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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1화 (271/389)

271화 내게 말해 줘 (1)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길을 묻는 관광객에게 길을 가르쳐 준 후, 십 분 뒤에, 한 시간 뒤에 ‘아, 그 사람 잘 갔으려나. 좀 더 자세히 알려 줬어야 했던 건 아닐까.’라고 곱씹는 대신 어련히 잘 갔겠거니 마음 놓을 수 있었다면.

인터넷 예매가 뭐냐며, 왜 5시간 뒤에 출발하는 기차마져 표가 없는 거냐며 발을 동동 구르시는 어르신을 두고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네’라고 혀만 차고 넘길 수 있다면.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두고 나와는 별 관련도 없고 개입해 봐야 골치만 아프다며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 인생은 조금 더 편해졌을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 * *

“이상하지…….”

에메랄드는 베른슈타인의 칼날로 덤벼드는 맹수를 베었다. 촤악. 퍼지는 핏줄기가 다져진 가도를 더럽혔다.

“왜 계속 근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기사님?”

하나 그녀의 관심사는 그딴 핏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면처럼 매달고 있는 웃음 속에서 방금 느낀 마기의 잔향을 쫓았다. 이쪽. 그녀의 곤두선 감각이 방향을 알려 주었다.

“자르딘.”

그녀는 말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종자를 부르며 검을 한 차례 움직였다. 크기만큼이나 묵직한 검이 한 차례 돌아가고, 호박색 검신에 묻어 있던 핏물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예?”

“알아서 따라오거라.”

직후, 그녀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쾅! 눈에 설핏 보일 수준으로 표출된 푸른 마력은 그녀의 각력을 강화해 더 먼 거리를 뛸 수 있도록 해 준다. 팡, 팡, 팡. 그녀의 몸이 한 걸음마다 수 미터를 쭉쭉 나아갔다.

“……?”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가 쫓던 마기의 잔향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막 위에 놓아 둔 물잔이 순식간에 비어 버리는 것처럼 사라진 것이라 찾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또 너구나.”

“…어, 그때 그 기사님?”

대신, 그녀는 녹색 눈을 끔뻑거리는 사내를 발견했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또 너구나.”

갑작스레 접근해 오는 기척에 놀라, 다급히 위장 스킬을 발동하고 최대한 멀찍이 물러섰을까.

머지않아 누군가가 내 앞에 도달했다. 우연찮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들은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 안녕하세요……?”

하나 이 우연을 마냥 불편하게 여기기에는 내가 그녀에게 진 빚이 너무 많다.

첫 만남 때는 본인 거슬린단 이유로 날 괴롭히던 모험가들을 내쫓아 줬고, 두 번째로는 만하펠트로 가던 골목에서 토벌대에게 발각될 뻔했을 때 “또 보네?” 한마디로 나를 보증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그녀가 대놓고 변호해 준 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아, 기사가 아는 사람’ 하며 대충 넘어가 준 쪽에 가깝긴 한데…….

“저번에 뵙고 또 뵙네요.”

어쨌든 의도치 않았더라도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인 건 맞다.

해서 나는 우연에 어리둥절해하는 청년처럼 어리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엔 진심 반 연기 반으로 지어낸 반가움을 띤 채다.

“참 이상하지.”

그러나 내가 그리 인사해도 상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냥 내 얼굴만 빤히 보는 게 어쩐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저, 무슨 문제라도?”

아니면 혹시 걸렸나? 위장 스킬을 쓰며 마기가 가려지는 모습 전부가 들켜 버린 건가?

“…이렇게 순해 빠진 얼굴이 악마일 리는 없고.”

미친, 들킬 뻔한 거 맞잖아.

“묻겠다.”

나는 등판에 식은땀이 주르르르륵 흐르는 걸 느끼며 상대의 고아한 얼굴을 마주했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해 봐야 도리어 켕기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기에 택한 것이었다.

“이 근방에서 악마를 본 적 있나?”

하나 빚어낸 것처럼 정갈하되 인형처럼 인공적인 구석이 있는 얼굴이 나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무섭다는 느낌이 들어서.

당장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는 마당이라 그 공포는 더 강하게 들어왔다.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속으로만 덜덜 떨었다.

“그, 저번이랑 똑같은 답만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만… 딱히 본 것은…….”

“…그래?”

와, 컨셉일 땐 컨셉 성질머리 걱정밖에 안 들어서 몰랐는데, 일반인 시점이 되니 이 세계 기사들은 엄청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특히 걸리는 게 있는 입장이 되면 더더 무섭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새삼 일반인에게서 기사가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큰지를 체감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마저도 상대의 시선이 내 손 쪽으로 내려오며 그만둬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 믿어 주마.”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나를 악마로 의심하지 않는단 것이었다. 인간형 악마─인간과 비슷한 형태란 소리가 아니라 진짜 인간처럼 생긴 악마─가 워낙 드물고 악마가 마기를 가리려면 대악마쯤 되어야 하다 보니 벌어진 일 같다. 정말정말 천운이었다…….

“…….”

“…….”

어째서인지 기사가 떠날 생각을 않는 건 별로 행운이 아니었다마는.

“기사니이임! 허억, 헉.”

기사가 가만히 서 있고, 그렇다고 내가 움직일 수도 없는 어색한 공기가 연속되었을까.

뻘쭘함을 참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려니,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끌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아마 이 기사의 시동? 종자? 대충 그 비스무리한 거였지.

“왜, 흐억, 왜 이리 멀리 오셨어요…….”

그보다 왜 동행인이 안 보인다 했더니, 그냥 내버리고 달려온 거였냐.

나는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측은하게 보았다. 타고 다니는 용도의 말이 아닌 짐말이라서, 그것도 무거운 짐을 이미 한가득 싣고 있는 말이라서 타고 오지도 못한 듯했다. 그저 불쌍했다.

“저, 물이라도…….”

“가, 감사합니다…….”

저 사람도 분명 가지고 있는 물은 있겠지만, 저 상태에선 짐을 뒤적여 물 찾는 것도 일일 테다.

나는 그런 마음에서 내 짐을 뒤적여, 물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상대가 나를 천사 보듯이 바라보았다. 와중에 손은 물주머니를 받아 들어 뚜껑을 뽕 따고 있다.

꿀꺽꿀꺽, 크아. 상대의 입안에 물이 졸졸졸 흘러 들어갔다.

“흐아, 살겠다.”

“그럼 이제 출발해도 되겠구나.”

“…….”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는 안 마셨… 인간인가?

나는 본인은 숨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며 가혹하게 채근하는 기사를 두고 순간 눈동자를 떨고 말았다. 진짜 인간 맞나?

“네, 넵!”

그러나 기사가 저리 행동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가 보다.

그는 뚜껑 닫은 물주머니를 내게 황급히 돌려주곤 본인의 작은 짐을 고쳐 메었다. 괜히 기사의 종자가 아닌지 그 잠깐 새에 호흡은 안정된 상태다.

“가자.”

폭풍처럼 몰려왔던 이가 폭풍처럼 떠나갔다.

“…진짜 놀랐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위장 스킬은 하루만 더 유지할까…….

나는 점점 멀어지는 기사와 그 종자 그리고 그들의 짐말을 보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저들과 나란히 가고 싶진 않기에 전진하는 속도는 아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만하펠트를 떠난 지 5주. 뮌문트까지 2주 남은 날이었다.

* * *

퀸른헨 지방과 데르마 지방의 경계, 라인필트 고원.

그리고 그 라인필트 고원의 서쪽 끝자락, 산맥으로 가로막힌 북쪽 대신 북서쪽 평원으로 빠질 수 있게 해 주는 퀴벡 가도의 수문장 도시 뒤반치히.

그곳에서 아크메이지는 본인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진 정보가 참으로 심각했던 까닭이다.

“베뮈르헨에서 벌어진 사건이 기폭제라도 된 것 같군요…….”

동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도시란 도시에서 죄 공문이 날아왔다.

악마들이 전선으로 모여들고 있음, 교전이 언제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음, 지원이 필요할 것 같음.

사용된 단어만 다를 뿐 놀라울 정도로 공통된 내용들은, 마치 한곳에서 여러 번 발행해 보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지 않다는 게 참으로 유감일 지경이었다.

“뭐 그럴 만하죠. 베뮈르헨이 감당하던 아이템 주문 수가 수고,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전선에서 빠진 병력이 몇인데. 제가 악마였어도 지금 치러 나설 듯.”

하나 더욱 불행한 사실은, 이 상통된 내용을 두고 단순히 ‘유감입니다’ 한마디만 하며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마이스터님. 단어 선택이 썩 좋지 않게 여겨집니다만…….”

“곱게 말한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이단심문관님? 어떤 형태로 말하든 지금 동부 전선이 좆되기 직전이란 건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건…….”

“와… 댁의 인성에는 갈수록 감탄만 나옵니다요. 사람이 어떻게 저러지.”

“뭐, 인마?”

당장 저들─세 명의 남정네─이 떠드는 꼬라지만 봐도 그렇다. 이 문서들의 이면에 숨겨진 악의는 참으로 깊고 짙다. 서투루 넘겼다가는 아마 피와 죽음뿐만이 이 손에 돌아오겠지.

“조용.”

“…….”

“…….”

그렇지만 섣불리 넘기지 않는다 해서 좋은 결과가 돌아오기는 할까? 그들이 이 악의를 이겨 낼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아크메이지님, 어디가 주공일지 감이 오십니까.”

“…죄송합니다.”

단 한마디로 모두를 침묵시킨 용사가 조근조근 질문했다. 답할 수 있는 말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라도 일단 들려주십시오.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당장 답할 말이 없다고 해서 일찌감치 단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포기는 어쩌면 존재할 수 있는 길마저 막는다. 아크메이지는 메마른 목소리 앞에서 눈을 감고 그나마 떠오른 것들을 말했다. 다른 이들은 떠오르는 게 없노라 손짓 발짓으로 피력했기에 발언자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신께선 북쪽으로 가라 명하셨지요.”

“전선을 외면한 채 북쪽으로 가라는 이야기십니까.”

“신께선 예언하지 않으십니다.”

미래를 엿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므로 신께서 내린 신탁은 이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께선 당시에 가장 올바른 선택을 말해 주실 뿐이지요.”

하지만… 최소한 이렇게 명확한 지시를 내렸다면 그 끝에는 그만한 무언가가 기다리지 않을까.

“…북쪽으로 가면 무언가가 바뀔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만약 바뀐다면, 바뀐 그것은 이 전선을 외면한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겠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런 추측 가운데 인퀴지터가 변함없는 표정으로 돌을 던졌다. 가치 비교, 우선순위, 기회비용. 언제나 사람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아크메이지의 입이 다물리고 인퀴지터가 딱딱한 얼굴로 탁자를 두드렸다. 약간의 겹침은 있을지언정 모든 공문이 늘어진 탁자가 톡톡 소리를 내었다. 오직 그 소리만이 방 안을 차지했다.

“북쪽으로 가는 건 미루겠습니다. 전선으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혹은 그런 수식어를 붙이긴 묘한 느낌으로. 적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퀴지터가 끝내 결정을 내린 것이다.

“또한, 목적지로는 지원군이 닿기 힘든 곳을 우선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혹 이견 있습니까.”

그러나 분위기가 엄격해지고 삼엄해졌을 뿐, 인퀴지터는 언제나처럼 확정 이전에 마지막 의견을 구했다. 독선을 경계하는 녹색 눈이 장내를 훑었다.

“저는 대리자님의 의견에 따릅니다.”

그에 다니엘이 먼저 제 입장을 밝혔다. 본디 명령을 수행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고, 애시당초 전략에 능하지 않다며 이런 일엔 물러나 있겠다 한 사람이니, 새삼스러운 발언은 아니었다.

“저도 뭐…….”

데스브링거도 비슷했다. 달리 딴죽 걸 만한 것이 없는 듯 그도 어깨를 으쓱이며 의견을 수용했다.

“뭐요.”

마지막으로 마이스터도… 옳고 그름이 아니라 본인의 귀찮음을 사유로 찬성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순응해 주었다.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은 지원군이 빠르게 올 수 없는 구역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하면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도시가 나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파티로도 정말 괜찮을까.

아크메이지는 베뮈르헨을 떠난 후 줄곧 생각해 온 문장을 또 한 번 곱씹었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혀는 착실히 그녀가 맡은 조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근거가 있습니까.”

“동부 전선이 압박감을 표하기 시작한 시기와 남부 전선에서 악마 목격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시기가 거의 동일합니다. 아마 남부 전선에 쓰이던 병력을 동부로 돌린 것이겠지요. 하면… 남부의 인력을 동부로 끌어 올려도 될 겁니다.”

그녀의 손도 동일했다. 아크메이지는 가설의 구실이 될 수 있는 몇 개의 공문과 보고서를 끌고 왔다.

“다만 남부에 있는 지원군이 동부 전선에 배치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상대적으로 남쪽에 있는 도시가 먼저 지원군을 받겠군요.”

“예. 그래서입니다.”

“북부 전선에선 지원군을 받기 어렵겠습니까.”

“…많이는 안 해 줄 겁니다. 북쪽은 언제나 치열한 싸움을 이어 온 곳이니까요.”

북부 지킨답시고 자리 지키다가 동부 전선이 뚫리면 그쪽만 손해니 지원을 보내긴 할 거다. 하나 대악마 둘이 전선에서 버티고 있는 북부 특성상 보낼 수 있는 병력이 그렇게까지 많지도 않을 터.

데르마 지방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뮌문트와 그 바로 아래의 브리스덴 정도만 지원을 받을 확률이 높다.

아크메이지는 그녀의 지식을 토대로 그것을 설명했다. 인퀴지터의 눈이 건조하게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군요.”

그리고 끝내,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을 짚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르센치히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브리스덴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한 도시, 히르센치히가 검지에 꾹 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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