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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5화 (275/389)

275화 내게 말해 줘 (5)

틸은 성벽 위에서 숲을 뚫어져라 보았다. 명목은 혹시라도 다가올 악마를 감시하기 위함이었으나, 마음은 계속해서 다른 것을 찾았다.

“그가 정말 돌아올까요?”

멋모르고 마을에 방문한 뜨내기. 또는 운 좋게 악마와 짐승의 습격을 피한 줄만 알았던 샌님. 그도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주제에 가출한 도련님.

『어쩔 수 없어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절대 고집을 굽히지 않는… 숨기는 게 있지만 꺼림칙하진 않은 마법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오늘 처음 보는 사이지만 걱정이 된다. 말을 몇 번 섞는 것만으로 됨됨이가 파악되는 사람이라 더 그랬다. 그 사람은 죽어도 싼 사람이 아니었다.

“글쎄다… 그게 될까?”

“그렇지만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들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으음…….”

틸은 마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실물을 보기는커녕 마법이란 것도 접해 본 적 없는 촌놈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동화 속 마법사들은 안다. 그들은 불길을 일으키고 대지를 뒤집으며 파도를 일으켰다. 하면 그도 가능하지 않을까?

비록 동화 속 마법사들은 죄다 고깔모자를 쓰고 하얀 수염을 성성히 길렀지만. 그에 반해 그 청년은 아주 젊고 지팡이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법사를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복주머니라도 가져가라 할 걸 그랬어요.”

“헉. 그러네. 그 생각을 못 했네!”

하므로 진짜 마법사들을 본 적 없는 주민들은 성벽 위에 모여 도란도란 기도했다.

그들이 비는 건 혹시 모를 기적이었다.

악마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더 있길 바라는 기적. 살아남은 병사들과 청년이 마주치길 바라는 기적. 그들이 안전히 이곳까지 생환하길 바라는 기적.

그런 기적.

“아, 보인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누군가가 소리쳤다.

“진짜 사람을 데려왔어!”

“어서 밧줄을 내려!”

기도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 * *

데스브링거는 복잡한 속내에 잠자는 대신 깨어 있기를 택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할 걸 생각하면 오래 깨 있진 못하겠으나 그래도 당장 자고 싶진 않았다. 지금 베개에 얼굴을 대었다간 이상한 생각만 송송 들 것 같았다.

“끄응…….”

“똥 마려운 개처럼 왜 지랄이야?”

“──!”

한데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겼나 보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이스터의 발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소리 없는 비명이 바짝 솟아오른 귀와 꼬리를 통해 쏟아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대, 댁은 왜 나와 있는뎁쇼…….”

“이거.”

찰랑. 마이스터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맑은 소리를 내었다. 사람 머리통만 한데 손잡이가 달린 단지였다.

“…설마설마해서 묻습니다만, 그거 술입니까?”

물론 단지 자체가 저런 소리를 낼 수는 없다. 하므로 저 안에는 필시 액체가 들어 있을 것이다. 들고 나온 걸로 보아 결코 물이 아닐 액체가.

“알면 왜 물어?”

“미친 인간. 그건 또 어디서 났는데요?”

“맹수 잡은 답례로 촌장한테 받아 왔어.”

“댁이 잡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거.”

“어쩌라고. 그럼 너도 달라고 하든가.”

재주는 샌님이 부리고 돈은 저 미친놈이 받네.

데스브링거는 표정을 구겼다가, 마이스터가 제 옆에 쪼그려 앉음에 더 구겼다.

“꺼져요, 내 자리거든요?”

“엄밀히 따지면 이곳의 거주자는 촌장이니 촌장의 땅이지, 네 땅이 아니라.”

“아오. 물에 빠지면 아가리만 동동 뜰 인간 같으니.”

“아가리도 못 뜨고 잠기는 것보단 뜨는 게 낫지 않나?”

“칭찬 같아요?”

“칭찬으로 들었을 것 같아?”

그 말이 끝난 직후, 데스브링거와 마이스터는 서로를 향해서 중지를 치켜들었다. 와중에 아무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건 ‘떠도 저 새끼가 떠야지, 내가 왜 감?’ 따위의 마인드 때문이다.

자존심이 결국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붙여 두었다.

홀짝.

“…….”

별개로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데스브링거는 잔으로 떠먹기는커녕 단지째로 홀짝이는 마이스터를 두고 한숨을 절로 흘렸다.

무시하려고 해도 얼굴만 한 단지가 시야 한편에서 꼼지락거리니, 시선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뭐야, 왜 다시 와?”

“어떤 시발롬이 내 앞에서 단지째로 처먹잖아요.”

휙. 주방에서 쌔벼 온 나무 잔 두 개 중 하나가 마이스터의 손을 향해 날아갔다. 일반인도 받을 수 있게 살살 던진 것이라, 마이스터도 손쉽게 받아 냈다.

데스브링거의 몸이 본래 있던 자리에 도로 앉았다.

“난 준다고 안 했는데.”

“저도 달라고 안 했거든요?”

누가 달라고 할 것 같냐? 데스브링거는 제 몫으로 들고 온 나무 잔을 두고 코웃음을 쳤다.

“뺏어 먹으려 갖고 온 거지.”

“도둑 새낀가?”

“그걸 지금 아셨습니까요?”

마이스터의 진심 아닌 방해를 뚫고, 데스브링거의 컵이 단지 속 술을 떠냈다. 구수한 냄새가 살살 올라오는 것이 밀주蜜酒인가 했다.

“크.”

단맛 없이 시큼씁쓸한 게, 숙성이 정말 잘됐다. 데스브링거는 오랜만에 마시는 독주─상대적 독주─를 두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신전에서 두는 식전 포도주랑은 상대가 안 되네…….”

“거기 건 그냥 음료수지.”

“그건 그래요.”

애들도 먹일 수 있는 게 뭐가 술인가, 그냥 음료지.

데스브링거는 밀주를 한 컵 더 훔쳐, 입에 들이부었다. 내일 숙취라는 업보가 다가올 거란 건 애써 외면했다. 술이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도 한잔 주시겠습니까.”

“뭐야, 왜 이렇게 뺏어 먹는 놈들이 많─”

“푸흐흐흐흡.”

그러다 잠깐. 끼어든 목소리에 데스브링거는 입에 든 술을 뿜고 말았다. 마이스터도 적잖이 당황한 듯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였다.

“콜록, 콜록.”

“괜찮나.”

아오, 코에 술 올라왔어. 데스브링거는 따가움을 참으며 기침을 두어번 뱉었다. 다가온 손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샌, 샌님은 또 왜 나왔는데요.”

“나는 나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건, 아니긴 한데…….”

진짜 인퀴지터는 왜 나왔대. 그보다 방금 들은 게 진짜면 인퀴지터가 술을 달라고 한 건가?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인지 능력이 벌써 상실되었나 혼동하며 눈을 떨었다.

“받아요.”

그사이, 마이스터는 인퀴지터가 내민 컵에 술을 따라 주는 중이다.

“…술도 마실 줄 압니까?”

“……? 당연히?”

데스브링거는 의아하단 샌님의 눈빛을 두고 아차했다. 저 양반도 신전 출신이지. 매 식사 때마다 가볍게 포도주를 내오는 신전 출신.

“이럴 줄 알았으면 두 개를 얻어 올 걸 그랬네.”

“괜찮습니다. 많이 먹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신전 포도주는 몇 병을 들이켜도 취하지 못할 만큼 도수가 낮은 것들 뿐인데. 그런 양반에게 제대로 담근 밀주를 먹여도 되나……?

데스브링거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미 늦었다. 샌님은 밀주에 입을 대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독하군요.”

“이건 그렇게 독한 놈도 아닌데.”

결국 데스브링거를 포함한 세 사람은 집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술을 홀짝거렸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침묵과 달빛이야말로 그들의 안주였다.

“…마이스터, 혹 혼란을 잠재워 주는 마법도 존재합니까.”

그리고 단지의 술이 거의 동났을 즈음, 인퀴지터가 입을 떼었다. 마지막 술을 들이켜고 있던 데스브링거의 손이 멈칫거리고, 마이스터가 다 마신 컵을 내려 두었다.

“내 머리가 좋긴 하지만, 그렇게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까지 알아듣긴 힘든데요.”

“그러니까… 마음 속의 혼란 같은 걸 말하는 겁니다.”

“심마 같은 거?”

“예, 예.”

“되겠어요?”

“…그렇습니까.”

“애초에 심마란 게 뭐예요. 마음이 어지럽다는 건데,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원인은 보통 주변 환경이 좆같거나 당사자의 처지가 좆같거나 아무튼 그런 거잖아요. 근데 그걸 마법 하나로 뿅 바꾼다? 그게 가능하면 그건 마법사가 아니라 신이지.”

물론 어떤 문제는 파이어볼 한 방이면 해결되긴 해요. 덧붙인 말은 전혀 쓸모없는 조언이다. 그렇게 치면 세상은 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다.

“그럼…….”

“아니면 이런 수단도 있긴 해요.”

“……?”

“대가리를 건드리는 거.”

“…뭘 건드려요?”

그러다 잠깐. 데스브링거는 어이 상실로 인해 저도 모르게 말을 얹었다. 마이스터의 손가락이 본인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대가리. 정확히는 가죽이랑 뼈 아래에 존재하는 뇌.”

“…그걸 왜 건드려요? 아니, 애초에 건드려서 뭘 할 수 있다고?”

“감정을 없앨 수 있지. 어쩌면 기억도.”

하지만 돌아온 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뿐이라. 데스브링거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인퀴지터도 비슷한 심정인 듯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물론 성공 확률이 낮긴 해. 내 기억상 90%는 죽거나 백치가 됐거든.”

“…아니 시발, 성공 확률이 10%밖에 안 되는 걸 왜 권유하는데요.”

“20년 전 기억이 그랬던 거고 지금은 또 모르니까? 뭐어… 신전이 해당 실험을 허용했을 리는 없으니 여전히 제자리걸음일 수도 있고.”

“나 참…….”

신전이 허용하지 않는 걸 성에서 허락할 리도 없으니, 결국 해당 시술은 불법이란 거잖아. 그걸 왜 신전 사람한테 권해.

데스브링거는 거기까지 생각한 후,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불법 시술의 존재와 그것의 성공 확률을 마이스터는 어떻게 알지?

“당연하지만 진심으로 권유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정답을 영 못 내리겠다면 그냥 괴로움을 느끼는 감각 자체를 없애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해 주는 것뿐이지.”

“…그게 죽으면 편해진다랑 뭐가 달라요.”

술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다. 데스브링거는 갈증이 이는 목구멍을 어떻게든 쥐어짜 냈다. “그러게.” 마이스터의 건조한 목소리가 목마름을 더 심화시켰다. 염병할 기분이었다.

“…그렇군요.”

와중에 인퀴지터는 이렇다 저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래 같았으면 질색 팔색을 했을 텐데. 그런 반응이 없어서 어째 불길했다.

“날이 늦었습니다. 슬슬 자러 가죠.”

설마 동한 건 아니겠지? 데스브링거는 반사적으로 인퀴지터의 옷자락을 붙잡을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혹시라도 긍정이 돌아올까 싶어서였다.

“그래.”

정말로, 무서웠다.

* * *

“밥은 입에 맞나?”

병사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몇 번 위험에 처할 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좋은 선택이 되었다.

본래라면 외지인으로서 받았어야 할 경계가 사라진 것은 물론, 잘 곳과 저녁 식사가 생긴 것이다.

“네, 정말 맛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하룻밤 묵게 된 곳은 촌장님 댁이었다. 다친 병사들이, 내게 ‘아탸’라는 단서를 제시해 준 이가 머물고 있는 곳이란 말이다.

안 그대로 어떻게든 그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던 차. 촌장이 자기 집에서 지내라 해 준 덕분에 핑곗거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나는 한 번의 도박이 가져온 결과를 두고 기쁘게 웃었다. 역시 선행은 해서 나쁠 게 없다.

“많이 들게.”

“네.”

“고기도 들고.”

“아하하… 네.”

물론… 고생했다며 해 준 고기 요리는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귀한 고기, 오롯이 호의로서 내준 것이라 차마 거절은 못했지만.

“술도 좀 하나?”

“아, 술은…….”

나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법사들은 술을 먹으면 안 돼서요…….”

거짓부렁이지만 마법사들을 나밖에 본 적 없다니 상관없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구라를 쳤고, 촌장은 애석해하면서도 홀랑 거짓에 넘어가 주었다.

“마법사들은 불쌍하군… 평생 금주를 해야 한다니…….”

“하하… 제가 수련생이라 그런 것도 있습니다. 평생 금주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가?”

“네에. 이성이 명징해야만 마력을 잘 다룰 수 있어서…….”

그렇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술 먹고 마력 다뤄 봐야 얼마나 잘 다룰 수 있겠어.

“그렇군. 그럼 고기라도 더 먹게.”

“네네.”

나는 촌장이 잘라 준 만큼만 내 그릇에 덜어 놓고 나머진 채소로 그득그득 채웠다. 촌장이 나를 볼 때에 맞춰 고기를 우물거려서인지, 촌장은 내가 편식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다.

“고기가 생각보다 더 남았군……?”

뭐 마지막 가선 좀 의아해하긴 했는데… 나는 ‘다친 분들이 깨어나면 그분들께 나눠 주는 것도 좋겠다’라며 대충 화제를 돌렸다.

먹던 걸 줘도 되나? 싶긴 했으나 식량이, 특히 고기가 귀한 편이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정작 먹어야 할 사람들은 죄 기절한 상태라… 그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버지! 병사 한 분이 깨어나셨어요!”

그러나 정작 그들이 깨어났을 때, 남은 고기는 도마에 오르지도 못했다.

“당장 뮌문트에 상황을 전해야 한다는데… 어쩌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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