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납득할 수 있는 (5)
『아무튼. 들었죠, 73번? 축하합니다. 실패작이긴 하지만 폐기 처분도, 추가 실험도 면했네요.』
『…….』
『왜 기쁜 얼굴이 아니죠?』
『나는 실패작이 아니다.』
『아하. 자존심이 상했습니까?』
『나는……!』
『당신은 실패작이 맞습니다, 73번. 마법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존재의 피를 받았음에도 마법 재능은 바닥, 마기를 제거했다곤 하나 낼 수 있는 출력도 인간의 한계 수준. 결과적으로 같은 악마에게도 공격받는 체질까지… 아, 애초에 악마 자체가 아니니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인간인 것도 아니지만.』
『……!』
『주제를 파악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의 원본 되는 자는 분명 천상의 반역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천상의 반역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난, 나는…….』
『하늘을 노리고 싶다면, 그 전에 그에 맞는 격부터 갖추고 오세요. 뭐, 안 되겠지만.』
『…….』
* * *
에메랄드는, 계명啓明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반역. 본인의 입으로 내뱉고 본인이 비웃는 단어는 곧장 검날에 잘려 나갔다. 세상 모두가 조소해도 그녀만큼은 조소해선 안 될 목표기에 그러했다.
한 번의 순응은 패배가 아니나 한 번의 체념은 굴종의 신호탄이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로 그녀의 원천 되는 자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 그러시군요.”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의 상대를 보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발바닥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두꺼운, 동시에 그녀의 장기인 유연성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얇은 가죽 신이 자글자글 주름을 일으켰다.
쾅!
뜀박질 한 번에 주위 공기가 으스러지고 그 파편을 흩뿌렸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주변으로 비산하는 건 깎여 나간 마력의 잔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마력을 응집시킬 수 있고, 그것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 검을 맞대야만 나올 수 있는 현상이었다.
녹과 흑의 빛가루가 보석의 잔해처럼 찬란하게 흩뿌려졌다.
촤악!
하나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계명은 자신이 가진 바를 십분 이용했다.
채찍. 1.5m 어림으로 잘린 채찍이 주위에서 막 솟구치던 벌레의 몸뚱이를 터트리고, 그 잔해로 상대의 시야를 막았다.
그 대가로 그녀의 흰 옷도 더러워졌으나 감수했다. 구름 위의 고고함을 끝까지 유지하기엔 그녀는 너무 약했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현실이 그러했다. ‘이따위 대우에도 악마에게 붙은 이유가 뭡니까.’ 그녀가 강했다면 듣지 않았을 말부터가 그녀의 처지를 증명했다.
그녀는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큿……!”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의 배움이 얕고 검이 몽매하다는 것. 아둔한 자들이나 적당한 실력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했겠지만, 계명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상대의 상체를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상대가 다급히 검 면으로 레이피어의 한 점을 막아섰으나, 그녀는 도리어 힘을 강하게 넣었다.
어차피 그녀의 레이피어, 금단은 부러지지 않는다.
호수 밑을 기는 카인이 비늘을 제공하고, 깃 없는 새 하와가 차가운 불로 주조했으며, 하얀 숨을 내쉬는 아담이 담금질하여 아벨의 공양으로 완성된 검이 바로 이것이었으므로.
하니 계명은 자신의 검이 꺾이지 않을 것임을 믿고 상대를 밀어냈다. 진흙이라는 번드러운 지반이 검과 사람을 통째로 미끄러트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 비슷한 색의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키잉!
그 광경 속에서 계명은 발에 힘을 주었다. 콱. 구울의 머릿통을 깨부수고 진흙 사이를 파고든 발이 대지를 단단히 디뎠다. 반동으로 인한 미끄러짐은 없었다.
그녀는 그녀와 다르게 좀 더 밀려난 상대를 보고, 상대가 좀 더 밀리는 바람에 분리된 두 개의 검을 보았다.
쾅!
또 한 번 그녀의 몸 전체가 도약했다. 촤아악! 그 잠깐 새에 휘둘러진 채찍은 그녀 주변의 잡것들을 견제하고 또 터트린다.
계명은 비산하는 살점과 핏물 아래서 상대의 검을 또 한 번 두드렸다.
노리는 건 검신 중 가장 약한 부분. 깡! 그녀의 레이피어가 또 한 번 상대의 검과 충돌했다. 그녀가 검을 미끄러트려 자신을 찌를 걸 경계하는지 요리조리 눈 굴리는 게 참 선명히 보였다.
하나 그녀가 왜 그런 위험한 도박수를 감수한단 말인가? 한 번에 죽이지 않으면, 혹은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반격을 당하기가 좋은 공격이 바로 찌르기인데?
기사의 싸움은 적을 한 방에 죽이는 데 있지 않다. 사방이 적인 난전에서는 더욱 그 경향이 도드라진다.
기사는 언제나 스스로를 지키며 싸워야 한다. 살아남는 것이 더 많은 적을 죽일 수 있도록 해 주기에.
“그대.”
또한 시간은 그녀의 편이었다. 상대는 조금도 모르는 눈치지만.
“슬슬 숨 쉬기 힘들지 않나?”
“……?”
“복부 어딘가가 아파 오진 않고?”
이 환경은 그녀에게나 상대에게나 평등하게 적대적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좀 더 위험한 처지의 사람을 고르라면, 계명은 망설임 없이 상대를 고를 것이다.
“분노를 품은 이상 그대에게 기아와 갈증의 저주가 내려지진 않겠지. 하지만 역병과 벌레는 다르다.”
왜냐면, 이곳은 벌레가 참으로 가득하고, 상대에겐 벌레가 파고들기 좋은 상처가 너무도 많았다. 정확힌,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대의 신체에 병이 퍼지는 것이 먼저일지, 벌레가 알을 까고 부화하는 게 먼저일지 궁금하구나.”
등과 어깨, 옆구리, 배, 허벅지, 팔뚝. 근육이 보일 정도로 베이거나 찔린 자리만 꼽아도 이리 많다. 저곳에 오염된 흙과 벌레가 들어간 걸 고려하면 그의 목숨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지금쯤 몇 마리는 폐 따위의 내장 일부를 갉아먹고 있을 것 같은데?
“쿨럭.”
“역시.”
그녀의 예상은 바로 맞아떨어졌다. 얼마 안 가 상대는 입으로 피를 게워 내기 시작했다. 키잉! 그 순간에도 검을 막아 세우고, 다리로 그녀를 걷어차는 모습에는 제법 장한 면이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뻗어 온 공격을 검으로 비껴 내며 채찍을 휘둘렀다. 교묘한 손목 스냅에 의해 파공음을 흘린 채찍이 상대의 옆구리를 터트리려 들었다.
파앙! 상대의 몸으로부터 터져 나온 마기가 그녀의 채찍을 강제로 밀어냈다.
“웩.”
이후, 상대는 또 한 번 피를 뱉었다.
그러나 처음 피를 게워 낼 때와는 표정이 사뭇 달랐다. 악마를 통째로 품고 있는 만큼, 태산처럼 거대한 마기가 그의 몸속에서 물결치는 것이 보였다.
“후, 감사합니다.”
“……?”
“원인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리고 그 물결은 그대로 신체 내부를 돌아다니던 자잘한 생명체들을 으깨 죽였다. 그의 신체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은 채, 오롯이 그 자그만 벌레들만을 터트려 죽였단 거다.
섬뜩할 정도의 장악력이었다.
“통각이 없다는 건 이래서 문제야…….”
“…어떻게?”
다만, 그녀는 인간이 저렇게나 자연스럽게 기운을 지배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뿐 아니라 그녀의 원천 되는 존재, 그녀가 공유하는 근원의 기억을 더듬어도 마찬가지다.
“…분노에게 도움을 받았나.”
마기나 마력 따위에 저런 지배력을 행사하는 건 교만과 분노밖에 없다. 계명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꾹 다물렸다.
“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때의 이펙트 역시 보이지 않아 의심스러웠건만… 하, 그런 거였나.”
“예??”
몸에 마력을 주입하다 보면 강화하는 데 쓰인 마력 중 일부가 바깥으로 흘러 나가기 마련이라. 쓰인 마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통제를 벗어난 기운은 아지랑이처럼 몸에서 피어오른다.
그녀가 그러했고, 그녀가 말로만 전해 들었던 전 기사단장이 그러했듯.
하나 경이로울 정도의 지배력 앞에서는 그마저도 일어나지 않는가 했다. 계명은 그 사실을 두고 헛웃음을 토했다.
“정말로, 비참하구나.”
인간이 저 경지를 이뤘을 리는 없고, 필히 분노가 도왔을 터.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참담해졌다.
어렴풋이 가늠만 하던 목표가 현실이 되어 뼈저리게 다가온 탓이다.
“나는 진정 하늘에 닿을 수 없단 말인가……!”
하늘에 닿고 싶었는데, 그녀의 근본이 외치는 갈망을 따라 어떻게든 근원을 꺾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고 싶었는데.
저것마저 따라 할 수 없는 그녀가 그 지고에 닿을 수 있을까? 그녀는 하늘에 설 수 있나?
“나는……!!”
그녀는 치미는 선망과 질시에 검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근처에서 분노의 기운이 계속 느껴진다라… 어쩌면 계획을 감지하고 망치러 오는 걸지도 모르겠군.』
이 시샘과 투기심이야말로 근원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함을 아나,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너라는 패를 더 남겨 봐야 도시에 피해 입힐 타이밍은 그리 많지 않을 터. 이참에 털어 내는 것도 좋겠지. 분노가 끼어들면 어차피 망할 계책,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힌다면 이쪽에 손해는 없으리라.』
단순히 존재만으로 그녀의 원본이 그녀를 버림 패로 써먹게 만드는 존재가 너무 증오스럽고, 또 부러웠다. 그녀는 저런 힘이 필요했다. 그녀를 오롯이 서게 만들, 그녀의 원천이 일으키는 갈망을 해결해 줄 힘이!
“왜 갑자기 발작을─!”
쾅!
그녀는 당혹감을 표하는 상대를 빠르게 몰아붙였다.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주변의 악마들을 싸그리 정리해 줄지언정 상대하기 까다로운 검기도, 검기를 막으면 순식간에 빈자리를 채워 호시탐탐 등을 노리는 악마들도 방심하면 제법 위협적인 것들이었다.
채챙, 챙!
그러나 그녀는 결국 수석기사를 차지했던 사람이었고, 상대는 그러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뻗어 오는 공격을 두고 팔을 들었다.
콱!
그녀의 옆구리와 팔 사이 허공을 상대의 검이 꿰뚫었다. 다만 상대가 앞으로 발돋움하고, 그녀 또한 그리함으로써 그녀의 옆구리와 팔 사이에 가둬진 건 칼날이 아니라 칼을 든 팔이 되었으니.
그녀는 팔뚝을 옆구리에 붙이는 형식으로 상대의 팔을 구속했다. 상대가 집중적으로 힘을 주어 팔을 빼내려 든다면야 당연히 풀릴 구속이었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쯤 되었을 때는 그녀의 레이피어가 먼저 상대를 찌를 것이다.
스륵!
하나 그녀의 칼이 움직이려던 찰나, 상대의 빈손에 새로운 칼─형태와 길이로 보아 투헨더로 추정되는─이 소환되었다.
아까도 허공에서 칼을 소환하고 집어넣었으므로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나 그건 결정적으로 상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그녀는 레피이어의 폼멜로 검면을 그대로 찍었다. 폼멜에 눌린 검이 기울어지며 상대의 머리를 때렸다. 중간에 검이 끼었을 뿐, 금속에 머리가 찍힌 셈이었다.
“큿.”
상대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팔을 빼냈다. 퍼억! 그 팔에 롱소드가 다시 생겨나기 전 그녀의 발이 상대의 복부를 밀어내듯 걷어찼다.
“흡.”
그녀의 레이피어가 밀려나는 상대를 향해 고속으로 돌진했다. 롱소드를 겨우 소환해 낸 상대가 가까스로 레이피어의 돌진 경로에 롱소드를 끼워 넣었다.
쨍강!
순간 높은 금속음과 함께 레이피어의 한 점에 찔린 롱소드가 뚝, 하고 부러졌다. 반발력에 의해 계명 또한 뒤로 밀리고 손목도 시큰해졌으나 손해는 없었다.
무기를 잃은 기사만큼 좋은 먹잇감도 없었다.
“이제─”
물론 상대가 보여 준바, 아직 투헨더는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 기본 검에 속하는 롱소드조차 통달하지 못한 자가 과연 투헨더를 잘 다룰까? 애초에 투헨더를 잘 다뤘다면 처음부터 롱소드로 그녀를 상대하려 들었을까?
“─끝이구나.”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으므로 그녀의 판단은 정확하다.
발악이 좀 더 이어지든, 아니든 이기는 건 그녀가 될 것이다.
그녀의 검이 상대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아, 진실은 듣고 가야지. 그렇지?’
문득, 상대의 눈이 홍옥처럼 붉어졌다.
“아탸!!”
때마침 성벽 저 멀리서 이쪽으로 던져진 건 불꽃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주홍색 검이다. 허공을 노닐던 마기가 마치 낚싯줄처럼 그것을 낚아챘다.
‘축하해. 대가 없이 내 도움을 받은 자는 얼마 없다고.’
동시에 상대로부터 쏟아져 나온 강대한 마기가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불탄다. 찰나의 환상이 그녀의 본능을 뒤흔들어 1초의 틈을 벌어 주었다.
‘난 해 줄 거 다 해 줬다?’
기어이, 주홍빛 검이 상대의 손아귀에 쥐였다. 지겠구나. 그로 하여금 계명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깨우침을 얻었다. 그녀는 패배할 것이다.
“그대.”
분노의 그릇을 먹어 그 힘을 계승하지도, 그를 통해 반역을 꾀하지도 못한 채로 그녀는 죽을 것이다.
“부디 분노와 함께 파멸하기를.”
그게 너무 비참해.
계명은 눈을 감지 않은 채 까맣고 노란 불꽃을 받아들였다.
심장에 칼날이 내리꽂혔다.
* * *
『두고 봐라, 반드시 하늘이 되어 돌아올 테니!』
그는 반추한 과거를 두고 녹보석이 든 유리관을 다각도로 돌렸다. 점점 깨져 가는 보석은 이제 형태가 무너질 일만 남았다.
“대악마의 피와 인간을 섞어 만든 호문쿨루스의 위력을 알고 싶었는데…….”
이 녹보석은 오직 호문쿨루스의 상태만을 확인시켜 줄 뿐, 그것의 위치나 상황을 알려 주진 않는다. 그것이 참으로 아쉽다. 이왕 죽어 간다면 어떻게, 어떤 반응을 보이며 죽어 가는지라도 알고 싶은데.
“너는 오만한 눈으로 죽고 있니? 아니면 발악하며 죽고 있니?”
어쩌면, 그것의 죽음이 피를 제공한 자의 죽음과 닮았을지도 모르니까.
빠각!
보석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