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전해 줘 (3)
빠각.
단단한 어떤 것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계명은 눈을 떴다. 그러자 축축한 무언가가 뜬 눈으로 스며 들어왔다.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알갱이 하나하나가 섞여 있어 안구를 따갑게 만드는 것이었다.
따끔거리는 눈에 그녀는 화들짝 눈꺼풀을 내렸다. 그것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눈 외에도 쑤시고 욱신거리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괜히 신음 소리를 자아냈다.
계명은 결국 눈 뜨기를 포기한 채 몸을 마구 뒤틀어 보았다. 그때마다 불쾌하게 차갑고 질척이는 것들이 그녀를 압박했다. 몸이 터지겠다 싶을 정도로 무겁지는 않으나 행동에 제한이 걸릴 정도는 되는 압력이었다.
“읍.”
심지어 그것들은 입과 코에도 슬쩍슬쩍 들어왔다.
비릿한 흙과 피의 냄새.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철퍽!
그녀는 압력을 이겨 내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를 파묻었던 진흙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바깥 공기를 쐰 손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팍!
그 상태 그대로 땅을 짚은 계명은 몸을 끌어 올렸다. 손바닥과 대지 사이에 끼인 통통한 무언가가 터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숨통이 트이고, 온몸의 감각이 좀 더 선명해지는 게 그녀에겐 더 중요했다.
“퉷.”
계명은 입안에 들어왔던 흙을 뱉어 내며 주변을 노려보듯 살폈다. 뒤집어지고 솟구치며 마구 변화한 지형, 오목하게 파여 사위의 시선을 차단하는 구덩이 안에 우연히 존재한 자신, 그녀를 갈아먹던 것으로 추정되는 벌레 몇 마리.
그녀는 사위의 벌레들을 손바닥으로 쳐 내며 죽기 전 시야와 지금 시야를 비교해 보았다. 땅이 치솟고 구덩이가 파이는 등 이전 시야와 닮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으나 뒤편의 성벽과는 거리감이 여전했다.
즉, 그녀는 죽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부활했을 확률이 높았다. 계명의 눈가가 비좁아졌다.
스륵.
와중에 그녀의 손은 반사적으로 칼에 찔렸던 자리를 쓰다듬고 말았으니.
찢기고 터지고 뚫리며 성한 구석이 없는 옷자락이 느껴졌다. 실제 그녀가 칼에 찔렸음을 증명하는 구멍이고, 그 뒤로 벌레에게 끝없이 갈아먹혔음을 알려 주는 흔적이었다.
아까 전 그녀가 한 번 죽었음을, 하다못해 그 칼질에 죽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음을 증거하는 자국이기도 했다.
함에도 작금의 그녀는 어째서 숨을 쉬고 사고를 이어 나가고 있는가?
…그녀를 그녀로 존재하게 하는 대신 교만의 꼭두각시로 서 있게 만들었던 심장의 제약은 또 왜 사라졌는가?
쿵, 쿵.
예전보다 둔하게 뛰는 심장이 자유롭게 뛰었다.
계명은 그것이 참으로 기묘하고 또 기묘했다. 평생 유지해 온 가면이 깨질 기묘함이었다.
짜그락. 이런 순간에도 꽉 쥔 채 놓치 않았던 검이 바닥을 긁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검과 바닭이 맞닿으면 언제나 이런 긁히는 소리를 내곤 했으니까.
다만 이상한 것은 그녀가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손목의 각도와 소리가 들려오는 거리감이었다. 레이피어로서 상당히 긴 날을 가진 금단이 바닥을 긁는다면 이것보다 좀 더 먼 곳에서 나야지, 이런 각도로 나선 안 됐다.
계명의 눈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돌아갔다.
『항상 이것을 곁에 두세요, 이름 없는 형제여. 당신이 마땅히 가졌어야 할 기회를 받기 위하여.』
오른손이 쥐고 있던 금단Forbidden의 검에는 더 이상 날이랄 게 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계명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 벨.”
순교하기 위해, 제물로 공양되기 위해 탄생한 존재. 그녀를 무시하던 오만의 피조물들을 설득하여 검을 빚어 준 유일한 사람.
처음에는 동정하는 듯하여 불쾌하기만 했던…….
『부디 스스로의 삶을 사세요.』
계명은 한참을 침묵했다가, 끝내 이를 악문 채로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있을 무언가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죽을 당시를 고려하면 그녀의 현재 위치는 성벽으로부터 백몇 미터 떨어진 정도일 터이나, 지금 그녀 주변은 지형이 엉망인 까닭이다.
즉, 그녀가 성벽을 못 보듯, 성벽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아, 오만이여.”
괜찮지 않아도 괜찮게 될 것이다.
“내 반드시 그대에게 파멸을 선물하리.”
그녀가 필히 그리 만들 것이므로.
“…아, 벌레들 진짜 많네.”
계명은 그녀의 반대편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구덩이 너머로 발걸음을 얹었다.
* * *
“…아, 벌레들 진짜 많네.”
나는 귀에서 계속 윙윙거리는 벌레들을 두고 손을 몇 번 휘저었다. 이게 다 베헤모스가 불러낸 벌레라 생각하니 기분은 더욱 좋지 않았다.
‘이건 안 없어지냐?’
[뭐, 벌레?]
‘어.’
거기에 악마 이 자식은 또다시 현실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상태라. 나는 건너편이 거의 비치지 않을 정도로 진해진 그것을 보며 눈을 괜히 좁혔다.
[마기로 이뤄진 것이라면, 소환체는 아니고.]
물론 악마는 티끌만큼도 내 눈살에 신경 쓰지 않았다.
‘둘에 차이가 있어?’
[검기와 철검 정도의 차이가 있지.]
…검기는 주입한 마력이 떨어지면 사라지지만, 철검은 그렇지 않다. 그런 이야기인가. 다른 말로는 소환체일 경우 직접 제거하지 않는 한 안 사라질 거란 얘기도 되는 거고?
“하여간 악마 아니랄까 봐 끝까지 똥만 뿌리고 가네…….”
[짐승에게 뭘 바라?]
“너도 포함이거든, 똥 덩어리 새끼야.”
[…불쾌하네.]
나는 나와 베헤모스 사이에 끼여 죽은 악마들을, 또 그 사체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힐끗 보았다.
마기도 제법 회복됐는데 태워 버릴까? 도가 넘는 불쾌함에 잠시 들었던 생각은 성벽 쪽 시선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마이스터가 도망치라는 신호를 주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괜찮은 쪽으로 가닥이 잡힌 듯한데… 그걸 굳이 초 치고 싶진 않은 까닭이다.
왜, 나야 벌레 잡는다고 불을 일으킨 거지만 저쪽은 전혀 다른 의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
윙~
하여 나는 손바닥으로 접근하는 벌레 몇 마리만 족친 후, 차라리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컨대 황야 위를 선회하는 바람소리나 바스락거리며 굴러가는 모래 알갱이의 소리 같은 거.
바스락.
무언가가 황야를 걷는 듯한 소리도.
“……?”
걷는 소리?
나는 살아 있는 악마… 아, 이렇게 말하니 저놈이랑 헷갈리는군. 앞으로 저놈의 칭호는 분노다.
나는 속으로 남의 명칭을 마구 바꾸며 좌우간 귀를 좀 더 기울여 보았다. 살아 있는 악마 탐색을 위해서였다. 하나 기분 탓이었다는 것처럼 기존에 들리던 소리만 다시 들려왔다. 그러니까 벌레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거 말이다.
‘야, 뭐 못 들었어?’
[…뭘?]
‘소리.’
[잘 모르겠는데.]
혹시 몰라 분노도 채근해 보고, 내 귀에도 좀 더 집중해 보았지만 역시 들리는 건 없었다. 파우스트는 아직도 히끅거리는 중이라 물어보기 좀 그렇고.
그렇다고 무언가가 보이느냐? 그렇다기엔 시야 한편을 완전히 가리는 베헤모스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다. 베헤모스가 남기고 간 지형의 꼬라지도 참 처참했고.
“으음…….”
아니면 정말 사체를 노리고 온 뭐가 있나?
나는 불쾌함을 참아 가며 뚱돼지 주변을 둘러보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벌레들이 좀 날아다닐 뿐, 사체를 갉아먹거나 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닌가…….”
[사체가 걱정되면 마기의 흐름만 확인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움직이는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분노가 미묘하게 가리고 선 성벽 쪽 방향을 힐끗 보았다. 그렇지만 베헤모스가 짓밟으며 마구 뒤집어진 지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
거기에 분노의 조언을 따라 마기에 집중해 보거든, 움직이는 마기 따위가 전혀 없으니. 위잉. 귀에 달려드는 벌레들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들 소리를 착각했을 확률이 제일 높은 것 같다.
나는 결국 바이크를 세워 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오.”
와중에 벌레들 진자 짜증나네. 차라리 피부 위를 기어라. 구멍에 고개 들이밀지 말고.
나는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손을 다시 휘저었다.
[…차라리 귀마개나 후드 같은 걸 만드는 건 어때.]
그러자 분노가 제의를 던졌다. 본인도 벌레 보기가 불쾌한지 제법 호소하는 어투였다.
‘…만든다고?’
[재생도 하고, 신체 구성도 뒤바꿔서 마기도 감추는 마당인데 간단한 변형이 안 될 건 뭐야?]
그건… 그런가?
‘몸 변형이 된다고……?’
[그래. 애초에 네가 짠 설정에 꼭 들어맞는 외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아?]
‘그건 그런데…….’
중간에 내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이 있었지만, 신기함이 순간의 부끄러움을 압도하며 사고의 흐름을 주도했다.
아무렴, 내가 짠 설정에 꼭 들어맞는 외관이 아무리 수상해도 설마 셀프 성형수술에까지 생각이 닿았겠는가. 그냥 이 우연까지 포함해 내가 결정된 거구나 여기지.
[방법은 라텔을 뒤바꿀 때와 비슷해. 바꿀 지점을 관조한 후 마기로 변형시켜.]
각설하고, 나는 홀린 듯이 옷깃을 잡아 마기를 집중해 보았다. 빳빳하게 세워져 있던 카라가 꾸물꾸물 형태를 바꾼 건 그다음 일이었다.
슬라임처럼 늘어난 카라가 내 상상을 따라 머리를 덮으며 하나의 후드가 되었다. 카라에 달려 있던 십자 모양의 브로치는 적당히 위치를 옮겨 비슷한 높이에 매달린 채다.
‘잠깐만, 이러면…….’
나는 아까부터 입가에 달라붙는 벌레를 떠올리곤, 또 한 번 마기를 움직여 보았다. 파도치듯 움직인 마기가 곧 목과 입을 가리는 천이 되었다.
달라붙는 감각이 싫었기에 타이츠 형식은 아니고, 목도리라고 하기엔 끝과 끝이 연결된, 굳이 따지면 넥워머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천이었다.
‘…야, 이거 옷뿐 아니라 몸도 바꿀 수 있는 거지.’
[말해 뭐 해?]
‘…머리색이랑, 팔도?’
[애초에 네 팔이 검은 건 네 설정놀음에 맞춰 주느라 검어진 거거든?]
그쯤 되니 이 변형이란 것의 의미가 확 와닿는지라. 나는 멍하니 생각 한 줄을 띄웠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변장 걱정은 덜었네.’
[변형할 때마다 마기가 들고, 과도하게 변형하면 감각이 어긋나서 위화감이 들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물론 당장 변장까지 해 가며 도망 생활을 할 의향은 없기에, 이건 최악의 최악까지 몰린 후에야 빛을 발할 것이다.
‘아, 맞아.’
[왜.]
‘외관 하니까 생각난 건데, 아까 기억 읽었단 건 뭔 소리냐.’
별개로, 나는 외형 변경권에 감탄하다 말고 잠시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내 질문에 분노가 ‘아’ 소리 따위를 냈다.
[말 그대론데.]
‘아니, 그니까 내 기억을 왜…….’
[필요하니까 읽었지?]
‘아, 진짜…….’
내가 물어보는 이유를 모르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을 미묘하게 돌리는 것이 오묘하게 꼴받는다. 하여간 이 새끼는 진짜 악마란 종족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이곳을 게임으로 가장하기 위한 기억이 필요해서 읽은 거예요. 당신의 개인 정보는, 그러니까 이름이나 나이, 가족, 친구, 나아가 유년 시절이나 소년 시절 같은 건 오래된 마법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다만 그쯤 해서, 울기를 멈춘 아이가 대신 답했다. 기억을 읽었으면 내 이름도 아는 거 아닌가? 잠깐 들 수 있었던 의문은 뒤에 붙은 문장 덕에 해결된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내 삶 전부를 아는 건 아니라니 그건 정말 다행이긴 한데.
내 속마음이 잠깐 안도했다가, 모르고 넘어갈 뻔한 단어를 도로 잡아채고 말았다.
‘게임을 가장하기 위한 기억이라는 건……?’
「HUD? UI? 같은 걸 만들 때 참고할 게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하신 게임 일부를 좀 확인했어요.」
‘…내가 한 게임을? 전부?’
나는 순간 당황하여, 내가 과거에 했던 게임들을 전부 떠올렸다. 천만다행스럽게 이상한 게임을 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개그를 노리고 만든 버그 망겜 정도가 최대였으니까.
다만… 다만 문제는…….
「네… 전부 확인했는데……. 아! 그… ‘영웅전설’인가? 하는 게임도 확인했어요. 그리고 그를 위해 컨… 셉? 이란 걸 준비하신 것도… 아, 이건 기억을 읽었다기보다는 지켜본 것에 가까워요.」
나는 파우스트의 목소리가 ‘컨… 셉?’이란 단어를 내뱉는 시점에서 혀를 꽉 깨물고 말았다. 분노가 말하는 것과 파우스트가 말하는 건 엄연히 무게가 달랐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계약이 당신을 선택한 게 게임을 시작하기 전 시간대였어서… 어, 왜, 왜 그러세요?」
털썩. 엄청난 파괴력 앞에 무릎은 속절없이 꿇리고 말았다. 이곳에서 한 쌩쑈에 더해 그 이전 설정 놀음까지 전부 봐 버렸다니, 전부 들켜 버렸다니…….
“수치스러워…….”
「왜, 왜……??」
“죽고 싶다…….”
분노 새끼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아이한테 그걸 들켰다고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쪽팔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어이 바닥에 엎어져 머리를 박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