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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84화 (284/389)

284화 내게 말해 줘 (14)

귄터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청록빛 머리칼이 나부끼며 사방으로 핏물 튀는 장면이 퍽 비현실적이었던 까닭이다.

아니, 사실 그 장면 자체는 비현실적이지 않다. 에메랄드 경이 악마들을 학살하며 피 튀기는 건 으레 있던 일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

지금 죽은 건 악마가 아니잖아.

툭.

떠올랐던 사람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박 부서지듯 깨지진 않았으나 일부가 함몰되고 피가 또 한 번 튀겼다. 사방으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의 색상은 남청색이었다.

“반역이다!!”

“성주님이!”

“에, 에메랄드 경!”

순식간에 비명과 아우성으로 가득 찬 공기가 어쩐지 아득해졌다.

귄터의 무릎이 반사적으로 꿇렸다. “기, 기사님, 어째서─” 의문을 표하던 에메랄드 경의 종자가 피를 토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가, 시야가 더 내려감에 따라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보이는 건 그의 앞까지 날아온 누군가의 머리통이었다.

“아, 아버.”

그는 남청색 머리칼을 가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던 손은 끝내 닿지 못한 채로 멈춰 섰다.

자신이 죽었다는 걸 끝까지 감지하지 못한 얼굴이 그를 사납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그 표정이 낯선가? 그건 아니다. 성주는 악마를 볼 때면 매양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실망을 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므로 저건 낯설기보다 익숙한 쪽에 속했고, 그만큼 귄터가 좋아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런 표정을 지은 채 죽어 버리는 걸 상상해 본 적은 없는데.

죽어야 한다면, 죽게 된다면 그건 이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왜?

“소성주님, 물러나십시오! 너희! 소성주님을 보호해! 그리고 너흰 당장 백옥기사에게 상황 전달을……!”

왜……?

“크악!”

“다들 물러나, 물러─ 커억!”

“힘을 숨기고 있었나……!”

귄터는 망연히 고개를 들었다. 목 잃은 육체가 하나, 가슴이 찔린 채 쓰러진 사람이 둘, 사지가 잘린 자가 셋, 머리가 관통되거나 가슴이나 팔다리가 베인 병사가 넷.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는 기사가 다시 하나.

“에메랄드! 어째서, 어째서 반역을─!”

“아… 반역인가.”

원형진을 겨우 이뤄 낸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외쳤다. 그러자 청록빛 머리칼의 기사가 머금고 있던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인형, 또는 가면 같던 얼굴이 비로소 사람 같아졌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의 나른한 조소는 사람의 심장 깊은 곳을 뒤흔들고 분노를 심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느끼게 된 분노와 슬픔, 당혹감, 배신감 따위를 모조리 무시하는 미소였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나는 이것을 그리 여기지 않지만, 마음대로 칭하거라. 반역이든 배신이든… 그깟 단어가 너희의 운명을 바꾸진 못할 것이니. 마지막 가는 길, 언어의 자유 정도는 내 베풀어 주마.”

“에메랄드!!”

“하나, 나를 그리 부르는 것은 더이상 용납지 않겠다.”

심지어 그것은, 빌어먹을, 청옥기사와 상황을 알고 달려온 황옥기사, 수많은 정예병마저도 무가치하게 여기는 듯했다.

저들이 결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양, 자신에게 이 상황은 별것 아닌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양 굴었단 말이다.

“이 배신자!”

“토파즈 경, 섣불리 덤비면─!”

“미천한 인간이 하사한 작위로 나를 칭하지 말라. 그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며 멸시이니.”

아, 어찌나 오만한가. 어찌나 교만한 모습인가.

“나는 이 땅의 계명啓明이다.”

귄터는 그 오연함을 통해 상대의 진실된 모습을 정의했다.

저것은 그들의 아군도, 인간도 아닌, 원죄의 한 갈래이자 죄종 중의 하나를 품은 악이었다.

* * *

병사는 굳은 얼굴을 할지언정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피아가 확실하지 않은 마법사를 견제하는 것이, 성벽에 병사 하나 더해지는 것보다 더 많은 안전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뭐, 아크메이지만 해도 주문 외울 시간만 주면 건물 하나 정도는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 영 이해 안 가는 판단도 아니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실하지 않다면 차라리 경계하는 게 안전한 법이다.

“악마들이 쳐들어오는 신호, 맞나요?”

“…진군 신호는 아닙니다. 그럴 확률이 높으니 주민들에게 대피 준비를 하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모쪼록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나 역시 움직일 생각을 버렸다. 지금부터 시작될 전투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을 거란 예상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의미의 사과입니까?”

“마지막 양심으로 인한 사과, 뭐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냥… 참전하지 못한다는 게 송구할 뿐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 개입을 포기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죽어 나갈 사람이 많을 걸 알고 있음에도, 대악마에 비견될 마기의 덩어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앎에도 그랬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행동하려 해 봤자 의심만 살 것이기에 저들을 외면할 것이다.

내가 저들을 도우려면 힘을 드러내야 하니까. 힘을 드러냈다간 정체가 발각될 거니까. 베헨 마을처럼 어떻게든 숨길 여지조차 없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는…….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슬프네요.”

이 도시를 돕지 않는다.

“이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진짜 악마기사가 이 모든 걸 감수할 만한 무언갈 약속하지 않는 한, 영원히.

“…정말로 비참해.”

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집에 가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게 실로 참담했다.

『사랑해, 아들.』

『태어나 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당신들은 이런 날 이해해 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나도 평생 내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었다…….

“제발.”

내가 이 이상 비참해지지 않게 해 줘. 나는 울려 퍼지는 종소리 앞에서 기도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오가는 병사들마저 보이는 성벽이 신상을 대신했다.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 * *

“…악마숭배자였습니까, 당신.”

클라우스, 뮌문트에서 하사받은 이름으로는 청옥기사 내지 사파이어.

그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뮌문트의 최대 위기임을 직감했다.

“불쾌한 추측이구나. 나보다 지고한 존재가 이 땅에 없거늘, 내가 어찌 나 이외의 존재를 숭배할까.”

단순히 성벽 밖 악마들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었다. 무수한 악마들이 이 도시를 침략하려 드는 건 언제나 있던 일이었으므로.

성주가 암살당한 일 역시 지독한 불행일지언정 대처 못 할 사태까진 아니다. 이 도시는 통수권자의 급사를 대비하여 권한을 이어받을 자들의 순위를 정해 두는 편이었다.

“…그것 참 오만한 발언이시군요.”

수석기사같이 중책을 맡은 이가 배신한 일도 그렇다. 뮌문트에는 만일에 대비해 그에 맞는 대응법을 준비해 두었다. 이 도시가 무너지면 주위 도시까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므로 당연한 대비였다.

“하긴, 주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니 이런 일을 벌인 거겠지만.”

즉, 사건 하나하나만 따지면 그것들은 고난이 될 수 있을지언정 뮌문트의 위기가 될 수는 없다. 그것들이 하나씩만 찾아왔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전부 겹친 지금은, 마치 바람 앞의 등잔과 다름없었다.

“그래… 청옥, 그대는 멍청이들만 가득한 이 도시에서 그나마 머리가 굴러가는 편이었지.”

“……!”

“하지만 그래 봤자 조금 현명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클라우스는 그의 도발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이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권위적이고 거만한 발언을 토대로 시도한 도발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리고…….”

까앙!

“……!”

“황옥, 그대 또한 조잡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가 시선을 끄는 사이, 황옥기사가 감행한 습격도 먹히지 않았다. 기사치고 큰 편이 아님에도 사위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이 막힌 칼날을 두고 미적지근하게 조소했다.

“시끄러운 입을 다문다고 해서 그 천박한 방정맞음이 어디 갈 거라 생각했더냐?”

노랫말처럼 낭랑하고 두루미의 걸음걸이처럼 우아한 목소리는 패배감을 심는 말을 조근조근 쏟아 낸다.

“에메랄드……!”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웃는 얼굴 그대로 눈빛만을 싸늘히 만든 존재가 팔에 힘을 주었다. 두손과 한 손, 하프소딩과 아닌 손의 맞부딪침이었음에도 팽팽하게 이어지던 힘겨루기가 단번에 기울었다.

취옥. 에메랄드가 에메랄드로서 존재하게 된 이유가 떠오른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괴수 잡이가 전문인 황옥, 전술에 해박한 백옥, 특출난 건 없으나 떨어지는 것도 없어 청옥이 된 자신.

그리고 인간형 적에 한해 무패 신화를 자랑하는 대인 특화 취옥.

이대론 황옥이 위험하다. 클라우스는 발에 힘을 싣고 앞으로 뛰어 나갔다.

“흡.”

토파즈 역시 숨을 멈추곤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 다음 행동에 나섰다.

승패가 기울었던 힘겨루기가 의미를 잃고, 옆으로 빠졌던 그녀의 검이 자연스럽게 찌르기로 전환되었다. 배신자가 피하지 않는다면 찌르기에 당할 것이고, 피하려 든다면 클라우스의 검에 베일 터였다.

“경이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존재들이야, 그대들은.”

하나 상대는 그 무엇에도 당하지 않았다.

호박의 검을 내버린 손에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토파즈의 검이 그대로 잡혔다. 피부를 아무리 강화해도 베이긴 하는지 상대의 흰 장갑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텅!

클라우스의 검은 치맛자락처럼 부푼 옷자락 사이에서 튀어나온 맹고쉬Main-gauche가 강렬한 힘으로 튕겨 내 버린 채다.

“성주님, 백옥기사와 일부 기사님들께서 독에… 허억!”

“흐음. 드디어 죽었나. 독이 좀 더 있었다면 그대들까지 깔끔하게 보내 주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어.”

그렇지만 튕겨 난 검을 부드럽게 틀어 다시 공격의 궤적으로 바꾸는 건 기초적인 일이다.

클라우스는 최고참 기사이자 총지휘에 능숙한 선배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토파즈 또한 옴짝달싹 않는 검을 포기하고 주위 병사에게서 검을 받아─반쯤은 빼앗아─새로운 공격을 잇는 중이다.

“이 개새끼가 독까지 쓴 거냐!”

“…배신에 이어 비겁하고 졸렬한 수까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백옥기사를 독살한 거야 그렇다 쳐도, 수석기사인 그와 황옥을 내버려 둔 채 일반기사를 노린 건 좀 이상한 까닭이다.

“독을 쓴 게 어찌 비겁하고 졸렬한 것이 되지? 너희가 현명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일진대.”

성주를 독살하지 않지 않은 건, 성주가 음식을 입에 대기 전 일일이 검식하는 문화 때문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소성주는 어제부로 계속 굶고 있었으나 독살 따윈 꿈도 못 꿨을 테고.

“아니 그런가?”

기사들 전원을 독살하지 않은 것도 이해 범위 안이다.

아무렴, 뮌문트는 수석기사의 짐조차 검사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 편인데 그를 뚫고 독을 들여와 봐야 얼마나 들여오겠는가.

심지어 배신자는 어제 복귀한 사람이었다. 틈틈히 독을 모으는 일조차 못 했을 테니 우선순위를 정해 죽이는 건 합당한 일이 맞다. 그래, 거기까지만 타당했다.

수석기사 둘을 내버려 두고 무력이 떨어지는 일반기사를 우선해 죽인 건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다.

“배신자…….”

아니면 살려 둔 기사들이 전부 배신자 편에 붙은 이들이라든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래도 수석기사를 우선해 배제해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황옥이 저리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배신자 편에 붙은 것도 아닐 테니 더욱 그러하다.

“잠깐, 설마……!”

“오, 눈치챘나?”

하면 결국 수석기사보다 일반기사를 먼저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셈이니.

그리고 죽은 백옥기사와 살아남은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를 떠올린다면…….

“빌어먹을, 소성주님을 당장 대피시켜!”

“역시 그대는 나름 현명해.”

그건 전장을 넓게 보며 통솔할 능력이었다. 죽은 기사들도 아마 지휘력이 뛰어난 자들부터 우선해 죽여 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구제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지.”

“토파즈 경, 여긴 제게 맡기고 경은 소성주님 보호를……!”

온 성벽의 상황을 파악하고 맞게 조율할 사람이 없으면, 저 배신자를 죽여도 성밖의 악마들에게 무너지는 미래밖에 없다.

클라우스는 그것을 깨닫고 당장 외쳤으나, 상대가 한발 더 빨랐다.

“그대들이 나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는데도, 그런 희망을 품고 있잖나.”

퍼억! 상대의 다리가 그의 가슴팍을 후려 찼다. 와드득. 죽지는 않았으나 갈비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들었다.

“이건 잘 빌리마.”

그와 함께 그의 허리춤이 가벼워졌다. 혹시 몰라 들고 다니는 예비용 대거를 빼앗긴 것이다.

“……! 소성주님! 피하십시오!”

황옥마저도 튕겨 나가 상대를 제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클라우스는 다급히 소성주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소성주는 병사들에 이끌려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중이었는지 제법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 아는가?”

하나 그 거리가 과연 소성주를 지켜 줄까?

“소성주, 난 항상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을 든 정예병의 거리 안으로 좁혀 든 이가 맹고쉬의 칼날을 눈에 박아 찢었다. 투구가 미처 가릴 수 없는 구멍을 정확히 요격한 것이다.

촤악!

연이어 대거의 검신이 피를 튀겼다. 그것이 훑고 지나간 것은 다른 병사의 목이었다.

투구와 사슬갑옷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검이 혈관을 끊고 뼈를 갈랐다.

“피하십시오! 소성주님!”

당연하지만 클라우스와 토파즈는 바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배신자가 구태여 병사를 죽이는 건, 단순히 포위망을 무너트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죽은 이들이 산 자들 사이로 넘어지고 무너지며 그들을 순간순간 머뭇거리도록 만들었다. 살아 있는 병사들이 길을 비켜도 지연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병사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비켜 주는 것보다 배신자가 병사들을 죽이고 나아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니 죽어라. 그것이 세상에 더 보탬이 되리라.”

삽시간에 포위망을 뚫어 버린 자의 검이 기어이 소성주의 앞에 도달했다.

“내뱉은 말은 지켜.”

동쪽에서 내비친 햇살이 성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 * *

「❖ 뮌문트 수_」

「❖ 뮌_」

「❖ #@**@#…」

「❖ $%……」

「❖ %#$………」

「❖ ………죄송합니다

∎ 뮌문트를 향한 위협 제거

보상: 진실」

까앙!

맹고쉬와 롱소드가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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