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납득할 수 있는 (9)
“저 썅─”
아오, 시발. 현실이었으면 변호사 고용해서 존나 조졌을 텐데 저 씨 발라 먹을 미친 새끼가 애한테 이딴 수작을.
「죄, 죄송…….」
“네 잘못 아니야. 사과하지 마.”
나는 들끓는 빡침을 겨우 억누르며 소년의 사과를 막았다.
「제, 제가 좀 더 생각했다면…….」
“고향의 위기 앞에서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계약의 허점을 써먹는 건 배우지 않는 이상 대처하기 힘들고.”
태어나서부터 모든 것에 통달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있다 해도 이 소년이 그런 존재인가?
그렇진 않다. 아이는 멍청하진 않으나 무지했고, 아둔하진 않았으나 배움을 청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이건 네 탓 아니야. 저 배라먹을 새끼가 나쁜 놈인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절대로.”
그러니 이건 소년의 잘못이 아니다. 태어났고, 배우지 못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큰 건 결코 아이의 죄가 될 수 없다.
어리석음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 건, 오직 배울 수 있음에도 배우려 들지 않는 자들을 향할 때뿐이다.
[너무 내 탓만 하네… 섭섭하게.]
“그만큼 나이를 처먹었으면서 아이 등처 먹고 싶으세요? 나이 헛먹으셨네. 등신 새끼가.”
[당한 쪽이 어리석은 거 아닐까?]
“아, 그래. 아이 등처 먹고 살 정도로 똑똑해서 참 부럽네. 근데 그거 알아? 보통 그렇게 말하는 놈이 자기가 당하면 남 탓만 조지게 하고 자기 탓은 안 하더라. 자기가 한 말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지능이다 이거지. 와, 너무 부럽다아.”
[부러우면 그레트헨, 너도 하지 그래?]
“아, 난 괜찮아. 난 코 묻은 돈 사기 쳐서 안 뺏어도 내 앞길 지폐로 깔 수 있다 못해 다른 사람 앞길까지 깔아 줄 수 있는 사람이거든. 남한테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어느 도태 찐따랑 다르게.”
나는 올라온 분노를 어떻게든 언어로 풀어내며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건만, 아이가 자신의 실수에 짓눌려 죽을 것처럼 굴고 있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덜덜 떠는 아이를 내 품에 다시 끌어들였다.
「죄, 송해요…….」
헐떡거리는 숨에는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저 혀에 너는 얼만큼 속아 넘어갔을까. 얼만큼 고통을 받았을까.
이곳까지 홀로 걸어오는 동안 네가 흘린 눈물과 피를 모은다면 이 세계는 어디까지 차오를 수 있을까.
“사과하지 마. 악마 새끼를 치우고, 네가 저지른 진짜 잘못을 고르기 전까진, 절대 사과하지 마.”
여전히, 아이를 용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어른이라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너무 깊었다.
“네 잘못 아닌 걸로 사과하는 거 아니야. 알았어?”
그렇지만 내가 아프단 이유로 소년을 진창에 계속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과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동일하지 않고, 연민과 증오는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었으므로 나는 그리 할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대답해.”
「…네, 네.」
나는 아이의 흐느낌을 감싸 안으며 그 정수리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괜찮아.”
혼자 있을 땐 미지근한 것들이 서로 붙어야만 겨우 생기는 온기였다.
“우린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들었다. 약속의 불이행으로 다시 부서지는 세계의 저편에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다.
[글쎄. 정말 괜찮을까?]
또한 그 불꽃 앞에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는 건 흰 머리의 악마이니.
[정말 괜찮을까, 그레트헨?]
“…설명해 줘. 내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부터.”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저 새끼는 반드시 업보 치르게 만든다. 나는 진심으로 다짐했다.
* * *
“멈추지 마, 달려!”
인퀴지터의 외침에 거품을 문 말이 길게 울었다. 퍼억! 빛을 머금은 메이스가 밤의 숲을 밝혔다. 어둠에 숨어 있는 악마들의 몸뚱이가 터지고 뭉개진 건 그다음 과정이었다.
히이이잉.
전 주인을 닮아 괴팍한 성질머리의 말이 로데오 하는 소처럼 순간적으로 몸을 튼 후, 다가오던 악마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 찼다.
뒷발질 한 번에 거미를 닮은 악마가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비틀거렸다.
“받아라, 악마!”
그런 거미악마 위로 새로이 투척된 건 작은 항아리 병이라. 쨍그랑. 병이 깨지며 안쪽 내용물을 분사하는 순간, 악마의 몸이 미약하게나마 녹아내렸다.
“좋았어! 싸가지, 하나만 더 주십쇼!”
“말을 그따위로 하면 내가 잘도 주겠다, 그치?”
데스브링거의 발언에 마이스터는 쌍욕을 지껄이면서도 순순히 무언가를 내밀었다. 말 위에서 뚝딱뚝딱 급조해 낸 마력탄이었다.
순수 근력은 마이스터보다 약할지언정, 표적을 맞히는 기술은 뛰어난 데스브링거가 재빨리 받아 던졌다.
또 하나의 악마가 눈이 녹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악!
하나 악마는 한 면에서만 오지는 않았으니. 마력탄을 만드느라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마이스터를 향해 또다른 악마가 달려들었다.
마기에 영향을 받아 악마화한 놈인지, 짐승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었다.
서걱!
“어딜!”
그에 방패와 롱소드를 꼬나쥔 다니엘이 나섰다. 그는 말을 재촉하여 마이스터의 왼편까지 다가간 후, 악마의 발굽을 방패로 막고, 롱소드로 그 발목을 베어 녀석이 뒷걸음질하도록 유도했다.
“천둥이시여!”
다니엘이 번 한 호흡. 그 뒤를 이은 건 아크메이지의 마법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어떻게든 마력을 응집하는 데 성공한 아크메이지가 악마의 머리통에 번개를 내리꽂았다.
“젠장, 스켈레톤만 잡다가 이딴 놈 잡으려니 낯설구만.”
“하하, 이거 기사 체면이 말이 아니야.”
그런 아크메이지를 보호하는 이 또한 있었으니. 뮌문트를 향해 달리던 도중 합류한 다른 도시의 기사와 정예병들이 창을 마구 휘두르며 악마들을 견제했다.
“돌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악마들을 죽이는 데 집중하진 않았다. 악마 하나 잡겠다고 멈춰 서는 순간 찢겨 죽을 미래를 알아서였다.
사냥보다 돌진에 집중한 세력이 숲을 마구 내달렸다.
“3시 방향! 성벽이 보입니다!”
“오!! 뮌문트인가?!”
“아마 아닐걸요. 아까 악마 피하겠다고 방향도 좀 비틀었고, 거리 대비 시간도 안 맞아요. 뮌문트가 나올 시간이 아닙니다.”
“용사님! 어찌할까요!”
“…일단 저곳으로 빠집니다!”
마음 같아선 뮌문트까지 달려가고 싶으나, 병사와 말의 체력을 고려해야 한다. 더불어 성벽 안쪽에 삿된 것이 안 느껴지는 이상, 성벽을 끼고 싸우는 것이 안 끼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것도 맞으니.
선두에서 앞장서던 인퀴지터는 그런 판단하에 사람들을 성벽으로 이끌었다. 어둠 속에서 가장 강한 빛을 발하는 금빛은 마치 태양의 한 조각을 잘라 가져온 듯하다.
“문을 여십시오! 저흰 적이 아닙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녀는 후미로 빠질 준비를 하며 자신의 메이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신의 힘을 가득 담은 광명이 메이스를 통해 퍼져 나오며 그녀의 신분을 증명했다.
“…사제?”
아무도 없던 것 같던 성벽 위로 사람 얼굴이 빠끔 올라왔다.
“부디 문을!!”
“…티챠 씨! 문을 열 준비를!”
“하지만, 병사님. 저 사람 뒤에는 악마들이…….”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봐야 다 죽을 뿐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피 칠갑을 하고 있는 이들이 수선을 피웠다. 끼이익. 곧 문이 열렸다.
“제가 마지막에 남아 악마들을 막을 테니, 여러분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세요!”
“예!!”
인퀴지터는는, 용사는 성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며 말에게 신호를 주었다. 인간보다 똑똑할지도 모르는 말이 속도를 점차 늦추며 그녀를 후미로 데려다주었다.
성벽이 열리고, 병사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과 꼭 들어맞는 타이밍이었다.
“신이시여, 제게 힘을!!”
용사는 그것을 확인하며 기도 올렸다. 금빛 막이 그녀가 선 자리부터 출발하여 성벽을 모조리 감쌌다. 악마들이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는 막이었다.
“시발, 살았다…….”
그녀가 그렇게 마지막을 지키는 사이, 일행은 후다닥 성벽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문을 열어 준 자는 현명하게도 길 옆으로 피해 있었기에, 속도를 늦추지 않아도 안쪽으로 진입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두두두두.
물론 그로 인해 마을 안 밭이 조금 짓밟히긴 했다. 그러나 어차피 채소도 없는 밭. 처음 진입한 자들은 뒷사람을 위해 넉넉히 안쪽으로 들어선 후에야 말을 멈추었다.
“이 무슨……!”
기실, 넉넉한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쪽으로 진입하며 보인 마을의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스스로를 뜯어먹고 있어…….”
밤을 틈타, 굶주림이 바닥을 기어 오고 있었다.
* * *
「뭐부터…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눈물이 콸콸 쏟아질 만큼 감정이 복받친 상태에서 포괄적인 주제를 설명하는 일은 강단에 수십 번 선 교수를 데려와도 어려울 거다.
하여 나는 꼬운 눈으로 멀찍이 서 있는 버러지를 불렀다.
“야, 악마.”
[나한테 묻지 마. 답을 주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소년이니까.]
“너한테 답 구한다고 한 적 없어. 나는 아는 게 없고, 얘는 패닉 상태인 만큼 적당한 질문거리가 뭐 있는지만 자문하려는 거지. 아니면 이것도 못 해 줘? 아, 그냥 자문해 줄 머리가 안 되는 건가?”
[…제법 의외야, 그레트헨. 난 당신이 이렇게까지 표독하게 말 뱉을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어지간한 상황은 웃으며 넘겨서 그런가. 혹은 평상시 화내지 않고 넘기려 노력해서 그런가. 작정하고 혀 놀리면 다들 놀라더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그만큼 네가 쓰레기란 뜻 아닐까?”
평상시의 내가 욕을 줄이려는 건, 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청자에게 새겨지는 나의 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의나 예절은 그걸 지킬 가치가 있는 존재 앞에서나 지키는 거지. 물론 어떤 고-귀하신 분들은 별 쓰레기 앞에서도 각 잡히게 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렇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쓰레기들까지 대우해 줄 이유는 없다. 대우받는 느낌조차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참지 않고 경멸을 드러냈다.
“각설하고, 그래서 지능이 안 된다고?”
[오, 그레트헨. 수가 얕아. 내가 질문거리를 제공한다면, 그걸로 진실의 최소치를 특정할 거잖아? 나는 의미 없이 나의 패를 날리진 않을 거야.]
“아, 멍청해서 안 된다고. 알았어.”
들켰네, 젠장.
나는 아쉬움을 표정 없이 삼키며 거의 진정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뭘 물어봐야 세계를 덜 부순 채로 약속을 끝낼 수 있을까.
“진실이 다 전달되면 어떻게 돼.”
사실, 이렇게 마주하게 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정말 많았는데.
「…규칙에 따라, 저는 악마를 막을 수 없게 돼요.」
“막는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
그러나 나는 일단 정말 묻고 싶던 건 뒤로 미뤘다. 모든 걸 듣자마자 악마 새끼가 날뛸 수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후 대책을 세울 수라도 있게 우선순위로 들어야 할 게 있었다.
「…일단, 아까처럼 악마와 붙는 게 불가능해져요. 아예 못 싸우는 건 아니지만 제한이 많이 걸려서 제대로 공격 한번 못 하고 당하겠죠.」
“당한다고?”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죽지는 않아요.」
다급히 붙여진 뒷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당신도… 계약 조건에 따라 죽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아까처럼 공격당할 수는 있어요. 제가 막을 수 없게 됐으니만큼 더더욱.」
“공격당하는 건… 그냥 심상 세계에 안 들어오면 되는 문제 아니야?”
「아뇨… 공격받는단 건 이곳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깨어 있을 때도 포함이에요.」
쿵.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세계가 부서져 내렸다.
「제가 악마와 싸우지 못하게 됐다는 건… 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넣었던 기능 일부가 사라진단 뜻이거든요. 예컨대, 통각 수치부터 정상적으로 돌아온다든가.」
“아…….”
통각 수치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나. 나는 지금껏 내가 입어 온 부상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모든 걸 생으로 겪어야 했다면 내 멘탈이 많이 나가리 났을 것 같긴 하다.
「악마의 말도 직접적으로 들려올 거예요. 지금도 저 몰래몰래 전달하고 있던 것 같긴 하지만…….」
“파리가 윙윙거리듯 말하긴 했지.”
[…듣고 있긴 했구나, 그레트헨?]
“내가 떠올린 것처럼 속삭이는 게, 대가리 참 열심히 굴린 흔적 같긴 하더라. 근데 캐해 솜씨는 좀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공감 하나 못 하는 지능이라 아마 어렵겠지만.”
나는 아이가 보지 못하는 각도로 악마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준 후 아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더 말하라는 의미였다.
「몸도 직접적으로 탈취하려 들 거예요.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 수시로 작열통을 일으키겠죠.」
“…혹시 내가 요 며칠 느꼈던 그게?”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못 막았죠.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내가 네 잘못 아닌 걸로 사과하지 말랬잖아. 사과하지 마. 네 탓 아니야.”
고향 앞에서, 가족 이야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건 아이가 아닌 어른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아이의 흔들림을 이해했다. 용서 운운할 죄도 아니었다. 평상시 그 고통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해당 건에 대해선 아이는 최선을 다했다.
“그 외에는?”
「그외에는… 순간적으로 주변에 마기를 터트려서 사제들의 적의를 끌어온다든가 할 수도 있어요.」
“적의를 끌어와?”
「…육신이 완전히 죽으면 저 녀석에게도 손해지만, 죽음 직전까지 가는 건 또 달라서요.」
다만, 두 번째 경우을 설명하던 차에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는 순간, 몸을 빼앗기 쉬워지니까.」
그것의 어린 형상과 대비될 정도로 가문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