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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85화 (285/389)

285화 납득할 수 있는 (1)

진실.

그것이 내걸린 순간 나는 울듯 웃었다. 드디어 손에 쥐인 답지가 나를 안도케 했는지, 저들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죄송해요.”

“…그, 마법사님. 그건 당신의 잘못이─”

“가 봐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망설일 이유는 사라졌다.

사르륵. 위장 스킬을 해제한 몸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장갑을 끼고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는지라, 병사가 그 사실을 알아채곤 비명을 지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가야 한다’라는 말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그러나 한낱 병사에게 막힐 내가 아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쾅!

페널티로 인해 다소 약해진, 그래도 일반인보단 월등한 각력이 창틀을 발판 삼아 몸을 위로 띄웠다. 탁. 내 몸이 순식간에 건너편 건물 옥상에 올랐다.

“이 무슨─!”

건물의 지붕을 밟고 나아가는 내 뒤로, 아련히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그가 많이 혼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그건 어렵겠지만.

“흡!”

그러나 남을 걱정하기엔 당장 나도 코가 석 자인 상황이라.

나는 도약을 통해 짧은 활강을 즐기는 동안, 아공간 팔찌로부터 몇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군화와 마법이 새겨진 가슴보호대, 여분의 롱소드였다.

당연하지만 모양 빠지게 멈춰 서서 신발을 신거나 하진 않았다. 팔찌에서 물건을 꺼낼 때 ‘충분한 공간을 두고 빼낸다’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어디에 꺼낼지 정도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까닭이다.

다른 말로는, 내가 계산만 잘하면 게임 캐릭터가 순식간에 옷을 입고 벗는 것처럼 해당 부위에 장비를 장착할 수 있다.

나는 그를 통해 속력을 늦추는 일 없이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춰 입었다. 만일을 대비해 가발을 벗거나, 악마기사를 상징하는 코트는 배제했다.

이 일로 이 외형 역시 쫓기게 될 것은 분명하나, 악마기사가 이렇게까지 변장 및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최대한 숨기고 싶어서다.

키가 큰 점이나 다루는 힘이 비슷하단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의심은 받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거랑 불확실한 건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마지막 여지까지 만들어 둔 후, 놀란 사람들을 지나쳐 성벽 근처에 다다랐다. 달려오는 동안 서서히 풀린 페널티가 내 다리에 힘을 실어 주며 순식간에 수 미터를 뛰어오르도록 해 주었다.

탁. 올라가라고 만들어 둔 계단 대신, 도약으로 성벽을 밟은 내 시야에 붉은빛이 촤악 퍼졌다.

“하니 죽어라.”

쓰러지는 병사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붉음이었다.

“그것이 세상에 더 보탬이 되리라.”

그리고 그 피보라 사이로 청록빛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보석의 실타래 앞에는 넘어지기라도 한 듯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암청색 머리칼의 사내가 있다.

우습게도 둘 다 아는 얼굴이었다.

「아, 안 돼.」

다만 그중 누가 적인지, 누가 구해야 할 대상인지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저 사람은, 저 사람만은 죽으면 안 돼.」 절규하는 목소리가 내 표적을 지정해 주었다.

“내뱉은 말은 지켜.”

까앙!

햇빛을 등진 내가 성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 검이 청록빛 기사의 공격을 막았다. 느슨하게 묶었던 갈빛 머리카락이 셔츠 위로 나풀 흔들렸다.

“…아탸?”

“그래, 슬슬 올 줄 알았… 그대는……?”

청록빛 기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휘익! 동시에 그녀는 빛살처럼 반응하여 다른 쪽 대거로 내 몸을 베려 들었다. 소성주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상황이라 스텝으로 피하기도, 이미 맹고쉬와 맞닿은 롱소드로 대응하기도 뭐한 경로였다.

깡!

그렇지만 내겐 아공간 팔찌라는 신의 물건이 있었다.

순식간에 소환된 단검이 대거를 쳐 내고, 롱소드를 잡은 쪽 손목이 뱅글 돌아가 방해를 무산시켰다. 만하펠트에서 배운 요령이었다.

내 다리가 앞으로 나아가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어떻게?”

수평으로 휘둘러진 그것을, 상대는 가벼운 백스텝으로 회피했다. 물러날 때의 간격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을 고려한 착지 장소 선정 따위를 보면 결코 피하기 급급한 회피 기동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대가……?”

하나 그렇게 잘도 피했으면서, 정작 그 동작을 행한 이의 얼굴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혼란이 찾아온 양, 매번 유지하던 미소마저 거둔 채 냉랭한 시선만을 한 것이다.

“어떻게 그대가 분노일 수 있지? 기만과 거짓이 첫 번째 이름이었다곤 하나, 어떻게 청빈함을…….”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노란 이름이 바로 나오는 걸 보니 대악마 비스므리한 거란 건 알겠다. 혹은 그 바로 아랫급인 72기사의 일원이든가.

“종종 마주친 존재감이 분노 당신의 것임은 알았다. 당신이 계획을 파탄 내러 올 수도 있다는 예상 또한 했다. 하지만… 하지만 대체 왜…….”

‘음습한 박쥐 새끼, 또 이상한 걸 만들었군.’

만일 그중 하나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소성주를 습격한 시점에서 아군은 명백히 아니다.

하여 나는 그녀가 당혹감을 추스르기 전, 냅다 달려들었다. 단검을 다시 집어넣고 롱소드를 양손으로 붙잡은 자세였다.

“잠깐, 설마?”

‘인간도 악마도 아닌 것을 만들었어.’

한 걸음.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내 어깨 위로 걸치듯 쥐었던 검은 순식간에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향하고 있다.

노리는 건 상대의 머리, 나는 그녀가 단검으로 쳐 내도 손목 스냅으로 뱅글 돌려 공격할 걸 상정하며 움직였다.

챙!

역시나, 예상한 대로 대거의 날과 롱소드의 날이 서로를 튕겨 냈다.

“하.”

상대가 날카로운 웃음을 토해 내는 찰나, 내 검이 뒤집어진 U자를 그리며 반대쪽을 베어 들어갔다. 채앵! 상대의 다른 쪽 손에 들린 단검이 그 공격을 막아 냈다.

“그래… 이러면 말이 되는구나. 그래, 이러면 말이 돼. 이제야 그대의 행적 속 모든 모순이 설명되는구나.”

들고 있는 검 길이와 신체적 길이로 인한 일방적인 검격에도, 상대는 끝내 미소를 다시금 띠어 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비치는 내 모습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다.

“그들을 기만한 건, 분노 당신뿐이 아니었구나.”

까앙! 삽시간에 두 개의 단검이 내 롱소드를 교차하듯 얽었다. 단검의 날과 가드에 걸려 이도 저도 못 하는 사이, 그대로 미끄러지며 다가온 상대가 팔을 휘둘렀다. 나는 그 팔을 잡아 쳐 낼 생각을 하며 검 자루로부터 한 손을 떼 냈다.

까앙!

“그릇마저 기만꾼이었던 것이야.”

“배신자 놈!!!”

하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본래라면 아마 내 목을 갈랐을 단검이 뒤에서 날아온 공격을 막기 위해 방향을 튼 것이다.

교교하게 웃던 상대가 눈동자 위로 귀찮음을 살짝 담아 내며 옆으로 빠르게 빠지려 들었다. 놓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단검에 막힌 롱소드를 옆으로 치우곤, 단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보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빈손으로는 상대의 옷깃을 잡고자 경로를 비트는 중이다.

원하는 건 하나, 그녀의 소매를 잡는 것.

그로 인해 노리는 이득은 두 가지. 단검 휘두르는 것을 방지하고, 또 몸 자체를 붙잡음으로써 롱소드를 피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러나 그 의도는 실패했다. 맹고쉬를 뒤집어 역수로 잡은 이가 내 손목을 그은 탓이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으나 장갑 일부가 잘려 나갔다. 자칫하면 엄지맞섬근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채앵!

더불어 상대를 붙잡든 놓치든 일단 베고 보자는 마음으로 휘두른 롱소드는 사이드링과 칼날 사이에 막혀 튕겨 내졌다. 내 손목을 베고 허공을 꿰뚫듯 움직이는 것으로 롱소드를 가로막는 솜씨가 더럽게 예술적이었다.

“크윽!”

심지어 상대가 방어에 성공한 공격은 내 것뿐이 아니었다. 꿀 같은 금발의 기사(추정)가 행한 일격마저 대거를 통과하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는, 대거가 기사의 명치를 향해 날아가는 바람에 기사가 공격을 취소해 버렸다.

“금단이여.”

각설하고 우리의 공격이 전부 실패한 사이, 옆으로 빠지던 상대가 가슴에 빈손을 얹었다.

눈부신 빛이 그녀의 손과 가슴 사이에서 새어 나오더니 곧 무언가가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백금색 검신과 비취를 깎아 만든 검 자루로 이뤄진 레이피어였다.

서걱!

또한 그녀가 그 레이피어를 꺼내는 사이, 맹고쉬로 자신을 찌르려던 청발의 기사를 견제했다. 온전히 꺼내진 레이피어는 1m가량의 칼날로 창을 든 병사의 눈을 꿰뚫어 버린다.

시야각이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나는 혀를 내두르며 다급히 따라붙었다. 내 공격이 전부 파훼된 시점에 바로 땅을 박찬지라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막 병사 하나를 죽인 그녀에게로 내 검이 떨어져 내렸다. 맹고쉬로는 청발의 기사를 견제하고 있으니 레이피어로만 막아야 할 것이다.

깡!

X자로 팔을 교차하듯, 맹고쉬를 든 왼팔을 당겨 온 상대가 기어이 내 롱소드를 막아 냈다. 촤아악. 맞닿은 금속과 금속이 서로를 긁으며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만하펠트에서 배운 대로 손목 스냅을 통해 검을 빼내려는 시도는 상대가 맞춰 검을 비튼 덕에 원천 봉쇄 되었다.

“이런!”

더불어, 그녀가 내 오른편으로 미끄러져 다가온 덕분에 의도치 않게 그녀와 청발의 기사 사이에 내가 끼인 꼴이 되었다. 청발의 기사가 내게 막혀 공격을 할 수 없게 됐단 거다.

촤악! 짓무른 눈알과 함께 뽑혀 나온 상대의 레이피어는 내 머리를 노리고 있다.

덥썩.

그렇지만 레이피어의 절삭력은 높지 않다. 사실 가만히 있는 모든 검이 다 그렇다.

하여 나는 그것을 믿고 적의 레이피어를 쥐어 방향을 강제로 틀었다. 상대의 맹고쉬는 내 롱소드를 견제하고 있기에 도리어 나를 찌를 수 없다.

“하늘에 오르고자 했던 자는 알고 있을까?”

만하펠트에서 정식 검술을 조금이라도 배워 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1초가 100초 같은 순간 속에서 달싹거리는 입술을 보았다.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을 것 같던 그릇조차도 사실은 기만에 능한 재주꾼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악마기사’가 나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뭐어. 몸뚱어리 안에 분노를 품고 다니는 사람이 둘 이상일 리 없으므로, 편견만 깨면 알기 쉬운 사실이긴 했다.

그러니까, 저치가 지금 말하듯이 ‘악마기사가 전혀 다른 성격을 연기할 수 있다’라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나도 궁금하구나. 그대의 기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지? 그 강고함? 혹은 강고함의 밑바탕이 되던 증오? 아니면 그대를 설명하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나?”

그렇지만 굳이 답해서 확신을 줄 이유가 없다. 나는 그것의 발언 속 ‘하늘에 오르고자 했던 자’와 상대의 정체 자체를 추측하며 레이피어를 확 잡아당겼다.

그녀가 롱소드의 견제를 포기한다면 그대로 허리를 벨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레이피어를 놓고 그녀의 목을 붙잡아 꺾을 생각이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 목이 베일 가능성도 있긴 했다. 통상적으로 퍼진 편견과 달리 레이피어는 찌르기 외에 베기도 가능한 무기니까.

하나 그녀는 내게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내가 그녀의 목을 잡을 즈음이면 그녀는 내 목을 베고자 해도 가드에 걸려 베지 못할 것이다. 보통 검이었다면 가드의 가장자리로 찍어 버리겠지만, 하필 둥근 형태의 가드라 효과적이지도 않을 거란 점에서 더욱 안전했다.

“그대도, 그대가 품고 있는 자도 마치 허깨비와 같구나.”

레이피어를 당기는 바람에 퍼스널 스페이스 이상으로 가까워진 얼굴이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렸다.

“결코 가면을 벗지 않는 자들.”

그녀의 손이 레이피어와 맹고쉬를 놓고, 뒤로 뛰었다. 다른 쪽에서 기습을 시도하려던 금발의 기사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상대가 조금만 회수가 늦었어도, 내 옆구리가 관통되었을 것이다.

촤아악!

그 사실을 두고 나도, 금발의 기사도 기겁하던 와중. 뒤로 물러난 이의 손으로부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시꺼먼 그것은 뱀처럼 허공을 갈라, 내가 내버리려던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확! 하고 낚아챈다.

촤악!

레이피어가 뒤로 당겨지며 성가퀴를 밟고 선 이의 손에 돌아갔다. 그의 나머지 손에는 광조차 흘리지 않는 가죽 채찍이 들려 있다. 서걱! 막 회수된 레이피어가 하필 그 근처에 있던 병사의 눈을 베었다.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는 움직임이 검신을 타고 흐르는 핏물로 빙긋 웃었다.

“한데 분노하지 않는 그대여.”

그리고 그 핏물 아래에서, 성가퀴를 딛고 서 있는 에메랄드빛 기사 뒤에서.

“정녕 이 도시를 구할 수 있는가?”

썩은 살점의 짐승이 고개를 들었다.

악마들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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