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납득할 수 있는 (3)
“경은 백옥기사가 있던 자리로 가게, 어서!”
“예……!”
“그리고 너! 지금부터는 네가 백인대장이다! 지휘해!”
“예!”
귄터는 죽은 지휘관을 대체할 사람부터 서둘러 뽑았다.
평상시 병사들에게 들은 것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프레깅fragging 당할 확률이 낮고, 능력도 있는 몇 명이 바로 떠올라 임시 진급 대상이 돼 주었다.
“우리의 목표는 버티기다! 각 도시에서 지원군을 보낼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알았나?!”
사람을 뽑는 중간중간에도 그는 격려하는 말을 고래고래 질렀다. 목이 지독하게 마르고 굶주린 배가 쥐어 짜이는 것처럼 아파 왔지만 악착같이 견뎠다.
지금 이 자리에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 목이…….”
“배고파…….”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저 괴수가 떠나면 사그라질 착각! 인내해라! 그대들은 이겨 낼 수 있다!”
아무도 없어서, 오직 그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겨 낼 수─!”
그는 사기에 반비례하여 커지는 목청을 두고 순간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나? 이것이 효과가 있나?
이것이, 이게, 이 행위가.
『후계 후보 중 너 따위가 최선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
…내가 할 수 있을까?
“…우린 이겨 낼 수 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강하게 주먹 쥐었다. 갑작스럽게 양도받은 직무가 너무도 무거워서, 도저히 손을 펴 놓고서는 있을 수 없어서 주먹 쥐었다. 숨이 막혔다.
“무기를 놓치지 마. 제대로 잡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개같은 노친네. 실망했다고 지랄할 거면 죽지나 말든가, 왜 혼자 뒈지는데? 너 같은 건 안 된다고 매양 염병을 떨었으면서 왜 가장 먼저 뒈지냐고.
나보다, 나 따위보다 훨씬 잘하면서.
“우리에게 뒤는 없다! 죽어도 이곳에서 죽는다! 가족들을 위해, 친구와 연인을 위해 무기를 잡아라!”
그는 짓눌리는 어깨를 가까스로 펴고, 겁나는 만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어!” 문득, 한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신자가 병사들과 대치하던 곳이었다.
“뭐냐!”
설마 황옥이 배신자에게 당했나?
그는 불길한 느낌에 지령을 내리다 말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토파즈마저 당하면 배신자를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이 없으므로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사파이어를 불러와야 하나? 아니면 기사 두엇이라도? 그런데 지금 그들을 빼 오면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
귄터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배신자가 있던 성벽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이 무슨.”
황옥뿐이 없었다.
“경, 무슨 일인가?!”
“그, 그것이.”
토파즈 경이 입술을 바르르 떨더니 손가락으로 성벽 밖을 가리켰다.
“떨어졌습니다, 그, 정체 모를 청년이 배신자와 같이.”
“…뭐?”
그는 다급히 성가퀴에 달라붙었다. 사람을 배치하는 동안 성큼 다가온 악마들의 군대와 성벽 밖으로 떨어진 두 인물이 보였다.
수십 미터의 추락에도 그들은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양 검을 맞부딪치고 있다.
팔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지독할 만큼 향수를 가져왔다.
“소성주님, 저자는…….”
그때 누군가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소성주로서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주교님?”
1분 1초가 천금 같은 상황임을 앎에도 주교가 두어 번 입술을 씹었다. 찌푸려진 눈매는 경멸과 당혹감 등등을 마구 담고 있다.
“저 갈색 머리는… 역병의 짐승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마기를 품고 있습니다.”
끝내 주교의 입이 열렸다.
“예?”
“이 사실이 퍼져 봐야 사기만 하락할 듯하여 사제들에겐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다만…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 무슨…….”
주교가 악마들의 진군을 일별하며 조용히 문장을 귀에 들이밀었다.
도시 안쪽에서부터 마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오던 도중, 에메랄드의 배신을 목격. 마기의 주인이 그 배신자와 대적하는 걸 보고 적대시하기보단 사제들의 입단속부터 지시했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주교님의 현명함에 감사를 표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흰 만일에 대비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는 어깨에 새로이 얹힌 무게를 두고, 소리 지르고픈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역병의 짐승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마기라니. 그건 결국 저 갈색 머리가 대악마란 소리 아닌가.
“소, 성주님.”
“…황옥 자네도 침묵하게.”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상황에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 변수가 ‘일단은’ 그들에게 이로운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고.
“…성주를 죽이고 기사를 독살하여 도시에 큰 피해를 입힌 건 마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수석기사에, 대악마로 추정되는 인물은 정작 우리 도시를 위해 싸우고 있다라. 세상 참 재밌게 돌아가는군.”
귄터는 그 우스운 사실을 두고 손을 망토 자락 안에 넣었다. 머리가 괜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앰버 경이다…….”
“앰버 경이 돌아오신 거야.”
그런 그의 어지러움은 주위 병사들의 말로써 한층 더 심해졌다.
“…빌어먹을.”
바깥에서 싸우는 자는 앰버 경이 아니다. 그는 죽었고, 저것은 마기를 품은 악마니까. 우연찮게 앰버 경을 닮은 악마일 뿐이니까.
“앰버 경! 부디 뮌문트에 승리를!”
“부디 이곳에 구원을!”
그렇지만,
그렇지만.
귄터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걸 보며 조용히 빌었다.
악마가 됐다고 해도 좋으니, 진짜 앰버 경이 돌아와만 주기를.
* * *
챙, 채앵!
밟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병사라는 장애물이 사라져서일까. 나와 상대의 검격은 더욱 강렬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까앙!
물론 기량에 한해서는 여전히 비벼 볼 여지가 없다. 나는 미흡하고, 그녀는 전해 듣기로 기사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어리석진 않구나.”
하나 그런 거에 집착할 거였으면 굳이 어깨 찔리면서까지 전장을 바꾸진 않았을 거다. 나는 나의 장점, 무지막지한 마력으로 세련된 검술에 대응했다.
쾅!
마력이 들어간 대지가 갈라지고 뒤흔들리며 상대의 검을 흔들었다. 전후좌우 온갖 곳에서 생겨난 마력창은 그녀가 어떤 동작을 골라도 피하기 어렵게 짓쳐들어간다.
“다만 미숙하다.”
하나 어떤 경지에 오르면 선으로 면을 만드는 기예도 가능한가 싶었다. 느리게 흐르는 듯하던 검신과 채찍이 보석처럼 고운 빛을 흩뿌리며 곱게 피어났다.
만일 하늘에서 이 광경을 관찰했다면 에메랄드빛 장미가 흐드러졌을까. 나울거리는 베일이, 오로라가 순간적으로 모든 마력창을 베어 넘기고, 내 검 위로 미끄러졌다.
뱀처럼 교묘하고, 달빛처럼 교랑한 검신이 음흉한 궤적으로 내 검을 쳐 내고 손을 건드렸다. 촤악! 가죽 장갑이 찢겨 나가며 손등에 얕은 혈선을 남겼다.
서걱!
그러나 그것에 굴하기엔 이미 당한 상처가 많다. 나는 생채기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공격을 계속 이어 나갔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창과 뒤흔들리는 대지가 지상의 폭죽놀이를 만들어 냈다. 새까만 불티들이 잿가루처럼 마구마구 흩날렸다.
까앙!
그 순간에도 검은 부딪친다. 검은 채찍이 마력을 머금은 채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허공을 찢고, 왜곡된 공기가 내 마력창을 부수는 동안에도 끝없이 부딪쳤다.
깡! 마력을 손가락 갑옷처럼 두른 손이 레이피어의 날을 쳐 내고 열린 품을 노렸다. 까앙! 통하지 않는다. 상대는 밀려난 검을 부드럽게 휘어 가속을 붙이는 것으로 순식간에 검을 되돌렸다. 레이피어와 롱소드가 맞붙고 또 돌아갔다.
“불쌍하구나.”
그 움직임을 언젠가는 따라 할 수 있을까?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 기교의 끝에서 원을 그린 검이 마력의 베일을 새겼다. 파사사삭. 정면으로 쏘아 낸 몇 개의 창이 파쇄되고, 내가 흔들지 않은 대지가 그녀의 발길질 한 번에 비슷한 형상을 취했다.
“이다지도 강맹한 마력을 이렇게밖에 쓰지 못함이.”
촤르륵. 어느새 다가온 채찍이 그녀의 왼쪽 공간을 찢고 비틀더니 기묘한 꺾임으로써 내 롱소드에 칭칭 휘감겼다. 동시에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레이피어는 그녀의 오른편과 등 그리고 머리 위를 휘젓는다. 그녀가 절대 피하지 못할 각도로 짓쳐들어오는 많은 것을.
채앵!
언제 다시 맞닿은 걸까? 나는 검과 검이 엮이는 것을, 그리고 기기묘묘하게 틀어져 팔꿈치에 닿는 검날을 느꼈다. 사악. 옷자락과 함께 살점 일부가 도려내졌다. 선혈과 함께 팔랑팔랑 날아가는 셔츠 자락이 우스웠다.
“하나만, 묻죠.”
나는 허공에 고스란히 드러난 검은 팔을 외면한 채 발을 굴렀다. 내 몸으로부터 터져 나온 마력이 은근하게 검을 풀어 주고 대신 휘둘러진 채찍을 튕겨 냈다. 상대가 제법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당신은 72기사입니까, 대악마입니까?”
이어진 물음에도 비슷했다. 그녀는 도자기처럼 고운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살의나 적의, 하다못해 불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시선인데도 어째 부담스러웠다.
까앙!
또 한 번 그녀와 내 검이 부딪쳤다. 마력창의 난사 대신 그저 검과 검만을 맞대었더니, 순식간에 팔꿈치 쪽 상처가 늘었다.
“그런 단어들로 나는 정의되지 않는다.”
둘 다 아니라는 말을 참 곱게도 표현했다. 나는 그녀의 검을 밀어내는 동시에 마력창을 날리며 상대의 정체를 추론했다. 대악마도 아니고 그 따까리도 아니면 뭐지?
“그럼 악마숭배자?”
사각. 차라리 예술 작품인가 싶은 스냅으로 검을 회전시켜 창을 지워 낸 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리석은 인간이란. 그런 추측밖에 하지 못하는구나.”
“아니시구나.”
악마도 아니고 그 따까리도 아니고 따까리의 따까리도 아니면 뭘까. 사익을 위해 협력한 사람? 단순히 거래 관계의 조력자?
그런데 정말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면, 내 정체는 어떻게 바로 알아챘지?
“근데 참 신기하네요. 악마랑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이 안쪽을 쉽게 정의 못 하던데.”
내가 마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나, 품은 마기의 양 정도는 신전의 사람들도 쉽게 알았다. 하나 이 안에 든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규정 못 했다.
단순히 마력만 다룰 줄 아는 기사나 마법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내가 마기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걸 보이지 않는 한 눈치를 못 챘다.
“진짜 악마 아닙니까?”
그러니, 그러하므로.
상대는 단순한 협력자가 아닐 것이다. 내가 먼저 밝히기 전에 나를 기만, 거짓, 분노라 부르는 자들은 지금껏 악마뿐이 없었다.
“…날 그런 비천한 것에 갖다 대지 말라.”
나는 잠깐 사이에 회복된 마력을 확인한 후 다발로 만들어 낸 마력창을 정박과 엇박의 간격으로 쏘아 냈다. 내 검뿐 아니라 마력창까지 쳐 내느라 어지럽게 꼬인 레이피어가 날카롭게 롱소드의 코등이를 찔렀다. 조금만 아래로 미끄러지면 코등이가 미처 가리지 못하는 내 손가락이 있을 위치다.
“비천한 거라 부르시는 것치고 그들 편에 찰싹 붙으신 것 같은데.”
그것이 미끄러지며 손가락을 찌르지 못하도록 아래에서 위로 마력창, 보다 정확히는 탄에 가까울 것을 쏘아 쳐 냈다.
또한 검을 옆으로 치운 채 그대로 전진했다. 레이피어에 막히지 않으면 나도 상대를 찌를 수 있다. 마력창으로든 롱소드로든.
예상은 그랬다.
상대의 은은한 미소와 흰 팔뚝이 내 검을 쳐 냈다.
사각. 무언가가 작용했는지, 스스로 끊어진 채찍이 공기와 함께 내 다리의 거죽을 찢었다. 좁은 공간에서도 어떻게 속도를 붙인 건지, 옷자락이 찢어지고 살갗이 터졌다.
멀리서 봐도 티가 날 정도의 상처가 여섯 번째로 내 몸에 새겨졌다.
“혀가 길구나.”
“…약한 사람이 혀가 길다잖아요.”
다행히 근육은 안 상했다.
나는 뒤로 반보 물러나며 이어지는 공격에 대응했다. 마력창을 난발한 덕에 채찍은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었으나 검은 달랐다. 대지를 흔들어 균형을 망가트린 후에야 가까스로 비껴 낼 수 있었다.
나는 침음이 절로 나오는 걸 인지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배신했습니까?”
밀리는 건 밀리는 거고. 과묵 고압 컨셉을 벗어던졌으면 이 정도 정보 채집은 해 줘야지.
“기사면 누릴 거 다 누리는 위치일 텐데, 악마도 아닌 분이 왜 배신하셨어요?”
아, 물론 지금 하는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아무렴 이 사람의 정체나 배신한 이유를 조사해 봐야 내게 뭔 도움이 되겠나. 남의 비설에 진짝 악마기사와 분노가 손잡은 정황이 숨어 있지도 않을 텐데.
그렇지만 멀쩡한 인간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 정체를 단박에 간파할 수 있는 건 퍽 중요한 사항이다.
이후에, 그러니까 내가 변장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다시 악마기사와 동떨어진 형태로 이 세상을 주유할 수 있게 된다는 가정하에. 정체를 발각당하기 싫으면 이런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받으셨기에?”
하여 나는 쇄도하는 채찍을 터트리며 계속해서 혀를 놀렸다.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면 입을 닫겠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으므로 떠들었다.
상대의 비설을 캐는 것에 매몰되어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유의하는 정신은 아직까진 날카롭다.
“아니면, 대가 없이 부려 먹히는 입장이신가?”
그리고 상대의 눈썹이 드디어 물결쳤다.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나 분명 동요였다.
그녀의 육체에 피어오르던 청록빛 아지랑이가 불꽃처럼 진해지기 시작했다.
“예부터 혀는 많은 재앙을 불러왔지.”
“동시에 평화도 많이 불러왔죠. 대화와 타협. 주먹보단 아름답지 않습니까?”
실실 웃으며 반박하니 상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은은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건 바로 알겠다.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거 아십니까? 발끈하니까 더 진짜 같다는 거?”
진짜 대가 없이 부려 먹히는 따까리셨어요? 내 한마디에 상대의 검이 말없이 힘을 더 담았다. 고고한 척해도 역린은 있구나.
나는 난폭한 움직임에 계속 떨어지려 하는 안경을 빈손으로 잡았다.
스륵.
안경이 인벤토리로 돌아갔다. 내 눈만 죽어라 노려볼 인간도 없겠다, 깨지면 나만 손해니까 한 선택이다.
“온다!”
곧, 땅이 진흙처럼 묽어지기 시작했다.
“악마 떼가 온다!”
썩은 살점을 탐닉하는 구울, 대지 아래를 헤집고 다니며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창자벌레. 산성으로 이뤄진 몸뚱이를 질퍽거리며 녹일 것을 찾는 슬라임, 무언가를 삼키거든 배꼽으로 토해 내어 해결할 수 없는 배고픔으로 허덕이는 식토귀, 나방과 구더기를 살점 안에 키우며 시체를 찾아 헤매는 시체탐식자 등.
기아와 가뭄, 질병을 품은 썩은 흙 사이로 악마들의 손이 솟구쳐 올랐다. 보다 효율적인 마력 소비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버러지 같은…….”
다만, 그것들이 가장 먼저 붙잡은 건, 우습게도 내가 아니었다.
캬르르르륵
[배고파배고파배고파.]
[먹자먹자먹자.]
[먹이먹이먹이.]
“천것들이 감히.”
발목이 붙잡힌 청록빛 기사가 내게 습격을 당한 이래 처음으로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주제를 파악하라.”
콰앙!
청록빛 기세가 터지며 진흙과 악마들을 쫙 밀어냈다. “음.” 내 몸이 대지를 박차고 그녀에게로 달려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온몸에 아로새겨진 상처가 피를 토해 내고, 은빛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거절할게요.”
지금껏 아껴 왔던 초승달의 참격이 기사와 기사 뒤편의 공간을, 그곳에 서 있던 자잘한 악마들까지 수직으로 잘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