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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14화 (314/389)

314화 전해 줘 (8)

다니엘은 한참을 울다가, 비척비척 내게 몸을 비켜 주었다. 복수를 확실히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유보한 것인가. 그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강령된 영혼이란 건, 믿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래. 그대를 납득시킬 물증 같은 게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뇨, 믿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보인 행적이 그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가…….”

너무 울어서 헐어 버린 눈가가 살짝 보였다. 하나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서로 내색하지 않았다. 서로의 자존심을 챙겨 주기 위함보다는, 각자의 상황이 너무 버거워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에 더 가깝다.

“경계를 아예 못 했군.”

“…그러게요.”

대신 우리는 자리를 조금 옮겨 망루 벽에 몸을 기댔다.

각자 앉은 자리 옆에는 마역을 내다볼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앉아서 고개만 돌리면 확인이 가능한 위치였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연유를 묻는 거라면, 그런 건 없다. 소년은 마를 이겨 낼 수 있는 자를 바랐을 뿐이고, 우연히 내가 그 조건에 맞아떨어졌을 뿐이니까.”

“하면 어째서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사실을 숨기셨습니까.”

“그대가 듣기에 불쾌할 수 있겠지만, 몰랐다. 정확히는 기억이 없었다. 그때 말했던 말 그대로.”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 소성주가 당부한 경계를 섰다.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상대방을 보는 일은 조금도 없다.

“악마의 농간이었다. 나는 내가 강령된 영혼이라는 것도, 하다못해 이 육신에 존재하는 게 나뿐이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악마가 남겨 둔 기억에만 휘둘려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겨 둔 기억이라는 건.”

“이 육신의 주인이 당했던 일. 나의 것이 아닌 것.”

“…그렇습니까. 그럼 지금은 되찾으신 겁니까.”

“그래.”

우리는 시야의 절반을 망루와 벽으로 채우고 나머지 절반을 사막으로 메우며 느릿느릿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마이스터에게 한 말의 반복이었기에 내 쪽에선 문장 하나하나를 뽑는 게 썩 어렵지 않았다.

[사실 잃어버린 적도 없으면서, 그대도 기만꾼이라니까.]

분노가 은근슬쩍 끼어드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나는 그 녀석을 물 흐르듯 외면했다. 창피함에 볼을 붉히기에는 지금 기분이 너무 저조했다.

“강령을 푸는 방법은 있는 겁니까.”

“내가 타락하지 않고 9년을 버티면 악마는 지옥으로, 나는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그 육신의 원주인은 다시 자신의 몸을 되찾는 거고요?”

“그래.”

스윽. 와중에 천이 살갗에 스치는, 대충 고개와 몸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까부터 미동이 없었고 소리가 뒤편에서 들린 걸 고려하면 아마 다니엘이 그랬을 것이다.

“…아까 소년이 보인다고 하셨지요. 하면 그 육신의 본래 주인은 당신 곁에 머물고 있는 겁니까?”

“지금은. 항상 그렇진 않다.”

“느껴지는 건 딱히 없는데… 신기하군요.”

“내 오른손 위에 있는데 그게 안 느껴지나.”

“…예. 거기 있었습니까.”

나는 힐끗 내 오른손과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각각 파우스트와 분노가 있는 위치다.

‘설명.’

[…영혼체니까 당연히 느껴지는 게 없지. 네가 우리를 볼 수 있는 건 우리의 영혼이 그 육체랑 연결된 상태라서일 뿐이야.]

아, 그런 원리였나. 나는 마력이니 마기니 뭐 그런 걸 써서 존재하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다들 모르더라 했다.

“…아직도 울고 있습니까.”

내가 분노를 털어 보는 사이,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힘 빠진 목소리 어딘가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 산처럼 쌓여 있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

「히끅.」

거진 탈진 상태에 가까웠던 파우스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자신의 죄가 도마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럽고, 그런데 또 잘못한 건 맞아서 죄책감 들고, 괴롭고, 미안하고… 사과는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서러워서 몸만 움츠러드는 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정말 미안해서 우는 건 맞습니까.”

「흐흡.」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 돼서 탈수가 왔을 것 같은데, 영혼체는 좀 다른가 보다.

파우스트가 또 울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다니엘이 보지 못해서 다행인 장면이었다.

“…글쎄.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미안함에서 오는 통곡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눈물이었다면,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계속 울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어린아이가 우는 건 그 아이의 잘잘못을 떠나 측은해지기 좋은 광경이고… 그 아이를 용서할 수 없는 입장에선 그 측은함이야말로 속을 더 터지게 만들었다.

네가 뭐라고 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정말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네가… 뭐 그렇게.

“가여운가.”

“…당신은 그래서 용서했습니까? 듣자 하니 당신도 원해서 그런 처지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사이, 다니엘이 눈에 띄게 말을 돌렸다. 그에 대해 붙잡고 캐물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긴 하지.”

“그럼……?”

“글쎄. 그대는 용서할 건가?”

대신 그가 그러했듯 나도 답을 회피했다. 했던 말을 또 함으로써 파우스트에게 눈치 주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내 답이 다니엘에게 영향을 주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렴 용서는 명백한 피해자만의 권리였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누구로 인해 결정되어서도 안 되며, 누구의 선택에 떠밀리듯 강제될 필요도 없는 권리란 말이다.

“그건…….”

하므로 나는 다니엘이 그 스스로의 감정만을 따져 결론 내리기를 바랐고, 그는 그렇게 했다.

“저는 역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고하듯 한 자 한 자 끊어 내뱉는 목소리가 고통과 열기로 드글드글 끓었다.

“아이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예. 그러니 그 아이에게 전하십시오. 당신 뒤에 숨어서 울지만 말고 언젠가 내 앞에 당당히 나와 서라고. 나와서 당시 정황도 제대로 설명하고, 사과도 깍듯이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가 나와 처음 맞닥뜨렸던 순간보다는 나았다. 그 때의 그는 화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분노에만 휩쓸렸지만, 지금의 그는 적어도 자신의 울분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 반드시 전하지. 이미 듣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이 문제도 결국 끝나기는 하는구나. 나는 내게만 보이는 소년에게 시선을 던졌다.

‘들었지.’

그러자 소년은 젖어서 하얗게만 보이는 눈을 눈꺼풀 뒤로 숨겼다.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속죄할 기회는 내가 벌어 줬으니까, 나머진 네가 해야 해.’

「…네.」

모든 것이 끝난 후, 이 애가 다니엘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수 있을까? 그 사과를 다니엘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알 수 없는 문제라는 답만 내렸다. 어차피 소년이 사과할 수 있게 될 즈음이면 나는 집에 돌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니 나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소년으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눈꺼풀을 내렸다.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힘들었다.

* * *

다니엘은 대화가 끊긴 후로도 두어 번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흔들림 한 점 없는 상대는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깬 채 가만히 있을 뿐인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마치 그가 한 말들과 비슷했다. 정말 진실만을 말했는지, 아니면 이조차 기만인 건지 실로 구별하기가 어렵다. 세상에서 제일 영문 모를 존재였다.

“…당신도 억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하나 그럼에도 그의 말에 수긍해 준 것은 일종의 피로감 때문이었다.

원수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못한 것을 향한 증오도, 하필이면 그것이 지독하게 영웅적이라서 오는 혼란도. 결국은 그의 기력을 연료 삼아 유지되는 감정들이기에 더는 그것에 힘을 쓰고 싶지 않아져 버린 것이다.

“…무엇을?”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아무렴, 이 정도면 꽤 오래 끌지 않았는가? 일상에 쓰여야 할 기력마저 박박 긁어다 불 지핀 것이 6년을 넘겼는데, 이 정도면 슬슬 지칠 만도 하지 않겠나.

“어른이 될 기회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 동정받을 일이나, 그렇다고 우리가 무조건 양보해야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무엇보다 다니엘은 의심하기 싫었다.

애써 형체를 유지했다 할 뿐이지 사실은 그처럼 거의 다 닳고 망가져 버린 눈을. 그렇게 될 만큼 응어리진 분노임에도 누군가를 위해서 어떻게든 억눌러 보이는 그 선의를.

그런 것마저 의심해야 한다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므로.

“당연한 권리를 받은 것에 미안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한 권리를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렇게 만드는 것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였다. 저 황당무계한 말을 믿어 주기로 한 건, 오직 그래서였다.

저런 것마저 악마의 것이라 여기기 싫어서, 동질감을 느껴 버리고 만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원망하기엔 그가 평생을 모셔 온 신앙과 그가 여태껏 지켜 온 양심이 허락을 내리지 않아서.

“그러니 이름 모를 고행자여, 스스로의 감정을 무작정 억누르지도 마십시오.”

그래서 그는 그냥 체념했다. 그렇게 동정했다.

“당신의 처지가 남보다 낫다 하여 모든 고초를 감내하려 드는 것도 하나의 오만입니다.”

생판 남의 몸에 들어가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 그 존재를, 자칫했다면 그의 원망까지 다 감당했을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

모든 걸 불사르고 남겨진 재처럼, 남겨진 원망과 미련이 미지근한 온기와 함께 가라앉았다. 남는 건 이제 타인을 향한 얄팍한 동정과 동질감뿐이다.

“제게 화내셔도 됩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당신은 그래도 됩니다. 제가 가한 모든 폭언은 본래라면 당신이 들을 필요 없던 것들이니까요.”

“…….”

“아니면 당신도 연관된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한 말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이었던 거고요?”

“그건 아니다.”

“그럼 제게 요구하십시오, 사과하라고. 당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다니엘은 머뭇거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상대방을 지켜보았다. 좌우 색이 다른 눈은 그의 의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처럼 가늘어진 채였다.

“…사과란 건 보통 요구해서 나오는 게 아닐 텐데.”

“보편적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지금 사과했을 때, 진심으로 한을 덜어 낼 자신 있으십니까? 아니, 애초에 제 말로 인한 상처를 정확히 가늠은 할 수 있습니까?”

그게 다니엘은 좀 웃기고 또 서글펐다. 너무 강인한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호수도 끝없이 퍼내면 결국 바닥을 드러내는 법인데.

“부당한 폭언과 대우가 얼마나 싫었는지 정리해서 말해 주십시오. 맞춰서 마땅히 사과드리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사과할 사람은 나인 줄 알겠군.”

“불쾌하셨습니까? 그럼 그때 이것까지 사과드리겠습니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필요 없다.”

그래도 상대의 흐릿한 웃음을 보거든 이 사람의 호수는 아직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다니엘은 그 점에 한해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른 상황에서, 본인의 진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겸해서.

“선비 생각나네…….”

그때 혼잣말임이 명백한 중얼거림이 상대의 입술에서 살짝 머물렀다. 선비가 누군진 모르겠으나 소중한 이임은 아득해진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부러 못 들은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실, 이것엔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보고 없이 나온 상태라서.”

다니엘, 그는 지금 임무도 내다 버린 채 상대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즉, 다른 말로는 탈영에 가까운 짓을 저질렀다.

“…무운을 빌지.”

“…예.”

물론 그는 이곳의 정식 병사가 아니고, 지금 그의 상관을 자처하는 이도 실제 소속이 다르다 보니 크게 뭐라 하진 못할 것이다. 그가 도시 파견 병력이 아닌 신전 소속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나 징계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니. 다니엘은 일단 상관인 이에게 격식 차려 사과할 것을 각오하며 망루를 내려갔다.

“…꼰대!”

그러자 망루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청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용사 직속 일행이란 이유로 누구도 명령 못 내리는 잉여 인력이었다.

“…그렇게 부르지 좀 마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댁이 나리한테 하는 것 보고요.”

아무튼, 저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제 뒤로 굴러가는 시선을 보며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라가 보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 나리한테 상처 자국 있기만 해 봐요! 나중에 베개에 돌 넣어 둘 거니까!”

요 며칠 편히 자긴 글렀군. 다니엘은 자신을 후다닥 지나가는 이를 보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부터 뒤통수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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