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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05화 (305/389)

305화 증거를 (10)

“다만 네가 말한 대로 실증이 없다는 건 확실히 문제네. 나야 네가 진짜 악마를 통제하게 됐든, 악마가 인격 두 개를 연기하는 것이든 별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대충 넘어가지만, 신전은 분명 그게 안 될 테니까 말이야.”

마이스터의 만족스러운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색하듯 표정을 고친 이가 마땅한 지적을 내게 던져 주었다.

“아니면 널 도저히 못 죽이겠다고 엉엉 우는 용사가 신전을 설득하려나?”

“글쎄…….”

다만 그 지적은 나도 생각해 둔 것이라. 말로 핑계를 대는 것이야 알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물증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다. 계약이란 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근거가 아직 없다면 넘기고, 원주인은 왜 기억 잃은 너한테 진실을 말하지 않았지? 그가 입을 열었다면 네가 진실을 두고 헤맬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괜찮은 방법을 구하지 못해 침묵하는 사이, 마이스터는 또 다른 질문을 가져왔다. 인퀴지터나 다른 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호기심을 전부 풀겠다는 욕망이 언뜻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쪽도 악마의 수작 덕에 나와 접촉할 수 없던 상태였다. 내게 뭘 말해 줄 때마다 도리어 내게 해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려, 부득이하게 침묵했다더군.”

“와, 좆같네.”

내 모든 설명에 마이스터는 단순하고도 깔쌈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가엾은 건 가엾은 거고, 이 모든 사건의 전개가 좇같은 건 좇같은 거였다.

빌어먹을, 걔가 나한테 설명해 주고 데려왔다면 내가 이딴 흑역사를 쌓지는 않았을 텐데…….

“아, 그래. 그럼 할아버지는 순전히 네가 강령된 영혼이라서 자격이 안 된다고 한 건가…….”

“표정이 왜 그러지.”

“아니,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묘하게 빠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단순히 강령된 영혼, 즉 제3자의 영혼이라고 뒤로 뺄 사람은 아니거든, 할배가.”

…약간의 왜곡이 있긴 하지만, 이것 외에 사정은 없는데. 청산호가 더 아는 거라고 해 봐야 내가 다른 세계 출신 영혼이고 난데없이 끌려왔다는 것뿐이잖아. 아닌가? 뭐 더 눈치 까신 게 있는 건가?

“나는 이 이상 짐작 가는 것이 없다만.”

나는 청산호의 심리를 가늠해 보려다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포기했다. 어차피 별 중요한 건도 아니었다. 손자에게도 ‘자격이 안 되서 안 붙잡았다’만 알려 준 걸 보면 약속대로 비밀을 지켜 주는 듯하니까 말이다.

“그래.”

하여튼 내 태도에 마이스터도 한발 물러섰다. 적어도 내게 신문할 거리가 없다는 건 눈치챈 모양이었다.

현타 온 나와 질문거리를 고민하는 마이스터 사이에 잠시 침묵이 들어찼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강령된 영혼이란 걸 알았으니, 강령을 풀 건가?”

“푸는 방법은 이미 찾았다.”

“어렵나 보네?”

마이스터는 언제나처럼 내 한마디에서 여러 사실을 읽고 문장을 몇 개나 건너뛰었다. ‘찾았다’라는 단어에서 ‘바로 풀 수 없다’라는 걸 인지하고 난도를 물은 것이다.

“아니면 풀 경우 악마가 문제가 되나?”

“그건 아니다. 강령을 정상적으로 풀면… 악마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될 거다.”

하나 계약으로 옥죈 이상 어지간하면 악마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본다. 그 전에 멸망한 체면을 두고 수치사할 가능성은 있지만, 악마 자체가 지금처럼 사고 치기는 어려울 거란 거다.

하니 악마는 문제가 아니다. 악마만 문제가 아니다.

“…단지, 나는 사과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간 기억이 온전치 못하단 이유로 사람들에게 끼친 폐를.”

앞으로 9년의 시간을 보낼 방법이나 그 외의 것은 문제였다.

“…그건 네가 사과할 게 아니지 않나?”

“본의가 아니라고 해서 잘못이 잘못이 아닌 게 되진 않는다. 또한 잘못된 건 알게 되는 대로 바로잡거나, 바로잡을 수 없다면 수습할 의지라도 보여야 함이 맞다. 내가 사과하고자 함은 오직 그런 이유에서다.”

컨셉을 통한 인성질이 본의가 아니란 이유로 면죄받을 수 있다면, 그 논리는 파우스트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할 것이다. 미련하여 계약을 잘못했을 뿐, 그 애도 나를 고의로 엿먹이려 했던 건 아니니까.

하나 그 어떤 사람이 파우스트에게 ‘자의가 아니었으니 죄가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내가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것과 그 아이가 무죄 판정을 받는 건 별개의 일이다. 고의성과 피해자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본의가 아니더라도 피해자가 생겨났다면 사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도 사과할 것이다. 규칙은 죄의 깊고 얕음에 따라 달라져선 안 된다.

“세상 피곤하게 사네. 뭐, 그러든가.”

[…이 호구 새끼가. 진짜로?]

이건 피곤하게 사는 게 아니라 당연하게 사는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시큰둥한 마이스터의 반응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악마의 말에 느릿느릿 눈꺼풀을 달싹였다.

“그래서 말인데, 네게 도움을 구하고 싶다.”

“뭐?”

“아까 네가 말했지 않나. 신전을 설득할 근거가 없다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근거를 같이 구해 달라?”

“그래.”

참고로 이것은 내가 마이스터에게 가장 먼저 고백한 이유기도 하다. 빌어먹을, 컨셉을 풀기 위해선 물증을 찾아야 하는데 나 혼자로는 너무 어려웠다.

“일단 악마를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건 확실한 거지?”

[이 미친놈이, 너 진짜 용사랑 합류할─]

「닥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입 다물게 해 볼게요.」

[이거 놔, 망할 애송이가─!!]

“…그래.”

나는 마이스터의 물음에 잠시 먼 산을 보았다. 머릿속이 더럽게 시끄럽다.

“제어하고 있다는 걸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줄 만한 건 역시 없을 거고.”

[너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절대로─!]

「입 다물어!」

[머리카락 잡지 마, 망할 꼬마!]

“…너와 내가 아무런 문제 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삼을 수 있다면, 혹은 그들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하나 정돈 건질 수 있겠군.”

와중에 내 너스레에는 마이스터가 ‘그걸로 될 리가.’라는 눈빛을 했다. 으쓱이는 어깨는 덤이었다.

“아까처럼 교대하는 건… 기만이라고 주장할 머저리가 분명 있을 테니 제외. 육체 안에 영혼이 세 개 있음을 증명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불가능. 할배의 증언도 널 비호해 준 듯한 정황이 있으니 안 받아 주려 할 거고… 그렇다면 강령되기 전 신분을 증명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러냐? 하긴. 어차피 그쪽도 안 믿어 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인적 사항 자료는 조작되기 쉬우니까.”

조작이고 뭐고 그냥 다른 세계 사람이라서 어려운 거지만… 나는 마이스터의 말에 눈동자만 슬쩍 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정상적인 방식으로 강령을 풀면 악마고 뭐고 괜찮다고 했었지. 그 방법이 뭐야?”

“…죽거나, 내가 9년을 타락 없이 버티거나.”

“신전에서 물으면 전자는 빼. 무조건 죽이려 들 테니까.”

“그래.”

“그리고 후자는… 타락 없이 9년이라. 이건 조건이 좀 모호한데. 타락의 조건이 뭐야?”

글쎄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나도 제대로 안 들었네.

나는 잠시 기다려 달란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인 후, 눈을 감고 집중했다.

‘들리냐. 들리면 타락의 조건에 대해 말해 봐.’

대충 이렇게 강한 생각을 하면 입으로 중얼거리지 않아도 자기들에게 전달이 될 거랬는데. 될까 모르겠다.

「아, 잠시만요. 타락의 조건은…….」

다행히 전달이 됐나 보다. 악마랑 아웅다웅하던 파우스트가 내게 집중했다.

「맨정신으로, 또는 더없이 진심으로 ‘이 세상이 모조리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시는 거예요.」

‘…돌려서 말하는 꼼수는 안 되겠지?’

「네…….」

그래.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안다고, 편법을 그렇게 잘 써먹는 새끼가 설마 이걸 놓쳤겠어. 나는 약간의 짜증과 그럼에도 드는 안도감을 담아 미간을 구부렸다.

내가 저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설마 오겠어. 작품이었다면 플래그라 칭해질 문장을 뇌까린 건 덤이었다.

“내가 진심을 담아 ‘이 세상이 모조리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라 말하는 것이 타락의 조건이라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저런 말을 하게 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리가 작살났을 때조차도 원망을 세상에 돌린 적이 없는데.

“한 글자 빼고 말하는 식은?”

“아쉽게도.”

와중에 마이스터 이 녀석, 나랑 똑같이 꼼수부터 떠올리네. 그래.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어쨌든 그 말 없이 9년을 버티는 게 조건이란 거지. 그렇다면…….”

“떠오른 게 있나.”

“야, 차라리 이건 어떠냐?”

각설하고 마이스터는 이 사항에서 무언가의 방도를 찾은 듯 그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어때.”

“…약간의 인권 침해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괜찮은 것 같군.”

그건 말 그대로 인권 침해적 요소가 있을 뿐, 생각보다 괜찮은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 * *

인퀴지터는 성벽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볼이 불어 터지도록 울었다.

“저러다 탈수로 실려 가겠네.”

데스브링거가 질색해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감정을 눌러 왔던 만큼 펑펑 토해 냈다. 퉁퉁 불어서 옹졸해진 눈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온몸의 수분을 끌어다 썼다.

“돌, 돌아오셨다!”

인퀴지터는 성벽의 사람들이 그녀를 반기는 걸 보며 또다시 눈물을 팡 터트렸다. 저들의 기대가 ‘용사’를 향한 것임을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해 버리고 말았다.

“요, 용사님, 어째서…….”

“저, 저는. 저느으으은.”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던 사제 하나가 깜짝 놀라며 달려 나왔으나, 말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킁.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오는 코가 입술을 지나 턱에까지 맺혔다.

사제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내 자신의 옷깃을 건넸다.

“혹 악마를 놓치신 거라면 괜찮…….”

“흐어어어엉.”

악마를 놓쳐서 우는 거면 차라리 저들 볼 낯이라도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서 우는 거다. 그녀는 사제의 한마디에 또 울음을 터트렸다.

“샌님이 아니라 그냥 울보였네.”

옆에서 말을 챙기던 데스브링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고, 치료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당장 필요합니다.”

“그들은 어찌 찾으시는지…….”

“아, 필요하니까 찾죠! 어디 있어요! 가능한 많이 데려가야 하는데.”

악마기사를 치료한다고 말해 봐야 자원할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전에 다니엘 꼰대가 오기 전에 어떻게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그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여 데스브링거는 그저 윽박지르듯 부탁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달려오던 지휘 계층 인물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마법사의 치료가 급한 사람은 이곳에도 많습니다. 사제들 대부분이 역병 정화에 나선 상황이기에 더더욱요. 이유를 제대로 밝히시지 않는다면 용사님의 부탁이라도 좀 어렵습니다.”

“아, 진짜 답답하게…….”

“제, 가. 정화, 끄흡, 하겠, 흐윽, 습니다.”

다만 마기를 품지 않는 자를 치료하는 것에 한해, 또는 정화에 한해 인력난을 종결시킬 수 있는 인재가 이곳에 있는지라.

“제가 정화, 끄흡, 할 테니까.”

인퀴지터는 땜빵을 자처하는 대신, 자기로 인해 남게 될 인력을 파견해 주길 요청했다. 영 불가능한 요청은 아니었다.

인퀴지터가 온 힘을 다한다면 지금 이 도시에 있는 부상병 중 1/3은 치료가 가능했다. 단순한 정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 치료를 뒷전으로 둔다면 도시 전체를 정화하는 것도 그녀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면 상급자께 일단 보고를…….”

하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 계층일지언정 가장 위에 위치한 인물들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요구를 두고 시간을 요구했다. 데스브링거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

“무슨 일이냐!”

참으로 다행이게도, 데스브링거가 폭발하기 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달려왔다. 보다 자세히는 사람의 부축을 받은 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들에게 말을 내준 소성주였다.

“당신은…….”

말을 내어 달라 부탁할 당시 직접 대면했어서 그런가, 소성주는 바로 데스브링거를 알아보았다. 『대악마의 몸에 매달려 있던 그 사람을 데려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때문인지 데스브링거의 옆이나 뒤를 연신 살피는 게 보였다.

“그는? 그는 어딨습니까? 데려온 겁니까?”

“아직요. 찾기는 찾았는데 부상이 너무 심해서 치료할 사람이 필요합니다요.”

“부상이……?”

“사제론 안 돼요. 치료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데스브링거의 부연 설명에 소성주는 파리한 안색으로 입을 벌렸다.

“그럼 당장 사람을─”

“소성주님.”

그러나 소성주를 부축하던 이가 그를 나지막이 부르는 순간, 허락을 내리려던 소성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평생에 걸쳐 트집 잡혀 온 사람의 반사적 반응이었다.

“감정적으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황옥 경.”

“지금, 이성적으로 판단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 건…….”

꼬투리 잡는 건 열받으나, 기사 입장에선 못 할 말한 것도 아니리라. 돕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떠나 도시의 인력을 차출하는 건 숙고해서 해야 할 일이니까.

함에도 그 지적 앞에서 소성주는 유독 벌벌 떨었다. 기사가 공격적인 어투를 구사한 것도, 면박 주고자 하는 눈빛인 것도 아닌데 그랬다.

구겨진 미간과 일그러진 눈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애처롭게 흔들렸다.

“마법사들의 빈자리는 샌, 용사가 대신 채워 줄 겁니다요.”

하지만 데스브링거에게 있어 소성주의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나올 허락이 도리어 더 중요했지.

“그러니까 인력 부족일랑 걱정 말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해서 그는 재촉하듯 말을 붙였고, 새로운 파이터가 링 위에 등장했다. 사라진 팔 한쪽과 얼룩졌을지언정 선명한 신전의 문양. 최소 일반급 사제는 아니었다.

“누구를 구하기 위해 마법사를 파견하시겠다는 겁니까?”

끄흡. 각오했으나, 기어이 들이대진 교단의 물음에 인퀴지터가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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