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증거를 (6)
마기의 덩어리가 올라선 절벽 앞에서, 용사는 조그맣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희생하는 자에게 마땅한 명예를.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그만한 용기를. 구원하려는 자에게 분명한 희망을. 헌신에 가치가 있다는 증명을.
“만일 그럴 수 없다면.”
…그러나 신께서 가로되, 선은 그 자체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니.
권선은 보답받을 수 없다. 자연의 순환이 칭찬받을 일이 아니고, 세월에 늙어 가는 것이 보상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연히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무언가를 바랄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더더욱 가혹해지소서.”
그러하므로 선은 모질다.
“그 누구보다 혹독하게 저희를 시험하소서.”
인간은 무언가를 바라는 동물인데 선은 그에 보답하지 않으므로 가장 박한 것이었다.
“제가 오롯이 무기로써 쓰일 수 있도록.”
하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좇아야 한다. 선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음에도, 보상받지 못하는 마음이 부서지고 대가 없는 헌신에 온몸이 짓이겨져도 그녀는 그래야만 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 무기로써 쓰일 수 있도록 하소서.”
그녀가 ‘용사’였으므로 응당 그리해야 했다.
“그리하면 저는 어떠한 심마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함과 신앙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게 될 것이니.”
하지만 그녀는 ‘용사’임과 동시에 인간이기도 한 사람이었으니.
“인간이 아닌 병기로서 당신의 뜻을 영원히 받잡을 것입니다.”
인간도 용사도 될 수 없는 반푼이는 무덤에 묻힌 심장 위에서 기도했다.
신이 그녀를 필연의 수레바퀴로 굴리기를. 그로 하여금 흔들림 없는 궤적을 그릴 수 있도록 안배하기를.
이 살이 찢기고 뼈가 갈려도 좋으니 필멸자의 의심이 부질없는 것임을, 당신의 전지함에는 더 거대한 뜻이 있음을 미래로 보여 주기를.
“그러니 신이시여.”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저 믿고 따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란 확신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빕니다.”
그녀는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번제를 기다릴 수 있었다. 스스로 제단에 올라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으라 시켜도 순응할 수 있었다.
“제가 용사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희생에 괴로움을 느끼는 건 인간이지 용사가 아니므로, 그녀는 그럴 수 있다.
콰아아앙!
신성력을 힘껏 담은 메이스가 절벽을 그대로 무너트렸다.
* * *
“이 미─”
나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설을 삼키며 몸을 움직였다. 붕괴하는 절벽 파편을 딛고 뛰는 식의 움직임이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마력이 동난 건 둘째 치고, 등반 이후 몸의 긴장을 풀어 놓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무렴 인퀴지터가 이렇게 나올 걸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나는 그냥 포기하고 가거나, 암벽을 타고 올라올 걸 생각했지 설마 절벽을 부술 거라곤 상상도 안 했다!
[미친 용사.]
아니, 진짜. 차라리 암벽 타고 올라왔으면 기척으로 ‘어, 올라오는구나.’ 하면서 여유롭게 튀었을 텐데. 설마 ‘네가 안 내려오면 내가 내려오게 해 주마’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
나는 안 본 사이에 인퀴지터가 엄청 과격해졌다 여기며 발악하듯 떨어지는 파편을 밟았다.
긴장이 풀린 틈새로 몰려온 피로가 제법 무겁고 뻑뻑했으나, 달리 수가 없었다. 나는 운동 안 하던 몸으로 마라톤을 뛰었다가 다음 날 근육통과 마주친 사람처럼 낑낑댔다.
[저걸 밟고 뛰어!]
그 과정에서 악마는 참 협조적으로 나왔다. 죽는 게 얼마나 싫었으면 저렇게까지 나오나 싶었다.
“넌, 시발…….”
동시에 빡침도 좀 들었다. 아무렴 자기 목숨을 저렇게 챙기면서 지금껏 남 목숨은 길가의 돌멩이로도 취급 안 해? 저 새끼는 진짜 벌받아야 마땅했다.
우르릉!
“……!”
[이런 개같은……!]
하나 얼마 없는 마력과 한계까지 지쳐 버린 몸으로 치는 발버둥에는 한계가 있어서.
나는 무너지는 파편의 맨 위까지 올랐으나 절벽을 밟지는 못했다. 균형을 잃은 몸이 바위 덩어리들과 함께 기어이 추락했다.
쿵, 쿠우우웅, 쿠쿠쿵.
먼저 떨어진 암벽 조각들이 먼지바람을 마구 일으켰을까. 그 위로 새로운 조각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나까지 더해졌다.
“쿨럭.”
「아…….」
충돌의 충격과 일부 뾰족한 바위가 몸을 관통하며 인 부상이 기침을 만들었다.
기침에 피가 섞인 걸 보면 내출혈도 확정이었는데, 딱히 경악스럽진 않았다. 50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놓고 내장 파열이 안 일어나면 그게 더 이상한 법이다.
“흐…….”
하나 납득과 별개로 아쉬움은 있다. 기회를 받아야 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를 위해 나도 견디고 싶다 마음먹었는데.
왜 하필 지금.
푸스스스.
계속해서 떨어지는 돌가루가 내 근처에 내리며 파삭 부서졌다. 일부는 내 몸 위에 떨어져 안 그래도 작살난 몸을 더 망가트렸다. 한쪽 다리가 짓뭉개지고 팔이 파묻혔다.
이 정도면 용사가 아니어도 죽지 않을까. 나는 피를 한 번 더 뱉으며 머리를 땅에 기댔다.
콰앙!
그사이 일부 땅이 들썩이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먼지가 조금 묻었으나 그럼에도 빛나는 갑옷. 푸석푸석해지며 빛이 조금 바랜 듯한 붉은 머리카락. 화려하진 않으나 예술성이 없지도 않은 대방패.
흔하지 않은 외형이 그 사람의 정체를 정의해 주었다. 인퀴지터였다.
“크흡, 큽.”
나는 인퀴지터가 경사진 대지에서 균형 잡는 걸 보며 또 튀어나오려는 기침을 참았다.
쟤는 왜 절벽을 부숴 놓고 이 아래서 나오냐. 설마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몸 못 빼고 휘말린 건가? 그런 상념은 덤이었다.
[시발, 시발, 시발……!]
하나 어이없다면 어이없는 이 추론도 어떤 관점에서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절벽을 메이스로 부수려면 근접해야 하고, 인퀴지터는 발이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니니까 말이다.
「…괜찮아요.」
하므로 나는 이 우스운 상황을 두고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단지 언젠가의 내가 아꼈던 청년과 나를 달래는 소년을 보며 한탄할 뿐이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러는 동안 경사진 대지를 밟고 균형을 맞추던 이가 드디어 나를 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우리가 벌린 거리의 간극을 채워 넣었다.
쿨럭.
“……!”
그렇지만 이 대치가 언제까지 갈까?
나는 울 것 같은 소년과 무표정한 사제를 두고 올라온 피를 뱉었다. 참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숨을 막았던 피가 턱과 목, 가슴에 흩뿌려졌다. 인퀴지터의 무표정이 최초로 깨졌다.
“…악마기사.”
나한테 완전히 정 떨어졌나 했더니, 그건 아닌가. 나는 피 기침에 동요해 주는 이를 보며, 내가 없던 동안 인퀴지터가 겪었을 심정의 변화를 가늠해 보았다.
나의 상실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두었던 거리는 의미가 있었을까. 나의 배신이 너에게 크나큰 고통을 줘 버린 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볼 때면 언제나 초롱초롱하게 빛났던, 그러나 더는 그렇게 반짝이지 않는 녹색 눈을 보았다.
순간 깊은 깨달음이 내 머리를 가격했다.
“당신을 죽이라는, 신탁이 있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악마기사. 그래서 저는, 저는 당신을…….”
내가 너에게 가지는 의미의 크기가 분명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작을 것이라고.
그것을 상실한 고통이 분명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약할 것이라고.
너는 내가 밀어내도 굳건하게 버티는 아이이니, 이 아픔 또한 언젠가 잊히리라고.
나는.
나는…….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아. 악마와 소년이 나에게 죄인이 됐다면, 너의 죄인은 나였구나.
너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바로 나였던 거야.
* * *
청년은 한때 자신의 동경이었고, 우상이었으며, 옆에 서고 싶었던 사람을 응시했다.
파묻힌 팔과 뭉개진 다리, 뱃가죽을 뚫고 나온 바위, 긁히고 찢어지고 살가죽 등. 저 강인한 이가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다. 지금껏 저 사람을 상처 입힌 존재는 대악마거나 철저히 대비한 존재들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건 아니야.’
그러나 지금 저이를 다치게 만든 이는 악마가 아니다. 악마기사를 노리기 위해 대비한 자도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아니야.’
작금의 악마기사를 저리 만든 건 그녀였다.
‘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악마기사인데.’
용사의 가슴 한구석, 돌로 파묻어 둔 심장이 속삭였다. 그러나 그를 두고 뭐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전부 그녀가 선택한 결과고 그녀가 이뤄 낸 광경이다. 그래, 그건 악마가 아닌 용사가 만든 풍경이란 말이다.
‘사람들을 구하고 나를 구한 사람인데.’
하므로 용사는 그 울림을 무시하고 메이스를 들었다. 그는 한때 죽음이 유일한 구원이노라 말한 사람이니, 이 선택은 그에게도 옳은 것이리라 믿으며 다부지게 쥐었다.
그럴 리가. 또 한 번 파묻힌 심장이 들썩였다.
‘이럴 수는 없어. 이래선 안 돼.’
스스로도 믿지 않을 말을 심장이라고 믿을까. 심장은 계속해서 벌버둥을 쳤다. 그러나 더는 선택지가 없다. 용사는 외면한 채로 메이스를 강하게 고쳐 쥐었다.
용사가 악마를 품은 자에게 심판을 행하는 것은, 무고하나 구원받을 방도가 죽음뿐인 이에게 그를 전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당연한 일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저분이 이룬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저분을 죽일 수는 없어!’
하나 심장은 다시 말했다. 그건 틀렸어.
하여 용사는 눈 감은 채로 메이스를 들었다. 이건 옳은 일이다. 속으로 뇌까리는 말은 단호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상당히 짧다.
‘내가, 내가 어떻게…….’
그럼에도 심장은 절규한다. 한때 용사의 심장이었던 것은 그렇게 대규했다. 용사는 그 오열 앞에서 묵묵히 메이스에 힘을 주었다.
아마도 그러했다. 그녀는 용사였으니까. 신의 검이자 신의 대리인이며 신의 사자인 용사였으니까.
‘제발…….’
그러니까, 용사는 인간이었던 심장의 우짖음으로부터 귀를 막으며 메이스를 아래로 내렸다. 이것이 그의 구원이 되기를 바라며 휘둘렀다.
“인퀴지터.”
그러나 닿지는 못했다.
* * *
나는 내 숨통이 헐떡이기 시작하는 걸 인지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가 나가기는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해지긴 한 모양이다. 내 머리 옆에서 메이스가 멈춰 섰다.
이거 좀 무섭다.
“그러지 마라.”
그렇지만 지금은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그러지 마라, 인퀴지터.”
이 선택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상처받은 청년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남기는 건 아닌지, 나를 위해서 너를 속이는 건 아닐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너 스스로를 죽이지 마라.”
그렇지만 그게 무섭다고 멈추기엔 나의 죄가 너무도 깊고, 상처받을 네가 너무도 가엽다. 나의 죄가 깊어지는 건 상관없으나 네 상처가 더욱 커지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말하십니까? 저는 지금 저를 죽이려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는 청년을 지긋이 응시했다. 억눌렀음에도 흔들리는 목소리가, 그리고 담담히 유지하려 하지만 물결치는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죽이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지 않아. 녹색 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소리 없이 내 심장을 찔렀다. 내가 만든 비명이었다.
“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죽이려 하는 거란 말입니다!”
나는 그 비명 앞에서 참담해지고, 또 한없이 슬퍼졌다.
세상에 자신의 동경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나이 먹은 사람에게도 괴로운 것이 함께한 사람의 상실일 텐데. 나는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네가 이겨 낼 수 있다고 자신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제가 죽이려 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너는 이제 막 사회에 나와 갓 어른이 된 이였는데.
“미안하다.”
“제게 사과하지 마십시오.”
“전부 내 잘못이야.”
“당신에겐 죄가 없습니다.”
“전부 내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열아홉과 스물. 그건 지구에서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사회적 합의선이다.
“당신이 악마인 것은.”
하지만 열아홉 살 아이가 스무 살 청년이 되는 순간, 아이였던 이가 바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12월 31일 11시 59분이 이듬해 1월 1일 0시 00분이 된다고 해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어른의 것으로 전부 바뀔까?
“제가 당신을 살해해야만 하는 것은.”
그렇지는 않다.
사회적 합의선이 그를 이제부터 어른으로 취급한다고 해서 방금 전까지 아이였던 이가 바로 영글지는 않는다. 한때 아이였던 존재를 성장시키는 건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체험이다.
“전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직 더 많은 시간만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악마기사. 저를 원망하십시오. 제가 부족한 사람이기에 당신을 구하지 못했노라 여겨 주십시오.”
물론 인퀴지터가 정말 열아홉 살에서 갓 스물이 된 아이인 건 아닐 테지. 그러나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는 다르고, 신전에서 갇혀 자란 이와 세상을 경험하며 자란 아이를 같게 볼 수는 없다.
하므로 인퀴지터는 어리다. 혼자 발버둥 치며 고독하게 견뎌 온 소년이 5년의 세월을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시간에 박제된 것처럼, 이 청년 또한 어렸다.
“당신을 구할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하여 사형선고를 하는 것도, 은혜를 원망으로 갚는 이 순간도. 전부 제가 부덕하여 이뤄진 일이니 그저 저를 질타하십시오.”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좁은 시계로만 자라기만 한 너는 어린아이였다.
“저는…….”
“너는 언젠가 내게 말했지. 이 모든 시련을 내가 이겨 낼 것이라 확신한다고.”
그러니 결국 무릎 꿇은 채 비는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인퀴지터. 나에게 기회를 한 번만 다시 다오.”
너는 정당하게 화내는 법도, 자신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아이였으므로, 내가 먼저 수습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니, 부디 너에게 속죄할 기회를 내게 줘.”
아. 제발, 이 사과가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말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