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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13화 (313/389)

313화 전해 줘 (7)

“드디어 만났군요.”

성벽에 올라선 순간, 나를 막아서는 사내 앞에서 조용히 생각했다. 타이밍의 신이 은근히 나를 억까 하는 것 같다면, 그건 피해망상일까 아닐까 하고.

“그, 꼰대 나리. 잠깐 대화를…….”

“당신은 끼어들지 마십시오.”

데스브링거가 다급히 나서며 다니엘을 말리려곤 했다. 하나 그는 단번에 데스브링거를 밀어내곤 나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머리 색과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후드를 푹 눌러쓴 채인데도 그랬다. 그는 후드에 가려진 내 눈을 어떻게든 찾아 노려보았다.

“아니면, 또 도망치실 겁니까?”

한데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끓어오르는 화와 설움, 너무도 오래 해묵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깊은 무언가로 가득했으니. 「아…….」 내 팔에 매달려 있던 파우스트가 목 막히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또한 파우스트가 그런 반응을 보였기에, 나는 자연히 그런 답을 내놓았다. 탁, 탁, 탁. 저편으로부터 절뚝거리며 달려오는 기척은 아직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안 그래도 그대와 나눌 대화가 있었다.”

“너, 너……!”

다만 익숙지도 않고, 다 쉬어 버려서 정체를 파악하기도 힘든 목소리가 절뚝거리는 발과 함께 누군가를 불렀다.

설마 나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긴 했으나 굳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대상이 대상이고, 그가 품은 감정이 감정일진대 내가 함부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소성주……?”

하나 내 옆에 있던 데스브링거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유로운 목으로 마음껏 새로운 등장인물을 확인했다. 소성주. 나는 쉬어 버린 목소리가 누굴 찾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소성주님, 안 그래도 잘 오셨─”

“자리를 옮기지.”

그치만 내가 판단하기에, 지금 우선되어야 할 건 그쪽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픈 데스브링거와 내 정체가 궁금할 소성주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상황이 그랬다.

“그대도 방해받고 싶진 않을 테니.”

“…좋습니다.”

그들의 감정 전부를 더해도 지금 내 앞에 선 사람만큼은 못할 것이니, 결국 이것이 최선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어… 사실 파우스트의 정서를 생각하면 완전한 최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소성주와 본래 긴밀한 사이였던 것 같으니 어쩌면 저쪽을 먼저 마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순서를 바꿀 자격 같은 건 안타깝게도 나에게 없다. 파우스트를 위해 대화 자체를 피해 버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이라고 무작정 감싸 주기엔 저쪽이 입은 피해가 너무 크다. 따지고 보면 제3자에 불과한 내가 함부로 개입하기 그러할 만큼.

“잠깐, 그 무슨…….”

“나는 이이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 내가 이 도시에 끼친 결례와 내가 이 도시에 입힌 은혜를 저울질했을 때, 약간의 시간을 구가할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같은 의견인가?”

“그, 거야 당연히 가능하지만…….”

“명쾌한 답, 감사를 전하지.”

나는 소성주에게 입으로 감사를 전한 후, 자리를 옮기기 위해 발을 살짝 틀었다. 그 과정에서 울상인 소성주의 얼굴과 그 뒤에 선 호위의 맹렬한 낯빛이 눈에 띄었으나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이 도시를 습격한 악마를 제거한 것과 별개로, 내가 가진 위험성이나 초기에 속여서 들어온 걸 고려하면 저 반응은 타당했다.

“대화할 만한 장소를 알고 있나?”

뭐, 타당함 이전에 부상이 제법 깊어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는 호위기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대화 장소를 수배했다.

“…모릅니다.”

“그런가.”

안타깝게도 나나 다니엘이나 마땅한 장소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저쪽 망루를 쓰게 하심은 어떻습니까. 경계할 병사가 부족하여 거의 텅텅 비다시피 한 곳이니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사나운 눈빛의 호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만 애타게 보고 있던 소성주가 몸을 화들짝 들썩였다.

“…바란다면, 20분 정도 병사들을 빼 줄 수 있소. 대화를 잇되 마역을 향한 경계만큼은 지속해 준다는 조건하에서.”

다만 그 눈치 보는 듯한 모습과 다르게, 그는 통수권자로서 제법 그럴싸한 답을 내놓았다. 아무 생각 없이 부하의 조언을 따르는 상관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 검토하여 승인하는 상급자의 모본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기에 다니엘 이단심문관은 불만 없이 고개를 숙였고, 나 또한 가볍게 묵례를 해 주었다. 제대로 된 격식은 아니나 최소한의 존중은 표한 내 행동에 호위가 그제야 시선을 누그러트렸다.

“가지.”

아무튼 장소도 얻었겠다, 나는 다니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나, 나리.”

내 뒤에 있던 데스브링거가 내 옷깃을 잡았다. “엇.” 그러고 나선 바로 떨어지는 것이, 본인도 반사적으로 붙잡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다녀오겠다.”

데스브링거도 나와 저 사내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이건 뒤로 미룰 수 없는 문제다.

나는 데스브링거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뗀 후 먼저 나아간 다니엘의 뒤를 따랐다. 그 잠깐 사이에 명령을 내려 둔 건지, 우리가 향하던 망루로부터 병사 두 명이 후다닥 내려오는 게 보였다.

망루는 이제 완전히 비어 버렸다.

터벅, 터벅.

나와 다니엘은 서로에게 말 거는 일 없이 망루의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내 손 위에 있는 파우스트는 더 이상 꺽꺽대는 소리도 흘리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죄스러운 일이라는 것처럼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탁.

그리고 끝내 망루의 꼭대기에 발이 닿았다. 심판자처럼 머리 위에 선 태양이 우리를 세상에 드러나도록 비추었다.

“이야기해 보십시오.”

후웅. 거칠게 부는 바람이 내 후드를 기어이 벗겼다.

“당신이 썼다는 그 불꽃에 대해, 제게 말해 보란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격앙된 이의 머리카락도 흐트러트렸다. 휘날리는 앞머리 사이로 눈물 자국이 선명한 뺨과 짙은 빛깔로 침잠한 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그랬습니까?”

“…….”

“왜 모른 척을 했습니까? 왜 그들에게 상냥하게 굴었어요? 슈츠의 환심은 대체 왜 샀고요? 친절을 베푸는 게 재밌는 일이라도 되셨습니까? 그들을 속이고 저를 기만하는 게 즐거우셨어요?”

“그건 아니─”

“그럼 대체 왜!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

“대체 왜, 대체 왜 그러셨냐고요……!”

“…난.”

“슈츠는, 이모님은 아직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데!!”

후드득. 넘실거리는 감정의 편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와 함께 내 입술도 온전히 닫혔다. 그의 감정은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분들은 아직도 당신을 믿고 있는데…….”

이건 그의 감정에 공감해서일까?

“왜, 왜 그러셨습니까? 대체 왜 그러셨냐고요…….”

아니, 아니다. 평상시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그에게 공감할 수 없다. 이해가 된다 안 된다를 떠나 그럴 여유가 없다. 나는 나의 감정으로도 충분히 무겁다.

“기만할 거면 끝까지 기만하든가. 도망칠 거면 다신 나타나지 말든가. 마음 편히 신뢰하든 영원히 원망하든 한쪽이라도 고를 수 있게 해 줄 것이지. 왜, 왜 당신은…….”

그렇지만… 그렇지만…….

“차라리 아니라고 다시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아니라고, 제 부모님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품은 악마도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나는 그의 감정으로부터 나의 감정을 연상했다. 마음 놓고 원망할 수도 없고, 잊어버리기에도 너무 거대한 울분을 떠올렸다.

토해 낼 수 없는 감정은 정말 최악이다.

“제가, 슈츠가 당신에게 속지 않았다고 어서 말하란 말입니다!”

정말로… 최악이기만 하다.

“나는, 네 원수가 아니다.”

“……!”

그러나 다니엘이 그 최악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줄 방도는 내게 없다. 아니, 있으나 선택할 의향 자체가 없다.

나는 내가 앞으로 고할 말이 다니엘에게 얼마나 잔인할지 알면서도 혀를 멈추지 않았다.

“그 말은…….”

“나는 이 육신의 진짜 주인이 아니므로, 너의 원수가 될 수 없다.”

“그게, 뭔…….”

“나는 최근에 강령된 영혼이다, 이단심문관. 이 육신의 주체가 제 몸에 멋대로 자리 잡은 악마를 혼자 막을 자신이 없어서 강제로 끌고 온 영혼이 바로 나란 거다.”

당신은 애도 아니고 지지해 주는 가족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괜찮지 않더라도 알아서 버텨.

나는 멋대로 재단한 사실을 멋대로 강요했다. 이 사실을 알거든 다니엘이 나를 개좆같이 보겠지만 알 바 아니었다. 다 큰 어른까지 챙겨 주기엔 나도 힘들었다. 그래 시발, 나도 정말 힘들단 말이다.

“그대의 원수? 이 육신일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지금 이 몸을 다루고 있는 나는 그대의 원한에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내가 불려 온 건 모든 사건이 끝난 후의 일이니까.”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이 이상 짐을 지고 싶지가 않아서.

나는 해당 사건으로부터 선을 그었다. 파우스트가 이것으로 더 힘들어질 수는 있겠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것까지 감싸 주기엔 내가 너무 힘겹다.

‘네 편을 들어 주지 않는 내가 원망스럽냐.’

「…….」

내 물음에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조금 불쌍하다가도 다시 그저 그렇게 됐다.

왜 어려.

『왜 그러셨습니까.』

겨우 억누르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외면하는 것조차 시도할 수 없는 이 순간에.

“뭔.”

내가 그렇게 가라앉는 사이, 다니엘은 잠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뭔 개소리를……!”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당연하다. 부모님이 살해당한 사람 입장에서 살인범(추정)이 저딴 말이나 하면 빡칠 수밖에 없다.

“할 변명이 없어서 지금 내게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성큼성큼 다가온 이가 내 멱살을 잡았다. 무기 내려놓고 오자고 할 걸 그랬나. 나는 멍하니 그런 상념을 떠올리며 눈꺼풀을 느리게 내렸다.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아, 아까까진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오는 기분이다. 좀 지친다.

“죽이고 싶은가?”

“그걸 말이라고……!”

“막지는 않겠다. 그대의 복수를 막을 자격은 내게 없으니까.”

[잠, 잠깐. 이봐, 그레트헨─]

“다만, 이단심문관.”

문득, 불발된 폭탄이 떠올랐다. 그게 터졌다면, 흰바람이 내게 사기를 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집에서 깨어나 있었겠지?

“…이 육신의 주체도 그대의 부모님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건 아닐 거다.”

다시 기회를 받은 것이 싫은 건 아니다.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 그 외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드디어 개선할 수 있게 됐으므로, 나는 이 순간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게 여겼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들을 입에 올려!”

“단지 잠들면 몸을 빼앗기는 입장이라, 고통에 정신 놓으면 악마가 대신 깨어나는 상황이어서, 조금만 방심해도 주변이 불태워지는 처지기에, 죽으려고 하면 되레 악마에게 기회만 내주는 꼴이 됐기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렇기에, 막고 싶었음에도 막지 못했을 뿐이라 생각한다.”

다만. 다만 그런 거다. 만약 그 폭탄이 터졌다면. 그리함으로써 나의 현실에서 깨어났다면. 당신들 품에 안겨 울 수 있었다면.

“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힘겨운 존재라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나는 생각한단 거다.”

“네가……!”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도무지 머리 한구석을 떠나지 않아서.

“이단심문관, 그대에겐 아마도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내게는 보인다.”

퍼억, 하고 다니엘이 내 몸을 밀쳐 넘어트렸다. 나는 굳이 저항하기보다, 그대로 순응하여 바닥에 몸을 대자로 펼쳤다. 스릉. 다니엘이 검을 잡았다.

“그대에게 너무 미안해서, 죄송하다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그저 꺽꺽 우는 아이가 보인다.”

“닥쳐!”

“그대가 원한다면 스스로 배를 가를 수도 있을, 그런 소년이 보인다.”

“닥치라고!!”

깡! 사납게 날을 세운 검이 내 머리 옆에 꽂혔다. 머리카락 일부가 잘리고 귀에 얄팍한 혈선이 그어졌다. 조금만 옆으로 간다면 내 목이 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용서하란 겁니까?”

그러나 그 검은 끝내 내 목을 베지 않았다. 다시 들어 올려 내려찍지도 않았다.

“재수 없이 악마를 품게 된 아이가 악마를 통제하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일 뿐이니 그 애를 용서하란 겁니까!!”

멈춰 선 칼날 대신 흘러내린 물방울이 내 뺨을 갈랐다.

“나는 부모님을 잃었는데, 내 인생의 반이 그날 사라졌는데……! 그런데도 그 애를 용서하라 말하는 거냔 말입니다!”

너무도 시리고, 너무도 비통한 일격이었다.

“용서하지 마라.”

그렇지만 내겐 이미 한번 지나간 감정이고 고민이었기에. 이미 매듭 짓고 결론을 내린 이야기라서.

“우리가 용서할 필요는 없다.”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나는 흐느끼는 청년 너머, 화창한 하늘을 두고 그저 중얼거렸다.

“다만, 이단심문관. 용서하지 않더라도 그 아이가 속죄한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 다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 아량만 베풀어 다오.”

아, 정말이지.

“어른이 될 기회조차 빼앗긴 그 아이와 달리, 우리는 어른이 될 기회만큼은 받았지 않았나.”

집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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