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전해 줘 (4)
귄터는 계속 마역 쪽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억눌렀다. 그곳을 응시해 봤자 원하는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리란 걸 알아서였다.
“거주구 상황은?”
대신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아무렴, 난리가 난 건 성벽 쪽만이 아니었다.
“인육을 먹다 걸린 자가 오십이 좀 넘고, 식량 창고나 우물을 급습한 이가 열하나입니다.”
역시나 허기와 갈증에 미쳐 날뛴 이가 오십이 넘는다는 보고가 돌아왔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다. 단련된 병사들조차 저주에 미쳐 동료를 물어뜯거나 스스로를 뜯어 먹은 마당인데, 민간인들이라고 뭐 아니 그랬겠는가.
“수는 상관없다. 격리 현황을 말해.”
다만 그들이 사람을 먹었든 자기 자신을 먹었든 뭘 먹었든. 그것이 이 난제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그들 개개인의 죄를 들춰 보며 신경 써 주기엔 그 외의 논란이 너무 많았다.
“명하신 대로 발견한 이들은 제압 후 시계탑 광장에 모아 두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한 자는 다섯이며, 사살된 자는 셋입니다.”
“역병에 걸린 자들은?”
“시체는 발견하는 족족 태우고 있으며, 주민들의 격리 또한 진행 중에 있습니다. 다만 병이 옮을까 주저하는 병사들이 있고, 주민들도 자신이 감염된 상태임을 쉬이 인정하려 들지 않아서…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작업 도중 전염된 병사는 최우선으로 치료해 줄 것이니 두려워 말고 작업하라 명해라. 또한 저항하거나 병을 숨기려 드는 주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격리하라. 협조하지 않는다면 경증일지라도 사살을 허가한다.”
다만 그쯤 되어, 귄터는 기묘한 느낌에 휩쓸렸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듯한, 마치 제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경증마저, 말입니까?”
“정화된 구역에 감염자가 들어가면 그곳은 또다시 감염 지역이 된다. 겨우 치료한 자들도 다시 전염될 수 있고. 그 꼴을 보느니 하나를 죽여 백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지켜본다는 건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가 보고 듣는 모든 풍경은 그의 육체를 통해 펼쳐지고 있으니까.
하나 입 밖으로 말 한마디가 나아갈 때, 그때마다 세계가 흐려지고 세피아빛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게 옳은 판단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허기와 갈증에 미쳐 날뛰었던, 그러나 저주가 풀린 후 순순히 격리에 협조한 일부 주민이, 역병 환자와 격리 구역을 나눠 달라 간청한 바가 있습니다. 경증 환자 역시 중증 환자와 구분되게 구역을 나눠 달라 요청한 바 있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선 어찌 처우할까요.”
“거절해라.”
보고하는 지휘관의 말 앞에 붙는 침묵이 거슬린다. 그렇지만 귄터는 간신히 외면한 채로 그의 생각을 읊었다. ‘이끄는 자는 언제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위가 흔들리면 아래도 무너진다.’ 들을 땐 가운뎃손가락만 올리고 싶던 가르침이 지금의 그를 지탱했다.
“지금 행하는 격리는 중증과 경증, 광인, 멀쩡한 주민. 이 네 분류로 나누고자 함이 아니다. 멀쩡한 자와 멀쩡하지 않은 자를 구분하여 보호와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지.”
아니, 지탱인가? 조종은 아니고?
그는 퇴색되어 가는 세상 앞에서 무릎을 쥐었다. 망가진 다리로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무너진 돌무더기 위에 앉아 버린 상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한 진통제를 주입하여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다리는 잿물이 끝없이 흐르는 듯하다. 그를 더 이상 인간이 아니도록 만드는 잿물이었다.
“기술자, 지식인, 마법사 등의 고급 인력은?”
“확보하는 즉시 신전 병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래.”
이게 머리끝까지 차면 그는 전 성주 같은 사람이 될까. 귄터는 결국 시선을 마역 바깥으로 굴렸다.
“…동물 문제는?”
“쥐는 발견되는 족족 태우고 있으며, 고양이도 눈이 붉다 싶으면 일단 죽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물릴 뻔한 병사가 몇 나오기는 했으나 다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가축은.”
“명하신 대로 우리 안에 있는 가축은 살리되, 우리를 탈출한 것들은 폭력성을 확인한 후 사살하거나 주변의 빈 우리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과 소의 피해가 큰가?”
“민간 쪽 말과 소의 피해는… 조금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군마의 경우는 우리 안에서 혼자 날뛰다 다친 녀석을 제외하곤 큰 피해가 없습니다. 유니콘 쪽 혈통의 경우는 저주가 통하지 않아 더욱 건강한 상태입니다.”
당연하지만 보고 싶은 이는 거리감으로 인해 검은 실루엣 정도로만 간신히 보였다. 색조차 구분 안 가는 셈이었으나, 조금만 더 멀었다면 점으로 보였을 것이니 마냥 아쉬워하기도 그랬다.
“그래…….”
그래도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좋았을 텐데. 갈색 머리카락을 흐트린 채 불꽃을 피워 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텐데.
“격리가 절반 이상 진행이 되면 정화 구역을 넓힐 것이다. 병사들에게 그 점을 고지하고, 특이 사항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도록.”
“예.”
무언가를 알고 있어도, 앰버 경이 돌아왔다 믿고 싶은 누군가에겐 필히 위안이 되어 줄 텐데.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파이어 경에게 말 하나 전해 주도록.”
귄터는 가을의 밀밭처럼 부드러운 공기를 두르고 있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청록빛 배신자를 가로막고 대악마를 향해 호박빛 횃불을 들어 올리던 검사 또한 떠올렸다.
상황이 급하고 피가 난무하여 확신할 수는 없으나 머리색이 변한 것 같던, 용사와도 관계가 있어 보이던 정체 모를 이 역시 기억했다.
“발 빠른 전령에게 담요와 물을 챙겨, 내게 보내 달라고.”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가 본 모습 중 어떤 것이 가장 그의 본질에 맞닿아 있을까?
“아, 물을 드시고 싶으시다면 제가…….”
“내가 쓸 것들이 아니다.”
“그럼……?”
귄터는 그것을 두어 번 곱씹고, 결론을 내렸다.
“가장 큰 위협을 제거한 것도 모자라,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아직도 저 바깥에 남아 있는 영웅을 위한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이든 아무래도 좋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상반된 면모를 보였든 간에 그것이 그가 베푼 은혜를 가리진 않을 것이므로.
* * *
[누가 오는데.]
“……?”
대지에 머리를 박은 채로 인생의 무상함을 찾았을까. 바이크에 걸터앉아 있던 분노가 발로 나를 툭툭 쳤다.
“발로 차지 마라.”
애초에 이건 무슨 원리로 되는 거야? 나는 나중에 물어볼 질문으로 이것을 기억해 두며,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성벽 방향에서 누가 오고 있긴 했다.
케이프를 두르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품에는 무언가를 바리바리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흠.”
다만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상태에서 반겨 줄 수는 없다. 나는 몸을 일으킨 후, 먼지를 털어 냈다.
“꺼져.”
[야박하긴.]
그러곤 자연스럽게 바이크 위 분노를 내쫓은 후 그 위에 대신 앉았다. 위잉. 이제 와서 간지 챙기려고 하는 건 아니긴 하다만, 눈치 없는 벌레들이 주변에 꼬이며 불쾌감을 새롭게 가져다주었다.
나는 결국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족족 조그만 마력창을 날려, 모조리 꼬치구이로 만들어 주었다. 바스락. 상대가 슬슬 시야권 안에 들어왔다.
“…데브?”
다만 등장한 이가 조금 의외였다. 아니, 엄청난 의외냐면 그건 또 아니긴 한데, 아무튼 생각 안 하고 있던 인물이긴 했어서.
상대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속은 점진적으로 복잡해졌다. 우리 사이의 꼬인 관계나 그것을 푸는 법 따위만 떠올렸을 뿐인데도 그랬다.
파우스트와 나의 관계가 그러하듯, 우리의 시작은 거짓과 오해로 꼬이고 꼬여서 바라만 봐도 참 숨이 막혔다.
“…나리.”
이런 사이도 나아질 수 있을까? 각자의 신념과 사정에 급급하여 어긋나고 또 어긋나기만 했던 관계도 되돌릴 수 있는 걸까?
“그, 나리한테 물이랑 담요 같은 걸 달할 사람을 구하길래.”
나는 여덟 걸음을 두고 멈춰 선 이를 보며 벙긋거리던 입을 보다 확실한 형태로 움직였다.
“어차피 저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미안하다.”
우리의 관계를 제대로 된 형상으로 되돌리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건 분명 욕심일 테니까.
“너무 늦은 사과라는 건 안다. 그래도 미안하다.”
다만… 다만 이대로 헤어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뭉쳐 있는 어떤 것만큼은 풀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응어리가 남아 있으면 사람은 앞으로 가는 게 힘들어진다.
“…당신이, 당신이 뭐가 미안한데요!”
여덟 걸음.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멈춰 섰던 이가 핑글, 하고 눈에 습기를 돌렸다.
“잘못은 우리가 했는데, 당신이 왜 미안한데…….”
암녹색 눈동자가 하얀 광을 흘릴 때마다 사막에 비가 몇 방울 떨어졌다. 어엇. 반사적으로 움직일 뻔한 다리가 군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친 건, 괜찮습니까요?”
“…그래.”
“진짜로?”
“다 나았다.”
나는 옷을 걷어 올려서라도 멀쩡함을 피력해야 하는지, 아니면 참아야 하는지 갈등했다. 마이스터를 시작점으로 내놓을 변명을 고려하면 못 할 짓까진 아니긴 한데, 데스브링거가 해당 사실을 전해 들은 상태인지 아닌지는 또 모르는 까닭이다.
만약 모르고 있는 거면 나만 또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기억도… 되찾으신 겁니까요?”
아, 기억 얘기하는 것 보니까 듣기는 들었나 보다.
나는 약간의 안도감과 조금 강렬한 양심의 타격 앞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악마에게… 가족이, 가족들이 죽었다는 그 기억만… 가지고 있는 게, 더는 아닌 거… 맞습니까요?”
그, 아니야. 나 사실 기억 멀쩡해……. 멀쩡한데 컨셉질 들키기 싫어서 그런 변명 댄 거야……. 나 진짜 멀쩡해…….
양심이 너무 거하게 찔린 나머지 울고 싶다는 생각도 좀 든 것 같다. 나는 순수한 걱정에 또다시 괴로워졌다. 이 논란을 듣고 있을 파우스트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내가 저런 변명을 댄 것엔 파우스트의 자업자득인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의 죽음이 꾸준히 언급되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그래.”
나는 나중에… 그러니까 저들과 계속 다니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해당 발언은 모쪼록 줄여 달라 부탁할 것을 다짐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컥. 어째서인지 데스브링거가 눈시울을 또 붉혔다. 떨어지는 눈물 방울은 더욱 굵어진 채다.
“…왜 우는 거냐.”
그, 과몰입하면 울 만한 사정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진짜 울 줄은 몰랐다. 얘한테도 내가 그렇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나? 인퀴지터에게 실수한 것처럼 데스브링거의 감정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또 저질러 버렸나?
“그걸 말이라고 묻는 겁니까요……?”
“…그건, 그러니까.”
데스브링거는 눈물을 뚝뚝 흘릴지언정 나를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명백히 실수한 사람은 내 쪽이었다.
“…난 그냥, 믿어 줄 거라고 생각 못 했을 뿐이다.”
아니, 그래도 말이야. 변명을 하자면 난 바로 믿어 줄 거라 생각을 못 했다고? 앞서 말했듯이 마땅한 실증도 없고, 내가 보기에도 악마의 기만질로 비칠 여지가 많으니까.
거기에 내 컨셉을 향해 얘네가 보인 진심을 고려해 보거든, 솔직히 후자가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내가 괜히 마이스터를 먼저 노린 게 아니란 거다.
나와 가장 거리감이 있던 마이스터는 도리어 설득의 여지가 많지만, 나를 감정적으로 따르던 이들은 그렇기에 설득이 어렵다.
컨셉기사를 너무 잘 아는 나머지 그것을 벗어난 모든 것을 이단으로 매도하는 편이니까.
캐해고정러의, 그것도 초반 캐해만 맹신하는 고정러의 최대 단점인 셈이다.
“의심할 여지가 많으니…….”
“장난해요?!”
한데 내가 그리 말하자마자 데스브링거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잘못 발언했구나. 나는 바로 나의 실수를 자각했다. 철회가 안 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당신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진작에……!”
“…진작에?”
다만 데스브링거의 발언을 듣고 있자면 조금 거슬리는 게 있는지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에 눈을 깜빡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가? 그런 건가?
불안감과 기대감 사이를 줄타기하는 감정이 내 머리를 건드렸다.
“…알고 있었던 거냐?”
근데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내가 컨셉질 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가? 그건 진짜 안 되는데.
“…그냥, 추측했던 것뿐이에요. 기억이 멀쩡한 사람이 본인 과거가 정리된 문서를 살 리 없잖아요.”
하나 이어진 말에, 불안감에 더 가까웠던 내 심정은 탁 하고 풀려 버렸다.
아, 그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