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증거를 (11)
“근데 우리 이제 어떡하냐?”
아무튼 신전으로부터 내 안위를 챙기기 위한 방법 찾기가 끝난 후, 마이스터가 불쑥 그런 이야길 꺼냈다. 후으으웅. 황량한 대지 위로 부는 먼지바람이 그의 말에 허탈감을 더하는 듯했다.
“걔네들 올 때까지 기다려?”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군.”
인퀴지터가 가는 걸 그저 지켜본 이유는, 악마의 힘으로 회복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생각이 바뀔까 싶어서였다. 걔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목숨은 목숨이니까.
설사 그 애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걸 알았더라도 비슷했을 거다. 아무렴 방금 전까지 살리네 마네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거기서 악마의 힘을 빌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더 심란해지지 않겠는가.
인퀴지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걔한테 고민거리를 더 얹어 주기 싫어서라도 나는 인퀴지터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뭐, 내가 그 애에게 부활 장면을 보여 주고 싶었더래도 악마가 도박은 싫다며 징징대는 바람에 아마 실패했겠지마는, 어쨌든.
“이쪽에서 먼저 가지.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
각설하고, 아까처럼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면 또 몰라, 멀쩡히 나은 상태에서 치료 인력이 오는 걸 기다리는 것도 좀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뮌문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에 더욱더 그랬다. 나를 치료하기 위해 데려올 인력도 그곳에선 귀한 것일진대, 그들을 헛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너 진짜 갈─]
「입 좀─!」
나는 슬슬 익숙해지는 머릿속 소란을 외면했다.
“그러든가. 나야 선택권이 없으니까.”
와중에 마이스터에게 왜 선택권이 없지… 아, 무력.
나는 괜스레 묘한 시선을 마이스터에게 던졌다. 성격이 괄괄해서 그런가, 아니면 아가리와 포악한 주먹질로 사람 후두려 패는 걸 몇 번 봐서 그런가. 얘는 이상하게 약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해 호위하지.”
“당연한 거 아냐? 나 죽는 순간 넌 바로 수배령이야.”
“그래.”
나는 마이스터의 면박을 대충 넘겼다. 이 무력으로 마이스터의 호위를 실패하려면 아무래도 대악마쯤 되는 놈들이 등판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플래그를 꽂으면 도로 등장하는 일이 있긴 한데… 설마 그러겠어?
“…성벽 상태는 많이 안 좋나?”
“아무래도 그렇지. 죽은 사람 좀 많더라.”
“…그런가.”
나는 괜히 플래그 같은 생각을 했나 후회하는 한편, 마이스터의 말에 한 차례 더 숙연해졌다. 리챠 씨나 소성주는 괜찮으려나. 내가 아는, 혹은 파샤가 아는 이들이 그곳에 있는지라 신경이 더 쓰이는 느낌이었다.
“혹시… 아니다.”
“사람 빡치게 말하다 말지 마라.”
“…가서 직접 보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소성주라면 몰라, 리챠 씨의 안위를 마이스터가 알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야, 이동기 같은 거 없냐?’
대신 속마음으로 악마를 좀 닦달해 보았다. 이왕 악마와 협력─그쪽은 강제지만─하게 된 거, 뚜벅이 탈출을 위한 무언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있겠냐?]
‘없음 말고.’
그렇지만 역시 그런 건 없나 보다. 나는 악마가 빡치든 말든 원하는 답만 얻은 채 잠시 고민했다. 정녕 도시까지 걸어 돌아가야만 하는가.
“맞아. 야, 이거는 뭐로 만든 거냐?”
한데 그런 내 귀로 마이스터의 호기심 어린 질문이 들어왔다. 그의 팔과 손, 손가락을 따라 내 시선이 끝내 닿은 곳은 바닥에 조용히 뭉쳐 있는 흰 덩어리다.
“아까 여기서 검도 뱉고 하던데.”
“이건…….”
나는 악마가 알려 준 이것의 재료를 말해 주는 한편, 갑작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다듬었다.
‘야.’
[그대, 내가 외치는 모든 말을 무시하면서 질문만 하면 내가 대답을 할 것 같─]
‘이거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꿀 수 있댔지. 그럼 혹시 탈것으로도 만들 수 있냐?’
[…창의력을 발휘하랬더니 정말 이상한 생각을 가져왔구나.]
‘돼, 안 돼. 그것만 말해.’
[…마기가 많이 들기도 들 거지만, 네가 실시간으로 조율해야 할 거다.]
‘아, 그럼 상관없어.’
마기가 많이 들어도 몇 시간 뚜벅이 신세보단 낫겠지. 나는 최소한 남겨 놔야 할 마기의 최소치를 정해 두며 라텔의 형태를 변경했다.
“이건 뭐야.”
“바이크.”
“……?”
아, 판타지에 현대 물품 등장시키는 건 못 참는다고.
* * *
“대리자시여, 그는, 그 존재는─”
“…도시를 구했는데도 안 되는 겁니까?”
인퀴지터는 문득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 난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낙루였다.
“악마를 품어서, 악마의 그릇이라서. 그는 어떤 공을 세워도 인정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는 겁니까?”
가혹한 선이여. 모질기만 한 정의여. 혹독한 옳음이여.
“그는 도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기만 하실 거라면, 그렇게 매정하게만 구실 거라면.
경전에서는 어찌 사랑을 논하셨습니까? 어째서 공경을, 우애를, 자비를 지시하셨습니까?
“그가 도시를 구했습니다.”
살인과 간음, 절도 같은 죄를 금할 것을 도대체 왜 종용하셨습니까.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은 결국 자애와 자비, 인애가 있어서 나오는 것일진대.
“스스로를 불태우고 불살라서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일진대 정녕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까?”
분명 그럴진대, 왜 그에게만은 그리도 냉혹하게 나오십니까. 진정 당신께서 사랑으로 계명을 내리셨다면 그건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그도 한낱 인간이니, 많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박애가 그에게도 주어져야 할 텐데…….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 땅에 서서 이 풍경을 보는 일조차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고작 악마를 품고 있단 이유 하나 때문에. 그에게 악마가 기생하고 있어서. 그가 원치 않게 악마의 그릇이 되어 버렸기에.”
인퀴지터는 젖었으되 메마르게 쉰 목소리로 가슴속 경전을 펼쳤다. 수천 번 읽고 또 되새긴 경전의 교리를 제 앞에 놓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가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게 맞습니까?”
아! 이 모든 건 저 높은 하늘께서 하신 말씀이니.
너희는 나를 숭상하되 나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될 것이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이나, 모든 순간에마저 너희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 너희는 나를 대신하여 너를 낳은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자매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또한 나는 언제나 너희를 지켜 줄 수 없으니, 너희는 너의 옆의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너의 울타리를 든든히 하는 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어 가로되, 살인과 간음, 도둑질은 허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를 비롯한 모두에게 솔직한 자가 되어 거짓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하며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겸손함으로 스스로의 것만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것을 품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세운 신념과 정의를 확신하지는 말라. 너희는 나처럼 전지한 존재가 아니니, 너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말로 그게 맞습니까……?”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그분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주변을 사랑하고 죄를 경계하며 항상 반성할 것을 얘기하는 계명은 역시 틀릴 수가 없다.
가장 기초적인 선은 기초적이기에 그를 수 없는 것이었다.
“정의에 함몰되어 이지를 버리는 자, 가장 거대한 죄인이 될지어다. 초대 용사이자 이름 없는 성인이며 첫 번째 교황이었던 분께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죄인을 감싸 안은 채 계명을 논하실 때 하셨던 말씀이지요.”
하나 계명은 틀릴 수 없어도, 그 계명으로 인해 그른 것이 나올 수는 있으니.
“한데 그분께서 그 순간 그리 외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채 모두가 그리 말한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는 것은 정의가 아닌 한낱 폭력이라 여기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정의는 막을 방법도 없기에 더욱더 단속하고 주의해야 함을 말하심이 아니었나이까?”
그것은 경전을 스스로의 생각하에서 해석하고 그를 토대로 자기만의 ‘정의’를 구사하는 그들 모두다.
“악을 따르는 자에게 마땅한 꾸짖음을. 회개하는 자에게 인내를 더한 자비를. 억울한 자에게 해명의 기회를. 일상을 사는 자에게 죄를 향한 경계를. 정의를 외치는 자에게 끝없는 성찰을.”
또한 그렇기에, 그들이 신처럼 전능하지 않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모든 것은 틀릴 수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곡해 중 무엇이 더 옳은지 무엇이 좀 더 그른지 판단할 수는 있을까? 어떤 해석이 맞고 틀린지 판별해 줄 자는 과연 있는가?
“그러지 않는다면 죄인이 되는 건 바로 우리일지어다.”
“…초대 용사께서 감싸 안은 죄인이자 회개한 도둑, 두 번째 성인인 디스마스가 남긴 말이지요.”
“당시 이름 없는 성인께서 아홉 번째 계명의 진의로 몸소 행동을 보이시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디스마스께서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자신의 속죄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 산 위에 신전을 짓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가 대신전이라는 위대한 성역을 볼 수 있었겠나이까?”
없다. 없으므로 모두가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물론 베뮈르헨의 교주님게서는 말하셨습니다. 한낱 소매치기였던 디스마스와 악마를 품고 있음에도 도망친 자는 죄의 깊이가 다르다고. 하나 진정 그렇습니까? 용사가 감싸 주는 순간 모두가 손가락질을 그만둔 디스마스와 허용을 받았음에도 감시와 멸시의 시선을 끝없이 받아야 했던 악마기사는 정말 그렇게 차이가 납니까?”
그렇다면 그녀 또한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은 없으리라. 이번 일로 하여금 자신이 용사가 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 버렸으니, 차라리 인간답게 제멋대로 왜곡하여 그녀만의 ‘옳음’을 좇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없을 거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거라면. 저는 용사란 직함을 반납하겠습니다. 자신이 원해 악마를 품은 것도 아니고, 끝없이 선행을 행함에도 지탄받는 자 하나 구하지 못하는 제가 용사란 이름을 계속 달고 있을 순 없습니다.”
어차피 그녀의 결정조차 인애와 자비, 자애를 기반으로 한다면 결국 신의 말씀을 따르는 행동 중 하나가 될 테니.
“어차피 제겐 과분한 직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인퀴지터는 차라리 후련하게 자신의 일부를 잘라 냈다. 악마기사가 죽기 직전에서야 그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임을 알아 버렸으므로 그 반대쪽을 버렸다.
아, 용사가 아니게 된 그녀에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잠깐의 아픔이 그녀를 찔렀으나 그마저도 곧 괜찮아졌다.
그녀가 용사가 아니게 된대도 신을 따를 수는 있고, 무엇보다 악마기사만큼은 그녀에게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대리자시여……!”
“샌님, 당신…….”
아무렴, 그는 사탄을 잡기 위해 일행이 되었을 뿐 그녀에게 용사 대우를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악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에 좀 더 집중했지, 그녀가 용사란 점에 특별함을 부여한 적은 별로 없단 말이다.
그렇기에 인퀴지터는 자신이 무쓸모해지는 비참함과 가장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후련함 속에서 흐리게 웃었다.
“이런 저지만, 그럼에도 주제 넘는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소성주님, 더는 용사가 아닌 저지만 부디 제 은인을 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악마기사. 제멋대로인 생각이긴 하지만, 제가 더는 용사가 아니더라도 여상스럽게 ‘머저리’라고 불러 주실 거지요? 부디 그러기를 빕니다. 당신이 의도하신 건 아니겠으나 일관되도록 풋내기 신관 취급하신 게 저는 늘 기뻤으니까요.
“…예. 파견하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정의했던 가장 큰 단어를 잘라 낸 청년은 소성주의 자그만 답변을 두고 울며 웃었다. 부디 이 설득이 늦지 않았기를 빌며.
“어, 어!”
“……?”
부디 그러기를 빌며, 그녀는 놀란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느라 놓쳤던 마기의 흐름이 가장 먼저 머리에 박혔다.
“악마기사……?”
숨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이가 어째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