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내게 말해 줘 (7)
나는 감각 끄트머리에 걸린 무거운 기척을 두고 순간 숨을 삼켰다.
‘벌레 새끼까지 움직였나.’
아니다. 이건 내가 먼저 찾아낸 것이 아니다. 그냥 저쪽에서 먼저 알려 준 것이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내가 이곳에 강림했노라고.
내가 이 자리에 왔으니, 이곳에 당장 집중하라고.
‘추방자가 칼을 뽑아 들었나 본데.’
그게 무서운가? 라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무섭지 않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무섭지 않다.
근거도 증거도 없지만, 저것이 내 코앞으로 다가온들 괜찮을 거란 자신감이 끝없이 차오르는 까닭이다.
‘이제 어쩔 거야?’
다만 이런 확신도 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는 괜찮을지언정 리챠 씨가 괜찮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네 고향은 멸망해 버릴 텐데.’
…뮌문트가 괜찮지 못할 것이다.
“좀 어지러울 겁니다… 미리 사과할게요.”
나는 타들어 가듯 아프기 시작한 몸을 외면한 채 리챠 씨를 둘러업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마법사인 척해야 한다. 그 명제는 여전히 염두에 둔 채다.
“갑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래. 마법사인 척해야 한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남이 보기에 마법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마력의 선으로 사방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그 상태에서 고속으로 숲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마법이었다.
* * *
에메랄드는 순간 허기지는 배에 손을 얹었다. 목구멍은 수십 일의 가뭄이 찾아온 양 딱딱하게 메마른 상태다.
“우습구나.”
그렇지만 이 모든 건 착각에 불과하다.
에메랄드는 자신에게 덤벼든 오크를 두고 검을 휘둘렀다. 어지간한 성인 크기의 검신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몇 개의 생명이 사그라들고 핏줄기를 마구 떨쳤다.
촤악! 성벽을 이루는 돌 위로 핏물이 덧씌워졌다. 동틀 녘 햇살은 그 모든 것을 또 한 번 덮으려는 것처럼 세상에 황금의 베일을 얹고 있는 중이다.
“밧줄을 내려라.”
“예, 예!”
“자르딘, 먼저 올라가라.”
“…네!”
그사이,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서둘러 밧줄을 내렸다. 모든 짐을 내버린 자르딘이 그것을 붙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돌출된 치 덕에 그가 걱정해야 할 건 후면─관점에 따라 정면일 수도 있고─뿐이다.
크우아아아!!
당연하지만 그렇게 도망치려는 인간을 악마들이 곱게 놔줄 리가 없다. 오크를 위시한 다른 악마들이 자르딘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도하마, 미천한 것들아.”
하나 현 상황에서 밧줄을 잡고 오르는 자는 오직 자르딘뿐이라.
“부디 다음 생에는 주제를 알고 태어나도록 해라.”
마법사들이 마법을 난사하여 후미의 악마들을 처단한 순간, 에메랄드는 베른슈타인의 칼자루를 역수로, 늘어트리듯 잡았다. 이름 따라 호박색을 띠는 칼날은 마력을 머금으며 마치 용암처럼 빛나고 있다.
마력으로 강화된 전신으로부터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그녀의 허리가 옆으로 틀어지며 베른슈타인을 들고 있던 오른팔이 안쪽으로 꺾였다. 그녀의 팔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온 칼날이 오크의 도끼날을 튕겨 냈다.
서걱! 이어 1초라는 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을 때, 노련한 손놀림으로 파지법을 변경한 에메랄드가 검을 휘둘렀다. 정수로 쥐인 검이 그대로 오크의 목을 베었다.
두 발. 날아가는 오크의 목이 여전히 왼편에 자리하고, 그녀의 검이 오른쪽으로 휘둘러지며 또다른 악마를 막아섰다.
고블린. 키가 작은 악마에 맞춰 검이 대각선을 그렸다. 고블린의 팔뚝과 머리의 절반이 썰려 나갔다.
세 발. 베른슈타인의 칼자루를 왼쪽으로 당긴 손이 다시 오른쪽으로 팔을 뻗었다. 퍼억! 두 번째 오크의 머리가 관통되었다.
에메랄드는 그 상태에서 검을 위로 꺼냈다. 안쪽에서부터 두개골을 쪼개고 나온 검날이 막 중력에 사로잡히려던 오크의 무기를 밀어내고 원을 그렸다.
세 발 반. 적절한 힘 조절로 인해 베이지도, 흘러내리지도 않은 채 검날에 걸려 따라온 무기가 검을 따라 에메랄드의 왼쪽 앞 공간을 때렸다. 피해자는 그 자리에 있던 삼목구였다.
위에서 떨어진 도끼에 삼목구가 얻어맞는 사이, 에메랄드의 발뒤꿈치가 올라갔다.
네 발. 무희처럼 회전한 그녀의 몸을 따라 롱소드치고는 좀 길다란 검신이 꽃을 피워 냈다. 촤아악! 바깥쪽으로 퍼지는 핏물들은 그녀가 피워 낸 꽃을 장식하는 물감이다.
사르륵. 움직임을 따라 동그랗게 퍼졌던 옷자락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하얀 옷에는 기괴할 정도로 묻어나는 붉은색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희가 내고 뱉는 숨이 아깝지 않겠더냐.”
촥. 그녀의 손짓 한 번에 검신에 맺혔던 핏물이 전부 털렸다. 네 걸음 앞으로 나왔던 그녀의 몸은 가뿐한 백 점프 한 번만으로 최초의 자리에 도로 위치한다.
“불태워라!”
“죽어!”
또한 그와 함께 마법사들이 또 한 번 불을 뿜었다. 그녀를 따라잡으려던 악마들이 불꽃에 타오르거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따라잡기를 포기하고 만다.
모든 악마를 불사지르진 못할지언정 견제구로써의 역할은 다한 마법이었다.
“……!”
그러나 마법이 악마들을 물려 준 순간, 에메랄드는 도리어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감에 따라 푸른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이 마기는 대체……!”
그에 맞춰 성벽 위에 있던 사제들도 비명을 질렀다.
“사제님?”
“당장 종을 쳐야─!”
하나 사제들의 외침 따위 관심도 없다. 에메랄드는 검을 단단히 고쳐 쥔 후 자세를 바르게 했다.
크르르르.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주춤거리던 악마들이 괜히 울음소리를 토했다. 지금 다가오는 게 아군일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것인지, 순전히 공포란 걸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천한 것들이…….”
다만 가소롭고 짜증이 난다.
별 같잖은 것들이 호가호위하려는 꼴에, 에메랄드의 고운 아미가 구부러졌다.
쿠우웅!
“……!”
“지진……?!”
그때 무형의 파동이 숲으로부터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지진이라기엔 진동이 땅에서 느껴지지 않고, 폭발이라 칭하기엔 터져 나오는 빛이나 비산하는 조각 따위가 없는 파동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완벽한 압력, 용의 포효처럼 의도를 담은 압박.
“…또 사라졌나.”
그런 주제에 그것은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끝이 저릴 만큼 선명하던 위협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악마들이 몸을 움츠리고, 검을 쥔 에메랄드의 손가락이 펴졌다.
“…불길하군.”
“대, 대체 무슨 일이야……?”
“다들 조용……!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에메랄드 경, 지금입니다!”
악마들은 소멸된 마기에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더는 공격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에메랄드는 내려온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밧줄 아래쪽에 지어진 매듭은 그녀가 그것을 밟고 서 있을 수 있게 해 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검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검이 악마들을 경계했다.
“뮌문트에 볼일이 있는 건 기아와 갈증만이 아닌 모양이지.”
에메랄드가 직접 밧줄을 타고 올라서야, 뒤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여 병사들은 직접 밧줄을 당겼고, 에메랄드는 움직이는 일 없이 밧줄만 붙잡는 것으로 천천히 끌어 올려졌다.
히이이잉!
크헝!
물론 그 대가로, 그녀나 자르딘의 보호 없이 남겨진 짐말은 삼목구에게 바로 뜯어 먹히기 시작했다. 감수할 수밖에 없는 손해였다.
“뮌문트에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래도 그녀는 안전히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거면 짐말의 목숨은 충분히 가치 있게 쓰인 것이리라.
에메랄드는 그것으로 가축의 죽음을 묻어 넘겼다.
“에메랄드으으!!”
대신 새로운 기척 하나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는 베른슈타인의 검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터오르는 동에 찬란히 빛나기 시작한 금발이 칼날 앞에서 다급히 멈춰 섰다.
“으악, 뭐야 이건!”
“뭐겠니, 토파즈.”
“1년 만인데 그럴 거야?”
“100년이 지난다 해도 이럴 것이니 걱정 마렴.”
“싸늘해… 싸늘하다고!”
어떻게 저런 게 보석의 이름을 하사받은 기사가 될 수 있었을까…….
에메랄드는 징징거리는 기사를 무시하며 베른슈타인을 던졌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종자, 자르딘이 서둘러 베른슈타인을 낚아챘다.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인지, 들고 있던 물주머니에서 물방울이 몇 개 튀어나왔다.
“병사, 성주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슈테른 탑 쪽 성벽에 계십니다.”
“그래, 알겠다.”
악마들의 포위망을 뚫고 오느라 제법 피로가 쌓였지만, 기사된 자로서 보고를 미룰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오며 악마들의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임을 확인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에메랄드는 징징거리는 토파즈를 뒤로하고 슈테른 탑을 향해 움직였다.
“배고파…….”
“난 목도 말라…….”
굶주림과 목마름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여럿 지나갔다.
“여전히 칼에 대한 대우가 험하군요.”
“…소성주님.”
또한 그녀는 뮌문트의 소성주와도 마주쳤다. 뮌문트의 법도에 따르면 언젠가 그녀의 직속 상관이 될 남자였다.
뭐, 그 이전에 그녀가 이곳을 벗어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고.
“얼떨결에 떠맡은 검이라곤 하나,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아 슬픕니다.”
“…시정하지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어찌 됐건, 에메랄드는 돌아오자마자 듣게 된 권고에 눈을 가느스름히 접었다.
“친애하는 이의 검이 남의 손에 있는 게 싫다면, 그냥 달라 하면 될 것을…….”
“기사님…….”
“가자.”
그나마 다행이랄 게 있다면, 그녀가 저런 것을 상사로 모시게 될 일은 없으리란 것이었다.
악마들이 진을 친 마역 저편을 힐끗 본 에메랄드의 청록색 눈이 싸늘한 빛으로 반짝였다.
.
.
.
“저 기사는 매번 인상이 별로군.”
“소성주님…….”
“아, 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기사한테, 수석기사한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한편 에메랄드를 보내 준 뮌문트의 소성주, 귄터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전 대륙을 통틀어 흔치 않은 색인 암청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흔들렸다.
“하지만 인상이 별로인 걸 어쩌란 말인가?”
“그걸 티 내지 않는 게 기본 예의인 것입니다.”
“젠장, 그래도 저 인간 외의 사람한테는 잘한다고.”
“그러면 뭐 합니까, 가장 중히 대해야 할 인재에게 박하신데.”
귄터는 호위기사의 말에 또 한 번 머리를 긁었다. “그것도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격 없어 보입니다.” 그의 아버지보다도 깐깐한 호위기사가 또 한 번 일침을 가했다.
“젠장, 자네는 화도 안 나는가? 베른슈타인은 저런 대접을 받을 검이 아니야!”
“검에게 무슨 대접이 필요합니까. 검은 그냥 검입니다. 상대를 벨 수 있으면 끝이지요.”
“그래도!”
“소성주님, 솔직히 말하십시오. 베른슈타인이란 검이 식은 스튜 대우 받아서 싫은 게 아니라, 앰버 경의 유품이 식은 스튜 대우 받아서 싫은 거라고.”
“…빌어먹을, 자네는 그걸 알면서도 에메랄드 경의 편을 드나?”
“공과 사는 별개니까요.”
그러나 호위기사의 말이 틀린 적은 없다. 그게 문제였다. 귄터도 자신이 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아탸가 물려받을 검이었어.”
“예, 그랬지요.”
“앰버 경이 없다면 당연히 아탸가, 그도 아니면 앨랴가, 아니 앨랴는 검을 안 쓰니 파샤가 대신 물려받아야 했다고.”
“보통 때였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제기랄…….”
“…소성주님.”
아무렴, 본래의 주인도 물려받을 사람도 사라진 검이 그나마 잘 쓸 사람한테 가는 게 뭐가 이상한가? 갈 길 잃은 유품이 땅에 묻히는 대신 남을 위해 싸우는 자들 손에 쥐이는 게 뭐가 나쁜가.
하물며 에메랄드 경은 앰버 경처럼 마력이 많았고, 그럼에도 잘 싸울 수 있는 기사였다. 다른 말로는 베른슈타인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 다룰 수 있는 사람이란 거다.
그러니 그녀가 베른슈타인을 물려받은 건 마땅한 일이었다. 정말로, 마땅한 일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들은 정말 죽은 걸까?”
“글쎄요.”
“사파이어 경, 답해 보게. 자네는 그들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나?”
“…….”
귄터는 자신의 호위기사를 채근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호위기사가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파이어라는 명칭을 가져온 그의 청색 장발은 마치 쏟아지는 낙루인 양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들이 이 자리에 오지 않을 리 없잖습니까.”
귄터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그렇겠지. 정말 살아 있었다면 지금까지 안 나타났을 리 없으니.”
“…그들의 실종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는 건 압니다. 하나, 소성주님. 당신께선 죽은 사람 한두 명에게 매달리면 안 되는 분입니다. 이제는 미래를 생각하시지요.”
“…그래.”
그렇지만 그는 소성주였고, 장차 이 땅을 지키는 사령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귄터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 채 성벽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의 우상과 그의 친구와 그의 의동생들이 사라진 성벽은, 그럼에도 사람으로 가득하다.
“…병사들이 유난히 허기와 갈증을 호소하는군.”
그렇지만 병사들의 안색을 잘 살펴보거든,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귄터는 아까부터 목마르고 배고프던 자신의 배를 두고 눈썹을 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많은 사람─자신을 포함해─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러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자네도인가?”
“…예. 아직까진 참을 만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혹 소성주님께서도 그러십니까?”
“저주일지도 모르겠군.”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 뮌문트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일 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의외로 원인 찾기는 쉽다.
“…부디 아니었으면 하는데.”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그렇지만 자네도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잖나?”
“…….”
북쪽 전선에 임하고 있는 두 마리의 대악마 중 하나이자 연꽃잎 아래에 눕고 갈대밭 그늘진 곳에 잠겨 시체를 먹는 청소부. 혹은 강을 삼키고 땅을 가물게 하여 기아를 가져오는 짐승.
역병 배달부, 에릭식톤.
“식량 창고와 우물에 사람을 붙여야겠군.”
에릭식톤이 전선에 등장할 적이면 그 일대의 사람들은 이유 없는 갈증과 허기를 호소한다. 음식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해도 마찬가지였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 못 하는 갈급, 끝을 모르는 갈구, 영원한 탐식. 그것이 에릭식톤의 저주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뭐, 이마저도 아버지라면 이미 지시를 내렸을 것 같긴 해.”
에릭식톤의 저주는 신성력을 쬐어도 그 잠깐만 해주될 뿐, 사제의 손길이 떠나면 다시 배고파져 오는 특성이 있다.
하여 이것을 해결하고 싶다면, 그 방법은 오직 에릭식톤이 전장을 떠날 때까지 견디는 것뿐이라. 그때까지 식량 창고와 우물은 최우선 순위의 수호 대상이 될 것이다.
귄터는 본인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키는 자들마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건 아닐지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인내심이 강한 자들을 선발하는 수밖에는.”
“젠장. 북쪽에서 지원군을 보낼 때 부디 경험자들을 보내 달라고 해야겠는걸.”
“소성주님께서 직접 서시지 그러십니까?”
“글쎄. 내가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나? 난 아마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귄터는 그 자신을 잘 알았다. 그가 경계를 맡게 된다면, 언젠가 이성을 잃고 당장 우물로 달려들거나 식량창고를 탈탈 털어 먹을 것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정신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사, 사람이다!”
“……?”
한데 그가 스스로를 자조하는 사이, 성벽 한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호들갑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귄터는 따라오려는 호위기사에게 ‘저주가 맞는지나 알아보고 오게’라고 명령한 후, 그 혼자만 소란스러운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다가온 상급자에 병사들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그것이…….”
“…정찰대가 돌아왔습니다.”
“뭐?”
그런데 지금 뭐라고? 정찰대가 돌아왔다고? 수석기사만이 간신히 뚫고 온 저 악마들의 포위망을?
귄터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병사들을 헤쳐 나갔다. 정찰병이 살아 돌아온 건 희소식이나, 저 악마 떼거지를 뚫고 살아 돌아온 것은 썩 믿기지 않는 일인 까닭이다.
“…아탸?”
그러나 병사들의 가림막 너머로 고개를 내민 순간, 그는 더더욱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됐다. 지금껏 애타게 그리워하던 얼굴이 돌아온 정찰병의 옆에 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