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납득할 수 있는 (7)
발목까지 들이찬 핏물을 헤치며, 나는 손가락을 쥐락 펴락 해 보았다.
현실이 아니라서 그런가, 감각이 썩 선명하진 않았다. 마치 추운 겨울날에 방치된 손 같다. 단지 춥다는 감각이 사라졌을 뿐인.
“…그게 진짜 모습입니까?”
다만 신체로부터 느껴지는 자극이 줄어들어서인가. 혹은 날 이따위 진창에 처박은 범인들이 코앞에 있어서인가.
내 안쪽은 평소보다 더욱 거칠게 들끓었다. 마치 촉매가 내던져진 시약 같았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가, 끊어진 실처럼 잘렸다. 좋지 않아. 난 경험을 토대로 이것이 ‘좋지 않은’ 상황임을 깨달았다.
“묻잖아요, 그게 진짜 모습이냐고.”
그렇지만, 안다고 고쳐지면 그게 사람인가?
[글쎄. 그게 중요해?]
키득. 산양 뼈로 인해 얼굴선만 간신히 보이는 존재가 웃었다. 스리피스 정장과 그 위에 걸치는 두루마기가 어째 낯익었다.
고향의 향수라도 느껴 보라는 고도의 엿 먹이기인가?
[뭐, 모처럼의 질문이니까 답은 해 줄까. 응, 진짜 모습이야. 타고나는 외향이나 후천적으로 생기는 결함으로 본질을 흐리는 육체와 달리, 심상체는 ‘스스로가 정의하는 본질’을 고스란히 투영하거든. 가릴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게. 즉, 이 모습이야말로 네가 원하는 ‘진짜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내 심정이 어찌 되었든, 그녀는. 그러니까 아마 악마일 그것은 한국에서 1, 2년 전 유행했던 차림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소년의 옆자리부터 시작해 나를 중심으로 타원을 그리는 걸음이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나를 왼편에서 지나치는 이가 샐쭉 웃었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말이야. 너도 참 많이 섞였구나.]
거리를 분명 두었던 이의 몸이 순간 내 뒤에 섰다.
[아니면, 지금의 너와 과거의 너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니?]
그렇지만 그 접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견제에 들어가기엔, 이어진 말이 너무 무거웠다.
내 시선이 황망히 바닥으로 향했다. 핏물의 표면에는 어렴풋하게나마 내 얼굴이 비치고 있다.
[불쌍한 그레트헨.]
‘악마기사’의 얼굴이었다. 머리가 새까매지고 턱과 뺨을 덮는 화상 자국이 생겼을 뿐인 악마기사의 얼굴.
[잊은 것이든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든, 참 가엾기 짝이 없지.]
‘나’의 특징을 가졌지만 여전히 내것이 아닌 것.
[본래라면 이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는 악마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며 주먹을 꽈악 쥐었다. 이미 입술을 파고든 이는 핏물을 주륵 떨어트리고 있다.
[그보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거야? 탐식이 진격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
그리고 또각. 악마의 걸음이 나와 소년의 중간쯤에서 멈췄다. 정면에서 살짝 비껴 나도록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욕 나와서, 나는 순간적으로 목에 힘을 주었다.
「죄송해요…….」
그러나 내 말은 토해지지 못했다. 소년이 다시 발언했다.
「정말… 죄송해요…….」
당연하게도, 내 주목은 바로 그쪽에 쏠렸다. 이곳에 와서 겪은 온갖 고초가 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뭐가……!”
뭐가 죄송해. 뭐가 미안해. 사과해야 하는 것의 본질이 뭔지는 알고 그렇게 말해? 내가 겪은 일들, 내가 지고 있는 짐. 그 모든 걸 이해하고 공감한 채로 사과하려는 게 맞냐고.
「제가, 제가…….」
본래라면 이렇게 아플 이유 따윈 없었다. 1년 넘도록 아버지, 어머니,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살 일도 없었다. 내 얼굴을 잊을 필요도 없었고, 내가 누리던 모든 평화를 목메어 부르짖을 일도 없었다.
사람 죽이는 것도,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워하는 심정 또한 그렇다. 더한 범죄까지 손 뻗으며 발버둥 치는 것도, 그렇게 쌓여 가는 죄책감 앞에서 울부짖는 것도 본래 내 몫이 아니었다. 전부 내가 겪을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짊어질 짐은 이곳에 단 하나도 없다.
원래라면, 원래라면 그랬다.
「제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데 너 때문에.
「당신을 불러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 하나 때문에.
「죄송,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 하나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내가, 네가…….
“왜.”
네가 아니었으면 난 잘 살았을 텐데.
“왜 어려.”
너만 없었다면 지금도 행복하게 있었을 텐데.
“왜 화도 못 내게 어리냐고…….”
그랬는데.
「…아, 아니에요. 저는, 전…….」
“이렇게 어리면…….”
「그게, 그게 아니라, 아…….」
내고 싶었던 화가 있었다. 윽박지르고 고함치며 토해 내고 싶던 울분이 있었다. 이곳까지 오며 겪은 역경과 고난이 참으로 짙어서, 원치 않아도 해묵어 버린 원한이 많았다.
“이렇게 어리면, 난 어디에 화를 내야 하는데…….”
그러나 조그만 소년의 앞에서, 나는 차마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시발, 망할 꼬맹이는 키도 조막만 해서 내 어깨에 겨우 정수리가 닿았다. 그만큼 작았다. 너무너무 작았다. 심상체의 모습이 본질이라는데, 시발 이 새끼는 스스로를 소년으로 정의하는 애였단 말이다.
「화내셔도 돼요! 내셔도 돼요! 제가, 제가 다 잘못한 거니까… 제가 전부 잘못한 거 맞으니까……!!」
그래서, 염병할, 그렇게 어려서.
나는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그럴 수 없었다.
「참지 마세요, 제발.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당신을 괴롭히던 모든 건 전부 제 탓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핏물을 헤쳐 나가, 소년의 앞에 섰다. 소년은 키만 작은 게 아니었다. 얼굴도 작았고, 손도 작았고, 팔다리도 가늘었다.
추정한 바로는 분명 기사의 아이였는데, 입학 시험에서 일등 할 만큼 재능 넘치는 아이였는데도 그랬다. 어렸다. 어린 애였다.
「제가, 제가 나쁜 놈 맞으니까……!!」
그저 어린 아이였다…….
「…용서하지 마세요. 제발, 절 용서하지 마세요. 제발…….」
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전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요…….」 아이의 얼굴이 닿은 가슴팍이 곧장 축축해졌다. 파들파들 떠는 몸은 너무 가늘고 작았다.
「제발 용서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내가 겪고 만 불행의 출발점은 이다지도 비루했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나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좆같지.” 너무 가혹한 세상이었다.
[…장난해?]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 옆에서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난하냐고!] 피에 잠긴 백색 세계가 순간적으로 요동쳤다.
[지금까지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으면서 고작 애새끼란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해? 너 진짜 호구 새끼냐?]
째각. 째각. 거미줄처럼 금이 가기 시작한 백색을 등진 채 악마가 입술을 비틀었다. 산양 뼈의 안와 사이로 보이는 건 악마의 얼굴마저 가리는 어둠이다. 진짜 눈 대신 장식 단추처럼 매달린 붉은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반 죽인다며, 반 죽여 버리겠다며.]
무엇을 원료로 그러는지는 글쎄.
나는 내 분노를 부추기는 산양 뼈 앞에서 아이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저것이 소리내는 순간부터 덜그럭거리던 아이가 우는 소리조차 죽인 채 숨을 아꼈다. 어른에게 학대당한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모습 하나 때문에 풀릴 만큼 얕은 화였어? 아니잖아. 난 알아. 네가 얼만큼 화나 있는지, 네가 얼만큼 분노하는지 알고 있어.]
“…….”
[당장 저 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그 몸에 칼을 몇 번이고 찔러도 풀리지 않을 울분이 안에 있다는 걸 안다고.]
히끅. 품속의 소년이 몸을 또 한 번 떨었다. 떨어지고 싶어 하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렇지만 아이는 몸을 한차례 떨고는 순응하듯 몸에서 힘을 빼냈다.
「그러셔도 돼요.」
작은 중얼거림이 귀에 박혔다.
[참지 마. 안 참아도 돼. 네겐 그만한 자격이 있어. 암, 있고말고! 너한테 자격이 없다면 누구에게 있을까!]
「그걸로 화가 풀리신다면.」
[어차피 여긴 심상이야. 목이 졸려도 안 죽어. 칼 박아도 안 죽고. 그러니 참지 마. 참을 필요 없어!]
「전 괜찮아요.」
[아무도 널 비난하지 못해! 아무도!]
아.
정말로.
[그러니 그레트헨, 인내하지─]
너무나도 가혹한 세상이었다.
“아가리 여물어, 개시발놈아. 진짜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내 앞에서 가스라이팅 짓을 존나 처하네, 이 씹새끼가.”
나는 내 등에 있던 투헨더를 뽑아 던졌다. 원래부터 있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칼 던지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자연적으로 손에 칼이 잡히고, 그대로 날아갔다.
[…날 공격하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양심을 팔아 치울 때 개념도 같이 팔았나. 원인 제공은 본인이 해 놓고서 아이한테 덤터기 존나 씌우는 주제에 왜 자기한테는 칼이 안 날아올 거라 생각하지? 내가 전후 관계 이해도 못 할 상등신으로 보이냐?”
그와 함께 겨우 억누르던 화도 다시 치밀었다.
내가 지금 안 빡쳐서 안 화내는 줄 아나? 용서할 수도, 비난할 수 없는 처지의 비참함이 안 억울한 줄 알아?
나도 인간이다. 이런 일을 왜 당해야 하는지, 왜 정당히 분노할 기회조차 잃어버려야 하는지 나도 싫고 밉고 짜증난단 말이다.
“이 애가 잘못한 건 맞아. 맞는데, 그게 그렇다고 전부 얘 탓이 되는 건 아니지. 얘가 재미로 날 불렀어? 얘가 세상 사는 게 따분해서 누구 하나 엿 되라고 날 불렀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휘둘려 마구 화내는 게 옳은가? 내가 겪은 불행이 눈 가리고 무작위로 사람을 베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나?
“아니잖아. 네놈 새끼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벌어질 일도 아니었잖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아니었다.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난, 나는 나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오히려 그쪽에게 묻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기분 좋아?”
[…뭐?]
“어린아이 몸뚱이 하나 차지하겠다고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기생한 뒤에는 몸 내놓으라고 괴롭히고, 남에겐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면서 살면 기분 좋냐고.”
또한 이 작은 아이에게 모든 걸 덧씌운 채 그저 원망만 하는 건 전혀 떳떳한 일이 아니다. 나이 삼십 이상 처먹고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상등신 같은 삶을 살라고 하면, 나는 그냥 수치스러워서 냅다 죽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움츠리고 있는 아이를 내 등 뒤로 돌렸다.
왜 나였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지, 이런 방법뿐이 없었는지 듣고 화내고 혼내는 건 저 씹새끼를 뒈지게 팬 후에도 충분했다.
업보에 처맞아야 할 건 이 아이뿐 아니라 저 새끼도 동일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용서할 거야?]
“아니. 이게 용서될 죄는 아니지. 그렇지만 아이에게 항변할 기회 하나 안 주는 사람이 되진 않을 거다, 나는.”
[하, 정말이지 놀랍다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심상 속이라서 목 졸려도 안 죽고 칼 박혀도 사망하지 않는댔나. 그건 조금 아쉽다. 저 새끼 지금 목 따면 자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였는데.
[하긴 그래. 내가 당신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쉽게 넘어오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예상했어.]
아, 아니다. 내가 이기리란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나는 최악의 순간에도 현상 유지일 것에 안도하며 마음속으로 검을 그려 보았다.
왜, 만화나 소설 같은 걸 보면 심상 세계에 들어갔을 때 상상만으로 무언갈 만들고 없애고 하지 않던가. 방금 투헨더도 어째 내가 상상하니까 등에서 잡힌 기분이었고.
[납득은 여전히 안 되지만 말이지…….]
해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시도해 본 일이었는데… 다행히 그게 됐다. 스르렁. 날카롭게 날이 갈린 롱소드가 손에 잡혔다.
[다만 그레트헨, 내가 괜히 네게 진실을 허락했을까?]
「…아, 안 돼요!」
하나 내가 어떤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충격이 왔다. 바닥을 가득 메운 핏물 덕에 충격의 여파는 더욱 커졌다.
미끌. 미는 힘에 의해 내 몸이 그대로 엎어졌다.
“흐갹.”
안 넘어지려고 발 몇 번 내디뎠지만 소용없더라. 나는 결국 바닥에 대자로 엎어졌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핏물이 몸에 묻지 않은 건 다행인데, 코가 얼얼한 기분이다.
“왜 미는─!”
나는 순간적으로 분노도 잊고 코를 붙잡은 채 고개를 쳐들었다. 채앵! 섬뜩한 금속음이 내 앞에서 터져 나왔다.
「나갈 생각 하지 마!」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계약은……!」
[네가 먼저 어겼지.]
악마와 소년이 검을 맞대고 있었다. 내 눈에조차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고 거칠게.
[입 다무는 걸 계약에 넣자고 한 거 너였어. 우리 중 그 규칙을 먼저 깬 것 또한 너지.]
「……!」
[그런 마당에 내가 왜 참아야 하지?]
하나, 동작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을지언정 승기를 잡고 있는 쪽은 명백했다.
내가 소년보다 머리 하나 반은 크듯, 악마도 소년보다 머리 하나만큼 컸다. 체격부터가 한쪽에게 유리했단 소리다.
[꼬마야, 넌 이제 날 못 막는단다.]
거기에, 느껴지는 힘조차도 악마가 우세했다. 아니, 우세하다 정도가 아니었다. 격이 달랐다.
쿠웅! 백색 세계가 기어이 무너졌다. 그 뒤로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이고, 또 거대한 사슬이다.
「…아직, 아니야.」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슬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사슬에 묶인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손이었다. 불꽃을 모으고 모아 만든 거대한 손.
「아직 아니라고.」
촤르르륵!
그에 맞춰 소년도 악마에게 사슬을 내걸었다. 못 피할 만한 궤적이 아니었음에도 악마는 강제된 것처럼 손을 내밀어, 그대로 사슬에 얽매였다.
[쯧.]
악마가 간신히 보이는 입술을 삐뚜름히 기울였다. 그것은 이 상황에 대한 짜증 같기도, 혹은 조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진실이 전달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약속’을 이행하렴, 꼬마.]
저 새끼들, 나를 잊고 있다.
나는 욱한 마음으로 악마에게 칼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