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내게 말해 줘 (2)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에서 ‘며칠만 더 가면 뮌문트가 나올 것이다’라는 이야길 들었을까.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삼 일째에 정말로 성벽이 나왔다. 마을의 것이라기엔 너무 본격적이고, 도시의 것이라 하기엔 좀 낮다 싶은 성벽이었다.
“마을이 하나 더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하나 이를 두고 헷갈려 할 필요는 없다. 마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본격적이다, 라는 의견은 기실 악마의 출현이 드문 지방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아무렴 사람이 돌담이나 통나무 외벽을 못 넘는다 해서, 설마 악마까지 못 뚫고 나가겠는가? 돌담은 대개 낮고, 통나무 외벽은 재질이 재질이라 상당히 무른 편인데?
“여행자?”
하므로 이곳은 마을이 맞다. 마역에서 새어 나올 악마를 대비해 외벽을 좀 더 단단히 방비했을 뿐인 마을.
성벽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식으로 훈련받은 병사는 없는 곳.
“아, 네! 한데 여기가 혹시 뮌문트입니까?”
“뭐?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베헨이야! 성주님 대신 촌장이 있는 곳이지.”
“아… 도시가 아닙니까?”
“그래. 뮌문트는 여기서 더 가야 해.”
참고로 후자에 대한 증거는 단순히 심증만 있지 않다. 일례로 지금 고개를 삐죽 내민 병사를 보아라. 가죽 갑옷조차 입지 않은 보통 차림이지 않는가.
“혹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뮌문트? 뮌문트로 가는 시간을 묻는다면… 지름길로 갔을 때 하루 정도 걸려. 지금처럼 가도를 따라 갈 거면 보통 사흘 정도 걸리고.”
“지름길… 지름길이 있습니까?”
“그러엄. 있고말고. 산을 통해야 해서 토박이 아니면 길 찾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야.”
화기애애 이어지는 질답도 마찬가지다.
자기 딴에는 별거 아니라는 느낌으로 말해 주는 것 같지만, 그가 정식 훈련을 받았다면 저러진 않았을 거다. 좀 더 경계심을 갖추고, 내게 찾아온 이유나 이름 같은 걸 먼저 물었겠지.
그게 보초를 서는 병사의 일이니까.
“거기에 그 골목은 종종 마역에서 새어 나온 악마들이 나타나기도 해서… 악마들이 준동하고 있는 요즘은 오가는 사람이 아예 없어. 그러니 갈 거면 가도로 가. 물론 가도도 절대 안전하진 않겠지만.”
하지만 그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한 채 떠들기만 했다. 즉, 그는 결국 병사보단 무기를 든 일반인에 가깝다.
“악마들의 준동이 그렇게 심합니까?”
“…어, 음. 혹시 묻는데, 당신 그 외의 소식은 들은 거 없어?”
“그 외의 소식……?”
“뮌문트로 가던 상단 하나가 그대로 증발했다는 소식.”
“…금시초문입니다만.”
“나흘 전에 있던 일인데.”
“…엇갈렸나 보군요. 소식을 듣기 전에 출발한 모양입니다, 제가.”
“…그런 것 같네.”
보초를 서는 이가 병사보단 일반인에 가깝단 건, 어찌 보면 마을의 불행일 수도 있으리라. 저이가 크나큰 실수를 할 확률이 제법 높다는 것이니.
그렇지만 마을과 별개로 내겐 제법 기꺼운 일이었다.
“으음. 그보다 앞에 악마가 나타났다면… 음. 혹시 마을 안에 쉴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쉬고 가게? 하긴 노숙이 힘들긴 하지. 그렇지만 우리 마을엔 여관이 없는데.”
“밤만 보내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될까요?”
“그으… 음. 잠깐 기다려. 위험한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은 해야 하니까.”
“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제대로 교육받은 병사에게 심문받는 건 퍽 힘들었다. 가끔 날카로운 질문 같은 게 들어오면 둘러댈 말을 고르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프던지.
“…오.”
“무슨 문제라도?”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생각보다 키가 크시네요…….”
“…….”
“일단 짐부터 주세요. 당신 보는 앞에서 확인할 거니까 도둑맞을 걱정은 마시고.”
“그건 걱정 안 해요.”
그에 비하면 이런 허술한 탐문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 허락을 받은 상대가 가방을 가져가 펼쳤다.
“엥. 이게 다야? 이런 빈약한 짐으로 어떻게 오셨대요?”
“하하…….”
“무기도 하나 없네… 가방 안에 가방은 또 왜 넣어 두셨고? 아무튼 진짜 잘도 여기까지 오셨다. 악마가 뭐야, 맹수라도 잘못 마주쳤다간 목이 달아날 차림인데.”
물론 중요한 건 다 인벤토리─가방 말고 아공간 팔찌─에 넣어 뒀기에, 병사가 볼 수 있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내 허술한 짐을 본 그의 눈이 측은함과 기묘함으로 물들었다.
“저기, 혹시… 귀족인데 가출을 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제가 귀족일 리가요. 왜 그런 오해를…….”
“아니 그,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부도 희고 보석도 귀에 끼고 있길래… 짐도 제대로 쌀 줄 모르고…….”
그건… 그렇네. 오해할 만도 하네.
나는 문득 지나온 도시 몇 개를 떠올렸다. 검문소에서 병사들이 종종 나를 철없는 무언가로 볼 때가 있었는데, 혹시 그것도 이런 오해를 해서였을까?
“…그냥 물려받은 돈이 좀 있을 뿐입니다.”
“부잣집 도련님이긴 한 거구나…….”
“부잣집 도련님까진 아닙니다. 그냥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만 되는 것뿐이지.”
“그래요, 도련님.”
“도련님은 아니라니까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 나는 ‘어쩐지 묘하게 검문소를 통과하기 편하더라’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쓰윽. 헤집어졌던 가방이 도로 돌아온 건 그때였다.
“자, 다 봤어요. 덩치가 커서 좀 걱정했는데, 결국 덩칫값이 아니라 얼굴값을 하는 사람이었네요.”
“얼굴값……?”
“순해 보인단 뜻이에요.”
뭐어… 지금 인상이 좀 밍밍한 편이긴 하지.
내가 떨떠름하게 말을 받고 있으니, 병사가 씨익 웃었다. 툭. 팔꿈치로 내 팔뚝을 톡톡 치는 것은 그의 넉살이 가진 크기를 고스란히 내보여 준다.
“자자! 어서 들어오기나 해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마을이라 도련님 눈엔 안 차겠지만요.”
“그러니까, 도련님이란 말은…….”
어쩐지 이곳에 머무는 내내 도련님 취급을 당할 것 같은데. 이거 맞나.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병사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쏙 들어갔다.
“빨리 안 들어오면 닫습니다?”
“잠, 잠시만요.”
그래도 비웃는 기색이나 호구 취급은 엿보이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그를 따라 마을 안에 들어섰다. 철컹. 내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끙차.”
안쪽 잠금장치는 널판지를 가운데 끼는 고전적 방식이었는데, 아무 도움 없이 혼자서 하는 게 제법 힘이 세다 싶었다.
“자, 따라와요!”
“예?”
“왜 그런 얼굴이에요? 내가 마을 혼자 보낼 줄 알았어요?”
“아니, 그… 자리를 지키셔야 하는 게……?”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어요. 그리고 댁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병사는 그리 말하곤 낄낄 웃었다.
“어째, 여기서 이십 평생을 산 나보다 오늘 처음 온 댁이 마을 걱정을 더 하는 것 같아요?”
딱히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정 걱정이 되면… 어이! 미샤! 잠깐 나 대신 성벽 좀 봐 줘!”
“갑자기?”
“외부인이 와서, 안내 좀 해 줘야 하거든.”
“어… 외부인!?”
병사의 부름에 소년이 도도도 달려왔다. 내 가슴팍까지 오는 미들족 소년이었는데 회색 눈동자가 꼭 은 같아서 참 어여뻤다.
“우와. 진짜 외부인이다. 근데 키 엄청 커어!”
“크흐흐. 우유 안 먹는 미샤는 꿈도 못 클 키지.”
“아니야! 나도 저렇게 클 거거든?! 우유 안 먹고도 클 수 있어!”
“오호, 정말?”
소년의 외침에 병사가 또 한 번 낄낄거렸다. 웃음 자체에서 ‘오호라’ 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소년의 눈이 데굴 굴렀다.
“우유 안 먹고도 클 수 있는데… 진짠데…….”
“글쎄다. 그럼 한번 해 봐라. 대신 나중에 키 안 자랐다고 나한테 뭐라 하기 없기다.”
“어, 어…….”
딱 봐도 편식쟁이구만. 나는 아이의 굴러가는 눈동자를 힐끗 살펴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사탕은 더 이상 없지. 주고 싶은 사람이 더는 옆에 없어서, 다시 살 일이 없었으니까. 뒤늦은 깨달음이 잠깐 내 손가락을 굳도록 만들었다.
“저, 형.”
“…응?”
“형도 우유 먹었어요……?”
그사이,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나는 반사적으로 입가를 가렸다. 내 옆에 서 있던 병사는 이미 배 잡고 파들대는 중이다.
“…그럼요. 저도 우유 많이 먹었어요.”
“진짜요……?”
“네.”
“그럼 저도 우유 먹으면 형처럼 클까요?”
“…잘하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키는 지구에서도 엄청 큰 편에 속하는 키라… 미들족 평균이 170도 안 될 듯한 이곳에선 더 찍기 힘들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부러 긍정했다. 싫다는 걸 강제로 먹일 생각까지야 없지만, 이런 권유 정도는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는 판단이었다.
하물며 이 시대는 유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된 편이니까. 역시 먹을 수 있다면 가능한 먹이는 게 좋겠지…….
“그렇다고 배탈이 날 정도로 많이 먹는 건 안 돼요. 우유 말고도 다른 것도 골고루 먹어야 하고요.”
“네!”
나는 부족한 지식을 끌어모아 조언하곤 아이에게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였다. 아이가 마주 웃어 주곤 “성벽 보고 있으면 되는 거지!?” 한마디와 함께 성벽 쪽으로 우다다 뛰어갔다.
“눈치 좋네요, 도련님.”
“도련님 아니라니까요…….”
나는 내 소심한 반박에 깔깔 웃는 병사를 두고 숨을 가볍게 뱉었다. 상대가 진심으로 저러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내 반응이 재밌어서 저러는 거란 걸 알기에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는 몇 번이고 해도 질리질 않아서, 그저 좋기만 하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요. 여관은 없지만… 뭐 한 사람쯤은 방을 내주겠죠.”
“하하…….”
“정 방이 없으면 우리 집에서 자도 돼요. 가족들도 뭐라 안 하실 것 같으니까.”
“저야 그럴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한데…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아 참, 참고로 제 이름은 틸이에요. 티챠, 티샤, 타샤.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아, 음. 티샤?”
“그래요. 그렇게요.”
나는 티샤를 따라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러 채의 집이 먼저 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밭들이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있는 밭이 다는 아니고, 아마 성벽 밖에서 봤던 화전까지 포함한 게 이들의 농사 자리일 테다.
“으음. 여긴 신전이 없나 보네요.”
“아, 네. 조그만 마을이라.”
신전이 없다면 오늘 위장 스킬을 풀고 지내도 되려나. 눈썹도 위장 스킬 켠 채로 바른 건 스킬을 끈 후에도 제법 효과가 지속되니까, 사제만 없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본래도 손등까지 내려오는 옷소매를 좀 더 당긴 후, 물었다.
“신성력을 쓰는 사람도 없나요?”
“아휴, 당연히 없죠.”
까득. 내 귀에만 들릴 소리와 함께 시시각각 떨어지던 컨디션이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걸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뒤바꾼 신체적 편안함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요?”
“그냥, 가기 전에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라도 할까 했어요. 없다면 그냥 마음속으로만 하죠, 뭐.”
“흐흐. 그래요. 신께서도 충분히 들어주실 거예요.”
과연 그럴까. 정작 그 신이 제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나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이내 빙긋 웃는 걸로 답을 끝냈다.
“아, 그렇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우리 마을은 어떻게 찾았어요?”
“그냥 길을 따라왔습니다만…….”
“엥, 길이요?”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보고 오셨대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종종 헷갈리는 길인데.”
“어……?”
그런데, 지금 뭐라고?
나는 티샤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곤 내가 온 길을 설명했다. 그게 길이 아니면 뭔데, 물론 길이 길 같지 않긴 했는데. 뭐 그런 의미를 한가득 담아서 내놓은 설명이었다.
“아아. 바위를 기점으로 쭉 갔어야 했는데 거기서 헷갈리셨구나.”
“…….”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네요. 거기로 쭉 가면 뮌문트가 나오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썩 안 좋은 시기니까.”
글쎄다. 그때 바로 가나, 오늘 하루 묵고 가나, 가도의 안전 상태는 크게 안 달라질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든 생각을 혀로 굴리다가, 이내 삼켰다. 아무렴 엿새 연속 노숙보다는 중간에 마을 들르는 것이 내 입장에서도 훨 나았다. 가도의 안전 상태도… 뭐, 내가 당할 실력이 아닌 것과 별개로, 모르고 습격받는 것보단 알고 가는 게 더 좋았고.
“자, 여기가 저기가 우리 촌장님 집이에요.”
“촌장님께 부탁드려도 되는 겁니까?”
“우리 마을에서 제일 집이 크시니까 방 하나쯤은 남지 않을까요? 아니더라도 촌장님한테 외부인 한 명 데려왔다고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아하.”
티샤의 설명에 나는 납득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이런 건 우두머리─선출직이든 뭐든─에게 보고하는 게 좋지.
“다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네요.”
“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요.”
“네??”
그러나 보고도 상황이 따라 줘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마을에 들어왔답시고 풀어 뒀던 감각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걸 인지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마도 촌장의 집일 곳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다.
“어! 어?!”
그에 티샤가 당황하며 달려 나갔다. 나도 그를 따랐다. 다른 건 아니고, 그와 멀리 떨어져 있다가 수상한 놈 취급 받는 건 피하기 위해서였다.
“촌장님! 무슨 일이에요!”
“오, 티챠. 잘 왔다. 지금 다친 사람들이 엄청 들어와서…….”
그런데 그렇게 달려간 곳에서 마주한 것은 온갖 상처로 끙끙거리고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이었다.
짙은 피비린내에 내 미간이 구겨지고,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사람들 면면을 훑어보았다. 대삼림에서 가져온 약재가 아직 남아 있겠다, 필요한 수량을 헤아려서 꺼내 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
한데 그러던 도중, 나는 팔을 부여잡고 있는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탸?”
콰드득.
팔이, 어쩌면 온몸이. 그 살갗 아래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