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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6화 (276/389)

276화 내게 말해 줘 (6)

“당장…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깨어난 건 어깨를 다친 병사였다. 그러니까, ‘아탸’를 아는 병사다.

“그 몸으로 어찌 가시겠단 겁니까.”

“저의 일은 수색 및 결과 보고입니다. 저희가 알아낸 사실이 도시에 전해졌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저는 전달을 우선해야 합니다.”

“최소한 날이 밝으면 가시죠.”

“안 됩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더 위험해질 거예요.”

스스로를 리챠라 소개한 그는 여전히 피가 부족한 얼굴로 주먹을 죔죔했다. 그런다고 핏기 없는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진 않았다.

“이 마을에도 영향을 끼칠 일이니만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촌장님. 저희를 향한 악마의 습격은 단순히 지나가는 인간들을 툭툭 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것이지.”

“그건… 그러니까 그 말뜻은…….”

“예, 포위망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하지만 그게 진정 그가 흘린 피가 많아서이기 때문일까? 그가 자신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이 너무 거대해서는 아닐까.

“…아마 이 마을도 포위망의 반경 안에 곧 들 겁니다. 하니 추가 연락이 오기 전까진 마을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고, 지금부터 식량을 통제하에 두십시오.”

병사는 어깨의 통증이 거슬리는 듯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성벽에 세우는 사람의 숫자를 늘리되, 마을 내부도 틈틈이 순찰하셔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고블린이 굴을 파고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정말이지… 이런 일은 30년 만이군.”

“그때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단단히 각오하십시오.”

“그래…….”

병사는 거기까지 말한 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회색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더불어, 제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 다른 도시에도 말을 전해 줄 자원자를 구하고 싶습니다. 제가 뮌문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악마들의 포위망에 당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실패를 대비해 보험을 여럿 들어 놓고자 하는 제안이 건네지자, 촌장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제가 가겠습니다.”

“렉샤!”

“포위망이 완성되면 저희도 위험해져요. 아시잖아요, 아버지.”

“끄응.”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뮌문트를 향한 악마들의 포위망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평상시보다 더 조직적이라고 전해 주시면 될 겁니다.”

“네.”

용감해서 탈인 아들을 두고 촌장의 표정이 일그러지건 말건, 병사는 촌장의 아들에게 전할 것을 설명했다.

말을 듣는 촌장 아들의 눈이 맑고 총기가 넘쳐 나는 것으로 보아, 변수만 없다면 이 임무는 잘 완수될 듯하다. 그러니까, 촌장 아들이 가다가 악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뮌문트로…….”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하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촌장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나가려는 병사를 두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래, 아직까지는 그렇다.

“약간의 마법을 다룰 줄 아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압니다. 아까 나가 보니 악마가 꽤 많더군요.”

“…예? 나가셨다고요?”

병사의 눈이 큼지막해지고, 촌장이 ‘아’ 소리를 흘리며 나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나를 향한 촌장의 호감도가 제법 높았는지 내 행적은 가히 영웅의 것처럼 포장된 채다.

요약된 게 그 정도이니, 시간이 많았으면 어떤 소리가 나왔을지 두렵다. 나는 낯 뜨거운 얼굴을 괜히 쓸어 내곤 어색하게 웃었다.

“…무모한 일을 하셨군요.”

“그렇게 치면 지금 병사님께서 하시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이것은 제가 맡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가진 바 힘으로 남을 돕는 건, 제게 있어 응당 해야 할 의무입니다.”

내 말에 병사가 눈을 찡그렸다. 불쾌함보다는 고통으로 인한 찡그림으로 보인다. 회색 눈이 우물보다 깊은 빛으로 빛났다.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건 제가 감당할 일이지, 병사님께서 고려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 마법사님을 말로 이기려 든 제가 어리석었군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래도 나는 그와의 동행을 꿰차는 데 성공했다. 그거면 되었다. 가는 길목에 악마가 얼마나 있든 무엇이 기다리든, 이제 그가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뮌문트로 가는 지름길은 이쪽 문을 통하면 됩니다.”

“혹시 모르니 문은 열지 마시고, 아까 만든 걸로 저흴 내려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횃불이 밝힌 반경 안에야 아무것도 없지만, 숲 바깥의 기척은 좀 다르다. 나는 우글거리는 몇 개의 기척을 두고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리고 아드님은 내보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예?”

“이미 늦었습니다. 악마들이 숲에 쫙 깔렸습니다. 이 뒤쪽까지요.”

“…그건 마법으로 알아내신 겁니까?”

“예.”

“그런 것도 마법으로 해낼 수 있군요…….”

와, 이곳에 마법사들이 없고 사람들이 죄다 마법사와 접할 일 없는 계층이라 다행이다. 마법이라 사기 쳐도 그게 거짓임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는 그 점에 안도하며 눈을 감고 주문을 중얼중얼 외는 척했다. 밤의 새까만 공기를 틈타 날아간 마력창들이 기웃거리던 악마들을 죄 꼬치로 만들어 주었다.

악마들이 내는 비명 소리가 일제히 밤의 침묵을 깨트렸다.

“근처의 악마들은 일단 처리해 두었습니다만, 조심하시길.”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별말씀을.”

엄, 한꺼번에 수십 마리를 죽인 건 너무 인상적이었나?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편히 대했던 촌장님이 바로 존대하는 걸 두고 뒷머리만 긁적였다.

하기야 마법사라고 듣는 거랑, 마법 부리는─가짜지만─걸 직접 보는 건 와닿는 게 확 다르긴 하지.

“갑시다.”

“예.”

그래도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까, 괜찮을 거다.

나는 그들의 기억 속 내가 최대한 금방 잊히길 기도하며 병사와 함께 성벽을 내려갔다. 밤의 숲은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음산했다.

“제가 마법으로 꾸준히 주변을 탐색하며 악마가 없는 방향을 찾을 테니, 병사님께선 그 안에서 뮌문트로 향하는 길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치만 이런 공포 게임의 시작점 같은 분위기는 이미 많이 겪어 봤고? 도리어 걱정인 건 내가 기척을 재는 일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접근하기 전 먼저 죽여 버리는 일, 병사를 따라 걷는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지고?

와중에 시체가 발견되지 않도록 방향도 종종 틀어야 할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꿀꺽. 내 목울대가 다른 의미의 긴장을 삼켰다.

“…갑시다.”

아까 병사 두 명을 구출했을 때도 엄청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었다.

* * *

“이것 참, 각오한 게 무색할 지경이군요.”

리챠, 제대로 된 이름은 에리히.

26년간 정찰병 일을 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노라 생각하던 그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번 일에는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평탄할 줄은.”

아무렴, 그는 지금 악마가 도처에 깔린 숲을 단 한 번의 위험도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미끼를 자청한 동료나 악마들의 주목을 끌 수 있도록 만들어 낸 함정 따위가 없는데도 그러고 있단 말이다.

“그런가요… 엇.”

이런 건 이 짓만 20년씩 해 먹은 고참병사들도 못 한다. 뮌문트의 역사서에 기록된 수석기사들을 데려와도 비슷할 것이다.

짐승만큼이나 감이 예리하고 감각이 민감한 악마들에게 걸리지 않는 건, 심지어 그 악마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발각되지 않는 건.

행운 그 자체가 강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번에 네 번째군요. 조심하세요.”

“…죄송합니다. 뭐 보이는 게 없다 보니 계속 발이 걸리네요.”

“그럴 수 있죠.”

함에도 그게 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무뿌리에 종종 발이 걸려 넘어지는 이 젊은 마법사에 의해서.

“걸리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네. 아, 앞에 악마가 있습니다. 왼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한… 10m 정도.”

“예.”

하여 그는 보통 때였다면 화냈을 일에도 다정히 굴었다. 이 마법사가 넘어지며 내는 소음보다 그가 제공하는 탐색의 결과물이 더 압도적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일반인이 광원 없는 밤의 숲을 넘어지지 않고 걷는 건 본래 불가능한 일이니까. 관련된 훈련을 받지 않은 마법사가 이만큼 따라온 것에 도리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에리히는 마법사의 손을 단단히 붙들어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또…….”

그렇지만 그것도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마법사도 돌아가자고 말하는 빈도가 늘어난 것이다.

“후우.”

하나 이 정도는 각오했다. 그들 정찰대가 손도 못 쓰고 당한 시점에서 이 포위망은 결코 보통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못 했군요.”

“……?”

“위험을 무릅쓰고 제 동료를 구해 준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단순히 악마들의 수나 종을 확인하고자 파견된 정찰대가 아니었다.

상단이 사라진 게 정말 악마들의 소행인지, 악마들의 소행이 맞다면 그건 우연한 일인지 혹은 포위망을 형성하던 도중에 벌어진 일인지 알기 위해 내보내진 자들이지.

“두 분밖에 더 살리지 못했는걸요.”

“…두 사람이나 살리신 겁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포위망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음을 상정하고 파견되었다.

몇 명의 희생이 나더라도 누구 하나만큼은 뮌문트로 도망쳐 상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편제를 짜 나왔단 말이다.

“이놈들은 정말… 집요하게 쫓아왔으니까요.”

그리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그것에서 어떤 의미도 읽어 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안타깝게도 에리히에게 없었다.

“정확히는 뮌문트로 가려는 놈들만을 우선해서 쫓은 쪽이지만…….”

놈들은 포위망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했고, 그래서 뮌문트로 달려가는 병사를 우선해서 잡아 죽였다.

에리히와 그의 동료 둘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반대쪽으로 달림으로써 그것들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났다. 죽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혹은 임무보다 목숨이 더 중하다는 무의식의 발악 끝에.

“…낙엽 지대군요. 여긴 소리가 너무 많이 납니다. 돌아가죠.”

“네.”

그래도 그는 지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소근거리며 대화를 나눠도 걸리지 않을 만큼 안전하게.

그것이 그의 위안이 되었다.

“…목이 마르군요. 혹시 남은 물이 있으십니까?”

“별로 없는데… 잠시만요.”

그러나 그런 위안에도 긴장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목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해가 강한 날, 물 한잔 마시지 않고 나절을 버틴 기분이었다.

“이게 마지막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물을 혼자 다 먹어 버렸네요.”

“그럴 수도 있죠.”

문제는 물을 마신 다음이었다. 물을 마셔도 마셔도 목이 타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마지막 물주머니의 절반을 비운 후에야 찾아온 위화감에 에리히는 눈을 찡그렸다.

“…아뇨, 이건 명백히 이상한 일입니다.”

“……?”

에리히는 마법사를 끌어당겨 가까이했다. 어슴푸레한 새벽으로 인해 색이 무분별해진 상대는, 이제야 조카의 닮은 꼴에서 벗어난 채다.

“저는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물 없이도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마신 물의 양이 몇 병입니까.”

“…두 병 반?”

“반면 마법사님께서 드신 물은 거의 없지요. 마법사님, 이것이 정녕 우연이겠습니까?”

아니다. 누군가를 닮은 건 여전했다.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마법사님.”

“…리챠 씨, 여기서 뮌문트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아직 1/3은 남았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문제가 생겼습니까.”

희미한 달빛에 겨우 보이는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결혼, 허락해 주십시오』 그의 여동생을 훔치러 왔던 누군가와 참 닮은 형태로.

“곤란하게 됐네요.”

“무슨─”

“입 열지 마세요. 혀 씹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의 상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의 손이 그를 들어 올렸다. 시야가 거꾸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좀 어지러울 겁니다… 미리 사과할게요.”

이, 무슨.

에리히는 반사적으로 내뱉고 싶었던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적막한 밤에 소근거림 이상의 소음을 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자존심 이전에 존재하는 생존 본능이었다.

“갑니다.”

“……!”

그러나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어렴풋이 보이던 나무와 땅의 윤곽이 지워지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콰과과가가가가각.

바람이든, 나뭇가지든. 무언가를 죄다 갈아 버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몸이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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