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전해 줘 (2)
“위급한 자의 치료보다 역병의 정화가 더 급한 상태입니다. 해당 부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예!”
주교는 역병 환자를 격리하고 있던 곳을 가리켰다. “용사님?” 다만 이곳에서 의무를 다하고 있던 이 중 일부가 용사를 알아보았다.
“…아크메이지님, 다니엘 이단심문관님.”
“그를… 그를 죽이고 오신 겁니까.”
뭐, 그 일부야 용사가 직접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중 한 명의 부름에 용사가 얼굴을 굳힌 건 특이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을 구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하나 용사가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것도, 그것에 수긍한 이가 음울한 얼굴을 하는 것도, 그 사이에 낀 대마법사가 움찔거리다 결국 제 일에 집중하는 것마저도.
이 전체 상황을 생각하면 한낱 소사에 불과하다. 교주를 비롯한 그들은 그들의 우선되는 의무를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교님, 정말로 두고 보실 건지…….”
다만 그 과정에서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사제가 은근히 물어 왔다. 빠진 주어는 되물어 볼 필요도 없다.
주교는 허전한 어깨를 잠깐 쥐었다. 붕대와 지혈제로 임시 조치를 취한 팔에는 여전히 출혈이 일고 있어, 실시간으로 그의 명줄을 갉아 먹고 있다.
“여기서 무언갈 더 하고 싶습니까?”
“예?”
“무언가를 더 할 수는 있습니까?”
하나 그의 주변을 돌아보거든, 이미 명줄이 다한 자가 태반이다. 팔 한짝이 날아갔을지언정 살아 숨 쉬고 있는 그와 다르게, 살아날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 버린 자들이 주위엔 한가득이란 거다.
“사제들은 입을 단속하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런 그들 앞에서 어떻게 이 이상의 시도를 할 수 있을까. 악마의 그릇이니까 적대해야 한다고 어찌 고집 부릴 수 있어?
“그 말씀은…….”
“또한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사람들을 다독여 주는 것을 말하지, 악마를 때려잡으러 나가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있어, 베뮈르헨 주교의 말이 틀린 건 딱히 아니었다. 악마를 배격하는 건 신이 인정한 일이고 저 바깥의 존재가 두고 보기엔 위험한 것도 사실이니까.
하나 그의 말을 따르고 싶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악마를 처단하는 것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좀 더 우선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악마를 처형하는 데 수십의 희생이 따른다면 후일로 미룰 수도 있는, 만약 타협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단 말이다.
“주교님도 경계하시던 게 아닙니까? 지금까지 남아 있으셨던 것도 그런 마음에서…….”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대기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게 밝혀졌지 않습니까.”
물론 한평생 악마를 적대해 온 입장에서, 경계심만큼은 도무지 내려놓을 수 없긴 했다. 인간형이고 자시고 내부에서 마기가 느껴지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에게 있어 이 상황은, 대왕 바퀴벌레가 걸레를 들고 와 집을 복복복 닦아 주며 ‘나는 네 적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꼴과 비슷했다.
분명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고 있고 적대적 의사를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든다. 직전에 다른 바퀴벌레 떼가 그의 집을 덮쳐 엉망으로 만든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말을 더 얹고 싶다면, 모든 급한 불이 꺼진 후에 하십시오. 그 뒤에는 저도 말리지 않을 테니.”
그렇지만, 정말로 믿기 힘들지만.
저 대왕 바퀴벌레는, 아니 악마를 담고 있는 저 존재는 분명 그들에게 우호적이다.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기는커녕 도리어 도움만 줄 정도로, 용사와 대명장이 저리도 확고하게 나올 정도로 말이다.
“다만 용사님께서 동조해 주실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어떻게든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제압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건 용사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어리다 하여 자애와 정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무엇보다, 주교는 용사가 한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직무를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을 구해야겠다라니, 젊은 사람 특유의 치기와 깎여 나가지 않은 선함이 너무나도 선명하지 않은가?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은 분명 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비정한 자가 용사인 것은 필히 비극일지니. 그분께서 그리 말할 수 있는 분이란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명에는 인애가 있으니, 그것을 잘 아는 자가 용사가 된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으리라.
“대리자께서 논하는 정의와 자애야말로 신께서 외치는 것과 한 점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 * *
“성하, 당장 몸을 피하셔야─!”
“신의 성역이 침범받고 이 땅의 어린양들이 계속해서 죽어 가고 있건만. 이 내가 어딜 간단 말인가?”
한편 누군가는 씨가 될 말을 내뱉고, 누군가는 폭탄을 최대한 뒤로 미루며, 누군가는 용사의 인간상을 두고 안도하던 그 무렵. 세상에서 두 번째로 높고, 세상에서 제일 긴 산맥이 위치한 서쪽 대지에서 어떤 여인은 두 손을 그러모았다.
“부제와 어린 사제들을 우선해 대피시키게. 살 만큼 산 노인은 악마와 함께 죽을 것이니.”
회개한 도둑 디스마스가 평생을 바쳐 지은 신전은 마치 요람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으니.
그녀는 요람이 무덤으로 변할 각오를 한 채 기도를 외웠다. 빛기둥이 한번 솟구칠 때마다 그녀의 뺨과 목에는 주름이 새겨졌다. 세월이 주는 것보다 더 쪼글쪼글하고 늘어지는 주름이었다.
“아이고, 그 잠깐 새 할망구가 되셨네.”
다만 그녀의 얼굴이 주름에 전부 뒤덮이기 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새로 들어오는 몇 명의 인물은 제법 나이가 지긋한 얼굴들이다.
“다들 안 가고 뭐 했나?”
“우리가 가면 아기들 피할 시간은 누가 벌고?”
“우리 교황 성하 혼자 죽으면 외로울까 싶어서 찾아왔지요.”
“쯧, 천천히 가라, 천천히.”
성기사 하나 대동하지 않은 채로 찾아온 그들은 미리 짠 것처럼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교황을 포함하여 열두 명의 추기경이 만든 원형진이 아까보다 더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거… 꽤 부담이군.”
그러나 빛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들의 표정은 시시각각 안 좋아졌다. 힘을 부담하는 자들이 늘었다곤 하나 부하의 총량 또한 늘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근육이 익고 살이 부르트며 내장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외형의 노화는 그로 인한 여파에 불과했다. 그들은 안쪽부터 썩어 죽어 가기 시작했다.
“먼저 갑…….”
털썩.
그리고 기어이 누구 한 명이 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채 미라가 되어 죽었다.
“저도 갑…….”
그 사람이 끝이 아니었다. 한 명이 죽고, 또 한 명이 죽었다. 순식간에 다섯 자리가 비었다.
“악마여, 무엇을 누리고자 덜 자란 것들을 노리느냐? 이곳으로 오라. 그대들이 노리는 늙은이들은 이곳에 있느니라.”
함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기도를 외고, 신을 부르며 빛을 끌어왔다.
강맹하게 몰려오던 어둠이 그때마다 밀려나고 또 부서졌다. 마치 해안가의 파도와도 같았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며 비산하는 가루가 마치 포말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털썩.
그사이 또 한 명의 추기경이 쓰러졌다. 그것을 보며 교황은 눈꺼풀을 내렸다. 저 멀리, 어둠을 밀어내던 빛의 파도가 무언가의 앞발에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파사사삭. 그것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청녀가 찾아왔다. 강상하는 숨은 빛 없이 그저 희기만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아, 너희의 희생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 같더냐.]
늑대의 길쭉한 얼굴과 사자의 갈기, 설원의 냉기를 가진 짐승이 서리를 올올이 내뱉으며 교황을 주시했다. 그것의 눈은 하얀 돌로 지은 신전 건물을 뚫고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양했다.
[지금 진정한 신이 이 땅에 현신하셨으니, 고통 없는 끝을 바란다면 어서 머리를 조아리며 경도하라.]
“내가 모시는 신은 네 주인이 아니고, 네 주인이 진정한 신은 더더욱 아니니, 내 어찌 머리를 조아린단 말이냐? 가져온 몰락과 멸망이나 썩 내놓고 꺼지거라.”
[하해와 같은 자비로 내 권하였거늘, 이를 거절하고 독배를 마시는가. 어리석은지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대칭점의 존재들이니.
교황의 일갈에 푸른 늑대는 긴 주둥이를 쩍 벌렸다. 새까만 입 사이로 숨결이 튀어나오자 겨우 버티던 추기경 둘이 쓰러지고 빛이 얼어붙었다.
펄럭!
또한 그 얼어붙은 빛 위로 까맣고 파란 날개를 펼친 새가 날아들었다. 깃 없이 피막으로 이뤄진 날개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지상에 불이 붙었다. 열기 없이 연소시키고, 재 없이 부패하도록 하는 불이었다.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추기경 하나가 추가로 스러졌다.
이제 남은 건 추기경 둘과 교황뿐이었다.
[아직까지도 버티다니.]
그러나 흰 다리가 대리석 길을 밟은 순간, 남은 두 사람마저도 바싹 말라 죽어 버렸다. 커헉. 교황조차도 마른기침을 뱉으며 앞으로 엎어졌다.
[경이롭구나. 벌레처럼 바르작 짓밟힐 줄 알았건만. 내 인간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크흡, 컥.”
그녀가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는 사이, 왕관의 뿔을 가진 자는 또각또각 길을 따라 걸어왔다. 그를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도, 벽도 그의 충실한 사자와 공작이 전부 사멸시켰다.
[찬미하마. 그대의 발악은 나의 손짓을 한 번 더 이끌어 냈다.]
심지어는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의 손에 이끌려 도망치던 부제와 어린 사제들까지도.
[하나, 발악하는 자야. 그대의 모든 노고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대의 발버둥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그것을 인지한 교황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투명한 대신 붉은 빛을 띠는 눈물이었다.
“어떻게 그 어린 것들마저!”
[으음?]
“신을 자칭하는 자가 어찌 그리 잔인한가! 어찌 그리 잔인해!”
[잔인, 잔인인가.]
녹음도 바다의 빛도 아닌 광물의 눈동자가 긴 속눈썹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는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그대의 신 또한 자애 없는 냉혹과 불공정한 평등으로서 군림하는 존재일진대, 어찌 나에게 그런 비난을 가하는가? 내가 오롯이 섭리와 질서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인가?]
“나의 신과 그대는 위치가 다르다!”
[우스운 말이로다. 어떤 가혹함은 다만 신의 것이기에 허용된다니.]
스르륵. 고갯짓을 따라 흔들린 베일이 닿아 오는 빛에 따라 다채롭게 반짝였다. 마치 신이 입는다는 무지개의 한 자락처럼.
[그것은 결국 위치가 자격을 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또한 가는 손에 들린 왕홀은 바래지 않는 빛과 부서지지 않는 보석으로 대지를 두드렸다.
[그런 법칙이라면 나는 응당 가장 높은 곳을 향하리라.]
토옥. 대지 아래서부터 거꾸로 솟아오른 물방울들이 모여 웅덩이를 이루고 못이 되었다.
대신전이 있던 대지가 뒤집어진 호수에 잠기며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교만한 자여, 너는 결코 하늘에 닿지 못한 채 추락하리라!”
그 속에서 겨우겨우 숨을 잇고 있던 교황이 마지막 발악을 외쳤다. [무례한 것.] 조용히 주인의 뒤에 머물러 있던 사자가 남몰래 이를 드러냈다. 흰 숨결이 교황의 육신을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내가 불태워도 좋았다.]
[화장은 인간을 도리 있게 보내 주는 장례법이니. 천자께 무례를 범한 존재에게 어찌 예우를 다하겠나?]
사자는 깃 없는 새에게 그리 말하고서는 자신의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명 없이 나선 것에 마땅한 처벌을 내리시옵소서.] 그림처럼 웃고 있던 교만이 그제야 입을 떼었다.
[되었다. 나를 향한 충성에 어찌 벌을 내릴까?]
그는 사자를 벌하는 대신 들고 있던 왕홀로 호수의 표면을 톡 두드렸다. 뒤집어진 호수의 아래, 한때는 하늘이었던 허공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길고 거대한 용이었다.
쩌억!
수면을 향해 솟구치듯 아래로 추락하던 용은 그 거대한 입을 벌렸다. 촤악! 그리고 그것은 끝내, 얼어붙은 육신을 삼킨 채로 요란한 비산과 함께 뒤집힌 호수의 수면을 통과했다.
호수에 인 파문과 포말만이 방금 있었던 광경을 느릿하게 증명할 따름이다.
[친정은 여기까지다.]
그 속에서 교만은 조용히 몸을 낮추었다. 사르륵. 물결 사이로 들어온 거대한 비늘이 마치 옥좌처럼 펼쳐지며 그의 몸을 지탱했다.
[하면 눈과 불로 빚은 것들아, 그대들의 충정을 내게 증명하라. 더 많은 피와 살점을 들고 온 자가 나의 총애를 받으리라.]
[유일한 하늘의 명을 받잡나이다.]
[받잡나이다.]
사리를 분별할 이성과 지혜를 부여받은 자들이 그들의 날개와 다리를 펼쳤다.
[서부는 이것으로 종언을 맞이하겠군요.]
다만 모두가 나서는 와중에도 끼어들지 않는 자는 있으니.
눈을 가린 목동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원하는 바는 모두 이루셨나이까?]
[서부의 몰락은, 그러하다. 하나 어리석은 짐승이 내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구나.]
[…그가 실패했습니까?]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목적은 달성했으나 죽었다. 하니 결코 교환비에서 이득을 보았노라 말할 수 없으리라.]
[저런…….]
목동은 주인의 말에 유감을 표하는 한편, 어딘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스르륵. 흘러내린 옷자락이 땅을 잠깐 쓰는가 싶으면 그의 빈손은 땅에 떨어져 있던 무언가를 주워 든다.
[이것은…….]
[경전이로구나.]
[하아. 역시 그렇습니까? 무도한 것들. 서적 정도는 남겨 줄 것이지, 구분도 없이 모조리 태워 버리다니.]
[이곳에 있는 서적은 오롯이 이 땅의 신을 향한 것일지니. 그것에 어찌 관심 가지는가, 내 양치기야?]
[나의 하늘이시여, 저는 저의 공허를 채울 제물로 지식을 택하였으니. 이단일지라도 머리에 넣고자 하는 욕망을 어찌 참겠나이까?]
목동은 그리 말하며 주워 든 경전을 펼쳤다. 천을 감싼 눈을 대신하여 손끝이 경전의 모든 페이지를 샅샅히 훑었다.
[다만 하늘이시여, 이곳의 신은 인애를 모르고 너그러움을 몰라 순환과 질서로만 기능하는 것일진대 어찌 이곳의 경전에는 신이 계명을 내렸노라 쓰여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 월권이었으나, 무언의 허락하에 이어지는 것이라.
[그는 어째서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길 것을 말했으며, 어찌 이웃에게 자비로울 것을 하명했나이까? 살인도 간음도 절도도 자연에게 있어선 한낱 소사에 불과한 일일진대 이 땅의 신은 인애 없이 어찌 이것을 명했나이까?]
목동, 아벨은 감은 눈으로 또 한 번의 과분을 범했다.
교만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것은 경전을 적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
[법을 세우기 위해 신의 말을 사칭하다니, 최초의 인간이란 참으로 오만하지 않느냐?]
그가 질문이라는 월권에 웃었는지, 혹은 그 질문의 내용에 웃었는지는 알 겨를이 없다.
[결국 자애와 정의는 신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서 잉태되는 것이니. 인간사의 옳고 그름은 결국 인간만이 결정할 수 있으리라. 신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다만 계명성의 보석과 같은 눈동자는 자신의 양치기를 지긋이 응시하며 날개 망토를 뻗었다. 사륵. 첫 번째 깃이 아벨의 턱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소매로 연신 쓸었으나 그럼에도 핏자국이 옅게 남은 턱이었다.
[그래서 내 양치기야, 한낱 인형에게 너의 목숨을 건네준 이유는 무엇이냐? 내가 그것에 죄어 둔 목줄을 감히 부순 것은 어떤 이유에서 행한 것이냐?]
두려움 따위는 없다는 양 뻣뻣하게 굴던 목동이 처음으로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