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내게 말해 줘 (9)
“…저 무겁습니다.”
“괜찮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 입장에서 업기에는 무리란 의미입니다…….”
내 항변에도 리챠 씨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나무에 반쯤 기대 서 있던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어엇.”
순식간에 내 몸이 그의 어깨에 기대지고,─저쪽에서 당겼다─그 상태에서 리챠 씨가 일어났다. 내 몸이 포대 자루처럼 슉 들어 올려지는 건 금방이었다.
뭐 하나 보자 싶었던 감상이 ‘어? 어??’로 변했다.
“…생각보다 더 무거우시긴 하군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 부르더라. 어깨법? 도수 운반법? 군대식 나르기?
뭐 어쨌든, 최소한 공주님 안기는 아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가로로 실린 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러니까 내리겠다고 발버둥이라도 쳤다간 리챠 씨의 허리가 나갈 것 같아서 차마 퍼덕일 수 없었다.
“보기엔 말라 보였는데.”
그거야 옷을 키에 맞추다 보니 품이 남아돌아서 그래 보이는 거고… 실제론 100kg가 넘을 몸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어지간한 저체중이 아닌 이상, 키만 따져도 90은 기본으로 나갈 텐데 나는 여기에 근육까지 붙은 상태니까.
아무튼 내가 무겁다는 건 팩트다. 나보다 작은 사람이, 심지어 산에서 업고 가기엔 확실히 무리일 정도로.
“갑시다.”
하나 리챠 씨는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나는 엉겹결에 그 상태로 끌려갔다. 말로는 설득이 안 되고 실질적으로 반항하자니 상대의 허리가 걱정된 자의 최후였다.
“쿨럭.”
“…조금만 더 버티세요.”
거기에, 리챠 씨가 고생해서 문제지 이건 나한테도 썩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몸과 머리에 열이 올라 걷기 썩 안 좋은 상태인 건 맞는 까닭이다.
“……!”
“죽였으니까, 걱정 마시고…….”
더불어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을 보호하기도 편하다. 나는 허둥지둥 달려오다 우리와 맞닥뜨릴 뻔한 악마를 마력창으로 꿰뚫어 죽인 후, 피를 좀 토해 냈다.
이 상태로 뮌문트 도달하기만 해 봐라. 한때 아크메이지가 그랬듯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안쪽이 진탕되었다고, 그래서 절대절대 못 싸운다고 앓아눕고 말 테다.
마법 과다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신성력으로도 치유가 안 된댔으니─정확히는 안 그래도 진탕된 속에 신성력을 넣으면 더 꼬여 버린다고 했다─거리낄 것도 없다.
나는 단단히 꾀병을 다짐하며 피를 좀 더 토했다.
“…성이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의 기다림 끝에 성이 나타났다.
“악마냐?!”
당연하게도 성벽 위의 경비병들은 우리를 엄청나게 경계했다. 악마들로 바글바글한 숲을 단 둘이서 통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끌어올려! 조사는 나중에!”
그럼에도 우리가 올라갈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의심하느라 성벽 밖에 두고 악마에게 죽게 하느니, 일단 들여보내고 심문하자는 누군가의 판단 덕이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인다.”
물론 성벽 위로 올려 줬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의문이 줄었다는 건 아니다. 나와 리챠 씨는 병사들의 창날에 둘러싸인 채로 천천히 관찰당했다.
“…질답 전에, 마기 해독제가 필요할 것 같군.”
“그럼… 감사하죠.”
다만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주목된 건 리챠 씨의 검은 핏줄이었다. 병사 하나가 뒤로 빠졌다가 조그만 주머니를 들고 다시 왔다.
“감사합니다.”
주머니는 창날에 걸린 채로 전달되었다. 물은 딱히 주어지지 않았다.
“…물.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무언갈 함부로 꺼내면 더 오해받습니다.”
그건… 그렇겠네. 나는 단단히 밀봉된 저주 항아리 따위의 케이스를 떠올리며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사이 리챠 씨가 약을 생으로 씹어 삼켰다.
“사제님.”
“…일단은,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흐음. 그럼 정말 정찰병인가? 소속은?”
그렇게 최소 조치와 최소한의 확인─악마인지 아닌지─이 끝났을까. 우리는 손을 든 채로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응했다.
주로 리챠 씨의 신원을 확인하는 쪽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원래 여기 사람이다 보니 문답은 아주 척척 이뤄졌다.
확고한 정체에 경비대의 적의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옆의 청년은…….”
“잠깐 좀 비켜 봐.”
그때 병사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누군가가 비집고 나왔다. 병사들에 비해 장비가 고급스럽고 암청색 머리카락에 윤이 있는 남자였다.
엄청 높은 사람일 것 같은데. 내 눈치가 상대의 위치를 슬 가늠했다.
“…아탸?”
그마저도 생뚱맞게 튀어나온 단어로 인해 실패했지만.
“…저랑 조카분이 정말 닮았나 보네요.”
“…….”
그보다 아탸는 정말 어떤 사람이길래, 암만 봐도 귀족 같은 사람마저 알고 있는 걸까. 나는 그것에 의문을 품으면서 동시에 팔을 움켜쥐었다. 진짜 아프다. 오두막에서 느꼈던 아픔의 한 2/3만큼.
아니, 그때 그 고통만큼.
“…마법사님?”
“흐…….”
“마법사님?”
손을 들고 있던 리챠 씨가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내 손은 언제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마저도 금세 잊혔다.
“아파…….”
절굿공이로 온몸이 찧이는 듯한 고통이 괴로웠다.
‘뭐 해.’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웃는 소리지?
‘구속이 흔들리고 있잖아, 애송아.’
나는 몸에 힘을 주는 걸 잊은 채, 옆으로 엎어졌다. 기울어진 세상 속에서 몇 개의 말소리가 뭉개진 형태로 울려 퍼졌다. “정──려.” 시야가 희뿌예지며 리챠 씨가 우그러들었다.
‘그도 아니면.’
그리고 그 일그러진 시야 한편에 누군가가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날 내보내 줄 생각이 들었니?’
산양의 두개골뼈가 보였다.
칠흑이 몰려왔다.
* * *
“오늘도 올 생각을 않는군.”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을 두고 기사, 발터는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마의 영역과 그 위를 전전하는 스켈레톤 떼로 가득하다.
“더 모아서 올 생각인 걸지도 모르지.”
“글쎄, 과연 그럴까?”
다만 그것들의 수는 ‘끝인가’라고 한탄하기엔 한없이 적고, ‘안전하다’라고 여기기엔 묘하게 많았다.
섣불리 움직이기도, 완전히 방치하기도 어려운 셈이었다.
“내가 보기에, 저것들은 그저 우리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도록 하는 주박 같네만.”
이 기이한 대치는 언제까지 지속되려는 걸까.
저놈의 악마 새끼들은 진정 시간만 질질 끌려는 건가. 그게 아니면 깜짝 기습을 위해 기껏 모아 둔 병력을 꽁꽁 숨기고만 있는 것인가.
정말이지, 저쪽에서 쳐들어오기 전까진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답답하군.”
“동감일세.”
물론 다른 도시에서 들어오는 정보까지 포함해 판단하거든, 답은 아마도 전자일 확률이 크다.
아무렴 악마라고 해서 저런 짓이 어디 쉽겠는가. 동부 전선 전체에 걸쳐 돌격할 병력이 없는 건 인간도, 악마도 동일한 입장이었다. 몇백 년간 이어져 온 대치가 그것을 증거했다.
그들 사이에 병력이 남아도는 일이 있었다면, 그들은 진즉 다른 한쪽을 괴멸했을 것이다.
하므로 지금 저들이 하는 압박은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기습적으로 남부 전선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로써 한발 빨리 병력을 돌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그런 것.
인간 측 남부 병력이 동쪽에 도착하면 풀려날 뿐인.
“저 녀석들이 노리는 게 정말 동부 전선의 한 곳일까?”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해서 말일세. 진정 동부의 한 곳을 노릴 거였다면 이렇게 전체적으로 압박을 주며 경계심을 올리는 것보다, 도시 한곳만 집중 타격 할 요량으로 몰래 모인 후 한꺼번에 들이치는 게 훨 효과적이었을 텐데……. 저들은 마치 동부를 공격할 것이다, 여길 공격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집중해라. 뭐 이렇게 시위하는 것 같지 않은가.”
“흐음…….”
한 전투에서 쓰이는 전략을 짜는 덴 무리가 없으나, 여러 지방을 두루 살피는 대전략에 대해선 재능이 없다.
하여 발터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둔한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영 이상한 말은 아닌 것 같군.”
“자네 듣기에도 그런가?”
“하지만 동부 전선에 이만한 병력을 투자해 놓고 대체 어딜 노린단 말인가?”
“글쎄… 그게 문제란 말이지.”
동부로 지원군을 보내느라 다소 빈약해졌을 남부 전선?
하나 남부 전선이 예부터 널널하게 유지되어 온 이유가 뭔가. 그놈의 사막 때문이었다. 인간도, 악마도 사이좋게 먹을 것을 못 구해서 말라죽을 수 있는 그 사막이야말로 진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란 거다.
“으음… 스켈레톤들을 거기에 보냈나? 왜, 스켈레톤은 섭식 없이도 기능하는 녀석들 아닌가.”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네만… 아마 아닐 걸세. 왜, 스켈레톤도 나름 시체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녀석들이지 않나. 우리를 견제하는 동시에 남부 전선을 공격할 만한 숫자를 이루려면 그만한 시체를 대량으로 수급했어야 했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렇군…….”
“거기에 하루면 건널 수 있는 우리 쪽과 달리, 남부 사막은 넓어도 너무 넓으니… 성벽 앞까지 도착이나 하면 다행이겠군.”
거기에 스켈레톤은 먹이가 필요 없는 대신, 주변으로부터 꾸준히 마기를 흡수해야만 동작할 수 있는 악마다.
마기가 끓어 넘치는 마역의 중심 지대라면 모를까, 상대적으로 희박한─건너면 건널수록 더 희박해지는─사막의 경우엔 횡단은커녕 도중에 스러질 것이다.
역시 스켈레톤은 아니다.
“그럼 북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거기야말로 절대 뚫리지 않을 곳인데. 서부도… 사막 수준으로 험한 산맥이 버티고 있는 곳 아닌가. 심지어 거긴 대신전도 있는데.”
하나 친우의 말에 발터는 도리어 의구심을 잃었다. 어디 하나 노리기 편한 곳이 없는 게 실질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그냥 동부를 노리는 게 맞는 것 같네.”
“역시 그런가.”
“거기에… 혹시 아나? 사실 우리를 노릴 예정이었는데, 첫날 등장했던 그 시커먼 것 때문에 못 오는 걸지.”
해서 발터는 주제를 돌리고자 씨익 웃었다.
지평선을 순간적으로 검게 물들였던 무언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몇 주 전의 풍경이다.
“그게 우리한테 덤비면 어쩌려고 그러나?”
“하, 덤빌 거였다면 진즉 왔겠지. 거기에 어떤 적이 그런 공격을 적군이 아닌 아군에게 쓰나? 사제들 말로는 제물 의식도 아니었다는데.”
물론 제물 의식만 아니었을 뿐, 마기로 이뤄진 무언가이긴 했다. 당시 광경을 목도한 모든 사제가 몸을 부르르 떤 점에서 그건 확실하다.
“내분이 일었던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그게 나름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도시에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적을 일부 제거해 주었다. 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후배, 구데리안이 돌아온 점에서 더더욱 그런 의견이야.”
하물며 지평선이 까맣게 물들었던 날. 정확히는 그날의 밤이 지난 후. 성문 앞에는 곱게 누인 듀라한의 잔해가 있었다.
그건 12년 전 사망한 기사이자, 한때 이 도시에서 이름 떨치던 기사가문의 후계자, 구데리안의 시신이기도 했다.
“함정이라면?”
“글쎄. 사제들 전부가 달려들어 정화도 했고, 수습할 당시 습격이 인 것도 아니지 않나.”
누가 그것을 성 앞에 가져다 놨는지는 알 수 없다. 밤을 틈타 두고 간지라 목격자라곤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나 아무도 죽이지 못한, 그리하여 되찾지 못했던 기사의 시신이 때마침 돌아온 건 과연 우연일까? 그 새까만 것이 사막을 물들이고 악마들을 도륙한 직후 돌아온 것은 정말로?
“…악마가 그런 친절을 발휘했다고 생각하긴 싫은데.”
“그건 나도 동감일세.”
…악마가 돌려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구데리안을 죽인 주제에 이제와 돌려주는 걸 호의로 받고 싶진 않으니까. 상대가 한번 보인 선의로 풀리기엔 그들 사이에 쌓인 피와 살이 너무도 깊으니까.
“하지만 세상엔 이유 없는 행운도 있는 법 아니겠나?”
그러므로 그것은 그저 행운이다.
“아니면 내 친절함에 이끌려 온 걸지도 모르고 말이지, 하하!”
어느 밀빛 머리칼의 청년이 말해 주었듯, 그가 기사 후보생들에게 베푼 친절이 그의 후배에게 대신 돌아온 것이다.
“친절은 무슨…….”
“어허, 내 집에서 잠시 묵었던 청년이 진심으로 해 준 말이네.”
“그 청년은 안목을 좀 고쳐야겠어.”
“무슨 소린가. 안경까지 껴 가며 세상을 제대로 보던 친군데.”
“그럼 안경 벗고 봤나 보지.”
발터는 자신을 놀리는 친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악! 이 미친 놈이 투구를 때리면─!” 덩달아 그런 후회도 들었다.
“아, 실수했군. 자네한테도 분명 행운이 찾아갈 거라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엑!”
“복수다, 이 새끼야!”
한 박자라기엔 너무 늦은 후회가 친구의 손바닥과 함께 그의 등짝을 때렸다.
“기사들 전원 소집이다!!”
“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소식이 들이닥쳤다.
“뮌문트의 지원 요청이다! 대악마가 등장했다!”
누군가를 향한 기도도, 누군가가 설마설마하여 논하던 가능성도 모조리 잊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놈들이 노리는 건 뮌문트였군요.”
또한 그 소식은 만하펠트란 도시에만 전해진 것이 아니었으니.
“다행히 남쪽으로 빠진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북쪽으로 향한다면 늦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퀴지터는 한때 악마기사가 타고다니던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숨을 뱉었다.
“…전속력으로 갑니다.”
우연과 운명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