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증거를 (9)
원작자의 눈앞에서 작품을 갈아 버리는 만행에도, 마이스터는 어떻게든 냉정을 되찾았다. 화가 덜해졌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단지 그다음으로 이어진 광경이 빡침보다 더 커다란 호기심을 이끌었을 뿐이다.
“저건…….”
그는 악마기사의 몸을 중심으로, 인간이 감히 따라하기 힘든 기운의 격류가 생겨나는 걸 보았다. 안경을 벗어도 보일 정도로 거친 흐름이었다.
우드드득.
또한 그 흐름 속에서 악마기사의 몸뚱어리는 천천히 변화했다. 땅에 묻히고 뭉개진 팔과 다리가 물처럼 녹고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거다.
스르륵. 액체 형태의 마기로 풀려난 신체는 장애물을 사멸시키고 그 자리에서 도로 뭉쳤다. 망가진 찰흙인형을 재건하는 모양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지에 눌어붙었던 피와 살이 마기에 주물러져 원형을 되찾았다. 다신 못 쓸 거라 생각했던 다리가 멀쩡하게 수복됐단 이야기다.
그뿐만 아니라 긁히고 뜯긴 상처 또한 새살이 차오르는 것으로 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흘렀던 피는 사라지고, 너덜너덜해졌던 옷가지는 불에 휘감겼다가 다시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되는 중이다.
“사기잖아.”
곧, 평상시의 악마기사가 완전히 돌아왔다. 그 전부를 지켜본 마이스터의 감상 평은 단 네 글자로 정리된 채다.
“…부정은 않겠다.”
짧은 감상 평이었지만, 악마기사도 나름의 동의를 표했다. 하급악마도 아니고 대악마가 이따위 회복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불호 표현이기도 했다. 모든 대악마가 이따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류는 굉장히 곤란했으리라.
“그래서 그 검,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나도 지금 알았다.”
“대체 제대로 아는 게 뭐야?”
“글쎄…….”
아직도 기억을 되찾지 못했나? 마이스터가 의아해하는 사이, 악미기사가 옷자락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넌 왜 여기 있지.”
다른 거 다 제치고 먼저 물어본 게 그거라는 건 좀 웃겼다. 저쪽으로선 궁금할 법도 하지만.
“용사랑 함께 다니게 됐으니까?”
“네가……?”
“너를 다시 만나려면 같이 다니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았거든.”
“…나를?”
마이스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악마기사의 옷자락 곳곳에 붙은 것들을 가리켰다. 알고 재생한 건지, 모르고 재생한 건지. 잘도 옷깃에 남겨 놨다 싶은 장신구들이었다.
“돈을 받은 이상, 의뢰품은 전달해 줘야지.”
“…뭐냐, 이것들은.”
“신성력을 여과시켜 주는 장비. 한두 개 정도는 빠져도 되지만, 어지간하면 전부 착용해라. 부위별 적용이니까.”
마이스터는 그런 김에 귀고리 형태의 아이템도 넘겨주었다. 드롭형이나 링 같은 건 어울리지도 않고 착용하기도 싫어할 것 같아서 최대한 작게, 버튼형으로 만든 것이었다.
뭐, 귓바퀴에 이어커프 하나 낀 걸 보니 그쪽으로 했어도 괜찮겠다 싶긴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 목격담이 안 들려오길래 두메산골만 다니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변장을 하고 다녔나 보네?”
“……?”
의문을 표하는 눈동자에, 그는 자신의 입가를 톡톡 두들겼다. 악마기사로 치면 본래 상처가 있었을 자리였다. 지금은 마법 도구로 가린 모양이지만.
“아.”
악마기사의 손이 이어커프로 향했다. 달칵. 이어커프가 빠지는 순간 생겨나는 건 입가의 상처다.
“난 네가 변장을 할 줄 몰랐는데.”
“…….”
의외다 싶다가도, 대충 납득은 됐다. 가진 특징이 어지간히 개성적이어야지. 도망치는 입장에서 저것들을 가리는 건 선택지가 없는 일이었으리라.
“됐고, 내 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유를 모르면 박살 낸 이유라도 말해 주지? 원작자 앞에서 꼭 그래야만 했냐?”
어찌 됐건 눈앞에서 검이 박살 나야만 했던 이유 정도는 들어야겠다. 마이스터는 뚝심 있게 돌아갔던 화제를 도로 돌렸다. 악마기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기가 소멸한 건 회복을 위한 제물로 바쳐서… 다.”
“인신 공양만 되는 건 아닌가 보네.”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흐음.”
“…그리고 이것이 내게 있던 이유는 아마 악마 때문일 거다. 베뮈르헨에서 비장의 수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다면 내가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이번엔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답이 돌아왔다. 마이스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근데 잃은 기억은 아직도 못 되찾은 거야?”
“…아니. 일부는 되찾았다.”
“그럼 탈옥한 건 나머지를 찾기 위해서?”
“…그래.”
첫 번째 답을 꺼낼 때의 침묵이 1초라면, 두 번째 답을 꺼낼 때의 침묵은 3초에 가까웠으니. 그쯤 되면 그 고요는 말을 고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말할지 말지 결정하느라 겪은 갈등의 것이지.
“원하던 건 찾았고?”
“그래.”
“그럼 이제 다시 떠나겠네?”
하나 그 정도 심정은 이해한다. 마이스터는 악마기사가 처한 상황을, 그리고 그가 겪게 될 일들을 떠올렸다.
용사는 악마기사를 결국 해하지 못했지만 신전은 다르겠지. 이놈도 그걸 알기에 용사를 보낸 후에야 몸을 수복한 것일 테고.
“…나는.”
“난 상관없어. 네가 갑자기 부활해서 도망쳤다고 둘러대면 끝이니까.”
의심하는 자는 있겠으나, 그 의심이 그의 목줄을 죄진 못할 것이다. 증거랄 게 단 하나도 없으니까.
“대신 떠나기 전에 이건 대답하고 가.”
다만 마이스터는 악마기사를 보내 주기 전, 그가 이 일행에 합류한 결정적 의문을 꺼내 들었다. 이것만은 죽어도 들어야 했다.
“할아버지가 널 도와준 이유, 대체 뭐냐?”
“……?”
“청산호 씨가 널 풀어 줘야만 했던, 널 막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고 한 이유 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나.”
그에 악마기사가 눈을 몇 번 찡그리더니 끝내 눈꺼풀을 닫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그 위를 간질이고 떠났다.
“왜.”
“너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악마기사 특유의 좌우 색이 다른 눈이 뜨인 순간, 마이스터는 답을 기다렸다.
“나는 원래 이 몸에서 살던 영혼이 아니다.”
“…어?”
그게 설사 예상치 못한 답일지라도.
툭. 다용도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마력 채워 주자마자 잡아 넣기냐며, 양심 집 나간 소리를 하는 악마를 나는 외면했다. 숨기는 패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지만, 진짜 숨겨 놓은 패가 있던 점에서 저 새낀 진짜 기회 줘선 안 될 놈임을 깨달은 까닭이다.
“뭔…….”
더불어 지금은 깜짝 고백 같은 것도 한 상태인지라. 나는 표정을 구긴 마이스터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참고로 방금 발언은 짧을지언정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이 몸의 원주인은 악마를 막고자 했으나, 홀로는 힘이 부족하여 타인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내가 이 몸에 들어오게 되었지.”
그도 그럴 것이, 인퀴지터에게 ‘날 죽이지 않아도 된다’라는 안심을 주려면 그만한 근거도 같이 쥐여 줘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는 ‘냅다 악마를 통제할 수 있게 됐다’보다 ‘이러한 사정이 있어서 이젠 괜찮음’이 더 설득력 있는 법이라.
대부분의 진실을 전해 듣고, 나머지 사항도 곧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 역시 고백에 한몫했다. 예전이야 함부로 둘러댔다가 그에 반하는 진실이 까발려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지기에 시도를 못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일종의 강령 같은 걸 당한 거라고? 네가?”
“…쉽게 이해하는군.”
물론 인퀴지터를 설득시키지 않고 떠나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디 두메산골에 콕 박힌다면 9년을 버티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난 그러기 싫었다. 앞으로의 9년이 어떻게 되든 간에, 그 애와 나 사이의 관계만은 제대로 수습하고 가고 싶었다.
몰랐다면 몰라, 알아 버린 이상 이미 상처받은 아이에게 또 상처를 주고 갈 수는 없다.
“아, 별건 아니고. 역대 최강이라 불렸던 역전의 용사들, 아 여기서 말하는 용사는 신전에서 말하는 용사가 아닌 거 알지? 아무튼, 역사 속 영웅들을 새로운 육신에 강령시켜서 전쟁에 투입하면 전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연구가 예전에 있었거든.”
다만 그런 각오 속에서 듣게 된 이야기는 참 어처구니없었다.
역사적 영웅들을 강령시켜서 싸움시킨다니, 이거 완전 그거잖아. 아서왕을 여자로 만들어 버린 게임이잖아.
“…고인 모독인 것 같은데.”
“산 사람 몸도 가르는데 죽은 사람 영혼 하나 못 납치하겠어?”
“그래서, 성공했나?”
“했겠냐?”
실패했다니, 그건 좀 다행이다. 현세대 인류에겐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은 이후까지 일하라는 건 좀.
“그런데 그렇게 강령된 거라면 넌 왜 기억을……?”
“…악마의 수작이었다. 내가 이 몸에 강령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대부분의 기억을 흩뜨려 놓았더군. 그뿐만 아니라 원주인의 기억도 섞어 놓아서…….”
각설하고, 나는 마이스터의 물음에 재빨리 생각해 둔 구실을 뱉었다. 아무렴 다른 건 다 몰라도 컨셉질에 대한 고백만큼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수치사는 절대 사양이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얘가 있잖아. 심지어 악마도 알고 있을 거잖아.
나는 팔뚝에 붙어 있는─아까 무기 공양을 설명해 주기 위해 나왔다─소년의 미니어처를 보며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시, 시, 시, 시발.
「어, 어……? 어, 어디 아프세요?」
“뭐야, 문제 생겼냐?”
“…아니다.”
나는 화르륵 불타기 직전의 얼굴을 감싸 쥐며 이를 악물었다. 초반 그 꼬라지를 얘가 다 봤다고. 자크라티에서 악마 연기까지 했는데 그걸 얘네가 다 봐 버렸다고?
나는 갑작스럽게 죽고 싶어졌다. 저 어린애가 내 쌩쇼를 다 지켜봤다는데 당연했다. 쥐구멍보다는 그냥 접시에 코 박고 죽고 싶다.
「아악마가 뭘 하고 있나? 죄송해요, 제가 잘 마크했어야 했는데…….」
그냥 아까 죽을걸. 인퀴지터한테 정말 미안하지만 그냥 죽어 버릴 걸!! 나는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저 일단 들어가서 감시하고 있을게요. 진짜 죄송해요…….」
와중에 파우스트는 자기 탓부터 먼저 하고 있어서 더 가슴 아프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진짜 문제 생긴 거 아냐?”
“…괜, 찮다.”
안 괜찮아. 나 죽고 싶어.
나는 파우스트가 사라졌음에도 도리어 현타 오는 정신에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어째 계약의 이면을 알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괴로운 듯했다. 그쪽은 남 잘못이라서 원망이 가능하고, 이쪽은 내 탓이라서 원망도 할 수 없다는 게 그 원인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 뭐. 그래서 기억을 섞은 게 뭔 효과를 불러왔는데?”
“…덕분에 가진 그 기억에만 붙들려 살았다, 한동안은.”
다행히 마이스터는 내게 진실을 끝까지 추궁하지 않았다. 돌아간 화제가 그나마 나를 구원했다. 여전히 수치스러움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래 알갱이 하나만큼은 낫다.
“근데 그게 네 기억이 아니란 걸 베뮈르헨에서 알아 버린 거고?”
“청산호 마탑주의 공이 컸다. 그 전에도 위화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눈치채는 건 더 늦었겠지.”
이런 와중에도 변명 자체는 제법 괜찮게 나와 다행이다. 아니, 사실 진실 그 자체이니 괜찮지 않을 것도 없을 테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금 설유한 것이 진실과 크게 다른 건 아니지 않던가.
암, 초반 내가 이 몸에 강령된 상태임을 모른 것도 맞고, 원주인의 기억─게임사에서 제공한 설정 수준이지만─을 가진 것도 맞으며, 그 설정에 매달려 지난 1년을 지내 온 건 맞다.
자의와 타의만큼의 거리감은 있지만, 기억이 그것밖에 없어서 매달린 게 아니라 기억이 있어서 그것에 매달려 본 것이지만.
약간의 곡해가 들어갔을 뿐 사실에 기반하는 변명이긴 했단 말이다.
그러니 이 부분에 한해서 나는 당당했다. 진짜 당당했다.
[잘도 커버 치는군.]
시발, 아니다. 죽고 싶다.
“죽여 버리기 전에 닥쳐라, 악마…….”
“……?”
나는 겨우 내렸던 손을 다시 올려, 얼굴을 가렸다. 진짜 부끄럽다…….
“악마가 말 걸기라도 하냐?”
“…그래.”
“폭주나 뭐 그렇게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절대로.”
“이제 통제가 가능해졌나 보네.”
“그래. 그럼 됐어.”
아, 수치스러움이 한계 돌파를 하면 차라리 초연해지는 건가. 나는 해탈한 마음으로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나마 내 앞에 있는 게 마이스터라서 참 다행이었다.
“그보다 네 기억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때, 왜 주변인들한텐 말 안 했어? 다른 놈들이야 몰라도 네 일행만큼은 널 믿어 줬을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는 내가 말하길 거부한 문제엔 깊게 매달리지 않았다. 허점을 날카롭게 찔러 오는 건 조금 곤란할 수 있어도, 화제 돌리긴 편하단 소리다.
“…말해 봤자 동정표만 좀 살 뿐, 처형은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악마의 기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생각했고.”
“하긴.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불쌍하다 지랄하면 빡치지. 근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봐?”
“너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니, 내 말의 정당성과 현실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거라 생각했다. 실증이 없는 이상 완벽한 신뢰까진 무리여도, 최소한 증명할 기회는 줄 것이라고.”
거기에 허점을 찔러 오는 것 역시, 그 점으로 하여금 변명의 질을 올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나는 마이스터에게 답을 하는 것으로 해명을 더욱 탄탄하게 쌓았다.
“그렇지.”
어딘가 흡족해 보이는 마이스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