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납득할 수 있는 (10)
「죽지 않는 심상 속에서 굳이 찌르고 베어 고통을 주는 것도, 깨어있을 때 작열통으로 괴롭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정신이 피폐할수록 무너지기 쉬워지고… 고통은 사람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데 효율적인 수단이니까요.」
본래라면 자신이 감시자로서 그것을 막았겠지만, 힘을 상실한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며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녀석의 본질은 불꽃이에요. 무지의 은폐가 가리고 있을 때라면 아마 쉽게 죽었겠지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지금부터는 심장을 찢고 온몸을 터트려도 안 죽어요.」
영락한 노병보다도 더 늙고, 한겨울의 노상 거지보다도 지친 눈이 눈꺼풀에 가려졌다.
「그리고 그 고통은 녀석에게 아무 의미 없죠. 저희와 다르게.」
“…그러니까, 그 말은.”
「…온몸이 바스라지더라도, 산 채로 불타더라도, 심지어 잠깐의 졸음조차도 안 돼요. 어떤 이유로든 정신을 놓는 순간, 저희와 다르게 저 녀석이 아무런 동요 없이 일어날 거니까요.」
지금껏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 온 이의 눈꺼풀은 한없이 무겁다.
「…미안해요. 역시 끝까지 입 다물었어야 했는데.」
쿵. 세계 귀퉁이가 또 한 번 뜯겨 나갔다.
「역시 말하면 안 됐는데…….」
나는 아직도 소년이 내뱉은 말의 무게를 알 수 없는데, 사정없이 붕괴했다. 쿠웅. 추락하는 파편이 조금씩 심장에 닿아 왔다.
“그건, 그러니까.”
삐걱거리는 머리를 굴렸다.
심장을 찢고 온몸을 터트려도 죽지 않는.
온몸이 바스라지더라도, 산 채로 불타더라도, 심지어 잠깐의 졸음조차도 참지 못하면 빼앗기는.
[육신의 죽음이 더는 네게 답이 될 수 없단 뜻이지.]
두 개의 줄글이 늪지대처럼 내게 손을 뻗는 순간,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제약이 없어진 이상, 어지간한 죽음은 이 몸을 씹을 수 없거든.]
그것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싸울 생각 없다는 양 두 손을 뒤통수에 얹은 채, 하얀 머리카락을 사근사근 흔들며.
[자, 그러면 이제 어쩌려나. 고통으로부터 널 보호해 줄 소년은 더 이상 없는데. 끝까지 정신 차리고 있을 자신 있어?]
산양 뼈 사이로 떠오른 붉은빛이 내 시선을 계속해서 사로잡았다.
[계약의 종료까지 9년. 자지도 않고, 내가 수시로 일으킬 작열통에도 지지 않고, 이 세상 전부가 너를 죽이려 드는 환경 속에서. 더는 가려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그 9년을 버틸 자신 있냐고, 그레트헨.]
「다가오지 마!」
소년이 칼을 쥐고 악마를 막아서려 했다. 「다가오지 말라고!」 그러나 악마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푸욱! 도리어 그녀는 손을 뻗어 소년의 칼을 붙잡고, 자신의 복부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피가, 잿물이, 불꽃이 흘러내렸다.
[난 있어. 난 그럴 수 있어, 그레트헨.]
그리고 칼의 가드가 복부에 닿을 만큼 파고들었을 때, 악마는 소년을 가운데 둔 채 나를 직시했다. 피처럼 붉은빛이 기묘하게 웃었다.
[저 진창에서 3백 년을 그리 버텼기에, 나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평범한 인간의 역치를 가진 너와 다르게.]
주르륵. 악마가 다시 물러났다. 뒷걸음질에 상처가 마구 후벼졌으나 그것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만을 보아도 그랬다.
짝. 장갑을 낀 손이 손뼉을 부딪치며 그녀 대신 웃었다.
[그렇지. 아까 네가 뭐라고 했더라? 아이를 등처 먹은 내 잘못이지, 당한 얘는 잘못이 없다고 그랬나? 그런데 그레트헨, 그거 알아? 저 아이, 8개월을 채 버티지 못해서 나와 계약한 거라는 거?]
흑백 세계가 처음으로 부서져 내렸다. 「…나는!」 비명 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텅 빈 세상 한가운데를 찔렀다.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자기를 그만 좀 괴롭히라고. 나 대신 버틸 사람을 데려올 테니까.]
「난……!」
[여기까진, 그래.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레트헨, 최소한 저 아이는 저 환경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진실을 말해 주는 순간 자신이 이겨 내지 못한 지옥에 당신이 처박힐 것도 알지.]
「난…….」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칠흑은 지워지고, 아이의 고개도 떨어져 내렸다. 좋은 교환비인 걸까? 그건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저 아이는 당신 대신 가족을 택했어. 당신은 그저 휘말린 사람인데도, 지금까지 겪은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상태인데도, 가족이 보고 싶어 우는 건 당신도 매한가지인데도! 그걸 알면서도 저 아이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더한 지옥에 밀어 넣었다고.]
「아…….」
[이건 정말 죄가 아닐까?]
상대는 분명 우리에게 무언갈 내주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받아 가고 있었다. 더 커다란 무언가를.
[대답해 봐, 그레트헨. 당신은 이것마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
독이 온몸에 퍼졌다.
맹독이었다.
* * *
악마들이 물러간 후, 인퀴지터는 병사들에게 3시간의 휴식을 명했다. 시계가 넓어지는 아침을 기다리고자 함이었고, 또 뮌문트로 달려갈 체력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끝없는 배고픔이라…….”
하여 데스브링거는 다니엘과 함께 그 시간 동안 마을이 이렇게 된 이유를 조사하기로 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 성문을 열어 준 이들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을 여쭤도 될는지요?”
다만 그중에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은 이는 몇 명 없었으니.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은 물을 조금 나눠 주며 뮌문트의 병사라는 이와 티챠란 이름의 여성에게 살살 이야기를 뽑아냈다.
“부탁드립니다.”
처음엔 주저하던 두 사람이 교단의 문양 앞에서 겨우 입술을 떼었다.
“이상함이 느껴진 건 어제 새벽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이 유난히 갈증과 허기를 호소하더군요.”
“갈증과 허기…….”
“그래도 오전까지는 제법 괜찮았습니다. 다만 오후부터 이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유난히 배고파하던 사람 몇 명이 자기 집에 있던 식량을 전부 먹어 치우고선, 밭에 있는 채소까지 마구 뽑아 먹더군요.”
“밭에 있는 채소까지요?”
“예.”
“…그냥, 조리도 안 하고 먹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니엘이 약간의 당혹감을 싣고 반문하자, 병사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종의 이유로 뮌문트가 아닌 이곳에 와 있다는 그는 오래되지 않은 부상을 손으로 짚고 있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음. 이건 저보다 티챠에게 들을 말 같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그녀였거든요.”
보고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대화를 주도하던 병사가 티챠에게 배턴을 넘겼다. 그늘진 얼굴의 여성이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엔 대화로 풀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군요. 몸을 붙잡아 막으려고 해도 계속 뿌리쳤고. 그래서 저는 병사님을 불러와 집에 가두는 쪽으로 가닥을 다시 잡았어요. 해결할 방법이고 뭐고, 일단 밭은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모두가 협력해서 미친 인간들을 집에 가둬 놓는 사이, 채소 뽑아 먹는 사람이 더 늘었지 뭐예요.”
“…광증에 걸리는 사람은 노인, 청년, 아이 구분도 없었습니다. 제 동료 중에서도 막무가내로 먹을 걸 찾는 놈이 하나 나왔을 지경이니까요.”
심지어 그놈은 위장에 음식물이 너무 찬 나머지, 역으로 토하기까지 했는데도 계속해서 무언갈 입에 넣으려 들었다며 병사는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성 잃은 사람을 가두면 미친 사람이 하나 더 나오고. 그 사람을 가두고 있으면 또 등장하고. 심지어 목이 마르다고 우물에 빠지는 인간까지 나와서…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저는 제정신인 사람들만 밖에 남아 식량을 배급하고, 나머진 집에서 대기하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예.”
“그건 제법 효과가 있는 듯 보였습니다, 자정이 넘기까지는.”
그리고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형편없이 이지러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악마들을 경계하고자 마을을 순례하던 중, 주민을 가둬 둔 집 한 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하여 확인을 위해 문을 연 순간… 스스로의 몸을 먹는 주민을 발견했습니다. 한둘이 아닌, 여럿을요.”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오는 양했다.
“시발, 먹을 게 없어도 그렇지. 자기 몸을 처먹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티챠가 기어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럼 여러분이 여기 계신 건…….”
“…만에 하나,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먹으려 드는 사람이 나올까 하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먹어 치우는 인간도 충분히 지옥이지만, 타인을 습격하는 건 더한 지옥이다. 하여 그 지옥을 피하고자 내린 결정이었다며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물론 저희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서로 재갈을 물고 있기로 했고요.”
또한 병사는 자신과 티챠의 목에 걸쳐진 스카프를 가리켰다. 왜 다들 입에 천을 묶고 있나 했더니 전부 이런 이유였나 했다.
“저, 사제님.”
그렇게 모든 설명을 마친 이들이 수십 초간 침묵했을까. 할 말이 남아 있다는 양 병사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제가, 제가 마을 사람들을 버린 건…….”
설명하는 동안 그래도 침착했던 목소리가 흔들리고 눈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냉혹하게 버려야만 했던 처절함, 그걸 사제가 들었으니 문책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망가진 현실을 향한 공포.
그 모든 것이 병사의 떨림에서 느껴졌다.
“그분들의 죽음은 형제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매님의 잘못도 아니고요.”
또한 나지막한 신관의 음성이 그 떨림을 딱 잘라 냈다.
“저, 정말요? 정말, 저는, 저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여러분은 당시에 할 수 있던 최선의 대처를 하셨습니다. 이단심문관으로서 제가 보증합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분들이 형제 자매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이 형제 자매님 덕에 목숨을 부지한 것입니다.”
나름 사제였기에 그의 다독임은 더욱 효과가 좋았다. 신앙의 힘을 빌려 두 사람은 본인의 짐을 덜어 냈다. 평소엔 아니꼽던 이단심문관이지만, 지금 같은 때는 퍽 도움이 된다 싶었다.
“이봐요, 꼰대. 역시 이건…….”
“…대악마의 저주가 맞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 에릭식톤이 이 근방에 있었군요.”
별개로 데스브링거는 스리슬쩍 물었다. 예상과 어긋나지 않은 답에 그의 미간이 구부러졌다.
“이렇게 저주가 넓게 퍼지는 걸 모를 수 있어요?”
“변명으로 들릴 건 압니다만, 해당 저주만큼은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끝없는 굶주림과 영원한 갈증은 제물로 거는 저주가 아니라 에릭식톤의 영역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니까요.”
“시발, 사기잖아.”
“…대신 이렇게 오래 머무는 경우도 없습니다. 길어도 하루, 보통은 전투가 이뤄지는 나절만 지속됩니다.”
이만한 반경, 이만한 수의 생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대악마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지금껏 북부가 초토화되지 않은 것만 떠올려도 증명되는 사실이었다.
에릭식톤이 이 저주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면, 그놈은 도시 하나가 몰락할 때까지 그곳에 눌러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예. 다행이지요.”
“근데 왜 지금은 이틀 넘게 지속되고 있대요?”
“글쎄요…….”
다만 데스브링거가 지금 내놓은 물음에는 다니엘도 쉬이 답을 골라 내지 못했다. 북부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보니 에릭식톤에 대한 단서도 부족해서 더욱 그랬다.
“무언가를… 노리는 걸지도 모르지요.”
하여 그는, 적당히 머리 굴러가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추측할 수 있는 가설 앞에서 멈춰 섰다.
“이만한 품을 들여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말입니다.”
“흠.”
“물론 그게 뮌문트 하나라기엔 수지타산이 묘하게 안 맞으니 분명 그 이상의 노림수가 있겠지만… 그게 무엇일지는 잘 모르겠군요.”
한때 어떤 기사들도 내놓은 가설이었다.
“뮌문트가 이름 높은 도시긴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대악마 둘이 죽은 상황에서 또 하나의 목숨을 걸고 몰락시키기엔 또 아쉬운 곳인데…….”
“…살아 돌아갈 자신이 있다든가?”
“글쎄요. 대악마가 살아 돌아간다손 쳐도 그 아랫것들은 분명 소모가 됩니다. 악마라고 해서 병력이 바로바로 보충되는 것도 아니고요. 더구나 동부엔 용사가 있지 않습니까? 악마들이 밀고 들어온 부분도 용사가 합류한 순간 되찾을 여지가 커집니다. 그걸 악마라고 모르진 않을 텐데…….”
“그렇다면 샌님을 노리고……?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샌님을 노릴 거였다면 기습적으로 노리는 게 효과적이지 않나.”
“…아니면 에릭식톤이 여기까지 온 것처럼 나머지 하나도 몰래 내려왔을지도.”
“그러니까, 저놈은 용사를 불러올 미끼로 쓰였다? 용사가 오면 두 마리가 합공할 거고?”
“예. 용사님만 죽인다면, 그간 밀린 북부 전선이야 얼마든지 수복이 가능할 테니까요.”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긴 한데… 그게 되나?”
주제가 주제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앙금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건 아닐걸.” 그러자 중간에 마이스터가 끼어들었다.
“용사가 뮌문트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대악마 둘이 어떻게 달라붙겠어?”
“…그럼 댁은 뭐 때문에 저 지랄 났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참 나. 댁도 모르면서─”
“그렇지만 무수한 인력이 동부에 집중되고, 그들이 거의 모였을 즈음엔 모두의 시선이 뮌문트로 집중되는 것 자체가 저들이 바랐던 광경임은 확실하지.”
그의 눈동자를 가리는 안경이 손가락 끝에 의해 달싹거렸다.
“정보를 다룬다는 놈이 아직도 눈치 못 챘어?”
“……?”
“타임라인이 비틀렸잖아.”
“타임라인이라니, 그게 무슨…….”
“…어제 새벽.”
또한, 마이스터의 한마디에 데스브링거는 동공을 무의식적으로 확장시켰다. 그의 머리가 찰나간 맹렬히 돌아가며 그가 놓친 비틀림을 찾아냈다.
“…에릭식톤이 이곳에 온 건 어제 새벽이야.”
“저, 무슨 이야기신지 잘…….”
“빌어먹을! 우리가 대악마 출연 소식을 듣고 출발한 날짜랑 에릭식톤의 진짜 등장 날짜를 생각해 보라고요! 아까 당신도 말했잖아, 사람들이 겪고 있는 허기와 갈증은 에릭식톤을 따라 움직인다고!”
“…아?”
“우리는 에릭식톤이 등장하기 전에 대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겁니다! 아마도 인력을 이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계략 때문에!”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 * *
[끝까지 입 다물었어야 했는데. 무지의 은폐만이 당신을 그나마 쉽게 돌려보내 줄 수 있었는데. 당신의 희생에 마당한 값은 치르지 못해도 집에 보내 주는 것만큼은 제대로 해 줬어야 했는데.]
나는 귓가에 흘러드는 독을 두고 아이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선 등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기적인 아이.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은인을 내버리고 말았지. 누구는 자신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됐는데, 본인은 생존한 피붙이와 의형제를 지키겠다고 은인을 지옥에 밀어 버린 거야. 정말이지 염치없지 않아?]
그게 안타까웠나?
[그레트헨, 너는 가족조차 볼 수 없는데.]
아니면 증오스러운가?
“…혀를 잠깐이라도 놀리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어? 좀 닥쳐 봐. 너 때문에 지금 머리가 안 돌아가잖아.”
문득. 리챠 씨를 마주한 첫날이 떠올랐다.
[왜 그래? 내가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누구는 가족과 더는 만날 수도 없는데, 정작 원인일 누군가는 가족을 찾았다는 것에 분명 질투하고 분노했잖아.]
“나는─”
[그레트헨, 분노라는 감정 앞에서 나를 속일 수 있는 건 없어.]
그때 떠올리고 말았던 생각이 문장으로 정제되어 지금 읊어지고 있었으므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합당한 분노야.]
아, 내가 흘린 눈물과 핏방울을 모은다면, 소년이 흘린 것보다 더 깊어질 수 있을까?
“…….”
나는 고개 숙인 아이를 앞에 둔 채 손바닥을 죔죔 했다. 손발에 감각이 없다는 게 조금 엿같았다. 흰 숨이 토해졌다.
“괜찮지, 않아.”
「……!」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건, 확실히 괜찮지 않았다.
“조금도 괜찮지 않아.”
간절한 호소에도 침묵하던 자가 본인 가족 안위에 겨우 입을 뗀 것. 다만 그로 인해 내가 지옥으로 내몰린 것. 그건 정말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데.”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얘 탓은 아니야.”
소년의 선택이 이기적이라 해서 나한테 화낼 자격이 있는가? 소중한 이의 안위를 협상 테이블에 내건 건 나인데. 소년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분명 나였는데.
내가 왜 말했냐고 화내도 되는 걸까?
“가족을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소년이 나보다 가족을 우선시함으로써 이 꼴이 났다. 하나 소년이 가족보다 나를 우선시하여 침묵했다고 해서 내가 소년을 기껍게 여기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래서, 용서한다고?]
“아니.”
그러니 그저 파국이다.
“용서하기엔 너무 멀리 왔어.”
내가 이곳에 불려 온 순간부터 줄곧,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파샤.”
「……!」
“모든 것이 끝나면 이것에 대해 사과해.”
「아…….」
“그거면 돼.”
첫코가 잘못된 뜨개질은 전부 풀고 다시 뜨는 것밖에 수가 없듯, 우리의 관계는 반드시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8개월, 잘 버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