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내게 말해 줘 (13)
“옥상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입니다.”
다소 빈정거리는 듯한, 그럼에도 부드러운 저음에 의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 말이 귄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겠죠, 티야?”
“빌어먹을,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얼굴 펴세요. 주름 생길라.”
“네가 먼저 시작해 놓고는……!”
뺀질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잘못이 아닌 척 구는 얼굴도 함께였다.
귄터는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늘어져 있는 녹색 눈을 보며 고개를 팩 돌렸다. 키득키득. 나른한 웃음소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또 한 소리 들으셨습니까?”
“…네가 알 거 없잖아.”
“성주님을 뵌 건 맞나 보네요, 긴가민가했는데.”
“…젠장.”
와중에 떠보는 말에 당했다. 귄터는 본인의 이마를 찰싹 쳤다.
“제가 보기에 문제 될 성적은 아니었는데… 성주님 참 엄격하시다니까요.”
“…그 인간이 항상 그렇지. 삼석 이하로는 취급도 안 하는… 나 또 당했냐?”
“네.”
또 한 번 쳤다. 빌어먹을 새끼.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실력도, 그를 통해 정보를 뜯어내는 솜씨도 정말이지 세상 제일이다.
“그렇지만 거짓말은 아닙니다. 소성주로서의 업무를 병행하면서 기사수업까지 따라오는 게 어디 쉽나요.”
“…성주님은 그걸 했잖아.”
“그리고 당신은 성주님이 아니죠. 제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아니듯.”
그렇지만, 그럼에도.
“피 하나 잇는다고 재능까지 물려받으면, 세상이 이런 꼴이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주님이 규격 외인 거지, 당신이 부족한 건 아닙니다. 솔직히 티야 당신 사촌들도 그거 하나 못 해서 쩔쩔매고 있잖아요.”
저 녀석은 그의 편이었다. 그것이 귄터를 기쁘게 했다.
“…너는 네 아버지만큼 하잖아.”
“제가요? 언제요?”
물론 약간의… 자격지심을 자극할 때도 있긴 했다.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천재였고, 그의 아버지만큼 해내며 호랑이 아래 개가 태어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저도 제가 뛰어난 편이란 건 알지만, 그게 아버지를 따라잡을 정도냐면 좀.”
“수석이잖아.”
“그거 아십니까, 1,000문제를 다 맞힌 사람도, 100문제를 다 맞힌 사람도 표기상으로는 똑같은 만점자라는 걸.”
“그래서, 백 문제는 다 맞혀도 천 문제는 다 못 맞히겠다?”
“아무래도 그렇죠.”
아닐 것 같은데. 맞힐 것 같은데.
귄터는 그런 사유를 하면서도 구태여 반박하진 않았다. 녀석을 추켜세워 봤자, 아들도 아버지만큼 할 수 있다는 논거밖에 안 됐으므로 당연했다.
그는 아버지가 말하는 ‘실패작’이란 단어에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됐고, 집에 갑시다. 여기서 궁상 떨어 봤자 기분만 더 나빠지지, 좋아질 건 없잖아요.”
“…집에 가기 싫은데.”
“오… 파샤랑 리냐한테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티야 형이 더는 안 올 거라고.”
“아, 젠장. 성에 가기 싫다고! 성에! 너희 집이 아니라!”
“언제 성이 당신의 집이 됐습니까?”
그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귄터는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집에 가죠.”
대신 주어지는 배려가 너무 달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의 집은 저 성이 아니었다. 그의 집은, 그가 정말 집이라 여기는 곳은 사실…….
“아, 티야. 참고로 오늘 저녁은─”
“토마토 스튜와 토끼 구이입니다. 그리고 두 분 다 교칙을 어기셨군요. 교관님께 전달드리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나는 궁상 떨고 있는 학우를 위로해 주기 위해 잠시 들어온 것뿐이라고, 앨랴. 깎을 거면 티야만 깎아야지.”
“학우를 배신하는 모습, 잘 보았습니다. 그 발언도 착실히 전달드리겠습니다.”
“오…….”
“더불어 군야 선배님이 티야라 부르지 말라 공공연히 발언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건 친구끼리의 장난이지.”
“장난이란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과 괴롭힘 사건이 매년 한 번씩은 터진다는 걸 고려했을 때, 그 발언은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아니이…….”
사실 이들이야말로 그의 진짜 집이었다. “푸흐.” 눈꼬리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티야… 제가 난처해지는 게 그렇게 즐겁습니까. 이건 배신─ 커헉.”
“선배님, 이 머저리가 저지른 실례에 대신 사과드립니다. 혹은 더 때려 드릴까요?”
“…응! 한 대만 더 때려!”
“잠깐, 군야. 제가 좀 놀렸겠거로니 진짜─ 아악! 앨랴, 뼈 부러져! 뼈 부러진다고!”
“이 악물어라, 머저리.”
“여기 아직 학교─ 아악!!”
귄터는 학교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기수 차이로 인한 선후배 관계를 고려하여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던 이가 순식간에 한 살 차이 여동생으로 돌아가는 걸 보았다.
“이 새끼가 놀리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선배님. 예절 교육을 해 드리겠습니다.”
“애, 앨랴. 나 오빠야…….”
“어쩌라고. 죽든가.”
“너무해…….”
그게 정말 좋았다. 그는 살벌한 남매의 가운데에 끼어, 양쪽 어깨에 팔을 걸쳤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이제 됐어, 앨랴. 그만해도 돼.”
“…봐주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아. 저 녀석도 선은 안 넘는 거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싫어하는 별명을 계속 부르는 것도 불쾌한 일이잖습니까. 좀만 더 패면 안 부를 것 같은데.”
“…나 지금 멍 든 것 같은데?”
메이스를 한 손으로 휘두르고, 가끔 다른 손에 모닝스타까지 드는 이에게 얻어맞았으니 멍은 어쩔 수 없다. 평소 행실로 인해 쌓인 얄미움을 생각하면 별로 안타깝지도 않고.
해서 귄터는 녀석을 무시한 채 다른 이를 돌아보았다.
“집에 가자, 앨리스.”
“네. 집에 가죠, 귄터 오빠.”
“너희 진짜 너무해…….”
“멍청이 아서는 닥쳐.”
“앨리스으으으으.”
집에 갈 시간이었다.
.
.
.
“파샤, 리냐… 나 왔…….”
귄터는 잠결에 중얼거리다가, 느껴지는 한기와 굶주림에 눈을 번쩍 떴다. 조명 하나 없어 어둡기만 한 사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이곳이 그의 현실이었다. 꿈에서 느꼈던 온기가 돌바닥에 깔린 냉기에 모조리 날아갔다.
“…빌어먹을.”
그는 피부 위를 내달리는 오한에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형, 오빠거리며 달려오던 어린 것들이 어둠 위에 어른거렸다.
“조금만 더 늦게 깰 것이지.”
그랬다면 막 달려온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텐데. 조막만 한 발로 도도도 달려온 아기를 안아 올리며 빙그르르 한 번 돌려 줬을 텐데.
하필 꺄르륵 웃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깨 버려서.
“눈치도 없는…….”
탁, 탁.
“……?”
그러나 그의 짜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귄터는 복도에 넘실거리기 시작한 옅은 조명 빛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벌써 처형 시간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 안 잔 느낌이었는데, 사람이 찾아온 걸 보면 최소한 날이 밝은 모양이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는 건 처형이나 재판이 진행될 거란 이야기지.
“그럼? 나름 전 소성주였다고 재판해 주나?”
“…소성주님.”
“만약 그런 거라면 필요 없다고 해 주게. 사람 모으는 데 쓰이는 인력이 더 아까우니까.”
“…처형도 재판도 아닙니다. 저는 성주님의 명에 따라 소성주님을 석방하려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땅한 추측을 내놓았으나 전부 틀렸다. 기사가 찾아온 이유는 그가 염두에도 두지 않은 가능성, 석방을 위해서였다.
“왜?”
그치만, 대체 왜?
“아들이라고 석방해 줄 사람이 아닌데.”
“소성주님…….”
“아니면 자네, 성주님을 배신하려는 건가? 혹은 성주님이 갑자기 급사할 위기에 처했다거나? 아, 그래. 노친네가 간밤에 어머니 꿈이라도 꿨다 그러던가? 당신 아들이에요, 훌륭하게 키워 주세요. 그 소리라고 지껄이셨대?”
생각해도 생각해도 석방으로 결정 난 이유를 알 수 없다. 귄터는 진심으로 의아해져서 질문을 와다다 던졌다.
그때마다 조명에 비치는 청옥기사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는 거라고는 상상 안 하십니까?”
“그 사람이 그런 걸 조사할 정도로 내게 관심이 있을 리 없잖나.”
그런 걸 알아볼 사람이었다면 애시당초 이곳에 갇히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므로 무죄 석방일 리는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제가 성주님을 찾아가 고했습니다.”
“괜한 일을 했군. 죽어도 상관없었는데.”
“소성주님.”
“그래도 고맙네. 자네가 이 정도로 날 신경 써 줄 줄은 몰랐군.”
역시나, 그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대처한 게 아니었다. 하기야, 그 남자에게 그 따위는 오해로 보내 버려도 상관없는, 있으나 마나 한 가치의 존재일 테니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래서, 난 이제 뭘 하면 되나.”
“…성벽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래도 스물여덟 평생 고등교육을 받은 몸이다. 살렸다면 어떻게든 써먹으려고는 할 터.
그런 점에서 귄터는 성벽으로 오라는 명령에 의구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드십시오. 아무것도 못 드셨을 거 아닙니까.”
“어디서 가져왔나?”
쌓인 과제로 인해 밤샘한 그에게 가차 없이 일거리를 가져다주는 인간이 새삼 챙겨 줬을 리는 없다. 그러니 이건 분명 누군가의 몫을 떼 온 것일 텐데…….
“자네 건가, 설마?”
“…드십시오.”
“하, 자네나 먹게. 수석기사야말로 가장 신경 써서 먹어야 할 사람인데 무슨…….”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드십시오.”
귄터는 사파이어가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딱딱하게 말하는 그 앞에서 두 번 이상 거절하진 않았다.
아무렴 애써 참고 있지만, 그는 정말로 배가 고픈 상황이었다. 음식 냄새가 나는 주머니 자체를 전부 물어뜯고 싶어질 정도로.
“아까운 짓을 했어.”
그는 도수가 없다시피 한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딱딱한 빵을 입에 넣었다. 주머니에 담을 수 있는 것만 가져왔기에 빵을 적실 스프는 없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다.
“직접 온 것도 이것 때문인가?”
“…저는 소성주님의 호위기사입니다.”
“그 이전에 성주님의 기사지. 이런 짓 해 봤자 미운털밖에 안 박히는 거 알면서 왜 그러나?”
그러나 그 달콤함도 오래가진 못했다. 손바닥보다 크던 흑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부스러기만 남았다. 배는 아직도 고팠다.
“와중에 에릭식톤의 저주라는 건 참 지독하군.”
배가 든든한 기분이 들다가도 더 먹고 싶다는 사고가 머릿속을 먼저 채우다니. 부정적으로 참 놀라운 저주다.
귄터는 그런 상념과 함께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하나하나 핥았다. 문득, 손을 뜯어 먹으면 배가 차지 않을까란 상상이 잠깐 들었다.
“…이거, 왠지 이상한 생각 하는 자가 나올 것 같은데.”
“예?”
“자기 몸을, 어쩌면 남의 몸을 뜯어먹으려 드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어.”
기사교육을 받으며 참을성이 늘어난 편인 그조차도 이러는데 민간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이걸 몇백 년 동안 이겨 내 왔을 북쪽의 사람들은 얼마나 독종인 건가.
귄터는 눈썹을 찌푸린 채 성벽을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땡─ 땡─ 땡─
동시에, 악마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귄터와 수석기사의 다리가 계단을 성급히 올랐다.
“성주님은 어디 계시는─”
그리고 성벽에 막 올랐을 때, 떠오르는 해에 의해 연보랏빛으로 물들고 만 서쪽 하늘이 시야 대부분을 채웠을 때.
그는 성주를, 그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근본이 될 수 없다는 건 알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버림 패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의 옆에는 에메랄드 경이 서 있었다.
“불쾌하구나, 정말로.”
서걱!
호박색 칼날이 성주의 목을 쳤다.
* * *
“으음…….”
“깨셨습니까?”
“…아, 네.”
아탸와 친구였다던, 그리고 병사에게 전해 듣기로 현 뮌문트의 소성주라던 이가 떠나간 후, 나는 밤새 고찰을 이어 나갔다.
“일찍 깨셨군요.”
“잠이 없는 편이라…….”
물론 깨 있다고 해서 정말 눈 뜨고 생각을 이어 나간 건 아니다. 오랫동안 깨어 있는 게 감시병의 눈에 어떤 식으로 비칠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하물며 겨우 친분을 쌓았단 감시병은 교대로 인해 자정에 떠나기까지 했다. 나는 새로운 감시병의 성향을 모르는 상태에서 굳이 도박수를 던지진 않았다.
“창문을 열어도 될까요?”
대신 일찍 깬 것을 가장해 한번 찔러는 보았다. 창가 사이로 어슴푸레 들어온 빛이 병사의 묵적한 얼굴을 비춰 주었다.
아무래도 전임자보다 더 엄격한 성격이지 않을까 싶다.
“열어 드리겠습니다.”
별개로 창문을 여는 것 자체는 허락해 주었다. 마법사인 점을 너무 경계하는 바람에 졸지에 하나부터 열까지 남들이 대신 해 주는 호사를 누리게 됐지만, 아무튼 원하던 건 이뤄졌다.
열린 창문 사이로 새벽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직 동트기 전 하늘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검푸른색이다.
“시원하다…….”
공기의 온도도 딱 그 정도였다. 춥진 않지만 남아 있던 몽롱함을 가시게 해 줄 정도는 되었다. 졸고 생각하고 졸고 생각하고를 반복하던 머리가 맑아졌다.
“몇 시쯤 되었을까요?’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되, 몸을 완전히 일으킨 상태에서 조용히 질문했다. 창문을 열고 제자리로 돌아가던 병사가 잠시 침묵했다.
“곧 동이 틀 겁니다.”
그걸 물은 건 아닌데… 나는 혹시라도 옆으로 퍼졌을 앞머리나 옆머리를 정리하며 질문을 고쳤다.
“아침 배식은 언제쯤 이뤄질까요……?”
식욕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밤을 새워서 그런지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특히 전자의 경우는 인벤토리에 의지할 수라도 있지, 후자는 인벤토리에 남은 여분조차 없어 이쪽의 배급이 아니면 해결할 구석이 아예 없었다. 하므로 아침 배식 시간은 중요했다.
“병사의 경우 동트고 난 후 식사가 주어집니다. 마법사님도 그때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 나는 곧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안도하며 이불에서 몸을 꿈지락거렸다. 크게 스트레칭하긴 뭐하고, 계속 가만히 있긴 뻐근해서 한 일이었다.
경계하던 병사가 내 의도를 눈치채고 다시 몸에 힘을 풀었다.
“저…….”
그쯤 되어서, 나는 또 한 번 찔러 보기로 했다. 무난한 어조와 평화로운 얼굴을 가장한 채 내뱉는 말은 내게 있어 제법 중요한 것이다.
“혹시 리챠 씨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소성주와 대화를 나눠본바 나는 그에게서 얻을 만한 정보가 더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소성주가 아는 것이 실종 전 과거에 국한된다는 점도 있지만, 소성주란 인물 자체의 허들이 너무 높았다.
“치료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후 경과는 듣지 못해서…….”
보다 정확히는, 사람 자체는 부탁하면 추억팔이 해 줄 것 같긴 한데,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전 단계가 너무 어려워 보였다. 소성주란 직위에다가 상황이 이 모양이니 당연했다.
“…돌려 드려야 할 것도 있고. 역시 안 되겠죠?”
“…예. 물건 전달까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식은 교대 후에 상황이 되면 전달드리겠습니다.”
하여 차선으로 아탸가 조카라던 리챠 씨를 노릴까 했는데… 소식 전달까진 돼도 물건 전달까진 안 되는 걸 보니 만나는 건 더 안 될 듯하다. 나는 곤란해졌다.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 난처함이 내 앞길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들은 이야기로 추론해 본바, 뮌문트에서 얻을 정보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수준이었으므로.
“…창가 쪽을 보고 서 있는 건 괜찮죠?”
“가까이는 가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아무렴, 진짜 악마기사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뭐 하나? 그들이 진정 다 죽었다면, 결국 내가 진짜 악마기사와 거래할 만한 건 없는 셈인데.
진짜 악마기사가 행복했던 과거사를 털어 봤자, 악마와 어떤 거래를 했고 어떻게 나를 불러 왔는지에 대한 단서도 없을 듯하고.
하니 여기서 쓸 만한 걸 굳이 고르자면…….
땡─ 땡─ 땡─
…이곳이 위협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
나는 도시 전체에 퍼지는 종소리와 굳어 가는 감시병의 얼굴, 창가 너머 분주해지는 성벽, 그리고 다시 불붙기 시작한 몸속의 열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어쩔래?’
고향의 위기 앞에서도 당신은 침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