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증거를 (3)
“…미리 고하건대 지금부턴 낙오하는 자는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사는 프레드릭의 등에 오르며 문득 생각했다.
당신은 이번에도 싸우고 있을까? 또다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고 있을까?
“그러니, 헌신자들이여. 자기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키십시오.”
…당신의 모든 헌신은 보답받지 못하는데도?
“갑니다.”
본디 헌신은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안다. 어떤 순간에는 그저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해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하고, 앞으로가 그러할 것처럼.
히이잉!
“신이시여…….”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의 종이 여기 있나니.”
그녀는 텅 빈 감옥을 떠올렸다. 『 .』 이렇게까지 보답받지 못하는 헌신이 세상에 있어도 되는 걸까?
“희생하는 자에게 마땅한 명예를 내리소서.”
그녀는 마구 내달리는 말 위에서 작게 읊조렸다.
뮌문트까지 도달하는 2시간. 그 2시간 동안 부디 저 도시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 주기를. 최대한 많은 이들이 손 뻗으면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주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그만한 용기를 쥐여 주소서.”
또한 이 땅의 신이 그들을 버리지 않기를. 우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이 땅의 모든 존재를, 당신의 어린 자식들을, 신실한 종들을.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자에게 분명한 희망을 보여 주소서.”
가엾은 누구 한 사람을.
“부디… 헌신에 어떠한 가치가 있음을 역설하소서.”
부디.
* * *
“내가 왜 포기해?”
나는 귓가에 속삭여지는 권유를 두고 라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뭐 때문에 여기 남았는데, 이제 와서 포기해야 하냐고.”
빠드득. 검 자루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손바닥과 마찰했다.
“아니면 뭐, 저 사람들 죽기 전에 저 돼지 놈 못 잡는다고 제작진이 못 박아 놨어? 못 박아 놨냐고.”
[글쎄. 미쳤다고 신이 그걸 정해 두진 않았겠지.]
“그럼 된 거잖아.”
동시에 그 안으로 꾸역꾸역 마기가 밀어 넣어졌다. 베헤모스의 눈꺼풀 틈새를 타고 꾸물꾸물 파고드는 흰 점액질은 더 이상 안구를 찌르지 않는다.
“못 잡게 만들어 둔 거 아니면 게이머는 다 잡아.”
대신 그것은 안구와 살가죽 사이 틈새를 전부 메웠다. 베헤모스가 거슬린다는 듯 머리를 휘저었으나 의미는 없었다. 라텔도, 라텔로 하여금 단단히 부착된 나도 고갯짓 정도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얘도 잡을 수 있어.”
서걱!
여기까지 기어 온 바퀴벌레가 호박색 검에 목이 달아났다. 끝없이 확장될 것 같던 라텔은 안의 빈공간을 꽉 채웠는지 더 이상 늘어나는 느낌이 없다. 얼추 안구의 절반 정도는 덮은 것 같았다.
[이건…….]
그렇다면 남은 건 라텔에 마기를 주입하고, 또 그것으로 불을 일으키는 일이라.
나는 분노하면 자연적으로 불꽃이 일 거라던 악마의 말을 떠올렸다. 마기를 연소시킬 감정쯤이야 마침 내게 한가득 있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불쾌하네.]
아이에게 차마 풀 수 없던, 그러나 영원히 쌓아 둘 수도 없던 독이 눈물처럼 흘러 용암처럼 묵직해졌다. 악에 받친 심정은 그것의 테두리에 한 겹 덧씌워진 채다.
[나는 화火를 통제하기까지 백 년이 걸렸는데.]
그렇게 베헤모스의 눈꺼풀 안쪽으로 불이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스며들어 한순간에 타오르는 열화는 맞닿아 있는 안구를, 안구를 이루는 수분을 천천히 데우기 시작한다.
“당장 벌레 안 물리면 안구를 통째로 구워 버리겠어.”
꾸에에에에에!!!
고통을 참지 못한 눈이 기어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마구 비명을 질렀다.
“들었냐, 망할 돼지 새끼야? 당장 벌레 물리라고!!”
하나 그것이 불쌍하느냐면, 그다지? 그러게 누가 벌레 풀어서 사람 죽이래? 누가 내 앞에서 사람 죽이라고 했냐고. 누가 이렇게 단단해서 이런 수단밖에 못 쓰게 하랬냐고!
“벌레! 치워!!!”
나는 라텔에 뒤덮이며 하얗게 보이기만 하는 눈알을 노려보았다. 객관적으로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입힌 피해는 별것 없고, 놈의 단단함도 그것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별로 알 바 아니었다.
놈은 죽여야 할 인류의 주적 중 하나고 내겐 화낼 곳이 필요했다.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저 짐승 새끼가 말을 알아들을 리 없잖아.]
물론 이놈은 결국 내 울분의 주원인이 아니고, 그러함으로써 지금 풀어내는 화도 결과적으론 나를 속 시원하게 해 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좋았다. 모든 것이 털어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한 삽, 한 삽 덜어 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앙금도 바닥을 보일 것이다.
쾅!
그렇게 내가 화풀이 대상으로 베헤모스의 눈알을 조지는 사이, 베헤모스가 기어코 자신의 머리를 대지에 처박으려 들었다. 아마 자신의 짧고 굵은 다리로는 내가 있는 자리를 치지 못하니, 머리를 비벼서 떨어트리겠다는 노림수 같았다.
쾅!
다만, 녀석이 고려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 베헤모스는 이마보다 엄니가 더 튀어나와 있는 구조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쾅!
머리보다 항상 먼저 대지에 충돌하고 마는 엄니가 땅 일부를 부수고 얼얼한 진동을 가져왔다. 그때마다 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한 차례씩 들썩였다.
[라텔의 투명도를 조절해. 아까 뚫던 부분은 계속 뚫어야 할 거 아니야.]
“…이거 대체 뭘로 만든 거야.”
대체 뭘로 만들었기에 투명도 조절도 되는 건데?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내 근처를 둥둥 떠다니던 악마가 툭 답을 내놓았다.
[내 갈비뼈랑, 마법.]
“징그러워.”
화륵!
징그럽지만, 기능이 너무 좋다. 나는 라텔을 향한 생리적 불쾌감을 삼킨 채 그것의 투명도를 높였다. 그러자 베헤모스의 거대한 눈동자가 보였다. [저기.] 찌른 곳도 바로 근처였다.
탁! 내 몸이 날듯 뛰어나가며 호박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내가 자세 잡고 찌르려 들거든 저 녀석은 눈깔을 휙 틀어 버릴 테니, 한 점을 찌르는 건 기습적이어야만 했다.
순간적으로 흠집 위를 덮었던 라텔이 거두어지고, 호박색 칼날이 그 위에 내리꽂혔다.
촤악!
드디어 공막 아래 몇 개의 막마저 꿰뚫렸다. 얼린 삼겹살처럼 단단한 유리체가 내 검을 환영했다.
[…라텔을 제법 잘 다루는데.]
나는 검을 계속 박아 넣으면서도 라텔의 일부는 촉수처럼 길게 늘려 내 몸을 붙잡는 데 썼다. 눈알이 땅처럼 나를 받치는 게 아니라 벽처럼 존재하니, 추락을 면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서걱! 이런 순간에도 덤벼드는 바퀴벌레는 임의로 꺼낸 단검에 세 조각으로 잘려 추락한다.
구오오오, 으오오오!!!
내가 바퀴벌레를 몇 마리 베는 사이, 눈이 찔린 짐승이 앞발을 길게 들더니 그대로 대지에 내리꽂았다. 콰아앙! 없는 볼살이 떨리고, 옷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번지점프가 따로 없었다.
쿠우우우웅!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성벽이었다. 지진에 준하는 충격파가 대지를 휩쓴 순간, 성벽이 또 한 번 무너지고 도시에서 별별 굉음이 들려왔다. 인간의 비명 소리는 덤이었다.
쿵, 쿵, 쿵.
그렇지만 불행은 꼭 하나만 오지를 않으니. 베헤모스 본체는 심지어 도시 쪽으로의 돌진을 개시했다. 도시로부터 떨어트리겠답시고 기껏 유인했던 게 단번에 무의미해진 거다.
빌어먹을. 잡기 힘든 적을 향한 징글징글함과 막막한 현실을 향한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야, 이거 강도.”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다만 베헤모스보다 이게 단단했다면 처음에 보호용 고치를 풀지 않았겠지? 그리고 이거 부서지면 수복하는 데 마기 더럽게 드니까 어지간하면 시도하지 마라.]
…그럼 쓸모가 없잖아. 나는 라텔을 넓게 펼쳐 벽으로 세울까 했던 계획을 철회했다. 부서지는 벽은 의미가 없다.
“탄성은?”
[별로 안 좋아.]
탄성도 안 좋다면 그물처럼 펼쳐 속도를 늦추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는 거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진에 닿는 순간 박살 날 정도로 강도 차이가 심하냐.”
[…글쎄. 그런 걸 시험해 본 적은 없어서.]
“도움 안 되는 새끼.”
[너무하네.]
내 갈비뼈로 만든 것도 아닌데 그냥 라텔 박살 낼 각오로 벽 만들어 봐? 나는 베헤모스의 한쪽 눈깔을 웰던으로 만들며 계속 머리를 굴렸다.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무언가를 단번에 자르고 분쇄하는 능력을 빼앗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이시여.”
그래. 나는 적을 죽여 없앨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보호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능력의 사람이다.
“제가 이곳에 있나니, 악을 막는 벽을 세우소서.”
저기 저곳에 선 붉은 머리칼의 청년과 다르게.
* * *
콰앙!
그것은 일종의 가시와 같았다. 성벽을 감싸되, 한 점으로 돌출되어 뾰족한 그것은 분명 가시였다.
구오오오오!
동시에 그것은 벽이었다.
도시를 뭉갤 작정으로 달려오던 괴수, 에릭식톤이 얇고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그것의 두꺼운 목과 다리를 잇는 부분에는 금빛 가시가 파고든 상태다.
“쿨럭.”
이 압도적인 질량을 홀로 막아선 자가 어찌 피를 토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나 다르게 말하면 그뿐이었다. 큰 마을만 한 괴물을 혼자 막아선 이는 고작 피 한 번 내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부서지고 깨지고 구르기를 반복하며 확장된 그릇이 그것을 도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가로되 이곳은 이제 성역이라.”
거대한 짐승의 살점을 파고든 가시가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벽을 형성하던 신성력이 전부 짐승의 내부로 파고들려는 것처럼 그렇게 고여서 뿌리를 내렸다.
“악이여, 성역을 침범한 죄를 묻겠다.”
구우우우우우.
역병의 짐승이 벌레 떼를 흩뿌리며 울부짖었다. 이지가 바닥에 떨어진 금수일지라도 자신의 죽음은 이해할 수 있기에 울었다.
에릭식톤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끝없는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권속으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날것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크악!”
“으아악!”
“……!”
그에 용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아무리 강해졌대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작아서, 한 번에 고를 수 있는 것은 고작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사, 살려…….”
“죽기 싫어…….”
악을 단죄할 것인가, 가여운 자를 구할 것인가.
용사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방패와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는 버려야 했다.
“정화해라!”
무언가는, 버려야 했다.
그녀 혼자로서는 언제나 그랬다.
“네가 맡은 소임을 다해!”
아.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이를 두고 입을 벌렸다.
진흙과 피에 가려졌을지언정, 악을 상징하는 칠흑과 선이 되지 못한 회색을 동시에 품은 이는 언제나처럼 희게 타오르고 있었다.
“악마는 내가 죽인다!!”
아, 차라리 당신이 온전한 악으로서 이곳에 서 있었다면.
느껴지는 마기와 본질이 합일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좀 편해졌을까.
* * *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던 금빛이 오늘따라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다. 나는 베헤모스를 막아선 장막을 두고 울듯 웃다가 그 사이로 보인 얼굴을 두고 안색을 굳혔다.
“…애가 깡말랐잖아.”
신전 놈들 밥 제대로 안 줬어? 애가 왜 반쪽이 됐어. 젖살 안 빠진 것처럼 동글동글하던 얼굴이 왜 갸름해졌냐고.
[너는 지금 그게, 하…….]
하나 지금 인퀴지터의 사정을 챙기기엔 상황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나는 신성력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는 베헤모스를 보며 눈에 반쯤 박혀 들어간 호박칼을 고쳐 쥐었다. 성벽의 벌레는 실시간으로 방역되는 중이고 사람들 역시 금빛에 힘입어 치유되고 있는지라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검을 빠르게 뽑아 든 후, 다시 내려찍을 준비를 했다. 놈이 어떻게든 공격을 피하려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으나 180도 까뒤집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가드와 맞닿는 그 지점까지, 검이 베헤모스의 눈을 파고들었다.
쾅, 쾅! 성난 황소처럼 베헤모스가 온몸을 들썩거리다가 몸을 정반대로 돌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거대한 몸체가 사막을 향해 내달렸다.
[돼지 새끼가… 안 될 것 같으니 꽁무니를 빼려는군.]
그렇지만 이미 눈은 뚫렸다. 나는 라텔을 눈 안쪽으로 밀어 넣음과 동시에 손도 같이 집어넣었다. 인벤토리. 마음만 먹으면 접촉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도구가 베헤모스의 유리체를 어딘가의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또 내 등 뒤로 버려 버렸다.
[그보다 그레트헨… 항상 생각하지만 인벤토리를 참 잘 쓰는구나.]
순식간에 베헤모스의 눈이 쪼그라들었다. 다른 말로는, 안와 안쪽에 내가 밟을 만한 공간이 생겼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질기디질긴 공막이 미끄럽게 밟히고, 맨들맨들한 살점도 보였다. 나는 저곳 중 어디를 찔러야 뇌에 닿을지 고민했다.
[…차라리 여기까지 하는 건 어때?]
다만 내가 남은 마력량과 뇌의 위치를 가늠하며 라텔에 힘을 더 실을 즈음, 악마가 조용히 물었다.
“왜.”
[본래 목표했던 건 저 도시를 위협에서 구하는 것이지, 베헤모스를 죽이는 게 아니었잖아.]
“그래서 다 잡은 걸 놔주자고?”
본인도 벌레 어쩌구 잡놈 어쩌구 하면서 경멸과 혐오를 고스란히 드러냈으면서, 이제와 포기하자? 시기와 탐욕까지 때려잡은 지금, 새삼스럽게 악마의 편으로 돌아갈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악마의 본심을 살피고자 그 얼굴을 힐끗 보았다. “설득할 거면 진실을 대.” 내가 듣기에도 퍽 삭막한 목소리가 악마를 툭 치고 지나갔다.
[지금 이 녀석을 죽이려면 남은 힘을 다해야 해. 근데 지금 저 도시엔 용사가 와 있잖아.]
아, 고작 그런 의견이었나. 나는 라텔에 마기를 좀 더 부었다. 부르르. 한계까지 차곡차곡 담긴 마기가 라텔을 진동시켰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레트헨. 용사가 널 살려 둘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지? 부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재고하길 바라. 너도 알잖아? 너의 현재 위치는 삶을 고르기 어렵다는 거.]
격동이 점차 심해졌다.
[…물론 용사에게 죽어 돌아가고 싶은 거라면 그래. 어쩔 수 없지. 가여운 파우스트는 나와 계약한 흔적이 남아 구원 따위 꿈꿀 수 없는 채로 지옥에 던져지겠지만, 네가 정 돌아가고 싶다면야.]
다만, 그것을 던져야 할 손은 때를 놓쳤다.
[그래서 어쩔래, 그레첸? 도망갈 힘마저 퍼부어 가며 이걸 죽일래?]
나는 악독한 혀를 노려보았다.
악마는 확실히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