 한 역할을 했다. 안 그래도 지친 마당에 그 지랄들까지 감당할 자신은 귄터에게 없었다.
“의외야. 그대들이 뭐라 할 줄 알았는데.”
하나 백은 방을 내준 지금이라고 딱히 그 지랄들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백금이 성주의 것이라면 정금은 성주의 반려, 백은은 그 후계자가 대대로 써 온 장소니까.
“소성주님께서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불만 없습니다.”
“동감입니다.”
다만 귄터의 예상과 달리 옆에 있던 두 기사는 다른 말을 뱉었다. 귄터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상명하복에 의거한 충성 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차피 취임식도 아직이잖은가.”
“허례허식이 소성주님의 위치를 정하진─”
“글쎄, 정말로?”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완전히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석기사쯤 되면 아무리 우직한 사람도 정치에 눈이 트이는 법이니까.
그리고 기사 하나 통제 못 하는 성주는 그 권위가 흔들린다. 절대 권력자였던 전 성주가 죽은 지금, 도시를 위해서라도 저들은 충성을 내보일 수밖에 없단 거다.
“우리끼리만 있는데 그냥 허심탄회하게 나오지?”
“진심입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물론 지금은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자리니, 약간의 반발을 보여도 상관은 없긴 한데……. 평상시 저 둘이 그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걸 고려하면 역시 존중을 표해 주는 것으로 납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진심으로 불만 없나?”
납득만 할 수 있다. 믿을 순 없었다.
귄터 그의 판단은 언제나 완벽하질 못했으니까.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역시 그렇지. 그럼, 사파이어 경은?”
“…저 또한 최선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약간의 불안은 있지만, 그건 감당해야만 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런가…….”
거봐라. 이번에도 완벽히 맞아 들어 가는 답이 아니지 않은가.
귄터는 앉아 있던 의자에 철푸덕 기댔다. 몰아붙여서 들은 비판이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너는… 됐다. 말할 시간조차 아깝군.』 지적이 있다는 건 어찌 보면 개선의 여지라도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미안하네.”
그래도 이런 행위 자체가 올바르지 않단 건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주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다는 건 단호하게 무능하단 소리이므로, 당연하다.
“이딴 게 머리 위에 있어서.”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러지 않고 배기겠는가? 자기 확신을 하기엔 그가 너무 머저리인데, 어떻게 무작정 몰아붙일 수가 있겠어.
“오늘 소성주님께선 임시 성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셨습니다.”
“완벽히라… 절규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도 그리 말하는 건가?”
“모든 이가 살 수는 없습니다. 설사 전 성주님께서 살아 계셨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성주님께서 내리신 결정은 분명 그 자리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귄터는 자신을 위로하는 기사를 두고 헛웃었다. 최선. 그건 전 성주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였다. 그가 이 자리의 유일한 최선이었기에 더더욱.
“이 자리는 최선을 다하는 자리가 아니야. 최고의 선택을 내려야 하는 자리지.”
“소성주님, 인간이 매번 최고의 선택을 할 수는─”
“절대 없지. 알아. 그런데 주민들도 그렇게 말할까?”
솔직한 말로, 귄터는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한 편이라 생각했다. 아무렴 도망치지도 않았고 공포심에 굳어 벌벌 떨지도 않았으며 부족한 체력에도 이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설마 그가 노력 안 했단 소리가 나오겠나.
“그대들도 알잖나. 병사나 주민들 사이에서 내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은지.”
그렇지만 그의 노력이, 그의 최선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게 문제였다.
이 자리는 결국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자리다.
“매일 혼나는 소성주님,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소성주님, 안타깝지만 능력이 안 되는 건 분명한 소성주님……. 물론 그 의견들엔 나도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야. 감정적이고 확신도 없는 인재는 확실히 성주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걸 모두가 아는 것과 나만 아는 건 다르지 않나?”
“…사람들도 소성주님의 활약을 보았습니다.”
“보기는 했지. 근데 그들이 그걸 계속 기억할 건 아니잖나.”
오늘이야 병사나 주민들이 말을 잘 따라 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충격적인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며 사람들의 혼이 쏙 나갔기 때문일 뿐, 그들이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라서 이뤄진 일이 아니다.
곧 정신 차릴 그들은 슬슬 그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분명 얼마 가지 않아 말이 나올 거야. 도시의 존망이 걸린 상황인데 나처럼 무능하고 멍청한 놈이 위에 서 있어도 되는 거냐고. 좀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소성주님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만 전 성주보단 못해. 그렇지?”
“그건……!”
“남겨진 자는 언제나 떠나간 자와 비교되지. 그대들이 호박과 끝없이 비교된 것처럼.”
불합리하지만 그렇다. 그가 무능하고 싶어서 무능한 게 아닌데, 그의 능력은 멋대로 심판대에 올라가 평가를 받는다. 전임자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잣대는 더욱 엄격해진다.
“물론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귄터는 이제 제발 그만두고 싶었다. 그를 한평생 옭아매 온 말들로부터, 부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소성주님,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 사파이어 경은 그 마음을 읽어 낸 것처럼 귀신같이 막아섰다. 사파이어 경보다 눈치가 덜한 토파즈 경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소성주님?”
“…왜? 왜 그러면 안 되지? 어차피 모두들 내 능력을 의심할 텐데, 그럴 바에야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 게 낫지 않나? 그대들도 나 같은 등신 새끼가 위에 있는 것보단 한층 유능한 사람이 있는 게 더 편할 텐데?”
한평생 켜켜이 쌓여 온 자기혐오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뮌문트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하루를 보낸 상태기에 그 격류는 더욱 거셌다.
귄터는 이 지긋지긋한 자리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짐은 너무 버거웠다.
“모든 인간에겐 어둠 속에서 바른 길을 찾아낼 현명함이 있다. 단지 많은 이가 아직 그것을 못 찾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파이어 경이 어떤 글귀를 내뱉은 순간, 그는 이를 악물고 말았다.
“하므로 우리는 그 현명함을 향한 첫 번째 인도자가 되어야 하리라. 앰버 경께서 하신 말씀이시지요.”
“사파이어 경.”
“한데 소성주님, 소성주님께선 그분을 그리도 존경하셨으면서, 정작 그분이 남긴 말은 지키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경은 정말이지.”
“실로 그러실 겁니까?”
“뮌문트 최악의 인간이야.”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감히 그를 협박했기에, 그렇게라도 화를 표출해야만 했다.
“경, 나는 경이 정말 싫어.”
“…죄송합니다.”
“경은 나를 항상 나를 위하는 척하며 내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지. 내가 소성주인 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소성주님, 그런 건…….”
“하지만, 그래. 경의 말이 맞아.”
비참하다. 귄터는 자신을 가장 증오스러운 자리에 매어 두는 문장의 줄을 보며 뇌까렸다. 역시 비참하다.
“그분의 말을 어길 수는 없지. 내가 그분의 말을 어길 순 없어.”
세상 최악으로… 비참한 사랑이었다.
“소성주님.”
“사파이어 경, 앞으로 한 시간 동안 나를 대신하게. 나를 이렇게까지 능멸해 놓고 설마 이것마저 못 한다고 하진 않겠지?”
“…외출하실 거라면 황옥 경이라도 데려가십시오.”
“필요 없네. 성을 떠날 생각 없으니까.”
성을 떠나긴커녕 그냥 방에 돌아갈 거다.
귄터는 수석기사 둘을 내버려 둔 채 있던 방을 나갔다. 복도 건너편, 임시 통합 지휘실로 쓰고 있는 집무실이 보였으나 애써 무시했다. 앞으로 한 시간은 사파이어 경이 대신해 줄 것이다.
“방, 아.”
다만 자신의 방이 있는 복도까지 들어섰을 때, 귄터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본래 그의 방이었던 백은 방은 지금 손님에게 내준 상태였다.
돌아가야겠군. 그는 손님방의 위치를 생각하며 복도를 밟았던 발을 되돌렸다. 생각날 거면 좀 일찍 생각날 것이지, 방 코앞까지 와서 생각날 건 뭐람. 애써 가볍게 지어낸 문장은 그의 설움을 온전히 가리지 못한다.
터벅, 터벅
그의 발이 절뚝절뚝 복도를 되짚었다. 그가 들고 있는 촛불 외의 광원이 없는 복도에는,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홍빛이 어른어른 흔들린다.
스르륵.
그리고 그런 어두운 길에 또 하나의 빛줄기가 더해졌다. 가는 선부터 시작해 기울어진 각도로 두꺼워지는 빛줄기였다.
“……?”
귄터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뒤를 향했다.
“…파샤?”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