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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0화 (270/389)

270화 존재한다면 (8)

나는 모래가 조금씩 휘날리는 바위의 평원 위, 모여드는 악마들을 두고 숨을 길게 뱉었다.

마역 안인 만큼, 사제들이 내 마기를 감지할지언정 ‘악마기사’가 아닌 다른 악마의 것으로 오인할 거라는 판단하에 움직이곤 있지만… 정말 그럴는지. 도리어 이 선택이 실수가 되어 언젠가의 화근이 되는 건 아닐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내 머릿속 한자리에서 계속 맴도는 건 그따위 고민이다.

“하.”

그렇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 그만두지 못한다.

한국인은 먹은 밥값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종자였다.

휘익!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검을 꺼내어 그대로 휘둘렀다. 검은 마력이 들불처럼, 혹은 해일처럼 지평선을 향해 뻗어 나갔다.

서걱! 조금씩 모여들던 구울과 스켈레톤들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바닥으로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수가 대략 백이었다.

크르륵.

캬악!

“징글징글하네, 진짜…….”

물론 이렇게 해도 일부는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 나가, 분리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스켈레톤은 심지어 조각난 척추뼈를 뽑고 나머지를 잇는 식으로 수복을 시도 중이다.

이래서 언데드한텐 참격 속성이 안 좋아. 내 입새로 자연스럽게 작은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와르르르!

다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스켈레톤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더불어 스켈레톤보다 상위 개체인 구울들은 범위 내에 있던 놈들이 싹 다 죽었다. 여기서 배만 추가로 더 안 가르면 부활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니 그거면 됐다. 이거면 될 것이다.

저 도시가 감당할 부담은 최소한 백 정도는 줄어들었을 테니, 나는 최소한의 도리를 다했을 테다…….

나는 가발이 주는 답답함 대신, 머리칼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오랜만에 만끽했다. 당연하지만 더운 바람에 속까지 편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백 마리 가지고 생색 내는 것 같아 무안한 감정 한 스푼. 숫자가 고작 이뿐인 걸 보면 처음부터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안도감도 한 스푼. 어쩌면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애들이 덜 모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한 스푼……. 그렇게 여러 가지 감상을 마구 뒤섞다 보니 속이 영 아리까리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진짜 더 오는 거 아니겠지……?”

그렇지만 여기서 더 오래 있을 수도 없다.

아무렴, 여긴 마역이었다.

스윽.

나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내 오른팔을 매만졌다. 언젠가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오른팔─악마─은 참으로 잠잠하다.

마역에 들어왔을 때도, 마역에 들어와 1시간쯤 지난 지금도 그랬다.

하면 마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는 악마에게 별다른 버프를 주지 않는 걸까?

나는 한때 아크메이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건 굉장히 오래된 일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내가 컨셉에 파묻히게 된 원인 중 하나여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대악마는 사탄의…… 다름없…… 자네가 경계한 건…… 악마의…….』

물론 그녀가 한 말이 적확하게 기억난단 소리는 절대 아니다. 내가 천재도 아니고 반년… 반년 맞나?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데.

아무튼 뭉뚱그려 반년 전 일을 어찌 정확히 기억하겠나. 그냥 그녀가 했던 말을 적당히 뭉개, 그때 전달하고자 했던 뜻과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거지.

『봉인할 수단을 마련해 본다든가…….』

그래, 어찌 보면 걱정이었던, 그리고 어찌 보면 대안이었던 그 말들을.

결국 하나도 이뤄지지 못한 미래를.

하아.

나는 숨을 뱉었다. 한국이었다면 겨울의 한가운데였을 공기는, 세계가 다르단 이유만으로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열사의 사막이 건조한 더위로 내 숨의 형태를 숨겼다.

쉐에에엑.

그러다 문득, 쇳소리를 닮은 무언가가 모래 사이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철갑에 둘러싸인 팔과 허전한 목 위는 그것의 정체를 알기 쉽도록 배려해 준다.

듀라한. 기사들을 재료로 만들어지고 기사들에 의해 죽는 망자. 혹은 저것을 죽이기 위해 기사가 육성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도리어 탄생되고 마는 사자.

“오… 딱히 실전을 바라고 나온 건 아니었는데.”

이런 기사와 듀라한 간의 아이러니는 닭과 달걀의 관계랑 퍽 다르지 않아서, 사람들은 제법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론 그렇다.

“졸지에 배운 걸 바로 연습하게 생겼네.”

하나 적어도 이 도시에선 그 논쟁을 더 이상 볼 일 없게 되지 않을까? 하다못해 전보단 확실히 줄어들 것 같은데.

쉐에에엑.

나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검을 치켜드는 기사를 두고 롱소드를 다잡았다. 상단세. 항상 아래로 늘어트리던 검날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을 검날 위로 올려 두었다.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싶으나, 지금은 위장을 벗고 있으니 선택지가 없었다.

각설하고, 내가 그러자 저쪽 듀라한도 비슷한 형태의 자세를 취했다. 목 없는 기사의 검은 갑주가 철컥, 하고 울었다. 어제 발터 경이 보여 준 자세와 매우 흡사했다.

이 세계의 검술이 죄다 저렇게 시작할 리는 없으니, 아마 이 도시에서 발전한 검술 고유의 특징일 것이다.

“…승리하는 자에게 명예를.”

하면 저 듀라한의 육신도 언젠가는 이 도시에서 살아 숨 쉬는 기사였을까?

…발터 경과는 혹시 아는 사이였을까?

“패배하는 자에게 깨달음을.”

나는 철갑 사이로 보이는 빛바랜 비늘을 힐끗 살폈다. 때와 먼지가 덕지덕지 껴서 어딘가 누래 보이는 그것은, 아마 닦아 낸다면 제법 고운 검정색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런 기분이었다.

“결투에 공명정대함을.”

하여 나는 베르세르크에게 배웠던 경의를 표했다. 악마라고 한들 한때 사람들을 위해 싸웠던 기사의 육신, 그런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우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쉐에에엑.

그런데 기분 탓일까? 내가 예를 표하는 동안 듀라한은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되레 그 예식에 맞춰 주는 것처럼 타이밍 맞춰 쇳소리 같은 바람 소리를 내 주기도 했다. 퍽 기묘한 기분이었다.

까앙! 듀라한과 내 몸이 부딪쳤다.

* * *

[…경이로울 정도로 내 일을 방해해 주는군.]

호수의 옥좌 위, 세상을 굽어보는 존재가 왕홀을 쥐었다. 그의 앞에는 얇고 넓게 퍼진 물의 거울이 세상 어딘가를 비추고 있다.

퉁, 퉁. 약한 떨림과 함께 초마다 각도가 바뀌는 장면은 세세하지 않았다. 붉은 암석의 대지, 두 개의 인영, 순간순간 끼는 노이즈.

쾅! 무음의 폭발이 화면을 가득 채운 순간 물의 거울이 터졌다. 관찰하고자 하는 장소의 에너지 파장이 안정적이지 못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허락만 하시면, 직접 처단하고 오겠나이다.

또한, 이것은 처음부터 이뤄졌어야 했을 일이다.

그는 영향권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제대로 관측할 수 없는 영역을 두고 왕홀을 두드렸다. 툭. 손톱이 황홀의 대를 치는 순간 거울이 복구되었다. 다시 비치는 광경은 아까와 같은 장소이나, 약간의 차이점은 생긴 채다.

대지 위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두 사람이 아니다.

─샛별이시여, 부디 윤허를.

[허하지 않겠다.]

─…….

하나 그 싸움의 결과가 주는 정보값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저 싸움의 승리자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음습하기 짝이 없네. 내가 보고 싶다면 직접 오지 그래?』

하니 정말 봐야 할 건, 저것이 어째서 그의 관측을 허락했는가다.

[…기만인가, 아닌가.]

인간들이 마역이라 통칭하는 구역은 전부 그의 시야에 든다. 끝자락일수록 관측할 수 있는 양이 적어지고 ‘방해되기’ 쉽지만, 일단은 그렇다.

[분노하는 자여, 너는 항상 나를 시험하는구나.]

그리고 그것을 상대는 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알면서, 설사 몰랐대도 그의 영역을 밟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을 거면서. 어째서? 어째서 평소처럼 반경 1km에 방해파를 흩뿌리고 다니지 않는가. 어째서 감시를 알아챈 척도 하지 않는가.

어째서?

…또다시 숙주가 이겨 버려서?

─하면 샛별이시여… 계획은…….

그는 숨을 느른하게 뱉어 냈다.

[수정하지 않는다. 그대로 행하는 것이 너희의 역할이다.]

저것이 분노가 아닐 거라는 가능성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가 교만 이전에 새벽별이라 불렸듯, 저것은 분노 이전에 기만이었던 존재였으므로.

[나태와 식욕에게 고하라.]

동시에 그것이 과거 기만이라 불렸던 존재였으므로,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장에 종말을 배달할 때가 도래했느니라.]

누구의 신뢰도 살 수 없는 거짓말쟁이의 미래란 그런 법이었다.

* * *

‘박쥐 새끼가 또…….’

발터 경이 알려 준 대인 기술의 감도 잡고, 듀라한의 육신을 훼손하는 대신 심장만을 정확히 파괴하는 데 성공한 순간.

나는 무언가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힐끗 들었다. 딱히 ‘여기다!’라고 할 건 없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그 어디냐. 나한테 ‘님 쫄?’ 하며 미사보 씌우고 간 악마처럼 말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 새끼 쫓겠다고 밤새 수색했던 그 숲처럼.

“…마역이라서 그런가?”

으음. 그때도 이런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말이지. 찾아낸 게 없다 보니 결국 기분 탓으로 끝내긴 했지만.

“여기로 뮌문트까지 가는 건 역시 포기해야겠네…….”

하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이것마저 대충 넘기긴 그렇다.

나는 마역 끄트머리를 따라 악마들을 잡으면서 간다는 꿈을 포기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가능할 거라 여긴 적 없기에 체념은 더욱 쉬웠다.

나는 말라붙은 사막에서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철컥.

대신 나는 내 앞에 쓰러져 있는 듀라한의 사체를 챙겼다. 그 과정에서 군홧발에 짓이겨진 암석의 대지는 몇 번 바스라지고 만다. 파삭. 그것이 품고 있는 미약한 마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새삼 이곳이 마역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어어억─

“아오, 깜짝아.”

뭐, 바위 사이사이의 구멍이나 모래뭍에서 튀어나오는 악마도 이름값을 톡톡히 하긴 할 것 같다. 내가 담력 체험에 온 건지 사막에 온 건지 모르겠다.

콰직!

나는 바위 사이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을 발로 짓밟았다. 군화 굽과 땅 사이에 끼인 두개골이 으드득 소리를 내다 말고 산산조각 났다.

달그락.

그와 동시에, 안와 속에서 반짝이던 빛이 증발했다. 머리를 부수는 게 정답이었는 듯, 내 발목을 잡았던 손가락도 동작을 정지하긴 매한가지였다.

망할, 내 발목을 움켜쥔 건 풀리질 않아서 다리를 한차례 털어야 하긴 했지만서도.

“어휴.”

또 까꿍 당하기 전에 빨리 뜨든가 해야지. 나는 남은 구울과 스켈레톤의 수를 확인한 후 종종걸음으로 일대를 벗어났다.

암, 어쩔 수 없이 나섰다고 해서 목격담을 더 늘리고 싶단 건 아니었다. 그리고 목격담을 없애는 데는 사실 활동 시간을 줄이는 게 제일 효과적이지.

물론 여기와 도시 사이의 간격이 제법 넓어, 보편적인 시력의 소유자에겐 내가 점으로조차 보이지 않긴 할 거다. 나만 해도 성벽 위 사람들이 안 보이는 판이니까.

하나 돋보기 마법─혹은 망원경─따위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계속 느껴지는 찝찝함이 혹 악마 측이 아니라 도시 측인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뭐 그러는지라.

팍!

나는 이곳에 올 때처럼, 마력을 다리에 두른 채 내달렸다. 컨셉을 버린 후 입은 적 없던 코트가 나를 따라 펄럭였다.

상체에 거슬리는 게 없어서 그런가, 요즘 입고 다니던 망토보다는 조금 편한 듯 아닌 듯 편했다.

쾅!

지금 땅을 박차는 군화도… 음. 얘는 그냥 언제나 불편했으니 비교할 건 없나. 하루 종일 걸어도 냄새가 안 난다는 점에선 확실히 이쪽 승이겠지만.

바지나 셔츠도 뭐. 자동 세탁 기능이 있냐 없냐의 차이일 뿐, 편한 정도는 거기서 거기인 편이었다. 굳이 굳이 이쪽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내 몸에 딱 맞아서 덜 펄럭인다는 점?

참고로 품이 남는 건 절대 내 문제가 아니다. 샤기족이 아니고서야 190을 넘기는 인간이 드문 이 세상이 문제지. 더불어 관련 기성품들을 죄다 그쪽 체격에 맞춘 시장도 문제고…….

젠장. 샤기족들 체격이 유도 선수나 격투기 선수 느낌이었으면 딱 맞게 입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다들 스모 선수 느낌의 체격인 거냐고! 털 때문인 거냐? 역시 털인 거냐?!

나는 어쩌면 샤기족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발언을 마구마구 생각하며─부디 그들이 봐줬으면 한다. 이런 시장 구조 덕에 나는 옷을 살 적이면 항상 수선비를 추가로 지불해야만 했다─다시 크게 점프했다.

쿠웅. 발판이 되어 준 대지가 뭉개지고, 내 몸이 부웅 떠올라 몇 미터 수준의 절벽을 넘었다. 나무의 층진 느타리버섯처럼 겹겹이 쌓여 있던 바위가 순식간에 발밑으로 왔다.

쾅!

그다음은 벽이 나올 때까지 계속 전진이다. 나는 몇 개의 굴곡을 더 넘어, 가장 높은 능선에 도달했다. 성곽보다는 통나무 울타리에 좀 더 가까운 형태의 담이 나를 막아섰다.

악마를 작정하고 막으려 한다기보다는, 악마가 여길 지나갔을 때 알기 쉽도록─지나가려면 일단 벽을 뚫어야 할 테니, 그 흔적이 남지 않겠는가?─하는 장치였다.

휙!

하나 나는 이걸 부수지 않고 넘어갈 능력이 돼서 말이다……. 들어올 때와 같은 루트를 써먹었기에─완전히 동일하지 않아도 걸릴 일은 없다. 커버할 범위가 넓어서 그런가 감시초소가 워낙 적었다─보초에게 걸릴 일도 없다.

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인간의 영역으로 다시 복귀했다.

이제,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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