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납득할 수 있는 (8)
챙!
[보채지 마, 그레트헨. 이 꼬마가 힘을 잃거든, 그땐 네가 싫어도 상대해 줄 거니까.]
던진 칼은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검을 쳐 낸 이가 비죽거렸다.
“엿이나 드세요.”
그렇지만 그것에 굴할쏘냐? 나는 단검을 몇 개 더 생성하여 던졌다. 챙, 챙, 챙. 하나도 먹히진 않았으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드디어 저 새끼한테 칼이라도 던져 볼 수 있게 됐다.
[별것도 아닌 놈이…….]
「…함부로 덤비시면 안 돼요.」
그러나 내 도움을 소년은 썩 기꺼워하지 않았다.
악마의 팔을 얽맨 후부터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내 단검 던지기가 방해됐을 리는 없고. 그냥 내가 싸움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불편한 듯했다.
「당신 영혼은 악마를 누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하지만, 저 악마는 당신의 영혼을 비집고 나와 세상을 할퀼 수 있을 만큼 간교해요.」
“정확하게 설명해. 조심하란 거야, 덤비면 안 되는 거야.”
「…심상체는 죽여도 죽지 않아요. 다만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정신이 피폐해질 뿐.」
지금까지 겪은 게 있어서인가. 아이를 대함에도 말투가 조금 퉁명스럽게 튀어 나갔다. 다만 그 가시에도 소년은 괘념치 않고 내게 경고를 일러 주었다.
「피폐해진 정신은 시야를 좁게 하고, 눈앞의 구원만을 좇도록 하지요.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속삭이는 목소리 밑에는 지독한 피로와 후회가 겹겹이 깔려 모든 걸 받치고 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악마에게 먹혀요.」
소년이 홀로 겪고 홀로 쌓아 올린 지반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뒤에 계세요. 싸우는 건 제가 할 테니까.」
목이 졸려도, 칼을 박아도 죽지 않아. 악마가 말했던 것의 무게가 어렴풋이 손에 닿아 왔다.
[희생정신이라… 참 갸륵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선 소년을 보았다. 소년의 등은 여전히 작았다. 무릇, 다 자라지 않은 성장기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말했잖아. 더는 안 돼. 너는 이제 이 무대에 설 자격이 없어.]
동시에 소년은 기사였다. 곧추세운 허리와 적당히 벌린 다리, 검을 단단히 쥔 두 손이 그것을 증명했다.
「알아.」
눈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검이 타올랐다. 그 빛은 호박보다는 금이었고, 횃불보다는 태양이었다.
장작불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검이 부서지는 세계를 밝혔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막아 설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황금에 물든 소년의 머리카락이 마치 불티가 살아난 재처럼 반짝였다.
[아니. 넌 못 해.]
「……!」
하나 그 아름다운 빛은 판도를 바꾸지 못했다.
쾅! 악마가 든 새까만 불꽃의 검이 소년의 검과 충돌한 순간, 백색 세계의 붕괴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지평선은 이미 검정색에 먹혀 버렸고, 이젠 양옆의 광경마저 쩌적쩌적 부서지고 있다.
[‘약속’을 이행해.]
「크읏……!」
소년이 그것에 대항하듯 힘을 더 주었지만 그래 봤자였다. 금 가는 것이 느려질 수는 있어도 멈춰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 손에서 생겨난 검이 악마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귀찮게.]
「아!」
기사건 뭐건. 결국 소년은 아이였고, 나는 어른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돼서 애한테 보호받기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애가 설사 나한테 용서 못 할 짓을 저질렀대도, 모든 세상이 손가락질을 할 죄악을 범했대도 그렇다.
그 어떤 죄에도 아이들은 속죄할 기회를 마땅히 받아야만 했다. 오직 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경험해 보고 싶었어, 그레트헨?]
“이미 조지게 경험해 봐서, 별로?”
기사랑 다시는 붙기 싫었는데… 악마는 기사가 아니니 괜찮겠지. 나는 칼날을 피한 악마의 다리를 냅다 걷어찼다.
[소용없어.]
그러나 형체를 갖추고 있던 연기를 손으로 휘젓거든, 형태만 뭉개지고 사라지진 않으니. 악마의 신체 또한 그랬다.
그것의 다리는 불꽃처럼 연기처럼 흩어짐으로써 내 다리를 통과시키고, 다시 결합하여 원상태로 돌아갔다. 상상치 못한 반응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저 밖의 너를 지탱하던 힘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니?]
그러나 놀랄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화륵.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온 불꽃이 내 몸에 끼얹어졌다. 황급히 바닥을 굴렀지만 기어이 팔 한쪽에 불꽃이 닿았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피부를 태우고 그 아래를 좀먹는 고통에 입을 벌렸다. 신성력에 처맞았을 때랑 비슷한 강도의 아픔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상처가 없던 자신을 떠올려요!」
다행히 소년의 조언을 따라 행하는 순간, 몸을 태우던 불꽃은 사라졌다. 보다 정확히는, 소년이 불 붙은 자리를 빠르게 도려내는 것으로 불꽃을 떨어트렸다.
캉캉!
소년과 악마가 세 번 합을 이루는 사이, 나는 간신히 그 자리를 재생시켰다. 바라기만 하면 치료되는 건 좋은데, 여러모로 거지 같은 기분이었다.
“정신 제대로 안 잡으면 바로 뒈지는 구조잖아, 이거…….”
[정확해. 그래서 그런데, 포기할래?]
“좆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두고 검을 다잡았다. 통각 수치 조절이라는 꼼수 없이 고스란히 와닿은 고통이 어마무시했으나, 요 근래 이만큼 아팠던 적이 꽤 많아서 버틸 만했다.
까앙!
“아, 욕하면 안 되는데…….”
내 검이 소년을 베려던 불꽃을 쳐 냈다.
[하여간, 영혼이 거대한 것들은 쓸데없이 고집이 강하다니까.]
그러자 악마는 몇 번 더 공격을 시도해 보곤 안 통한다는 걸 파악, 그대로 훌쩍 물러났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내게 숨 돌릴 시간을 주었다.
[됐어.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니까.]
합을 주고받는 게 꼭 필요한 행위는 아닌가 보지. 나는 악마의 말로 하여금 대강의 형편을 살폈다. 거짓 수일 수도 있긴 하나, 소년이 묵묵히 있는 걸 보면 썩 틀린 예상도 아닐 성싶다.
“…얘.”
「…저 부르셨나요?」
“쟤 두드려 패도 의미 없는 거 맞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위 여부는 확인했다. 소년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도한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별 소용 없어요.」
“우리는 둘인데?”
「둘이니까 현상 유지가 된 거예요. 본래라면…….」
쩌억. 소년이 무언갈 말하려던 찰나, 세계에 금이 쩍 하고 가 버렸다. 계속해서 붕괴되고 있던 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건 눈에 띌 만큼 확연한 부서짐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무지의 은폐 때문이야, 방금?”
「…그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쪽에 있어요.」
“규칙을 깬 거?”
「그걸 어떻게…….」
“대놓고 말해 놓고 새삼스럽게 뭘…….”
사람 앞에 놓고 그런 식으로 떠들면 누군들 추측할 수 있게 될 거다. 나는 재생된 피부를 죔죔 하며 머리를 굴렸다.
내가 심상 전투에 익숙해서 저 악마를 두들겨 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년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투닥거린다고 부서지는 세계가 나아질 것도 아닌 듯하니, 차라리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려 보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판단이었다.
“…결국 나한테 입 다물고 있던 건 계약 때문이었단 거지. 네가 먼저 규칙을 어김으로써 악마에게 유리해진 거고.”
나는 몸을 들썩거리며 눈치 보는 소년을 두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뮌문트가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면 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을까. 이 꼬라지를 보면 아마도 그랬을 것 같긴 하다. 부서지는 백색 세계는 아무리 봐도 이쪽에 좋은 신호 같지 않았다.
[그래. 역시 눈치가 좋구나, 그레트헨.]
“…이행해야 한다는 약속은?”
[이미 예상하고 있으면서 뭘 묻는 거지?]
그렇지만 뮌문트를 가지고 협박한 게 후회되는가? 그렇진 않다. 아무리 나를 위한 것이었단들 내 눈과 귀를 가린 채 휘두르려 하는 건 짜증난다. 나아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나에겐 답이 필요했다.
목표로 삼을 수 있는 답이든, 지구에 두고 온 삶을 미련 없이 매듭짓도록 하게 해 주는 답이든. 아무튼 내 삶 일부를 가다듬게 해 줄 답이.
[진실의 전달. 그것이 너와 저 애송이가 맺은 약속이잖아?]
그리고 그 답은, 고작 몇 개의 문장이면 족했다.
“그래? 그럼 하나, 아니 두 개만 답해.”
아무렴,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된다면 무지의 은폐가 모조리 깨질 터. 그것이 내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상당량의 진실은 포기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 사실이 나를 집에 보내 주는 것도 아니잖는가.
「……?」
“나 집에 갈 수 있어, 없어?”
하므로 이 소년이 나를 어떻게 불러왔는지, 그에 쓰인 것이 정말 범죄자들의 육신인지, 왜 하필 나였는지, 내가 ‘악마기사’의 설정을 짤 건 어떻게 알고 그에 맞는 형상을 취했는지. 그딴 시시콜콜한 사항 따윈 전부 버리기로 했다.
“호기심 따위에 집 갈 기회를 팔진 않아. 난 내게 가장 필요한 것만 들으면 돼. 그러니까 말해, 집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
돌아갈 수만 있다면, 평생 갈 호기심 같은 건 얼마든지 품고 갈 수 있었다.
내 시선에 소년이 입술을 깨물다, 숨을 뱉듯 뇌까렸다.
「가, 갈 수 있어요.」
세계 한구석이 우드득 무너져 내렸다. 한 번에 많이 무너져서 그런가, 자잘하게 금 가던 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지금의 약속이 이행되는 게 작은 붕괴를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는 방법이 뭐야?”
「그, 그건…….」
다만 이 백색이 전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최소한 좋은 꼴은 안 나겠지.
하여 나는 가장 염원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내 마지막 물음이 될 것이다.
「죽음을, 그러니까 지금 쓰시고 계신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십 년간 타락하지 않으시면… 본래 세계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쩌어억!
거대한 빙산이 무너져 내리듯, 세계의 한 뭉텅이가 또다시 함몰했다. 정작 들려온 답은 생각보다 뜻밖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근데 그런 조건을 두고 왜 나한텐 입 다문 거야?”
죽음. 타락. 문학 속 악마들의 행동을 보면 새삼스럽지도 않다. 또한 내가 모르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것이 좀 더 대처하기 편한 조건이었다.
함에도 소년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난 또 사람들 엄청 죽여서 제물 바쳐야 하는 거면 어쩌지 싶었는데, 이 정도면 차라리 말하고 협조를 구하는 쪽이 더 낫지 않아?
물론 기간이 좀 길긴 하지만. 조금 많이 길긴 하지만.
「그건…….」
“아, 아니다. 말해 줬을 때 쟤한테 유리해지는 거면 굳이 말하지 마.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니까.”
사실 엄청나게 궁금하지만 집에 가고 싶단 욕구만큼은 못하다.
나는 방금 들은 조건을 대신 곱씹었다. 육신이 죽거나, 십 년을 버티거나. 누구 바치라는 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이만하면 됐어. 다 들었어.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
[이런, 안타까워라.]
그러나 내 바람과 다르게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악마가 히죽 웃었다.
[일단, 우선순위를 구분하는 영리함은 칭찬할게, 그레트헨. 정확한 상황도 모르면서 무지의 은폐를 유지하려는 그 기민함은 분명 똑똑한 자의 그것이니까.]
바스락. 덩달아 그녀의 팔을 옥죄던 사슬에 균열이 일었다. 부서진 세계의 저편, 거대한 불꽃의 손이 세계의 벽을 붙잡았다.
[하나 ‘약속’이란 게 그렇게 허투루 이뤄지진 않거든. 약속을 체결할 당시, 약속의 중재자였던 내가 ‘진실’의 개념을 ‘형편에 대한 모든 사실’로 정의했던 이상, 그건 그대로 이행되어야만 해.]
“뭐?”
[네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끝낼 수는 없다 이거지.]
나는 순간적으로 상대의 말을 이해 못 해, 머리를 좀 더 굴려야만 했다. 형편에 대한 모든 사실. 그건 좀 더 풀어 말해서 우리가 이 꼴이 된 모든 이야기를 뜻하는 듯했다.
“너…….”
「죄, 죄송…….」
반사적으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하나 소년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소년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개…….”
나는 본능적으로 가슴이 시키는 발언을 하려다가, 그대로 삼켰다. 아이는 그 잠깐 사이에 애처로울만치 덜덜 떨고 있다. 그것이 내 마지막 이성 줄이었다.
“…그러니까, 다 들어야 한다?”
[그렇지.]
“…나는 이걸로 족하는데?”
[그럼 약속할 당시 정확하게 문구를 작성하지 그랬어.]
다만 그 이성 줄을 앞에 선 악마가 살살 긁었다.
[난 약속의 중재자로서, 지금의 교환을 합당하다 판단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모든 진실을 들어야만 해, 네가 바라지 않더라도.]
잘 모르는 아이를 속여 넘겨서 이득을 취하는 어른.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개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