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증거를 (4)
나는 순식간에 까끌까끌해진 목을 두고 혀를 움직였다.
“…인퀴지터는.”
오랜만에 부르는 듯한, 혹은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던 칭호가 가시 공이 되어 혓바닥 위를 굴렀다.
[당연하다는 듯 너를 죽이겠지. 암, 용사가 왜 너를 살려 두겠어?]
그 가시에 찔려 잠시 머뭇거렸을까. 악마가 매끄럽게 화답했다. 산양 뼈로 만들어진 가면은 호선 없이 웃고 있다.
[도시의 절반을 날린 것도 모자라 탈옥을 감행한 전적이 있는데.]
“…전자는 네가 한 짓이잖아.”
[맞아. 하지만 그게 중요해? 원인을 따지며 책임을 묻기엔 너무 거대한 피해인데.]
문제는 그것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진실에 근거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게 맞는 말인 건 아니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물론 용사가 너를 각별하게 여기긴 했지. 강함을 향한 동경, 여정간 쌓인 유대, 시간이 건조한 신뢰, 당신을 구원하고 싶다는 의협심… 정말 유별나게도 따랐어.]
“…….”
[하지만,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존재할까? 응?]
반박할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인퀴지터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는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용사는 어리숙하지만 멍청이는 아니야. 자신이 동경해 온 강함의 실체가 실상 자기혐오와 학대로 점철된 무언가임을 지금쯤이면 알았을 거라고.]
“…걔는.”
[여행하는 동안 적립해 온 유대와 신뢰도 탈옥한 시점에서 와르르 무너진 셈이나 다름없어. 부서진 파편이야 남아 있겠지만, 글쎄. 그것에 걸기엔 너무 불안하지 않나?]
“걔는… 끝까지 날 구하려 할 애야.”
[오,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래.”
아니, 아니다. 나는 그 애의 선택을 어느 정도는 추론할 자신이 있었다. 그 애는 분명 나를, ‘악마기사’를 구하려 할 거다.
[맞아. 그 애는 널 구하려 하겠지. 그렇지만 알잖아, 그레트헨.]
분명 구하려 하겠지만.
[죽음만이 구원이라 말해 온 건 너였어.]
그것이 나를 살려 주는 식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내가 비운 사이 인퀴지터의 사고 회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예상할 수 없다.
그 애가 여전히 내게 미래를 그려 보자 제안할지, 내가 지금껏 연기해 온 ‘악마기사의 최선’을 받아들일지 도무지 알 수 없단 이야기다.
[연기를 너무 잘해도 문제지. 안 그래?]
“…….”
나는 격동하는 라텔을 쥔 채 손가락을 뻣뻣히 굳혔다. 쿵, 쿵. 이 순간에도 베헤모스는 대지를 내달리느라 온몸을 진동시키고 있다.
[다만 다행히도, 우리는 용사와 함께할 이유가 없어. 중요한 건 9년을 버티는 거지, 사탄을 잡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얘는 그냥 내버려 두고 가자. 지금 내려서 뺑 돌아가면 용사에게 잡힐 일도 없어. 지난 몇 주간 했던 것처럼 다시 잠적하면 된다고.]
…아, 젠장. 꼬맹이가 이 새끼한테 놀아난 이유를 알겠네.
나는 함정 같은데 듣기만 하면 또 그럴싸한 말을 두고 애꿎은 라텔만 노려보았다. 겉은 새빨갛게 농익은, 그러나 속은 썩은 사과를 손에 든 기분이었다.
「주저하는 이유가 만약 저 때문이라면.」
하나 내가 그것을 깨물기 전, 내 귀로 한 줄기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 팔뚝에 소리 없이 무언가가 생겨난 건 그 다음이었다.
심상 세계에서 봤던 소년이 실제 크기의 1/16만 한 형태로 내 팔뚝에 매달렸다.
「지옥에 굴러떨어지는 것쯤은 이미 각오했어요. 지금보다도 한참 전, 악마와 계약하기로 마음먹었던 날에요.」
“하지만…….”
「상냥하신 분.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해요. 그렇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내가 팔뚝을 세워 주자, 소년은 매달리던 자세에서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팔뚝을 대지 삼아 선 소년의 얼굴은 순한 웃음을 희미하게 띠고 있다.
「옳은 일을 해 주세요. 이 대악마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해요.」
내 손에 들려 있던 사과가 결국 내던져졌다.
* * *
성벽 전부를 정화하고, 그래 놓고도 힘이 조금 남아 마역 저편을 보았다. 쿠웅. 도망가던 괴물이 다리를 굽힌 건 그쯤이었다.
“어, 어어─”
그녀는 괴수의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마기의 형태를 천천히 감미했다. 거리가 거리고 괴수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시각적으로 보이는 건 달리 없었지만, 별문제 되진 않았다. 신성력을 담은 육신이 극상성인 마기를 실로 세밀하게 인지해 준 덕이다.
덕분에 그녀는 그것이 얼만큼 불쾌하게 이글거리는지, 얼만큼 게걸스럽게 연소시키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악마의 불. 그것을 수식하는 데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 없을 것이다.
“악마가, 악마가 넘어졌어…….”
“악, 악마가…….”
하나 그녀처럼 무얼갈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오롯이 악마의 침몰만을 두고 기뻐했다. 저 거대한 재해가, 그들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해를 남긴 괴수가 마치 죽는 것처럼 넘어졌기에 환호했다.
“앰버 경이야…….”
혹은 악마가 멈춘 이유를 짐작하여 소리 높였다.
“앰버 경이 해낸 거야.”
아무렴, 그들은 거대한 악마에게 끝까지 달라붙어 불을 밝히던 이를 보았다. 악마가 난데없이 넘어진 이유라 하면 가장 먼저 뽑힐 존재를 알았다.
“앰버 경이 해내셨어!”
하니 그 이름을 부르짖지 않고 어찌 배길까?
“앰버 경이 뮌문트에 승리를 가져다주셨어!!”
다만 저들의 기대는 언젠가 배반당할 것이다. 앰버 경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들이 찾는 자가 악마의 그릇이진 않을 것이므로 분명 배신당할 것이다.
“뮌문트가 승리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로서 용사는 조금 참담해졌다. 투둑. 가슴 안쪽에 돌이 떨어지며 그녀의 심장을 파묻기 시작했다.
“샌님, 샌님!”
사실, 사실은. 영영 만나지 않기를 바랐어. 당신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영원히 조우할 일이 없길 바랐어.
“샌님, 상황이 대체……!”
재회하면 분명 선택을 해야 할 테니까.
“…샌님.”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고, 시련은 혹독하다.
용사는 자신이 떠받드는 존재의 명령을 조용히 떠올렸다. 『길 잃은 자를 죽여라.』 신의 대리자인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되새겼다.
그러자 돌에 파묻힌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정말 죽이려는 겁니까요?”
“그러면?”
아니, 완전히 멈춘 건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전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어쩔 수 없다.’라는 미명하에 그녀의 시작점을 외면했다.
새람스럽게 사람 한 명을 두고 펄쩍 뛰며 혼란을 표하기엔 너무 멀리 온 셈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리예요!”
“그래서?”
하므로. 그러하므로.
그녀는 무덤처럼 쌓인 돌무더기 위에 또 하나의 돌을 떨어트렸다. 신앙과 대의라는 이름이 적힌 돌은 참으로 무겁고 거대해서 혹시 모를 박동 소리를 완전히 감춰 주었다. 이제 더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나는 용사다.”
아. 언젠가 이 순간을 평온이라, 안온이라 여길 수 있는 때가 올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아마도 그러진 않겠지. 그렇지만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짊어진 책무가 그것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뭔─!”
“벽을 세우고, 벌레들을 없애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분이 맞으십니까?”
용사는 화내는 이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 대신 헐떡거리며 그녀 앞으로 달려온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악마에게 잘렸는지, 벌레에게 먹혔는지 모를 다리 부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피에 얼룩진 남청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뺨이 두 번째로 보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도시는, 이곳은…….”
그는 파리한 얼굴로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휘청거리는 몸이 넘어질 뻔하였으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것을 붙잡아 주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팔이 부러진 상태임에도 한 사람을 손쉽게 지탱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조금의 도움을 더 청해도 되겠습니까? 염치없음은 알지만─”
“죄송하지만, 제겐 남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득바득 부탁한다고 해서 전부 들어줄 수는 없다.
허기와 갈증의 저주야 이미 풀렸고, 에릭식톤이 풀어 놓은 더러운 벌레들도 신성력이 몰아치는 순간 재가 되어 부스러졌으니, 당장의 우선순위가 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 러십니까…….”
“하니 부탁하실 것이 있다면 뒤이어 오실 다른 분께 말씀해 주십시오. 지원군으로 온 것인 만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조를 다할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이라고 해 봐야 다친 병사들을 추스르는 일과 한동안 저주에 시달렸을 주민들을 다독이는 일 정도일 터. 다만 그 두 가지의 경우 그녀가 꼭 있어야만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로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그녀가 당장 쓰여야 할 곳은, 그녀만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밧줄이 있습니까?”
그녀는 마역의 지평선을 응시했다. 거대한 크기로 인해 사이 간격을 헤아리기 어려운 괴수는, 여전히 이글거리는 마기를 한쪽에 품고 있다.
결코 괴수의 것이 아닌, 되레 괴수를 죽인 존재의 마기다.
“꼭 밧줄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는 데 쓸 만한 무언가가 있습니까?”
다만 강대했던 마기는 현재 언제 그랬냐는 듯 빈약하게 쪼그라드는 중이다. 힘이 다한 것인지 도주를 준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왜.”
“없다면 됐습니다.”
전자라면 다행이나 후자라면 두고 볼 수 없다. 저 마기가 도망치기 전에 저곳으로 가야 한다. 그 결과,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용사는 당장이라도 저 마기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 반,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 반으로 눈꺼풀을 내렸다. 대화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는 이의 눈초리가 참 매서웠다.
“마침 오는군요.”
“……?”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대악마를 막기 위해 뒤도 보지 않고 달려온 자신 대신, 뒤처리를 하며 달려오는─성으로 진입하기 위해 부숴 버린 성문 수습이나 그 성문을 타고 들어오려는 하급 악마 처리 등─이들을 가리켰다.
“다니엘 이단심문관.”
당연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온 건 그녀만큼이나 성마른 사람이라.
“…예.”
그도 저 불꽃을 인지한 걸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를 직시했다. 그의 눈 안쪽에서 타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는 약하고, 따라서 저곳으로 갈 자격이 없다.
“이분께 전적으로 협력해 주십시오.”
“…예.”
“이봐요, 샌님!”
용사는 그에게 나머지 일을 일임했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눈만 치뜨던 이가 기어이 입술을 벌렸다.
“전 악마를 처리하러 갑니다.”
“장난해? 저기에 있는 건 악마가 아니라─!”
“그만두십시오.”
“…악마라니, 무슨.”
그녀는 다니엘 이단심문관이 데스브링거를 제압하건 말건, 악마라는 발언에 남청색 머리칼이 혼란스러워하건 말건, 방패를 성벽 바깥에 내던졌다. 쿵. 거대한 방패가 악마들의 시체를 짓뭉개고 땅을 울렸다.
“시발,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방패는 이렇게 던지면 되지만, 그녀의 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뛰어내려야 하나? 그치만 갑옷 차림으로 20m가량을 뛰면 분명 충격이 있을 텐데.
“……! 잠깐, 형제님─!”
“난 네 형제 아니야!”
추가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는 만큼 신성력 소모는 최대한 방지하고 싶다.
그녀가 그런 마음으로 고민하는 사이, 그녀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 자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갔다. 이단심문관을 따돌리고, 무너진 부분을 통해 통통 뛰는 솜씨가 과연 뒷골목의 패자다웠다.
“가지 마라.”
하나 그를 그대로 보내 줄 수는 없다. 그녀는 결국 신성력을 쓰게 됐노라 한탄하며 만들어 낸 신성력의 벽으로 데스브링거를 가두었다.
“미친 샌님! 놔요! 놓으라고요!”
“다니엘 이단심문관,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저치 덕분에 내려갈 길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데스브링거가 그랬듯 무너진 벽을 통해 난생처음 마역으로 발을 디뎠다.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마기가 참으로 역겨웠다.
“나리를 죽이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이 머저리야!!”
그렇지만 그녀가 앞으로 해야 할 일보다는 아니다.
그녀는 떨어트린 방패를 주워 든 후 그녀의 목적지로 나아갔다.
괴수의 뇌를 전부 녹여 버린 불꽃은 어딘가로 도망가지도 떠나지도 않은 채 잿불이 된 상태로 그 자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