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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82화 (282/389)

282화 내게 말해 줘 (12)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귄터는 병사를 내쫓아 낸 후,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마법사가 깜짝 놀라며 움직이려 했지만 대충 손으로 거절했다. 피 토하며 쓰러질 만큼 아픈 사람을 부려 먹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뮌문트는 수석기사에게 보석의 이름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다. 아나?”

“…아뇨, 몰랐습니다.”

“그렇군.”

마법사들은 알면 잘난 척,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게 공통된 특징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건 전부 마탑 소속 한정이었나 보다.

귄터는 호기심을 닮은 녹안을 두고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는 수석기사에 한해, 그 기사가 가진 특징을 고려해 보석의 이름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다. 남옥기사, 청옥기사, 취옥기사, 홍옥기사 등등.”

물론 여기서 말하는 수석기사는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한 (견습)기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식기사로서 뮌문트에 봉사하는 자 중, 지휘권을 얻거나 압도적인 실력을 증명해 내 계급이 올라간 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수석기사에게만 주는 영예기에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아. 당대에 많아 봐야 5명, 적을 때는 2명 정도밖에 없지.”

“그렇군요…….”

“그리고 아탸는 5년 이내에 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던 장래 유망한 기사였다.”

“…….”

“사실, 그럴만도 해. 기사학교에 재학하던 내내 수석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졸업 후엔 듀라한을 단신으로 사살하기까지 했으니까.”

듀라한은 바탕이 되는 육신이 생전에 어떤 기사였는가에 따라 공략 난이도가 달라지는 악마다.

하나 그중 질이 떨어지는 듀라한조차도 통상 현역기사 셋, 못해도 둘은 달라붙어야 상대가 가능하다고 전해진다. 육신이 타락하는 과정에서 피부가 돌덩이처럼 단단해지고 근력이 서너 배 상승해 버리는 까닭이다.

“그때 이름을 받지 못한 이유도 단순히 경험 부족이라는, 갓 졸업한 기사라면 피할 수 없는 부분 때문이었지, 다른 결격 사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졸업한 기사가 듀라한을 죽였다. 견습기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굉장히 약한 축에 속한 듀라한이었단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듀라한은 약해도 듀라한이고, 당시의 아탸 또한 경험 부족한 풋내기였던 건 매한가지였으므로.

“그래, 녀석은 보석이 될 자격이 충분했어. 금록석이 될 것이냐 감람석이 될 것이냐가 문제였을 뿐.”

크리소베릴, 페리도트. 아탸의 녹갈색 눈과 두 보석의 색상을 고려하면 무엇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여 귄터는 녀석이 보석의 이름을 받을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받기도 전에 죽을 줄은 몰랐지만.”

녀석이 죽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귄터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는 이 앞에서 눈을 잠시 감아 보였다. 추억이 잠깐 그를 스쳐 갔다.

“…참고로 아탸의 집안은 기사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호박의 이름을 받은 수석기사이고, 본인은 앞서 말했다시피 차기 수석기사 감인. 심지어 학교를 졸업하며 막 정식기사가 된 둘째나 기사가 되기 위해 학교를 다니던 셋째까지 있는 집안이었지.”

둘째, 앨랴의 경우 아탸만큼의 활약상을 보인 적은 없다. 그녀가 졸업을 마치고 막 부임한 해엔 악마들이 잠잠하여 전장에 나설 일이 없던 탓이다.

그렇지만 재학 기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은 건 아탸와 똑같았다. 어쩌면 그녀 또한 차기 수석기사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파샤 역시 입학시험을 최고점─역대 최고는 아니었지만─으로 통과하며 한 핏줄임을 증명했고 말이다.

“막내의 경우는 너무 어려서 재능이고 뭐고 크는 게 우선이었지만… 아무튼 그들 일가는 성주의 총애를 받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자랑하는 편이었다.”

설령 셋째가 졸업에 실패하고, 막내가 기사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한 집안에서만 기사가 셋이다. 그런 집안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었다. 막내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주님이 빌려준 별장에 갔다가 그대로 실종됐거든.”

앰버 경은 늦둥이 막내를 참으로 아끼는 사람이었고, 나이 먹은 자식들도 어리디어린 막냇동생을 퍽 귀애하는 편이었다.

하여 그들은 막내의 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하고자 휴가를 청했고… 성주는 자신의 별장을 빌려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뮌문트에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의 별장이었다.

“실종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별장째로 송두리째 사라져서 도저히 단서가 될 게 없었어.”

“…….”

“하지만 악마의 짓은 아닐 거다. 거긴… 그 별장은 악마들의 습격을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거든.”

뮌문트에서 그나마 넓은 평야를 농지로 개간하고. 거기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의 마을을 만들고. 농지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과 경계초소, 연락용 마법사들을 상주시키고.

그러고 나니 경치가 제법 좋아, 마을 변두리 언덕에 오두막을 지어 별장 삼은 곳이 거기였다. 본래 성주 본인이 쓰려고 한 것인 만큼 안전성도 제법 뛰어났다.

그곳은 악마가 쳐들어가는 것보다, 뮌문트가 악마의 존재를 알아채고 대응하는 게 더 빠를 위치였단 거다.

“습격을 받아 봤자 길 잃고 새어 나간 악마 한두 마리 정도였을 텐데… 수석기사 하나와 예비 수석기사 하나, 정식기사 하나, 견습기사 하나가 설마 그걸 못 잡겠나? 그러니까… 그러니까 악마는 아니었을 거다. 악마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만, 악마가 아니면? 악마가 범인이 아니면 누가 범인이지?

설마 그들 스스로 오두막을 부수고 사라졌다는 건가?

“…악마는, 아니었을 텐데.”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오두막과 털끝조차도 다치지 않은 마을 사람들. 굉음을 듣기는 했으나 특별한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다는 목격담.

귄터는 충동적으로 고한 과거 앞에서 또다시 괴로워했다. 무엇을 상정해도 나타나는 모순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잊고 싶진 않은데 떠올릴 때마다 이다지도 미어진다. 어렴풋이 본 옆모습 하나에 지나가는 사람을 쫓고, 끝끝내 놓쳐 절망하기를 반복하던 언제나처럼.

“…그분과 많이 친하셨나요?”

“…친했냐고?”

그리고 이런 순간에도 배는 고프다. 내가 살아 있다고, 아직도 살아 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그렇게 배가 고프다.

“그들은 내 가족이었어.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고.”

“…….”

“아탸도, 앨랴도, 파샤도, 리냐도… 앰버 경과 그 부인도. 전부 내 가족이었어…….”

귄터는 기도하듯 깍지를 낀 채 얼굴을 묻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던 마법사의 얼굴은 신체에서 올라오는 고통 때문인지 살풋 일그러진 채다.

“…이제 호기심은 해결됐나?”

그렇지만 남을 걱정하기엔 제 앞가림부터가 문제인 사람이 바로 그였던지라. 귄터는 마법사에게 괜찮느냐 묻지 않았다. 여기서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결됐다면, 사람들에게 아탸가 누군지 묻고 다니지 말게. 대부분은 아까 그 병사처럼 답하겠지만… 누군가는 나처럼 괴로워할 테니까.”

아, 배가 고팠다.

* * *

귄터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성으로 돌아왔다.

“제가 먼저 가시지 말라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뒤쫓아 온 호위기사가 힐난했으나, 그는 눈길만 힐끗 주곤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과할 기력마저 없었다. 목이 마르고, 그저 허기졌다.

“…소성주님.”

“또 무슨 일거리가 생겼기에 여기까지들 와 있나? 일단 들어오게.”

귄터는 대신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힘없이 나아가는 다리는 응접실 겸 집무실로 들어가는 중이다.

“배급 과정에서 지시에 따르지 않고 음식을 빼돌리려던 병사가…….”

“마을 주민 중 일부가 폭동을…….”

완전히 들어가서 보고를 받는 것도 시간 아까운 일이다. 그는 보고하러 온 이들을 돌아가며 옆에 세웠다. 우수수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이미 예상했던 것들이다.

“저주의 영향이 있다곤 하나, 이 정도 인내심도 없는 자들을 계속 병사로 쓸 수는 없다. 그들에겐 규율에 따라 엄격한 처벌을 내린다. 또한 주민들의 경우 폭동을 주도한 자를 찾아…….”

그는 말을 잇다 말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목이 말라서 침조차 마른 것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말을 좀 많이 해서 입이 마른 것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늘 물을 얼마나 마셨지?”

“배급량보단 적게 드셨습니다. 가져오라 할까요?”

“…아니, 됐네.”

귄터는 잠시 고민하다가 끝내 거절했다. 참을 수 있을 만큼 목이 덜 말라서는 아니고, 단순히 심부름꾼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병사마저 음식과 물을 빼돌리려 드는데, 고용인들까지 아니 그러란 법 없지. 그들이 중도에 빼돌릴 가능성을 고려하느니, 나중에 병사를 시키거나 직접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아.”

거기에 안 그래도 배고파서 힘없는 사람들, 괜히 시켜 먹었다가 광기에 먹혀서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귄터는 반드시 남겨 둬야만 하는 성내 인력을 계산하며, 그외 인물에겐 휴가 내릴 것을 다짐했다. 똑같이 배가 고프더라도 집에서 가만히 쉬고만 있다면 버티긴 수월할 것이다.

“으음… 그럼 저라도 물을…….”

“미쳤나? 일이나 하게.”

“식사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하면 돼. 신경 끄게.”

병사를 시키는 것도 과분한 일에 수석기사를 써먹을 순 없다. 귄터는 단번에 거절했다.

“성내 경비도 축소하는 게 낫겠어. 좁은 부위에 몰려 지내면 경계에 쓰이는 인력도 줄겠지.”

대신 그는 방금 떠올린 생각에 맞춰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기사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건 이미 성주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아, 그런가? 혹시 일하는 사람들 휴가도?”

“예.”

“어쩐지 성에 사람이 덜 보이더라니…….”

“성주님께서 워낙 혜안이 탁월하시잖습니까.”

“…그렇지.”

그 노친네가 일 하난 잘하긴 한다. 에릭식톤에 대항하는 건 그나 성주나 똑같이 처음일 텐데, 맞춰서 대비하는 속도가 정말 남다를 정도로.

“…도저히 따라 할 자신이 안 들 정도로 시야가 넓은 분이지.”

이런 사람이 성주기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인데…….

귄터는 노친네가 했다는 일들을 들으며 가슴을 괜히 두드렸다. 도시에는 분명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 속이 답답하고 입맛이 떨어졌다.

“나쁘진 않네.”

“예?”

입맛이 떨어지면 밥도 덜 먹겠지. 귄터는 꾸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한 뱃가죽을 외면한 채 몇 개의 일을 더 보고받고 처리했다. 시계의 시침이 기어이 12시를 넘겼다.

“배고파.”

다만, 입맛이 떨어져도 배는 고팠다. 귄터는 결국 인간의 한계에 굴복했다.

“병사를 시켜 식사거리를 가져오게 할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병사들의 저녁 배급 시간은 7시다. 그리고 지금은 12시, 저주가 아니더라도 배가 살살 고파 올 시각이다.

한데 그런 시간에 나눠 줄 것도 아닌 먹거리를 가져오라 시킨다? 이것만큼 악독한 짓도 얼마 없을 거다. 귄터는 가련한 병사를 대신해 차라리 직접 가기를 택했다.

“자네도 여기 있게. 움직이는 것도 기력 소모야.”

“하지만 안전이…….”

“이 경계를 뚫고 온 자가 있으면 성주님을 죽이겠지, 설마 나를 죽이겠나? 그냥 있게. 자네도 체력을 아껴야 할 상황 아닌가.”

“…빨리 오십시오.”

어차피 멀지도 않아서, 딱히 문제 될 일 없는 선택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성주님.”

“이게 무슨 짓이냐 물었다.”

변수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야밤에 순찰을 돌던 성주와 맞닥뜨린 순간, 귄터의 표정이 흐린 하늘처럼 굳었다.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상황에 남몰래 식량을 훔쳐 먹으려 들어? 그러라고 그 자리에 올려 준 줄 아느냐?”

“…저는, 훔쳐 먹으려 한 것이 아니라─”

“같잖은 변명은 필요 없다. 입 다물고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라. 네가 너의 이름 앞에 붙은 직함을 떼고 일벌백계의 사례로 쓰기 전에.”

귄터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변명이 듣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제 말을 듣기 싫으신 거겠죠, 무능한 후계자니까. 본인 하는 것의 반의반도 못 따라오는 머저리 새끼니까.”

울컥 올라오는 감정은 선명한 언어로 정제되어 한 자루의 칼날이 된다.

“…너!”

“그런데 그 멍청이를 이 자리에 올린 사람이 당신이잖아. 다른 사람 물려주라고 골백번 처말해도 안 들은 건 당신이잖아.”

다만 칼날을 아무리 쏘아도 쏘아도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했을 텐데! 그래서 어떻게 성주가 되겠다고……!』 그는 뇌를 휘젓는 기억과 감정을 두고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안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냥 기사만 되겠다고─!』 언젠가 얻어맞은 뺨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됐어요. 들어 줄 생각 없는 사람한테 말해 뭐 해.”

“너, 너…….”

“그러니까 그냥.”

탈력감과 함께 주먹이 펴졌다. 점심 때부터 물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위장은 마치 쪼그라든 것처럼 아프다.

“그냥 일벌백계의 사례로 쓰세요.”

배가 고팠다.

배가, 정말로 고팠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아뇨.”

배가 너무 고파서.

“그냥, 이쯤 돼야 당신이 어머니를 버릴 것 같아서.”

가슴이 허했다.

귄터의 고개가 떨어졌다.

“…끝까지 내게 실망만 주는구나.”

글쎄. 그건 이쪽에서 해야 할 말이 아닐까? 귄터는 변명조차 들어 주지 않는, 않을 사람의 말을 두고 왼손을 본인의 목과 뒤통수에 얹었다.

점심 때부터 밥도 안 먹은 사람한테 너무하다느니, 도시에 대한 건 그리도 잘 알면서 아들이 뭘 하고 다녔는지는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느니… 그딴 말들은 대충 마음 어딘가에서 흩어졌다. 어차피 들어 주지 않을 사람, 말해 봐야 구차해지는 건 그였다.

“감옥으로 가자.”

대신, 그는 분노한 성주의 얼굴을 피해 그 옆에 있던 병사를 툭 쳤다.

병사의 안색이 시퍼래졌으나 귄터는 철회하지 않았다. 뮌문트의 군법에 따르면 식량을 빼돌리려 한 자는 발각 즉시 감옥에 갇히고 최대 사형까지 갈 수 있는, 아니 대부분 사형이 떨어질 재판을 기다려야 했다.

“서, 성주님…….”

“감옥으로 데려가라.”

“하지만 소성주님인데…….”

“소성주이기 이전에 군법을 어긴 병사다. 아니면 너도 항명하고 싶나?”

또한 그러하므로, 그는 감옥에 갈 것이다. 귄터는 자진해서 성 지하, 냉기가 흐르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아, 마법사에게 고용될 것인지 말 것인지 물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하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이미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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