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내게 말해 줘 (10)
“마법사라고.”
귄터는 치료받은 병사의 말을 들으며 누워 있는 이를 힐끗 보았다. 병사의 증언을 토대로 ‘마법 과용으로 인한 과부하 및 혼절’ 진단을 받은 이는 현재 반나절이 넘도록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상태다.
쓰러질 때 피를 왈칵 토해 낸 것에 비하면 참으로 태평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진찰을 위해 나섰던 마법사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랍니까!? 속이 완전 대차게 꼬였는데?!’라고 비명을 지른 시점에서 육신 내부는 마냥 평온한 상태가 아니겠지마는, 어쨌든.
같은 진단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꽥꽥대거나 사지를 파들거리는 것에 비하면 겉보기엔 평안한 낮잠이 맞았다.
“마법사치고 참 건장하네.”
“…여행자가 빼빼 마른 것도 있어선 안 될 일이라 사료됩니다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각설하고, 귄터는 상대의 정체를 두고 조금 고민을 했다. 골방에 박혀 연구만 하는 마법사와 장대한 골격은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여행자치고도 몸이 지나치게 발달된 느낌이란 소리였어.”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용병 일을 한다면 저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떠돌이 마법사라고 해서 싸울 일이 없진 않을 테니 분명 몸도 자주 썼을 텐데.”
“으음…….”
한데 구함받으면서 들은 게 있는 건지, 아니면 도움받으며 친밀감이 많이 쌓인 것인지.
그들 간에 존재하는 계급 차에도 병사는 다소 필사적으로 마법사를 옹호해 주었다. 평상시의 귄터가 소의 없이 병사들을 대하고, 자신이 가진 지위를 내세우는 편이 아님을 고려해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많이 친해졌나 보네?”
“…죄송합니다, 소성주님.”
“아, 아냐아냐. 절하지 마. 눈치 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니까. 나라도 악마가 바글바글한 숲을 같이 헤쳐 온 전우가 의심받으면 변호해 줄 텐데, 뭐.”
더구나 하는 말이 달리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니 뭐라 할 의향까진 없다. 단지 저렇게까지 마법사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그리고 여전히 ‘정말 그런 걸까?’라는 의문점 따위가 궁금할 뿐.
“…손을 보면 좀 좋겠는데.”
“예?”
“아니야.”
상의를 벗겨 보거나─진찰 때는 벗길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손목의 맥만 잡으면 그만이었으므로─손에 박인 굳은살의 형태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뭐라 확신이 설 것이다.
하나 전자는 너무 변태 같고, 잠든 사람의 장갑을 벗겨서 손을 확인하는 짓도 예의에 어긋난다. 귄터는 자신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호기심을 최대한 억눌렀다.
움찔. 상대가 드디어 움직였다.
“깨어났나. 그럼 너는 일단 가서 쉬도록.”
“…예.”
마법사가 깨어났다면 더는 병사를 문초할 필요 없다. 그는 병사가 쉴 수 있도록 보내 준 후 마법사가 온전히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약간의 침음을 흘리고, 밀빛 속눈썹이 움직였다. 그것이 살짝 뜨였을 때 흰자위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창가로 스며든 햇빛에 의해 색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아.”
또한 그마저도 다시 가려졌다. 본인의 눈가를 손으로 덮은 이가 “아?” 따위의 소리를 흘리더니 다른 손으로 주변을 더듬더듬 짚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안경은 오른쪽 협탁에 있다.”
“……!”
어머니가 안경을 끼고 사셨기에, 깨자마자 안경을 찾는 이의 심정은 조금이나마 안다. 귄터는 친절을 베풀어 그것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상대가 곧장 오른쪽 협탁을 찾아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렸나 하고 놀랐네요.”
드디어 안경을 찾은 이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인사를 해 왔다. 막 안경이 씌워지는 눈은 녹색이었다.
아깐 눈 색이 저것보다 더 옅었던 것 같은데. 귄터는 얄팍한 위화감을 느꼈다가, 금세 내버렸다. 문장으로조차 정제되지 않을 얄팍한 의구심은 녹색 눈과 밀빛 머리가 자극하는 과거의 향수에 비했을 때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돌아 버릴 정도로 닮았군.”
“예?”
“그치만 아니네.”
진정 아탸였다면 저렇게 얼빠진 소리는 안 냈을 거다. ‘그럴 리가요. 이 잘난 얼굴이 세상에 둘이나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그딴 말이나 실실 내뱉겠지.
“…그래. 이제 와서 돌아올 리 없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미 예상한 결과임에도.
귄터는 조금 우울해졌다. 아탸의 머리는 곱슬거리지 않고, 저보다 좀 짙으며, 안경을 쓰지 않고, 마법 따위 조금도 쓸 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대를 걸어 본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이봐, 너.”
그는 그만큼 친남매나 다름없었던 앰버 경의 사남매가 보고 싶었다.
“아, 네.”
“신분을 증명할 것이 있나?”
“…아니요.”
“역시 그렇군.”
하나 그 감정에 젖어 일을 완전히 미뤄 둘 수도 없다.
아무렴 공에 사감을 담는 시점에서 그는 좋은 성주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법이지 않나.
귄터는 우울함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을 일 속으로 밀어넣었다.
“하면 너는 이 도시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본래라면, 그렇다.”
여즉 상태가 좋지 않은지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 뮌문트의 병사에게 협력한 공이 있고, 마법사라는 증언이 있는 바. 현 시점의 특수함을 고려하여 그대가 뮌문트에서 지내는 것을 일시적으로 허가할 예정이다.”
그것이 묘하게 어려 보여서─덩치는 그보다 큰데도 불구하고─귄터는 저도 모르게 말투를 유하게 바꾸었다. 정말 무의식에서 행한 일이었다.
“단, 이것은 일시적인 허가이며, 자유를 허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대는 마법사고, 지금의 뮌문트는 전시 상태이므로 당연한 절차다. 불만은 없으리라 믿겠다.”
이제 보니… 아탸보다는 파샤를 더 닮은 것 같기도 하네.
귄터는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가 보기에도 정말 뜬금없고 어이없는 상념이었다.
“해서 그대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시 상태가 끝날 때까지 경비대의 감옥에서 지내는 것, 두 번째는 마법사로서 이 도시에 고용되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앰버 경의 갈빛 머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탸와 달리 동생 파샤의 머리색은 차분한 회색이었다. 눈동자조차도 머리색과 같은 회색이어서 저 녹안과 비벼 볼 구석이 없었고.
“물론 경비대의 감옥에 갇힌다고 해서 범죄자의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식사는 매 끼니 주어질 것이며, 침대 또한 병사들이 쓰는 것과 동일한 것을 내줄 것이다. 경비대의 재량하에 약간의 자유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대가 감시하에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니까.”
물론 이목구비는 닮았다. 아탸와 파샤가 형제이고 저 청년은 아탸와 썩 닮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고용을 받아들인다면…….”
함에도 이상하게 파샤가 떠올랐다. 처음엔 아탸만이 연상됐지만, 한번 떠올린 후에는 파샤의 압승이었다.
“그런다면…….”
예컨대 조그만 파샤가, 아버지처럼 되겠답시고 동그란 뺨을 바짝 굳히고 살던 꼬맹이가 어른으로 자랐다면. 거기서 머리색과 눈 색만 바뀐다면. 혹은 저 청년이 휴델렌에서 스쳐 갔던 인연 한 자락처럼 잿빛의 머리를 가졌다면.
아마도 저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최대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내가 편의를 봐주지.”
그냥 막연히 그런 상상이 들고 말아서.
귄터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던 소년을 떠올리며 입 안쪽을 깨물었다.
망할, 아탸에 이어 파샤랑 리냐도 보고 싶어졌다. 둘째인 앨랴도. 그들과 함께 집에서 기다려 주시던 앰버 경의 부인도. 언제든 문을 열어 주던 앰버 경도, 전부.
“…편의를 봐주신다고요.”
그러나 그리움이 너무 짙어 말실수를 해 버린 모양이다. 귄터는 상대의 읊조림에 아차 싶어졌다.
“악마들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만큼, 싸울 수 있는 인력은 많아서 나쁠 게 없으니까. 거기에 병사 하나를 데리고 저 포위망을 뚫을 정도면 보통 실력이 아니란 것인데, 그런 마법사에게 무슨 편의인들 못 봐주겠나? 결국 서로에게 호혜적인 일이 될 텐데.”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어떻게든 포장은 했다. 귄터는 청년의 고민하는 얼굴을 두고 선택을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뮌문트에 해가 되진 않을 인상이네. 노친네에게 들켰다가는 ‘섣부른 판단은 말랬을 텐데!’ 하며 노호성을 들었을 거란 생각과 함께였다.
“저… 마음 같아선 후자를 택하고 싶습니다만.”
“싶습니다만?”
그러다 청년이 입을 열었다. 유한 인상이 약간의 난처함과 곤란함을 담은 채 웃었다.
“마법을 너무 과하게 쓴 부작용인지 마력 조절이 영 안 됩니다…….”
“아.”
그건 그럴 수 있지. 마법 과용으로 인한 신체의 과부하는 꽤 오래가는 걸로 알고 있다. 청년의 경우는 간신히 죽음을 피한 상태라는 소리도 들었고.
해서 귄터는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참작해 줄 수 있다. 애당초 당장 마법사로서 전력이 되어 줄 거란 기대도 안 했고.”
“그렇습니까?”
“아무렴, 마탑에 소속되지도 않고, 인증된 것도 없는 마법사에게 뭘 믿고 일을 맡기겠나? 최소한의 검증 절차는 밟아야지.”
“…어.”
“어차피 믿고 맡기려 해도, 그대가 쓸 수 있는 마법은 파악하고 나서 배치를 결정해야 한다. 하니 고용될 의향이 있다면 마탑의 마법사를 데려오도록 하겠다. 마법은 못 써도 지식의 깊이는 시험할 수 있을 테니까.”
마법사에 따라 공격 마법 전문이 있고, 방어 마법 전문이 있고 아무튼 천차만별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검증 절차는 필수인 법. 그걸 꼬집어 주니 청년의 표정이 좀 더 창백해졌다.
떠돌이 마법사라서 그런가, 이런 쪽의 지식은 전무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인 박한 대우도 얼떨떨하게 느껴졌으련가. 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다. 악마숭배자인 마법사가 도시에 들어와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끔찍할 정도로 많았다.
그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야만 만일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어서 이러는 거란 거다.
“저녁까지 고민할 시간을 좀 더 주겠다.”
그래도 좀 어려 보이고, 이런 일을 겪어 본 적 없는 눈치니까 조금은 풀어 주는 게 낫겠지. 이리 몰아쳐 봐야 긍정적인 답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바깥에 하나, 들어와라.”
“예.”
“마법사, 이쪽은 그대를 감시할 병사다. 또한 감시병에게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노라 보고가 들어오는 즉시 그대는 처형될 가능성이 있다. 아무쪼록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협조해 주길 바란다.”
“…아, 네.”
“…그 몸 상태로 어딜 나갈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으나, 혹시 모르니 말해 두는 거다. 방에서 나가지도 말고 수상하게 굴지도 마라. 그러지만 않으면 그대는 나름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
귄터는 덩칫값 못 하게 순해 보이는 마법사를 두고 눈을 데굴 굴렸다.
진짜 무해해 보이네. 노친네가 들었다면 ‘인상만으로 사람을 파악하려 들지 말랬을 텐데!’라는 호통이 날아올 소리가 그의 마음속에 잠시 울려 퍼졌다.
뭐, 그 양반이 아무리 귀신 같더라도 마음속 소리는 못 들으니 결과적으론 상관없겠지만.
* * *
[예상대로 인간 쪽 전력이 집중되고 있어.]
나태 또는 듀크. 꿈과 태만의 주인이 나귀 위에서 작게 읊조렸다. 바로 옆에서 그 말소리를 전해 듣는 자는 키메라가 짊어진 가마 위에 꼿꼿이 앉아 있는 채다.
[뭐, 이렇게나 대놓고 친다? 칠 거다? 도발하고 있으니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싶지만.]
저 가마 참 부럽네. 듀크는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이내 포기했다. 가마 자체를 구해 오는 거야 쉽지만,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가마를 끌어 줄 키메라를 만드는 건 굉장히 귀찮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니 그렇게 노동할 바에야 이미 구한 권속을 계속 타고 다니는 게 덜 귀찮겠지. 여차하면 수레 같은 걸 연결해도 되니까.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듀크는 그런 마음으로 나귀 위에서 완전히 늘어졌다. 찰박. 나귀가 대지를 밟는 순간, 대지 위에 한층 덧씌워진 것이 사방으로 튀었다.
[얘네들 전부를 바쳐도 좀 부족할 것 같은데?]
그것은 바로 피. 혈천을 이루고 혈해를 고이도록 하려는 아주 많은 피였다.
[부족한 것은 채우면 그만이다.]
[무엇으로? 오, 설마 나를 제물로 바칠 거란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 내가 너보다 약한 건 사실이지만, 순순히 죽어 주진 않을 거니까.]
빠각. 나귀가 또 한 번 발을 내딛고, 무언가를 밟아 바스라트렸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복하란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잡것들의 뼈와 살점이었다.
[걱정 마라, 게으른 것아. 네 존재는 제물로 쓰이는 것보단 살아 인간을 괴롭히는 데 쓰이는 것이 좀 더 가치가 있으니.]
[…그거 다행이네.]
한데 그것이 불쌍한가? 그렇진 않았다.
듀크 자신조차도 소모품으로 써 먹던 게 바로 저급 악마였으므로.
[근데 그러면 뭘 쓰게?]
그렇기에 자신만 제물이 되지 않는다면, 듀크는 아무래도 좋았다. 수백만의 시체 위에서 듀크는 나른한 눈매를 더욱 늘어트렸다.
[네 본연의 힘을 낼 수만 있다면야 저걸 무너트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여긴 마역 바깥이잖아. 대가가 더 필요할 텐데?]
[변수를 창출하고자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함이라.]
[……?]
그러니까 물었다. 대가를 무엇으로 치를 것이냐고.
듀크는 선문답을 두고 조용히 머리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깨달았다.
[잠깐, 너?]
이곳에 제물이 될 수 있을 만한 건 없다. 그들 스스로를 바칠 게 아니라면.
그래, 스스로를 바칠 게 아니라면, 다른 대안 따윈 없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왜?
[벨페고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움을 벌인 지 얼마나 되었지?]
[엄… 좀 오래됐지?]
[그래… 그래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는 승기를 잡았나?]
[…판을 뒤집을 만한 큰 건은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잠식해 오긴 했잖아. 이대로라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분노가 시기와 인색을 죽이기 전이라면, 그랬겠지.]
상대의 말에 나태, 벨페고르는 순간 몸을 떨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악마 하나가 배반하고 둘이 증발해 버린 지금, 승기는 저쪽 세계로 기울어 버렸다.
그들을 제약하는 이신의 힘이 강해지고, 대행자에게마저 직접적으로 계시를 줄 수 있을 만큼.
[나는 오래 기다렸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차라리 포기를 한다면, 그냥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사탄은 내게 약속했다. 이 세상을 정복한 후에는 나의 고향을 내게 선물하겠노라고.]
[…오.]
[더는, 인내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탄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교만 역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벨페고르는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