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납득할 수 있는 (4)
째그락.
유리관 속 녹색 보석에 선명한 금이 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자가 조용히 테이블로 다가왔다.
펄럭.
다만 그때마다 대충 걸친 로브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로브가 흘러내린 바람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목과 빗장, 어깨 부근은 보송한 깃털로 덮여 있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빛바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쓱 쓸어 넘겼다. 자글자글 주름이 진 손은 자세히 보면 자잘한 비늘로 빼곡하다.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손톱이 희미한 광택을 흘렸다.
째그락.
그가 두피를 할퀴지 않게 조심히 머리를 쓰는 동안, 보석에 또 하나의 흠집이 생겨났다. 벽개는 아직 심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계속되거든 보석이 산산조각 나리란 건 명백했다.
“평생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주인 되는 자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망가져 가는 보석을 두고 흥분하는 기색도 보였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보석의 반사광이 닿아 갈색을 이루었다. 나무껍질처럼 바스락거리고 젖은 흙처럼 눅눅한 빛깔이었다.
“하늘을 넘보는 자는 무슨 생각일까?”
그는 보석이 든 유리관을 집어 제 눈높이에 맞도록 올렸다.
“응? 73번아.”
과거 이 보석을 만들던 순간이 잠깐 떠올랐다. 『이건, 실패로군.』 다른 땅의 금성이 이 탑을 비췄던 그때가.
* * *
“감, 히.”
노렸던 건 팔의 절단이나, 최종 성적은 어깨에 3cm가량 파고드는 것이 끝이었다. 점으로써 짓쳐들어오는 마력창과 달리 선으로써 몸을 베는 것이 참격이고, 지금껏 내보이지 않다가 이번에 기습적으로 쓴 것인데 그걸 또 대응하여 대부분 막아 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쓸 걸 그랬나. 나는 기대보다 못한 결과에 혀를 쯧, 차고는 비어 있던 손을 휘둘렀다. 손톱을 따라 튀어나온 마력이 허공을 할퀴다 그대로 채찍에 지워졌다.
분쇄된 마력이 바람에 녹아들었다.
“인간 따위가.”
그러나 그 완벽한─내가 보기엔─방어에도 상대는 불쾌감을 토로했다. 아니다, 분노였다.
나는 지금 셔츠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줄줄 새고 있건만, 본인은 어깨 조금 베였다고 눈에 화를 담은 것이다.
조금만 잘못 다뤄도 깨지는 에메랄드가 그러하듯, 오묘하게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가 벽개를 일으켰다. 거미줄처럼 금 간 단면에는 빛이 꺾이고 반사되어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시린 광채를 발한다.
“영혼을 찢어 저 별 위에 걸어 주지.”
“…오.”
나는 근사하게 표현했을 뿐, 요약하면 ‘처죽여 주마’로 해석되는 말을 두고 눈을 껌뻑였다. 인간이건 인외건 빡치면 다들 말이 단순해지는구나. 쓸데없는 깨달음이었다.
“해 보세요.”
별개로 분노에 휩쓸려 행동마저 단순해지면 안심이지만, 말만 저러고 동작은 이성에 절여져 있으면 좀 곤란하다.
안 그래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상황인데 저쪽이 진심으로 나오며 난도만 올라가면 정말 난처해진단 말이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아끼고 아끼던 마력을 제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마력창 외에 참격도 난사를 하기 시작했단 이야기다.
참고로 이 스킬을 지금껏 참다가 이제 와 쓴 것엔 별 이유 없다. 단지 참격은 원치 않아도 광역기의 형태를 띠고 있고, 이왕 광역기를 쓸 거라면 주변에 쫄몹도 가득할 때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다.
서걱!
암, 내가 저 기사를 상대하는 것과 동시에 쫄몹을 줄여 준다면 그만큼 성벽의 부담은 덜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니 초반에 시간을 질질 끈 건 나름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몸이 너덜너덜해질 줄은 나도 몰랐지만, 그래도.
“같잖은……!”
콰앙쾅!
나는 청록빛 궤적을 피해 몸을 띄웠다. 기사와 기사의 싸움에서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큼지막한 동작이었다.
캬르르륵.
하나 지금은 제대로 된 1대1전이 아니다. 나는 공중제비를 돌며 그녀의 검을 피하고, 발밑의 악마들을 피했다.
본래라면 나를 노렸어야 할 상대도 사위에서 쏟아지는 악마를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악마의 머리를 짓밟고 서는 순간, 검을 내려찍듯 휘둘렀다.
우아한 곡선으로 악마를 벰과 동시에 검을 위로 든 상대가 내 검을 옆으로 비껴 쳐 냈다. 튀어 나간 검기가 상대의 옷깃을 잘라 내고 그 뒤편을 그대로 썰어 버렸다.
“아쉽게……!”
다만 적의 검 자체는 내 검격을 수월히 버텨 냈다. 레이피어는 대체로 내구도가 안 좋다 들었는데, 저쪽 검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내가 아는 상식이 틀려먹은건지 멀쩡해도 더럽게 멀쩡하다.
아니, 되레 내 검이야말로 금이 간 것 같다. 나는 미세하게 날이 나간 롱소드를 보며 아쉽다 말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롱소드가 박살 나면 저치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물론 투헨더도 아직 인벤토리에 남아 있고, 그건 내구도 걱정도 없는 편이긴 한데…….
내가 만하펠트에서 배운 건 롱소드로 싸우는 법이지, 트루 투헨더로 싸우는 법이 아니다. 그리고 뭘 배운 롱소드로도 이렇게 급급한데 여기서 더 조악하게 쓰는 투헨더로 비비면 진짜 목 날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닥친 채 바닥에 꽂혀 버린 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검을 통로 삼아 대지에 주입된 마력이 가시처럼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콰아앙!
검을 축 삼아 터진 마력이 전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악. 또다시 검을 따라 만들어진 베일이 내 기운을 모조리 베는 바람에 먹히진 않았다.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그건 잔재주에 불과하다. 그녀가 착실하게 쌓아 올린 검술은 보고 또 봐도 따라 할 자신이 들지 않는데, 저 짓거리는 눈에 담는 것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 잡혔으므로 분명 잔재주다.
“갑자기 입을 터시는 걸 보니까─”
하므로 나는 최대한 유들유들하게 입술을 올렸다. 윙윙. 날아다니는 파리와 날개미, 바퀴벌레가 옷 속을 파고들고 상처를 헤집었으나 대충 넘겼다.
“슬슬 쫄리시나 봐요?”
내 검이 수십 개의 궤적을 마구잡이로 그리며 검기를 난사했다. 세상을 수백 개의 큐브로 쪼개 버릴 것처럼.
* * *
『주문은 완벽히 따랐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제조차 완벽히 인간으로 여기는, 그러면서도 본체에게 복종하는 복제품. 무력이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넘기고, 이 이외의 하자가 있단 말입니까?』
『경이롭구나. 지혜를 좇는다는 자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다니. 진정 몰라 묻는 것인가, 혹은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하하.』
『지식에 갈급한 자여, 내 복종하는 인간을 구하고자 했다면, 그대 앞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재물, 명예, 지식. 마땅한 대가를 약속하는 순간 내게 머리를 조아릴 자는 많으니.』
『그럼?』
『인간에게 인간 취급 받는 건 의미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으로, 악마에게는 악마로 보여야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그건 불가능합니다만.』
『그래. 그래 보이는구나. 하니 이 거래는 끝이다. 불가능이 판명 났다면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느니라.』
* * *
“경이롭구나.”
콰앙. 상대의 발이 구릉을 딛는 순간 땅이 원형 계단식으로 가라앉았다. 그로 인해 진흙은 붕 떠오르고, 악마들 역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대지를 마구 할퀴던 검기는 침하된 지반을 가르지 못하고 그 위의 공기만을 조각낸다.
“그리 경망스럽게 입을 놀리기도 어려울진대.”
하나 그 모든 것은 그녀가 행하고자 했던 행위의 부차적인 여파에 불과하다.
순간적으로 느릿하게 흘러가던 공기가 순식간에 배속하고 그녀의 몸이 내 앞까지 들이닥쳤다.
나보다 몇 배는 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공격.
나는 눈을 부릅뜨며 그것을 관찰했다. 회피하기엔 주변 환경이 받쳐 주지 않았으므로, 반격하는 게 내 유일한 선택지였다.
채채채앵!
나와 그녀의 검이 순식간에 얽혔다. 상단세로 시작되어 얽힌 검이 일반인 눈엔 동작을 확인하기도 어려울 속도로 회전하고 부딪치며 금속음을 쨍강쨍강 흘린다.
손목 회전만으로 부드럽게 튕기고 각도를 바꾸어 손을 벤다. 그것을 가까스로 막아서며 허벅지를 베려 하면 부드럽게 반보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 다시 머리를 노린다.
막는다. 공격한다. 공격을 막는다. 막힌다. 그것의 반복.
참격을 쓸 틈도 없었다. 상대는 내가 검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 그 검로를 따라 검기가 사출될 걸 알았는지, 내가 그 자신을 향해 검 휘두를 여지를 모조리 막아 버렸다.
퍼억!
다만 그 순간에도 나나 상대나, 신경 써야 할 건 서로의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파르르륵. 악마들과 함께 등장하여 몸에 달라붙는 벌레와 대지 아래서 기회를 노리는 창자벌레 또한 우리의 적이었다.
나는 시야를 가리는 나방을 쳐 내며 검을 휘둘렀다. 손바닥만 한 나방은 무게도 상당하여, 쳐 낼 때의 감각이 좀 묵직했다.
까앙! 조막만 한 파리를 꿰뚫은 레이피어가 내 검과 맞닿았다.
촤악!
동시에 바닥으로부터 창자벌레가 솟구쳤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얽히고, 약속한 것처럼 두 개의 검이 떨어졌다. 서걱! 적의 검은 오른편의 창자벌레를, 내 검은 왼편의 식토귀의 목을 날렸다. 챙! 다시 검과 검이 교차했다가 떨어졌다.
가운데서 튀어나온 슬라임을 피해 서로 물러난 까닭이다. 지금이다. 나는 이 거리가 내 공격 타이밍임을 깨달았다.
“뻔한 노림수다.”
쇄액!
하나 내가 검을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채찍이 뱀처럼 쇄도했다.
팡! 채찍질 한 번에 허공이 요란하게도 찢어졌다. 휘말린 벌레 몇 마리가 부스러지는 것이 시야에 보였다. 불쌍함을 떠나 절대로 맞고 싶지 않아졌다.
캬르─캭!
나는 다가오던 구울의 배에 칼을 박아 내리그은 후, 그 어깨를 잡고 그대로 뛰어넘었다. 촤악! 연이어 날아온 채찍이 애꿎은 구울의 살점을 터트렸다. 방패 역할로는 아주 좋았다.
스걱!
각설하고, 구울 뒤에 숨은 내 검이 지평선을 따라 그었다. 기묘한 소음과 함께 초승달이 대지 위를 기었다가,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촤악! 반 박자 뒤, 악마들의 몸이 가로로 썰려 피보라를 일으켰다. 그중 유일하게 반으로 잘리지 않은 건 단 한 사람뿐이다.
방패처럼 주인을 가로막아 선 레이피어가 토성의 고리처럼 옆으로 올라섰다. 그녀의 뒤로는 부채꼴로 겨우 생존하는 데 성공한 악마들이 몇 있다.
내가 자른 반경이라고 해 봤자 지름 20m도 안 될 것이기에 그 뒤로 넘어가면 더 많을 테고 말이다.
“후.”
다만 중요한 건 그녀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단 사실이다.
콱. 상대는 하얀 부츠 굽으로 꾸물거리던 시체의 손을 짓밟았다. 튀긴 진흙과 진흙 위에 흐르던 핏물이 그녀의 신발에 튀었다.
아무리 고고한 존재도 수렁 위에서는 더럽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참으로 이질적이고 불편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이따위 대우에도 악마에게 붙은 이유가 뭡니까?”
또한 그렇기에 상대가 저러는 이유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악마의 편이라기엔 나처럼 같이 공격받고 있고, 악마의 편이 아니라기엔 도시에 너무 큰 피해를 입혀서 더 아리송한 느낌이었다.
“이유라.”
더럽혀진 백의의 기사가 날아드는 벌레 떼를 채찍 한 번으로 파훼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 *
『협약에 따라 이것은 내가 거두어 가겠다.』
『…그건 이제 어쩌실 겁니까?』
『실패작이라곤 하나 쓸데가 없지는 않을 터. 이것은 알맞은 곳에 쓰일 것이다.』
『이왕이면 저 보는 데서 써 주시죠? 관찰이라도 하게.』
『재미난 요구를 하는구나.』
『역시 안 됩니까?』
『그대가 몰래 만든 그 녹보석은 남겨 주도록 하겠다. 그것으로 만족하라, 지식을 갈구하는 자여.』
『…알고 계셨군요?』
『그대는 그대의 연구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조차 잊었나?』
『…….』
『안정화가 되면 저것을 가지러 오겠다. 그때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
* * *
“인간들은 항상 그런 계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세상 대부분의 일은 설명할 수 없는 흐름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도.”
아까 어깨에 상처 좀 났다고 이번에도 열불 뻗쳐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대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콰직! 시야를 돌리지 않고도 주변을 살피는 능력 역시 여전한지, 그녀를 물어뜯으려던 식토귀의 목구멍에 레이피어가 꽂혔다.
“하나, 그래.”
연이어 꼬치를 휘두르듯, 식토귀를 꿰뚫은 레이피어가 그것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과정에서 힘을 버티지 못한 머리통은 끝내 찢어지고 분리되어 결국 바닥에 메쳐지는 건 머리 위쪽뿐이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가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자비롭게 답해 주마.”
철퍽. 진흙 위에 분리된 머리통이 눈을 까뒤집은 채 내버려졌다. 피에 젖은 진흙과 그 위를 굴러다니는 육편 조각은 마치 지옥도의 한자락을 끌고 온 형상이다.
“나의 모든 행위는 나를 능멸한 자를 끌어내리기 위함이고, 내가 시작점에 설 수조차 없도록 만든 자를 향한 반역이니.”
그리고 그 지옥도의 위에서 청록은 선언했다.
“그 첫 번째는 그대가 될 것이다.”
조용히 읊조려지는 목소리의 저편에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열등감이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