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전해 줘 (1)
나는 마이스터를 뒷자리에 태운 채로 질주했다. 말이 바이크지, 연료 탱크도 엔진도 머플러도 없는 짭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적어도 외관은 그럴싸했고, 실제로 움직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
「우, 우와…….」
참고로 이 엔진 없는 짭 바이크가 굴러가는 것엔 특별한 원리가 없다. 페달을 밟으면 움직이는 자전거처럼, 얘도 내가 마기로 직접 바퀴를 굴리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예상은 했지만 마력이 정말 더럽게 많이 든다.
“뭐냐, 뭐냐? 이거 뭐냐?!”
하나 그런 간단하고도 무식한 수법에조차 공돌이 마이스터는 굉장히 흥분했다. 말이 최고의 운송 수단인 시대에서 이런 물건을 봐 버렸으니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내 뒤에 탄 마이스터가 내 옷자락을 잡고 나를 짤짤 흔들었다.
“이것도 악마의 힘이냐?!”
“…내 고향 물건이다.”
“네 고향은 너처럼 마력 조절에 미친 놈들만 있는 거냐?”
“그럴 리가.”
거긴 애초에 마력이니 마기니 하는 게 없다고. 나는 그 말이 마이스터에게 상처가 될지 몰라, 꿀꺽 삼킨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기억하는 엔진의 원리를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엔진이라는 기구가 포함된다. 엔진은 연료 탱크로부터 연료를 받아 안쪽에서 자잘한 폭발을 일으키는데…….”
“폭발을 일으킨다고?”
“…폭발이 일 때의 힘으로 톱니바퀴를 회전시키는 구조다. 회전한 톱니바퀴는 바퀴와 연결되어 바퀴를 돌아가게 만들고.”
원리가 이게 맞나? 기계는 뭐 쓰기만 하고 원리에 관심을 가져 봤어야 알지. 심지어 나는 펑크 배경을 취향으로 삼았던 적이 거의 없다고. 그리기 힘들어서.
“자세한 건 모른다.”
내가 딱 잘라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자, 마이스터가 ‘으음’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연료를 받아 폭발이 인다라… 연료가 혼자서 폭발해 주진 않을 테니 분명 촉발제가 있을 거고… 아니, 그 전에 폭발을 견뎌 낼 수 있는 소재로…….”
거기에 그 뒤로 이어지는 건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라. 나는 괜히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바퀴를 더욱 열심히 돌렸다. 내가 죽인 베헤모스의 몸뚱이가 왼편에 보이고, 오른편에는 뒤집어진 땅과 성벽이 아슬아슬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 나중에 고향 물건에 대한 이야기 쫙 해 봐.”
…무서워. 나는 괜히 바이크를 보여 줬나 후회했다. 말 같은 건 다리를 일일이 조정해야 했을 것이므로 바이크는 분명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신전이 그럴 기회를 준다면, 노력해 보지.”
콱.
나는 거대한 언덕을 발판 삼아 수십 미터를 체공한 후, 착지 타이밍에 맞춰 라텔의 바퀴 부분을 묽은 액체 형태로 변형했다. 고무처럼 탄력 있는 재질로 변경이 안 되기에 택한 차선이었다.
철퍽 하며 바닥에 착지한 바퀴가 다시 제 형태를 갖추며 스르륵 솟아올랐다. 약간의 점성이 있도록 만든 바퀴는 울퉁불퉁한 바닥의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진 못할지언정 요란한 빈 수레 꼴이 되지 않는다.
“이런 물건이 대중화된다면 운송에 혁신이 일 텐데.”
“네가 만들던 배터리만큼의 혁신은 못 일으킬 거다.”
“…….”
애초에 지구의 바이크도 제작할 때 배터리가 들어가는 걸로 아는데, 그럼 무조건 배터리 압승이지.
나는 마이스터의 반응을 듣지 않은 채로 혼자 고개를 주억였다.
“그.”
덜컹.
“거야, 당연한 거고.”
하필 피하기도 애매하고 점액질 바퀴로도 커버가 되지 않을 커다란 돌멩이가 밟히며, 바이크가 한차례 요동쳤다. 마이스터의 말이 그에 맞춰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아, 혹시 아이템 하나를 봐 줄 수 있나.”
다만 그쯤 되어, 나는 그에게 물어볼 만한 것 하나를 떠올렸다. 진실 고백과 수치사의 위협, 미래에 대한 상담을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가슴보호구 건이었다.
“뭐.”
나는 인벤토리를 이용하여, 여전히 가슴팍에 끼고 있던 보호구를 능숙히 전달했다.
“이게 뭔데.”
“폭발 마법을 걸어 둔 장비다.”
“…가슴보호대인데?”
“폭주하기 전 자살할 생각으로 만들었던 거다. 아무튼, 얼마 전에 쓰려고 했는데 폭발이 일지가 않더군. 마법이 제대로 새겨진 게 맞나?”
내 물음에 마이스터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방어구에 걸린 마법을 확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말에 어이를 잃은 건지는 가늠이 잘 안됐다.
“…폭발은 아니고 보호 마법이 걸려 있긴 해. 회로가 교묘해서 착각하기 좋게 새겨져 있는데?”
“…그렇군.”
그래도 끝내 감정은 해 주었다. 내가 키워드를 잘못 뱉은 게 아님이 증명된 것이다.
“바꿀 거냐?”
“글쎄. 아직은 생각 없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런데 흰바람은 왜 사기를 친 거지? 그쪽은 사감 없이 내가 죽었으면 하는 입장으로 보였는데.
“다만 따져 보긴 해야겠군.”
나는 도무지 왜 그랬는지 모를 흰바람의 행동을 두고 약한 한숨을 뱉었다. 흰바람이 마법을 다르게 새겨 준 덕분에 기회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쉽기도 하고, 좀 찝찝하기도 한. 그런…….
“…슬슬 도착인가.”
각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했던 베헤모스의 사체 앞에 도달했다. 성벽과 그렇게 떨어져 있는 위치가 아니니, 나머진 걸어가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가라.”
“오오냐.”
참고로 도시에 돌아가는 건 마이스터 혼자인 것으로 미리 합의 보았다.
베헤모스 사체를 홀로 두기도 불안하고, 내가 도시로 향했을 때 그걸 저쪽에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거기에 이 정도 거리면 저쪽에서 나를 적대하기로 결정 내려도 붙잡히는 일 없이 몸 뺄 수 있을 테니까.
이래저래 편의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지금이라도 가는 게 어때? 남은 마기면 용사가 따라오더라도 넉넉히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무너진 성벽이나 패잔병처럼 널브러진 병사들을 떠올리거든 과연 내게 시비 걸 여력은 있나 싶긴 한데.
“기다리는 동안 고향 문물이나 정리하고 있으라고.”
무엇보다 마이스터를 보고 있자면 호기심 탐구를 위해서라도 신전을 반드시 설득해 올 것만 같다. 뭔가 믿음직스럽다.
“…신호하도록.”
“어.”
그래도 세상일이란 건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정해 둔 신호를 곱씹고는, 베헤모스 사체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바이크를 세웠다.
점점 멀어지는 마이스터의 등과 마이스터가 가까워질수록 소란스러워지는 성벽이 대비되었다.
스윽.
그러나 그걸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으니. 나는 성벽을 외면한 채 바이크에 몸을 기댔다. 리챠 씨랑 그 뭐냐, 소성주는 살아 있으려나.
할 것 없는 내 시선은 벌레들을 내쫓는 것과 동시에 은근히 성벽 위를 훑는 중이다.
「아…….」
하나 나보다 파우스트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았다. 억누른 탄식이 들려오고, 한 박자 늦게 남청색이 보였다. 피에 먼지에 별걸 다 끼얹으며 더러워진 남청색은 솔직한 말로 검정색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살아 있네.”
그렇지만 살아 있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은 채로 서 있을지언정 시체가 아닌 산 사람으로서 아직 이 땅에 있었다.
그렇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
문득, 나는 그가 나를 살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 그의 얼굴이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의 시선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
그리고 그건 파우스트에게 있어 더 잘 느껴질 감각이라.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퍼졌다. 입을 틀어막고 흘러 나가는 호흡마저 죽일 때 흔히 나는 소리였다.
[시끄럽게 굴기는…….]
‘너보단 안 시끄러우니까 닥쳐.’
저 애가 숨 죽여 울기까진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나는 그것을 헤아리면서도 섣불리 소년을 위로하지 않았다. 소년이 지금 느낄 감정의 크기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더불어 현실적으로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무렴 내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받아 주기로 한 것도, 그 상황에서 사람들 살리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것도, 그 와중에 끼어든 인퀴지터의 커다란 감정도, 온 잡념 끝에 눌렀으나 김 새게 불발된 폭탄도…….
최선을 다해 가볍게 가볍게 넘기고는 있지만 슬슬 한계다. 마음 편히 울도록 거리를 두는 침묵이 내 유일한 최선일 정도로.
[왜 그래. 슬슬 후회라도 돼?]
한데 그걸 악마가 슬쩍 찔러 왔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악하는 데 참 도가 텄다 싶기도 했다. 도닥여 주는 게 아니라 사익을 위해 후벼 파는 점에서 답 없는 쓰레기지만.
‘왜, 후회했으면 좋겠냐?’
[후회하는구나.]
떠보는 말이었나. 하지만 별 의미 없는 떠보기다.
솔직한 말로, 내가 사람인 이상 그런 마음이 아예 안 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이 해외 봉사지, 9년이란 게 그렇게 짧은 시간인 것도 아니고.
[동시에, 터지지 않은 폭탄을 정말로 아쉬워하고 있어.]
물론 시간을 되돌리더래도 선택을 달리 하진 않을 거다. 후회가 있다고 해서 최선이 최선이 아니게 되진 않으니까.
다만… 다만 내가 그걸 굳이 시시콜콜 말해야 할까? 나는 실실 웃는 악마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악마의 웃음소리가 좀 더 높아졌다.
[아, 그레트헨. 너는 정말이지…….]
‘아, 됐고. 아까 옷 재생한 건 뭐냐?’
그리고 나는 그 웃음소리를 길게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의 웃음을 끊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까 몸 재생할 때 옷도 다시 생겼잖아. 그거 뭐냐고.’
퍽. 내 목에 달라붙은 벌레가 손바닥에 얻어맞고 터졌다.
[아, 그것. 이 육신이 현재 마기로 대부분 구성된 걸 생각하면 답이 나올 텐데.]
‘…옷도 육체의 일부란 거야?’
[그래.]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진짜로?’
옷도 육체라니까 기분이 미묘하잖아. 나는 떨떠름함을 입안 가득 채운 채 옷자락을 매만졌다.
‘진짜 이것도 이 몸의 일부라고?’
정말이지, 좀 그랬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 비유하자면 그 옷가지는 소라나 조개가 두르고 다니는 껍데기와 다를 게 없는데. 인간의 부위로 비유하면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 같은 것이고.]
‘아니, 그래도…….’
소라나 조개의 껍데기라고 하니까 좀 낫긴 한데… 으음. 모르겠다. 나는 옷자락을 놔주었다.
‘근데 왜 진짜 옷을 안 입고?’
[너는 그딴 디자인의 옷이, 심지어 복구와 자동 세탁 마법이 걸리기까지 한 옷이 실존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
그냥 편의성이었나. 나는 나도 모르게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디자인 맞춘 건 어떻게 한 거야.’
[네가 하려던 게임을 참고했으니까.]
다만 뒷말의 경우, 답변의 무게가 다소 달라졌으니.
‘…그 게임은 어떻게 안 건데?’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하나 이 세계가 현실임을 자각한 이후 줄곧 품어 왔던 질문을 꺼내 왔다.
‘거기에 이 세계는 왜 그 게임과 닮은 거야?’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첫째로, 그 게임을 알고 있는 이유는 네 기억의 일부를 읽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 게임과 이 세계가 닮은 이유는 나도 몰라.]
그러나 돌아온 답이 그렇게 명쾌하지는 않았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그랬다.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억을 읽었다는 건 잠깐 미뤄 두고, 두 번째 답은 왜 그따위야.’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지, 그러면 안다고 말할까? 무엇보다 언젠가의 그대도 말했을 텐데. ‘우연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게 우연일까’라고.]
‘그래서, 영웅전설과 이 세계가 닮은 게 정녕 우연이다?’
[그래.]
과거에 내가 한 말을 돌려받게 되다니, 이거 혹시 아까의 복수인가. 나는 그런 생각까지 하며 손을 쥐락펴락했다. 말을 이해 못 한 건 아닌데 그래도 납득이 잘 안 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군.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우연이라기엔 미심쩍으니까.]
‘알면 수긍할 만한 거리라도 좀 가져와.’
[내가 왜? 그대는 내게 얻고 싶은 것만 얻어 가고,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데.]
‘양심 엿 바꿔 먹은 새끼. 그래, 말해 주기 싫으면 됐다. 너한테 물은 내가 등신이지.’
그래도 저 새끼한테 절절 매달려 가며 답을 얻고 싶지는 않다. 물어봐 달라는 듯 대놓고 드러내는 고향의 흔적도 마찬가지다.
나는 순순히 답 듣기를 포기했고, 조금 뒤에 악마가 입을 떼었다.
[나는 그대가 정말로 짜증나고 싫지만, 그럼에도 그대를 친애하니. 추측한 바 정도는 들려 줄 수 있어.]
‘알려 주기 싫다며?’
[방금 말했을 텐데. 그대를 친애하니까 말해 주겠다고.]
‘그새 뭘 잘못 먹었나…….’
나는 잠깐 사이에 뒤바뀐 태도를 두고 그 저의를 짚어 보았다. 뭐, 따지고 보면 아까부터 물어볼 때마다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었으니 태도가 뒤집어졌다고 하기도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서, 듣기 싫은가? 친애하는 그레트헨.]
그래도 이유 없는 친절함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저런 인간상은 한 번 패배했다고 포기하거나 갱생하지를 않았으니까. 아까 끝에 내몰렸다 착각했을 때 저 혼자 발악한 것처럼 말이다.
[정말 말하지 마?]
나는 은은히 웃는 악마를, 그것이 두른 두루마기와 현대식 정장을 보았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발언한 게임 지식도, 모두가 좆같다고 할 때 혼자서만 엿같다라고 말하던 순간도 떠올렸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놀려 봐. 아가리 얼마나 잘 터나 한번 보게.’
참 교활하지 않은가? 대놓고 동향 사람임을 강조하는 대신 은근히 동향 사람임을 알리며 친근감을 심는 수작이.
나는 그녀가 동향 사람이라도 용서할 생각이 없는데.
[이런, 안타깝게도 그대의 기준을 충족할 자신은 없군. 아까 말했다시피, 지금 말할 건 내 추측이지 진짜 정답인지는 모르거든.]
‘네 혀는 내가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걱정 마.’
[오,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그런 느낌에서 지금 저쪽이 이렇게 나오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면 그대를 부를 때의 경위를 먼저 설명해 볼까. 다만 그레트헨, 이건 알아 두도록 해. 우리는 불러올 대상을 직접 택하지 않았다. 서로 바라는 조건을 내놓았을 뿐이지.]
첫 번째로, 말하기 싫어도 협력이 강제되어 차라리 협력적인 이미지라도 구축하려는 것이든가.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을 택한 건 오래된 마법이었다. 옛 규칙, 지극한 법도라고도 불리는 그것이 네가 가장 알맞다 판단했단 거다.]
두 번째로, 협력하는 척하면서 거짓을 섞는 것으로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든가.
‘그래서 내가 결정된 건 너희 탓이 아니다?’
[우리가 고른 건 아니니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래서 내가 간택되도록 만든 그 조건은?’
[저 소년은 악성에 지지 않을 자를 요구했고, 나는 이곳보다 고향을 더 우선하는 자를 바랐다. 저 소년은 마에게서 승리할 자를 찾았으며,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자이기를 소원했지. 물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자와 살고 싶어 하는 능력자는 별개임을 간과하여 그대 같은 게 불려 오긴 했지만…….]
물론 이건 내 편견일 수도 있으므로 확실하진 않다. 하나 뭐 어떤가? 희망을 걸어서 배신당하는 것보단 처음부터 희망을 걸지 않는 게 편하다.
나는 그것을 명심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 조건만 따지면 꼭 나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글쎄. 과연 그럴까? 그레트헨, 생존에 있어 유리해질 수 있는 강점이 뭐라 생각하지?]
‘무력?’
[틀린 답은 아니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 텐데.]
‘…정보?’
[그래, 정보다. 정보야말로 가장 큰 힘이지. 그런 점에서 그대가 아는 게임과 이 세상이 닮은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아. 차원은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어떤 차원은 어떤 세계의 줄글이나 게임과 흡사한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정말 중요한 건, 그대가 이 세계와 흡사한 작품을 플레이 함으로써 정보가 될 수 있는 것을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시발, 그러니까 내가 영웅전설을 플레이 해서 이 꼴이 됐다는 거네.’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내 추측에 불과해.]
‘그래, 그렇겠지…….’
다만 정보에 독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도, 갑작스레 찾아오는 현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 하나 좋아한 게 나를 이렇게 엿 먹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그게 진짜 원인이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좆같다, 진짜…….’
게임사와 게임은 아무 잘못 없는 듯하지만, 그렇다 해도 앞으로 영웅전설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조용히 내 추억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치료할 부상이 없어졌다면, 인력을 파견할 필요도 없겠군요.”
한편 누군가가 추억에게 작별을 고하는 사이, 성벽에 오른 마이스터는 주교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마력을 보충해 줬더니 알아서 몸을 수복하더라. 성벽으로 오지 않은 이유는 누가 저 뚱돼지 악마 사체를 쌔벼 갈까 걱정돼서라더라. 그 말에 안도하던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의 표정이 각자의 형태로 일그러진 건 덤이었다.
“이봐요, 주교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면 저흰 치료와 정화를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
하나 그 일그러짐마저도 이어진 말 앞에서 멈춰 섰다.
“지금도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까요.”
“주교님……?”
주교는 악마기사의 취급을 두고 그 어떠한 말도 얹지 않았다. 마치 그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처럼.
“그 말씀은…….”
“대리자시여, 저는 그를 모르고, 모르기에 그를 경계했습니다. 하나 당신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상관없겠지요.”
“…….”
“다만 대리자시여, 기억하십시오. 무고한 자를 구하기 위해 용사란 직함을 내려놓는 당신이기에 도리어 당신이 용사라 불리는 것임을.”
물론 지금 주교가 이런 선택을 내렸다고 해서, 이후 신전이 같은 반응을 보이리란 보장은 없다.
어쩌면 주교조차 당장이 급하여 화제를 돌렸을 뿐, 나중에 가선 태도를 뒤바꿀지도 모른다.
“그럼 저희는 저희의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성주님.”
그러나 당장은 그의 존재를 용납받았다. 그를 살린 것에 대한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인퀴지터를 기쁘게 했다.
“저도 사람을 구하러 가 보겠습니다……!”
청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병동으로 향하는 주교의 뒤를 따랐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리면 꼭 뭐가 있던데…….”
“…뭡니까, 그 불길한 말은. 뭐, 저도 동의하는 바긴 하지만.”
“주교가 순순히 받아 주는 걸 보니 다니엘 그놈이 깽판 치려는 건가.”
“아,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몰라요? 말조심하세요.”
비록, 남겨진 불신의 화신들은 이런 상황에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