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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3화 (273/389)

273화 내게 말해 줘 (3)

“아탸?”

언뜻 들어 본 기억조차 없는 이름이 내 귀에 막 스며들었을까.

동시에 고통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만 환상통처럼 내부에서 나를 깎아 내는 통증이었다.

“아… 그럴 리가 없지.”

그렇지만 그때 그 망가진 오두막에서처럼 괴롭지는 않다. 혹은 두 번째로 겪는 것이라 나름 견딜 만하다. 그도 아니면 이 아픔으로 하여금 얻게 된 확신이 나를… 나를…….

나는 보다 수월히 인내하기 위해 이를 지르물었다. 성큼 다가온 단서가 내 아드레날린 촉진제라도 된 것인지, 그것만으로도 허리가 꼿꼿이 섰다.

버틸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티챠, 근데 이 사람은…….”

“그, 뮌문트로 가는 도중에 길 잃고 여기까지 온 외부인인데… 그보다 이 사람들은 다 뭐예요?”

“뮌문트의 병사들이다. 그러니 치료를 해야 하는데…….”

또한 그 확신에 힘입어, 나는 방금 중얼거린 사람을 서둘러 살폈다.

회색 머리카락과 삼각형 귀 모양을 가진 가진 큐어티족. 오른 어깨가 반쯤 잘려 나가고 마기 침식으로 인해 검은 핏줄이 울긋불긋한 상태의.

기억했다.

“티챠, 네 집에 약초가 얼마나 남았느냐?”

“요 근래 마련해 둔 게 있어서 좀 많아요. 근데 다 말랐을지가……!”

“이런……!”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반쯤 강제적인 일이기도 했다. “약초가 없으면 치료가 어려운데.” 간신히 쥔 단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어찌 흘려듣겠는가.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나는 고통으로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저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면, 내가 들을 수 있는 게 없어지겠지. 그러니 뭐라도 제공하는 게 맞겠지. 그런 판단에서였다.

물론 가방을 수색할 때는 없었던 약초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티샤가 의심하겠지만. 도련님 취급이 더 심해지거나 마법사 취급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숨긴 게 더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겠지만.

“약초라면 제가 가진 게 조금 있습니다.”

그렇지만, 티샤 한 사람이 가질 의심보다는 저 사람이 알고 있을 정보가 더 급하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를 먼저 따지는 나 자신을 경멸하고, 이렇게 돼야만 했던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며 그들을 응시했다. 티샤도 촌장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가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그 말, 정말인가?”

“사람 목숨 앞에서 농담하진 않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일단 있는 게 뭔지 알려 주게.”

무엇이 있더라.

나는 리스트를 불러 줄까 하다가, 그냥 가방을 통해 인벤토리에 있던 약초들을 마구 꺼냈다. 산군에게 약초 이름을 듣긴 했지만 그건 대삼림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약초 이름 다 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

하나 그런 내 움직임을 두고 티샤의 눈이 조금 멍해졌다. 여기서 그가 ‘어디서 꺼낸 거예요!’ 따위의 발언을 하면 조금 곤란한데.

나는 약초를 꺼내던 손을 움직여,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이 정도 제스처는 만국 공통인 듯, 티샤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우물거리는 입과 깊게 파이는 보조개는 그의 당황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이건 필요 없어요. 대신 이거 더 있어요?”

그래도 그 미묘한 굳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서 진실을 캐고자 하는 대신, 약초를 분류하는 데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좀 고마운 일이었다.

“치료도 할 수 있어요?”

“잘은… 못합니다.”

“와, 완전 도련님.”

“…….”

없던 물건을 꺼내는 신기를 보여 줬는데, 여기서 더 부정해 봤자 의미 없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필요한 약초들을 전부 꺼내 늘어놓았다. 치료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서둘러 그것을 가져갔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못한다면서요.”

“치료 방법에 능통하지 못할 뿐이지, 사람 붙잡는 건 할 수 있거든요.”

“오… 그건 확실히 필요한 도움이네요. 그럼 이 사람 좀 붙잡아 줘요!”

“네.”

나는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려는 절상切傷 환자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건 그냥 힘으로 억누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떨리는 팔과 다리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이에 나무토막 물리고, 넣습니다!”

한편 티샤는 환자의 입에 나무토막을 물려 준 후, 환부에 약초를 쑤셔 넣으려 들었다. 그의 손은 다소 지저분한 상태다.

“그러고 보니 손은 씻으셨습니까?”

“손? 손은 왜요.”

“…씻고 하세요. 그러다 감염으로 죽습니다.”

“감염……?”

그래, 여긴 아직 위생 개념이 덜했지.

나는 다급히 팔을 걷어붙이고 장갑을 벗으며,─위장 스킬을 괜히 풀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식수 용도의 물을 꺼냈다.

“잠시만.”

촤아악.

산천어가 사는 강에서 떠온 물이 티샤의 손과 내 손 위에 마구 뿌려졌다. 환자의 환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됐습니다.”

상처에 물을 뿌리는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흙먼지가 끼어 있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환자가 힘없는 비명을 지르며 꿈지럭거리는 걸 두고 사지를 붙잡았다.

치료가 다시 진행되었다.

“…지식인이셨군요. 도시에서도 감염의 개념을 아는 사람은 드문데.”

그렇게 한 사람을 치료하고 나니, 다음으론 나를 ‘아탸’라고 불렀던 이의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이 지혈을 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흐른 피가 많아 그의 얼굴은 참 창백하다. 검은 핏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창백함이었다.

“배움이 깊은 편임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계속 말하는 건 과연 좋은 행위일까? 그렇지만 이대로 기절하거나 잠드는 것보단 끝없이 말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응급구조사든 응급처치원이든 관련 자격증을 알아볼 것을 다짐하며 그의 어깨에 물을 뿌렸다. 그렇게 들고 다니던 식수 중 절반이 사라졌다.

“눈 감지 마시고 저랑 대화 계속하시죠.”

“…네.”

그치만 이미 한 사람은 끝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붙잡고 있는 상황이니까. 물 같은 게 특별히 더 필요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다 쓴 가죽 주머니를 대충 던져 두었다. 그러곤 티샤가 그를 치료하는 동안 그의 주목을 끌었다.

“…아탸가 누구입니까?”

그 과정에서 묻고 싶었던 말도 던져 보았다. 겉으로는 그의 정신을 유지시키기 위한 질문이고, 속으로는 내가 너무 듣고 싶어서 한 것이었다.

“내… 조카 녀석입니다. 당신이랑 제법 닮은…….”

“많이 닮았나 보네요. 저를 보자마자 떠올리실 정도면.”

“예… 많이 닮았습니다. 당신 머리색이 좀 더 밝고 옅긴 하지만… 녀석도 햇빛 아래서 보면 가끔 빛났거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는 죽음을 목전에 두며 허들이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술술 정보를 불어 주었다.

그의 왼손이 목에 걸려 있던 작은 복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에 가슴 한편이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파 왔다. 죄책감인지, 실제로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눈은 좀 다르네요… 그 애는 오묘한 녹갈색이었는데…….”

“…그래요?”

차라리 피가 올라오면 아픔이 덜해질까.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애써 웃었다.

“그런 조카를 다, 시 보려면 힘 좀 내셔야겠습니다. 여기서 죽으시면, 조카가 있을 집으로 못, 가잖아요.”

내가 뱉는 것이 말인가? 아탸가 내가 바라는 그 존재라면 이미 죽었을 텐데, 그런 사정을 알고도 이리 말하는 것이 맞나?

“…조금만 더 힘내세요.”

하지만 나는 집에 가고 싶어.

“…신기하네요.”

“뭐, 가요?”

“보면 볼수록 아탸랑 참 닮은 것 같은데… 말하는 건 참 달라서요…….”

“…그렇습니까?”

아탸는, 그의 조카는 성격이 좀 다부진가 보지. 나는 울듯 웃으며 그의 말을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원하는 정보가 아직 안 나왔거니와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화르륵. 온몸에 화인이 새겨진 듯 뜨거운 고통이 계속해서 나를 압박했다. 침음을 삼키기가 조금 힘들다.

“어떤, 분, 이시길래요?”

“엄청… 똑똑하고 기발한 녀석이었습니다. 좀… 군대와는 안 맞는 부류였죠……. 규칙도 엄격한 분위기도 엄청 싫어해서… 정말 제 부모랑은 안 닮은 애였어…….”

와중에 상대의 말투가 점점 늘어졌다. 순간, 몸의 고통이 날아가고 조급함이 대신 그곳에 자리했다. 그의 어깨를 쥐고 있던 내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착한 아이였는데…….”

흐흑. 문득 누군가가 잇새로 흘린 울음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고통에 겨워 비명 지를지언정, 서글피 우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는데도.

“주무시면 안 돼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졸려서…….”

“졸린 건 알지만 그래도 참으세요.”

“네, 네…….”

하지만 그건 기분 탓일 것이다. 기분 탓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조차 볼 수 없는 내가, 죽어 가는 누군가 앞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게 된 내가 너무 비참해졌다.

“응급처치는 다 끝났어요. 이제 안으로 옮겨야 해요.”

“아, 네.”

나는 멍하니 티샤의 말을 따라 환자를 들었다. 끝나지 않은 작열통이 다리를 휘청이도록 했으나, 남들은 그저 든 사람이 무거워서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같이 옮길까요?”

“괜… 찮습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미소를 매단 채 걸음을 내디뎠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으나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아무도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장갑을 벗어 던진 손바닥에서 땀이 절로 났다.

“감사합니다…….”

그러다 잠깐, 내 품에 들린 이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약해서, 내 귀가 조금만 나빴더라도 알아듣지 못했을 수준이었다. 힘이 빠져나간 그의 몸이 좀 더 묵직해졌다.

“아.”

아까 그러했듯 다급함에 고통이 일순 표백되고, 나는 서둘러 걸음 속도를 높였다. 스르륵. 마련된 침상에 그를 눕히자, 얄팍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보였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죽지 않았어.

“…살 수 있을까요, 이분?”

“모르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나는 지금 드는 안도감이 인간적 공감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 앞에서 온 것인지를 외면한 채, 망연히 생각했다.

울고 싶다. 혹은 웃고 싶다.

아니, 사실 가장 하고 싶은 건…….

“…사셔야 할 텐데.”

갑갑함에 한 손으로는 위쪽 단추를 풀고, 다른 손으로는 내 얼굴을 문질렀다.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손이 피범벅이 된 상황이란 건 반 박자 뒤에나 자각했다.

뺨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본래라면 뜨거웠어야 했을, 그러나 지금은 차디차게 변해 버린 축축함이었다.

“이젠 신께서 정하실 일이에요. 어서 씻고 오세요.”

“…네.”

그것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다친 곳도 없는데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온몸이 그 감정을 부각했다.

나는 티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 * *

“안 그래도 바빠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 맹수들은 또 왜 난리랍니까.”

한편, 브리스덴 혹은 히르센치히로 빠지는 길목에 자리한 도시 슈부르켄. 그 도시를 앞둔 가도의 한 마을에서 데스브링거는 투덜거렸다.

그놈의 맹수로 인해 반나절 정도 지체된 것이 현 상황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숙을 안 하게 된 건 다행이긴 한데…….”

물론 이 마을을 지나쳤다면 길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을 터. 그렇게 치면 맹수 사건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아무렴, 길에서 자는 것보단 마을에서 자는 게 훨 편하다.

“으음…….”

다만 그래. 급한 와중에 이런 사소한 일까지 발목 잡으니 썩 불쾌해지는 거다. 길 가다 보인 돌멩이를 괜히 발로 차는 심리와 비슷했다.

“악마들의 지령이라도 받았나 보지.”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말아 주십시오.”

그사이, 마이스터가 특유의 재수 없는 낯으로 농을 던졌다. 그러자 이번엔 다니엘이 식겁한 표정이 되었다.

이 세상 동물들이 악마들의 말을 따라 움직이는 걸 상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질색 팔색이야?”

“…으음. 제가 생각해도 그건 좀 끔찍한 말 같긴 합니다요.”

더불어 데스브링거도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하필 지금이 식사 시간이고, 그가 먹고 있던 것이 잡은 맹수로 만든 요리라 더 그러했다.

“너희 비위 참 약하네.”

“댁이 미친 수준으로 좋은 거겠죠…….”

“용사님을 봐. 멀쩡하잖아.”

“아니, 저 양반은…….”

데스브링거는 묵묵히 밥만 입에 쑤셔 넣는 인퀴지터를 두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샌님은 비위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그냥 이 대화를 안 듣고 있는 게 아닐까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 안에 맴돌았다.

“마법사들은 다 그렇습니까?”

결국, 데스브링거는 말을 돌리는 걸 택했다.

“그렇진 않네.”

그에 맞춰 잠자코 식사하던 아크메이지가 나섰다.

단칼에 잘라 뒷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마디에서는, 마이스터의 괴랄함이 마법사 전체를 향한 편견으로 퍼지는 건 막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물론… 일반인에 비하면 다들 역치가 높은 편이긴 하네. 연구하는 분야에 따라 편차가 심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론 그렇지.”

하나 그런 아크메이지조차도 완전히 묻기엔 양심이 찔렸는지, 그녀는 묻지도 않은 해설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저 정도까진 아니야.”

여전히 마이스터의 특출남은 부정하지 않은 채다. “내가 뭐 어때서.” 마이스터의 표정이 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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