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납득할 수 있는 (6)
화르륵.
나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조용히 검을 뽑았다. 까만 마기와 호박색 불티가 뒤섞여 마치 장작불처럼 보이는 검은 여전히 타오르는 중이다.
털썩.
그사이, 뽑혀 나간 검에 의해 완전히 널브러진 자가 질퍽한 소리를 내었다. 진흙 사이에 누운 시신은 더럽고, 그럼에도 희어서 이질적이다.
심장 한편에서 피어난 붉음이 마치 꽃처럼 보였다.
‘인간이 만든 것치고, 제법 괜찮은 검이야.’
아, 개빡세다, 진짜.
나는 다신 기사랑 안 싸울 것을 다짐하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방출한─방출된?─마기로 인해 전장은 잠시 일지 정지 된 채다.
갑자기 멈춰 선 이유는 글쎄. 며칠 전 내가 저 숲에서 시도한 행위와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격이 더 높은 악마가 등장한 걸 깨닫고 쫄았다 이거지.
실제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도 추측을 뒷받침했다. 내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압도된 약자의 것이다.
일부는 발을 주춤주춤 뒤로 빼는 게, 도망갈지 말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불태워 줄까?’
하나 도주 각을 재는 것과 실제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나와 저 뒤에 우뚝 서 있는 괴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우리의 눈치만 볼 뿐, 섣불리 발을 떼려 들지는 않고 있다.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야 그만두었지만, 전장 자체에서는 아직 안 빠지고 있단 소리다.
즉, 저것들을 이 전장에서 배제하려면 추가로 손을 더 써야 한다. 저것들을 내쫓기 위해 힘을 얼마나 더 써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 벌레 새끼가 군세를 물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어 줄까?’
기실, 다 쫓아도 문제다.
선악을 떠나, 오롯이 나 자신의 손익만을 고려하면 저것들은 완전히 떠나기보다 조금은 남아 주는 게 좋았다. 이 도시가 계속 위험에 빠져 있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만에 하나 진짜 악마기사가 입 닦고 모른 척할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세상엔 물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라는 하는 경우가 정말로 많다.
‘허락한다면, 이 판을 방해하는 잡것들을 전부 지워 줄 수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나서면 해결할 수 있는, 그러나 도시에겐 조금 위협적인, 그러면서도 당장 쳐들어오진 않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협상의 유리함이 주어지는 그런 상황이 되도록, 악마가 조금은 남아 있어 주길 바란다.
너무 이기적인 소망임은 알지만, 그래도.
「그건, 계약 위반이야.」
‘오, 대체 어디가 위반이지?’
「지금, 힘을 쓰려고…….」
‘공짜로, 대가 없이 써 준다는 게 왜? 애초에 이렇게 나올 거면 방금 개입한 것도 막아섰어야지.’
「…그것과 이건 달라.」
‘글세, 난 전혀 다른 점을 모르겠는데. 선의로 승리를 가져다주고, 선의로 잡것들을 치워 주는 게 나쁜 일인가?’
「네가 선의로 움직이는 걸 믿느니, 저분이 웃으며 사람 죽이는 사람이란 걸 믿겠어!」
그렇지만 역시 어렵겠지? 그래. 그런 게 어떻게 되겠어.
‘아,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래, 그렇지. 맞긴 해, 맞는 말이야. 내가 선의로 움직인다니,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돌아가기만 하면, 그건 세상이 아닌데…….
‘그런데, 그래서 거절할 거야? 네 도시를 위협할 수 있는 저 잡것들을 내가 처리해 준다는데. 대가 없이 모조리 불살라 주겠다는데. 그래서 거절할 거냐고.’
「……!」
‘그러고 싶지 않지?’
나는 피로 점철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검에 베이고 채찍에 터지고 벌레에 갉아먹힌 온몸이 그제야 욱신거려 왔다. 조절된 통각 수치에도 이 정도인데, 실제론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애송아, 다물렴. 너로 인해 휘말린 사람과 사랑하는 고향 중에서 후자를 택한 주제에, 이제와 저 사람 걱정하는 척 말고.’
「……!」
대신, 나는 손틈 사이로 막 떠오르는 글자를 보았다.
[ 라 텔을 꺼 내 ]
[ 주 변좀 치우 자 ]
[ 너도 대 화 를 방 해받 고 싶 진 않잖 아¿ ]
아니… 그걸 글자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그건 목소리처럼 뇌를 파고들었고, 문자처럼 귀에 새겨졌다.
[ 저앞에 뚱 돼 지까지 는 안 되겠 지 만 ]
[ 주 변의 잡 것들 을 전부 불 사르 면 ]
[ 네 가 진 실을 들 을시 간 정도 는벌 수 있 을 거야 ]
그 기묘한 현상을 두고 새삼스럽게 놀라진 않았다. 암, 이 몸뚱이에 나 이외의 존재가 살고 있다는 걸 안 지가 언젠데 이걸 가지고 놀랄까.
거기에… 방금 전, 이 주홍색 검이 내 손으로 빨려 들어온 점이나 내 뜻을 무시하고 갑자기 방출된 마기를 곱씹거든, 지금 말하는 존재의 정체는 뚜렷하다.
[ 너 도이 렇 게까 지 투 자했 는데 못 듣 고 끝나 는걸 바 라 진않 지?]
진실을 드디어 내걸어서인가, 방관만 하던 시발 놈들이 드디어 개입하기 시작했다.
[ 걱 정마 ]
[ 도시 는 안 건드 려 ]
다만 빡치는 건 (웃음)이 뒤에 붙을 것만 같은 저 말투인데.
나는 그로 하여금 시스템창을 통해 말하던 자와 지금 떠드는 자가 별개의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나아가, 방정함과 방정맞음을 토대로 진짜 악마기사와 악마도 구분했다.
[ 뭐 해? ]
[ 어 서꺼 내 ]
[ 내가 보 조할 게 ]
사과라도 한 시스템창이 악마일 것 같진 않으니, 분명 예의 토렴해 먹은 이쪽이 악마겠지.
“아, 혀가 있긴 있으셨나 봐요. 대화를 그렇게나 피하시기에 저는 혀도 없고 귀도 없고 말머리도 탑재되지 않은 개밥버러지신 줄 알았는데.”
[ ……. ]
근데 따지고 보면 진짜 악마기사가 나를 여기로 소환한 이유는 이 악마 때문이잖아. 그렇다면 얘가 결국 이 엿 같은 상황의 최대 원흉 아니야? 시발롬이 진짜 글자로 처웃고 지랄이네.
나는 드디어 마주한 원수의 파편 앞에서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글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 그 럼 나가 버릴 까? ]
“수틀리면 협박하시는 게,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참 투명하게도 보입니다. 또, 꺼내라고 할 거면 꺼낼 대상이 뭔지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라텔이라니, 그렇게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아니면 그래, 남의 몸에 기생하며 도태 찐따처럼 살다 보니 자기만 아는 단어를 남발하게 됐나요?”
[ 너말 을 참예 쁘게 하 네 ]
“칭찬 감사합니다. 그쪽은 말 참 더럽게 못하시네요. 띄어쓰기 하나 못 하시는 걸 보면.”
오랜만에 아가리를 좀 놀리니까 속이 후련한 기분도 들고, 여전히 화가 치미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쓴소리 좀 들었다고 또 침묵하는 문자열을 보며 저 새끼한테 할 말을 정리했다. 얼굴 마주하는 순간 토해 내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 네 투헨 더 ]
[ 꺼내 ]
정말로 많은데, 다 토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만 해도 속이 드글드글 끓는데, 저것의 면상을 직접적으로 보면 더 많이 빡칠 테니까.
[ 검을 휘 두르 면 서 마 기를 퍼 트리 는 거 야 ]
그치만 지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악마나 진짜 악마기사가 엿 같은 건 여전하지만,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
[ 명심 해 ]
나는 호박색 검을 땅에 거꾸로 꽃고, 허공에 빈손을 뻗었다. 투헨더가 손가락 사이 빈 공간에 생성되었다. 근 일 년을 잡아 오며 익숙해진 그립이 곧 손바닥 안을 꽉 채웠다.
화르륵. 내 몸에 붙어 있던 검은 불꽃이 투헨더로 흘러 들어갔다.
[ 마기 가 검을 앞 서서도 ]
[ 검이 마 기 보다 빨라서 도 안 돼 ]
[ 검 과 마 기는 동시 에 휘 둘러 져야해 ]
귀를 타고 들어오는 낱말은 다소 추상적인 구석이 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 퍼 진 마기 만 큼 불 태워 질 거야 ]
그렇지만 뒷말은 확실히 알겠다. 범위 지정도 가능하다 이거지? 좋아. 그건 꽤 마음에 든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농도는?”
[ 네가숲 에 서 썼던 것 의세 배 만큼. ]
“좋아.”
가진 마기 다 털면 대충 될 것 같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 * *
갈증에 미쳐 악마들의 피를 마시려다 죽고, 굶주림을 못 참아 피아 가리지 않은 채 주변을 물어뜯다 스스로도 잡아먹히고.
온몸을 뒤덮은 파리와 나방, 구더기를 내쫓다가 내장이 파먹힌 채로 쓰러지는. 때로는 그것들이 가져온 역병에 몸을 벅벅 긁다가 썩어 문드러지는.
악마에게 몸이 찢기거나 녹거나 잘리는 건 차라리 호상에 속할 광기의 현장 속에서 귄터는 ‘쨍강!’ 따위의 금속음을 들었다.
배신자와 대적하던 이의 칼이 깨지는 것이 그의 시야에 우연처럼 박혀 들었다.
“아, 안─”
달그락
목격 자체는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 바쁜 현장에서 하필 그 순간에, 그 너머의 장면을 보게 된 건 역시 우연의 장난이었을 테다.
하나 배신자가 내버리고 간 호박의 검이 발에 걸린 건 필연이었으며, 악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베른슈타인을 집어 던질 수 있던 것은 분명 운명이었다.
“아탸!!”
본래라면 성벽 3, 4m쯤 앞에 떨어졌을 검이 검은 줄에 낚여 전하고자 했던 자리에 빨려 들어갔다.
“소성주님!”
카르르륵!
다만 검이 그 자리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찰나. 그 찰나간 귄터는 모든 걸 도외시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등진 악마가 그에게 발톱을 돌렸다. 그랬어야 했다.
쿠웅.
순간적으로 공기의 무게가 달라지고, 목에 닿았어야 했던 발톱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춰 섰다.
[도망쳐도망쳐도망쳐.]
캬아아악!
[분노가왔다분노가왔다분노가.]
그건 비단 그 한 마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성벽을 반쯤 함락시킨 악마들이 제각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물러난다!”
병사들이 얼떨떨해하면서도 창질을 했으나, 저항하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것들은 겁먹은 쥐 떼처럼 성벽 아래로 몸을 내던지며 바닥을 기었다.
“아…….”
여명의 한자락을 담은 검이 순간 밤으로 물들고, 다시 여명의 때로 돌아간 건 그 때였다.
칠흑색 불티가 마치 재처럼 휘날리고, 눈이 아릴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주홍빛 검신이 마치 횃불처럼 타올랐다. 배신자의 심장을 꿰뚫는 불꽃이었다.
“호박기사다…….”
“앰버 경이야…….”
“앰버 경이 돌아오셨어……!”
그 선명한 빛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시선을 모았다. 악마들이 물러가는 이상 그 행위가 멈춰질 이유도 없었다.
주홍빛 불꽃을 기억하는 자들이 눈물 흘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신을 노래했다.
“아, 악마가… 악마인데…….”
“신이시여, 저희는, 저희는…….”
신의 힘을 받은 사제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들은 그들이 목격한 모순의 절정을 두고 고뇌하면서도 동시에 찾아온 희망을 망연히 살폈다.
“신이시여, 저희에게 왜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악마에게 한쪽 팔을 뜯긴 주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중얼거렸다.
“주교님.”
“…소성주님.”
“사람들을…….”
귄터는 말을 잇다 말고 성벽 위를 일별했다. 단련된 병사들은 1/3로 줄었고, 그마저도 부상병이 태반이니.
“사람들을 치료해 주십시오.”
“…가용 가능한 신성력의 양이 많지 않습니다.”
저들을 전부 치료한다면 사제들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다른 말로는, 그들이 회복되기 전에 악마들과 대적할 일이 생기면 신의 힘을 빌릴 수 없다.
“…저는, 저것이 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밖에 서 있는 자를 견제할 수 없다.
“그것은 앰버 경이나 앰버 경의 자제를 닮아서입니까?”
“…아뇨. 그냥, 저는 그냥.”
“소성주님…….”
“…알아요. 젠장, 저도 막연한 믿음으로 결정 내리면 안 되는 거 압니다. 아는데, 이게 도박이라는 건 아는데… 병사들 안 살린다고 저거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만 견제한다고 의미가 있을까.
“지금 힘 아낀다고 저거 이길 수 있습니까, 주교님?”
귄터는 소리 없이 증발하는 세상의 일부를 보며 주교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죽어라 견뎌 내기만 했던 악의 군대가 잿가루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소멸하는 것이 짧은 순간에도 눈에 잘만 들어왔다.
검짓 한 번에 이뤄진 광경이었다.
“감정적으로 내리는 판단 아닙니다. 생각하고 내린 판단입니다. 그러니까 주교님, 그냥… 병사들 살립시다.”
“…예.”
귄터는 주교가 허탈하게 웃는 것을 보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성벽 위를 가다듬을 차례였다.
“어, 어!”
“……?!”
문득, 뼈 같은 것이 성벽 바깥에서 솟구쳤다.
* * *
나는 투헨더가 녹아 하얀 점액질이 되고, 그것이 솟구치며 나를 보호하는 고치가 되는 걸 지켜보며 눈을 감았다.
만에 하나 들어올 공격은 이것으로 온전히 차단되었으니─악마 새끼가 지껄인 말이 진짜라면─이제 제대로 대화할 시간이었다.
시야가 칠흑에 휘감기고, 추락이 시작되었다.
[안녕, 그레트헨.]
「…….」
그리고 그 추락이 끝났을 때, 나는 드디어 나를 이곳에 끌고 온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제대로 얼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죄송, 죄송합니다.」
산양 머리뼈를 가면처럼 쓴 자와 눈물 가득한 회색 머리칼의 소년이 붉고 흰 세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