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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95화 (295/389)

295화 납득할 수 있는 (11)

[…그게 다야?]

“그럼 뭘 바랐어? 내가 저 아이에게 화내고, 울부짖고, 원망을 토해 내길 바랐어?”

나는 흐리게 웃었다.

“근데, 나는 불법 장사 하는 포장마차보다 불법 저지르는 대기업이 더 싫어.”

잠 한 번 졸음 한 번 청해선 안 되고, 악마가 수시로 일으킬 작열통도 견뎌내야 하는 와중에 모두가 나를 적대하는, 통각 수치 조절도 더는 되지 않아서 생으로 버텨 내야 하는 기간이 9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하루만 자지 않아도 멍해지는 것이 인간인데, 열흘도 한 달도 아닌 구 년을. 자그마치 구 년을 내가 견뎌 낼 수 있나?

“너 같은 아동 학대범은 더더욱 싫고.”

그렇지만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버릴 수가 없다. 소리 없이 우느라 서러운 빛깔로 반짝이는 뺨을 매몰차게 무시할 수가 없다.

시발, 인생이 개쓰레기 같고 세상이 개밥버러지 같은데, 그래도 가만히 있기가 안 된다고.

[아, 그레트헨, 너는 정말이지…….]

그러므로 나는 결정을 내렸다. 네가 8개월을 버텼으니, 나도 그 정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아이도 이겨 낸 걸 어른이 돼서 못 버티면 쪽팔리니까, 그만큼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데 탁월하구나.]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거짓의 원죄에 옥좌가 생긴다면 필히 그 첫자리에는 네 이름이 붙으리라.]

아이의 낙루 뒤에 내 진심이 숨었다. 심장 어딘가에는 울고 있는 어른이 숨도 내쉬지 못하며 짓눌리고 있다.

우는 아이가 있어서 울지도 못하는 어른이, 그렇게 꺽꺽대며 짓눌리고 있다.

[하나 스스로를 속여 넘기는 자야. 어디까지 스스로를 위해 번제할 수 있겠는가? 희생으로 고아지는 영혼은 언제까지 원형을 유지하겠는가?]

비참해. 서러워. 참담해. 화가 나. 나도 아픈데. 괴로운데. 달래 줄 사람이 필요해. 괜찮다고 말해 줄 사람이, 나도.

[남겨진 인간성 한 줌을 지키기 위해 고집하는 선행이 도리어 스스로를 부수는 모순을, 그대는─]

나도 가족들이 보고 싶어.

콰앙!

세계가 흔들렸다. 칠흑도 순백도 부서지는 진동이었다. 부서진 벽이 핏물을 꿀렁꿀렁 토해 냈다.

[…같잖은 벌레 놈이!]

이건 또 뭐야.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핏방울을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특별한 감상은 들지 않았다.

뭐 문제가 생겼나 보네. 고작 그 정도. 공감 없는 평가가 건조하게 뇌리를 떠돌았다.

「외부에서 충격이…….」

[아둔한 짐승이 주제도 모르고 나를 공격해?]

하나 나를 제외한 둘은 달랐다.

흑백 세계가 일순 반투명해지고 외부 상황을 비추었다. 눈으로 보는 시야보다 조금 확장된, 마치 숄더 뷰 형태의 게임과 같은 시야였다.

콰앙!

동시에 스피커를 빵빵하게 틀어 둔 느낌의 사운드가 귀를 때렸다. 육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치 형태로 돌려 둔 투헨더가, 라텔이 쳐들어온 적과 싸우고 있었다.

타이즈보다는 보호대처럼 주요 관절만을 감싸 안은 흰 조각이 내 몸을 멋대로 움직였다. 두 다리가 높이 뛰어 거대한 엄니를 피하고 양 팔이 다가오는 벌레 덩어리들을 쪼갰다.

[어리석은 금수야, 내 너를 주인과 똑같이 찢어 버리리라.]

그러나 그 움직임은 정말 최소한에 국한된 것이라, 적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이 공간에 핏물이 계속 흐르는 것만 봐도 확실한 사항이었다.

공격보단 회피에 치중된 육신이 죽은 자의 몸처럼 부자연스럽게 끼적거렸다.

「…내가 보내 줄 것 같아?」

[…상황 파악도 못 하는 애송이가!]

동시에 무언가를 하려던 악마 역시 사슬에 붙잡혔다. 깨지고 금 간 사슬은 언제든 부서질 것 같으나, 의외로 악마는 그걸 뿌리치지 못했다.

뿌드득. 뿌드득. 악마가 손아귀에 힘을 줄 때마다 부스러지는 사슬이 시간을 계속해서 끌었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 너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

[이 육신만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 어린 것아. 저 역병이 이 몸뚱이 하나만 먹고 돌아가진 않을 거다. 절대로! 저 욕심쟁이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가. 혹은 그사이에 육신이 죽음에 씹힐까 두려운가.

악마는 사슬을 부수려 발버둥 치면서도 계속해서 혓바닥을 놀렸다.

[얘야.]

순식간에 조근조근 줄어든 목소리가 달큰한 향을 풍겼다.

[네 은인마저 버려 가며 지키고자 한 고향이 이 뒤에 있단다.]

「…나는.」

[그러면 지켜야지. 지켜야지, 애송아. 한번 내버린 것에 연연하느라 전부 놓쳐 버리기 전에 선택해야지.]

「…난!」

[아니면 내가 네 고향까지 불태우는 걸 보고 싶은 거냐?]

「……!」

그 달콤함 속에 숨겨진 송곳니는 악랄한 독을 잔뜩 품고 있다. 소년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은 그 위로 빛이 쏟아질 때마다 번들거린다.

[놓아라, 아가야. 지금 나를 풀어 주면 나의 이름을 걸고 네 고향만은 남겨 줄 것이니.]

스르릉. 악마를 옭아매던 사슬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래, 착하지.] 악마가 웃었다.

촤륵.

「…그래도 상관없어. 망가지든, 부서지든, 불타 버리든.」

그리고 다시 한번 사슬 줄이 팽팽해졌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저는 당신의 안위보다 뮌문트의 안전을 택했어요. 저곳에 남겨진 추억이 너무 그리워서. 그나마 남아 있는 잔재가 아쉬워서. 그 사람들만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서.」

소년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아이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더는 욕심 부리지 않을 거예요.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이제 알았으니까.」

재가, 잿빛이. 퇴색된 회색의 머리칼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흔들렸다.

「그래. 수천 명의 목숨을 짓밟은 주제에, 무고한 당신을 끌어들인 주제에 소중한 걸 지키려고 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어.」

핏물이 우리를 삼킬 것처럼 차올랐다. 켜켜이 쌓인 죄악이었고, 우리가 흘린 눈물이었으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업들이 무릎을 덮고 허리를 휩쓸었다.

「미안해요. 이 한마디로 해결될 죄가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죄송해요.」

아아, 이리 바라건대.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의 억지에 휘둘려 주셔서, 잘 버텼다고 말해 주셔서.」

악성을 이겨 낼 수 있는 영혼이.

「이젠 가세요, 당신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악 앞에 무너지지 않을 강인한 존재가.

「…멋대로 불러들이고, 멋대로 끝내려 하는 점은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을 놓치면 기회는 결코 없을 테니까.」

마에게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작에 보내 줬어야 했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이 망할 꼬맹이가─!]

「아.」

만약 들린다면.

이 목소리가 들린다면…….

「아파…….」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날 당장 내보내지 않으면─!]

검은 불꽃이 소년의 심장을 꿰뚫었다. 왈칵 흐른 눈물은 차오르는 업보에 더해져 티 하나 나지 않게 녹아든다.

소년의 설움 따위, 이만한 죄악 앞에서는 조금의 의미도 없다는 양, 그렇게 흔적 없이 녹아들었다.

[젠장, 이대로는……!]

그럼에도 소년은 쓰러지지 않았다. 불꽃이 그 몸을 사르고 잿덩이로 만들어도 무릎을 꺾지 않았다.

아파. 들리지 않는 비명이 목구멍에 삼켜져 사그라들었다. 피가, 피가 흘렀다.

[망할 애송이가 끝까지……!!]

피가 무수하게 흘렀다.

불을 가두기 위해 죄악을 품은 피가 강이 되고 호수가 되어 기어이 바다를 이루었다. 한때 살기 위해 피 흘리던 소년이 혈해에 잠겼다.

“만약 내가 구 년을 버티면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소년보다 컸고, 그래서 삼켜지지 않았다. 턱까지 차오른 호수 속 소년이 내 손에 잡혔다.

“나는 돌아간다 치자.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끈적이는 핏물에 아이가 잠겨 있는 건 싫어. 그러니까 나와.

나는 한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올렸다. 쿨럭. 붉게 물든 아이가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채 나를 보았다.

「그건 왜…….」

“대답해 봐. 너든 너 새끼든.”

[…저 아이는 자유가 되고, 나는 몰락하기로 약속했다.]

“대충 네가 이 몸을 떠나 죽는단 소리로 알아들으면 되나?”

[그래. 죽진 않겠지만, 무언갈 할 힘도 남아 있진 않을 거다.]

회색빛 속눈썹에 맺혀 있던 붉은 액체가 토옥 떨어졌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남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겼나?] 초조함에 질린 이는 허세 부리듯 이죽거리고 있다.

“아니이. 생각해 보니까 그 약속이란 거, 진실과 뮌문트의 안전을 교환하는 거였잖아. 그렇다는 건 저 괴물까지 잡아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게 가시 세운 고슴도치 같다면 너무 좋게 봐 주는 걸까? 나는 잠깐 떠오른 이미지를 금세 흐트렸다. 조금 더 고민해 보니 이건 고슴도치한테 너무 미안한 비유다. 암, 그렇고말고.

「…안 돼요.」

“내가 지금까지 들은 진실의 값과 해치운 위협의 값은 과연 동등할까?”

「안 돼요, 제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악마.”

「제발, 제발……!! 당신은 더 이상 고통받으면 안 돼!!」

[…나한테 묻는 거야?]

“그럼 여기에 악마가 너밖에 더 있어?”

「저는, 이 땅은 당신의 고통을 대가로 살아갈 자격이 없어!!」

[이 육신이 죽으면 너는 돌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돕겠다고?]

“꼬우면 말든가.”

「당신은, 당신은 이제 그만 아파도 된단 말이야……!!」

[…아니. 나야 그래 주면 환영이지.]

「그만, 제발… 그만…….」

다만 흐트러진 고슴도치의 이미지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그럼 약속 다시 걸어.”

모르겠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나 이대로 돌아가거든 확실하게 후회할 거란 건 알았다. 그것만은 잘 알았다.

“내가 잘 때 몸 탈취하려 하지 않고, 일부러 고통 주려고 작열통도 안 일으키고, 마음대로 마기 터트리지도 않고. 아무튼 몸 뺏으려고 하는 수작은 절대 부리지 않겠다고. 아, 그 진실 전달 뭐시기 약속도 파기해. 쟤가 나한테 뭘 말해 주든 더 이상 페널티 안 받아도 되게 하라고.”

그러므로 나는 한 번 더… 딱 한 번만 더 걸어 보기로 했다.

이 조건 안 받아들이면 그냥 가겠다는 마음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만해요. 베뮈르헨에서도 겪었잖아……! 당신은, 당신은 그 사람들을 위해 남았는데, 그 뒤로 그렇게 괴로워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 소리야.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남았다고?”

[아, 너는 기억 못 하겠군. 우리가 지웠으니까.]

“너희 진짜 나한테 못 할 짓 더럽게 많이 했구나…….”

…오. 이건 정말 몰랐던 일인데.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두고 잠깐 재고했다가, 다시 입 열었다.

“이건 나중에 들으면 되고. 아무튼 약속할 거야, 말 거야?”

[그건 나한테 너무 손해인데─]

“싫으면 뒤지든가.”

동시에 인중까지 찬 피를 피해서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아이처럼 홀라당 속아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얻을 건 얻어야 했다.

[그럼 우리와 대화하기 전 상태로 기억을…….]

“야, 내가 만만해? 아니면 너 살기 싫어?”

[그럼 의도적으로 죽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살기 싫음 말라니까.”

[빌어먹을, 살기 위해 모든 걸 내놓으라는 거냐!]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나와 악마의 시선이 얽혔다.

“당하는 쪽이 어리석은 거라고 말한 건 너잖아.”

핏물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의미 없는 고함을 마구 내질렀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것의 비굴함은 스스로가 쌓은 업보였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후회하게 될 거다.]

“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서 정말 무서운 사람 없어.”

[내 말을 농담으로 듣는군.]

“식욕이 자길 노릴 걸 예상도 못 한 채 다 이긴 줄 알고 실실 쪼개던 빡추를 무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계약을 진행하지.]

거봐, 당하는 사람이 멍청한 거다 씨불이는 놈들은 정작 자기가 당했을 땐 자기 탓 안 한다니까.

나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삼켰다. 저 새끼가 빡 돌아서 계약을 안 한다고 배짱 부리면 이쪽도 난처해지는 까닭이다.

촤르르륵.

다행히 녀석은 계약서를 만들어 냈다. 핏물 속에서도 물러지지 않는 종이가 생겨나며 조항을 주륵 띄웠다.

“이 정도면 괜찮나.”

조항은 빡빡했지만, 시간이 없는 건 나도 매한가지다 보니 꼼꼼히 확인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대충 보았을 때, 일단 녀석이 취할 수 있는 수작은 대체로 막힌 것 같았다.

하니 그거면 됐다. 아마도 될 것이다.

「왜, 왜 이렇게까지…….」

“…이대로 가면 내가 고생한 게 무의미하잖아.”

「제발, 제발…….」

아니, 사실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잠 재워 준다는 확답이랑 고통 경감 유지, 의도적 작열통 제거만 따내도 견디기는 충분할 테니까.

아무렴 다리가 박살 나고 꿈이 작살나도 3년을 버티는 게 인간인데, 이 정도 조건이면 구 년이야 뭐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겠어.

「당신은 이제 행복해도 된단 말이에요…….」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내가 저지른 죄가 없지는 않는데, 이렇게까지 개고생할 건 아니라 생각하거든.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행복할 자격 정돈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하에 엉엉 우는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상황이라 높이가 맞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왜…….」

“빌어먹게도, 지금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그러곤 계약서를 악마에게 내밀었다.

“야, 조항 하나 더 추가해. 계약서에 적힌 행위 외에도 내가 판단했을 때 몸 뺏는 수작으로 여겨지는 행위가 언제든 새로 추가되어 금지될 수 있다고.”

[…그걸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겠어!]

“어, 그래. 그럼 죽든가.”

[……!!!]

한쪽에겐 손해가 전혀 없는─집에 바로 못 가는 것 빼고─치킨 게임에 악마가 이를 빠드득 씹었다. 촤악! 그로 인해 핏물이 밀려 나가며 우리가 있을 공간을 만들었다. 이건 좀 좋았다. 진즉 해 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네가, 판단한다는 조항은, 악용의 여지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만 할까.”

[…오래된 마법의 판단으로 바꿔 줘. 그러면 동의하겠어.]

“싫은데.”

[육체에 기생한다는 사실조차 수작으로 여길지 어떻게 알고 받아들이란 거냐!]

“…오. 역시 사기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바로 허점을 찾네.”

저 새끼랑 거래를 하는 게 정말 맞을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내 품에 안긴 소년을 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겠어, 애를 버릴 순 없는데.

“오래된 마법이 공정한 놈인지 아닌지 난 모르는데.”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렇게 말해도 좀.”

[계약할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있긴 한데 진짜 믿음이 안 가는 걸 어떡해. 나는 소년을 슬쩍 보았다. “확실해?” 내 물음을 두고 소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진실을 알려 줌과 별개로, 꺽꺽거리는 숨이 끝까지 나를 만류했다.

“그건 안 돼. 도와 달라고 하는 방법이 글러 먹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른한테 구조를 요청한 아이가 여기에 있잖아. 도와줄 다른 사람이 있다면 또 몰라, 지금은 오직 나밖에 없잖아.”

오래된 마법에 공신력이 있다면 괜찮겠지. 나는 나머지 손을 들었다. 펜이 필요한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펜이 생겨났다.

“평생도 아니고 9년 정도면… 해외 봉사 좀 왔다고 생각하지, 뭐.”

이제 여기에 이름을 적으면 되나? 나는 계약서 하단에 이름을 적고자 펜을 뻗었다. 「후회할 거예요.」 아이가 그것을 뺏었다.

「저 같은 거 도와주는 게 아니었다고, 분명 후회할 거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로, 후회하게 될 거야…….」

아이가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리며 뺏은 펜을 제대로 쥐었다. “왜 그걸 네가 잡아.” 내 물음에 아이가 끅끅 숨을 뱉으면서도 용케 말을 이었다.

「…악마에게 이름을 내주면 안 돼요.」

“아니, 그럼 계약은 어떻게 하라고…….”

사각사각. 글자가 말릴 새도 없이 계약서에 새겨졌다. 다행히 서명 칸은 아니었다.

「…저는 이미 악마에게 이름을 내주었으니, 제 이름을 쓰면 돼요.」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으로부터 육체를 강탈하려는 야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 야욕의 행위로는…(중략)…가 있다.

본래라면 내 이름이 쓰여야 할 자리에 악마들이 나를 부르던 이름이 들어갔다.

“진짜 이름 안 적었다고 꼼수 쓰는 거 아니야?”

「…그럴 순 없어요. 우리의 관념은 그레트헨을 당신으로 인지하고 있으니까.」

붉은 눈시울로 소년이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서명 칸에 제 이름을 적는 순간, 당신은 이 땅에서 다시 9년을 버텨야 해요.」

투둑. 진주알 같은 눈물방울이 또 한 번 추락했다.

「정말, 정말로 괜찮겠어요?」

그것이 내 선택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응.”

소년은 엉엉 울며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파우스트. 악마와 계약했으나 그레트헨에게 구원받는 존재의 이름이었다.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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