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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69화 (269/389)

269화 존재한다면 (7)

쿨럭.

동이 막 틀락 말락 하려는 시각. 나는 기침과 함께 강제로 기상했다. 쿨럭쿨럭.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던 손바닥에서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주르륵. 그 온기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넘치는 것 또한 그랬다. 투둑. 오래된 이불에 핏자국이 새겨졌다.

아. 오랜만에 북적북적해서 좋았는데.

나는 회복력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가해 버린 초당 대미지를 보며 쓰게 웃었다.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죄송합니다. 며칠은 묵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인벤토리를 숨기기 위한 위장용 짐을 어깨에 얹고 망토를 두르며 흐릿하게 웃었다. 그런 내 다른 손에는 핏자국이 흥건한 손수건이 한 장 들려 있다. 방금까지 내 입과 코를 막았던 것이다.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우당탕탕 모였던 발터 경과 기사후보생들의 표정이 그대로 거무죽죽해졌다.

“허락된 시간이 그렇게 길지가 않네요.”

“…신전에 가면.”

아, 그건 절대 안 되지. 바로 죽음 직행이지.

나는 그 말을 꾹 삼킨 채 빙긋 웃었다. 알아서 잘 오해한 듯 발터 경이 말끝을 흐렸다. 어젯밤 떠들다가 내 처지를 고스란히 들어 버린 기사후보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말릴 수도 없고 보내기도 좀 그렇다는 표정들이 퍽 다정했다.

“도시락 받아 가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는 동안, 발터 경의 부인분께서는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내게 도시락을 넘겨주셨다. 그러자 가방이 따뜻해졌다. 오래가지 못할, 그러나 영원토록 기억에 남을 온기였다.

“이젠 어딜 갈 건가?”

“제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는 대로 세상을 구경해 볼까 합니다. 최초로 목적했던 건 이미 봤으니까요.”

그래도 연기는 마지막까지 완벽해야 한다.

나는 미련을 한가득 담아, 창가 너머 체체바토르를 응시했다.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리니 촉촉함을 담는 건 더 쉬웠다.

아, 제발. 당신들이 보고 싶다.

“…아니면, 뮌문트에 가 보는 것도 좋겠죠. 이곳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사학교가 있는 도시니까.”

너무 과하게 감정을 담아 버린 듯하지만 뭐 어쩔 도리 있나.

나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휜자위 위로 이미 고여 버린 액체가 시야를 뿌옇게 흐렸으나 어찌어찌 흐르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세상이 일렁거렸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럴수록 생각을 돌려야 한다. 나는 울적함을 떨쳐 내기 위해 발터 경의 집에서 보낸 하루를 떠올렸다.

시끌벅적하고 따스한 저녁과 코 고는 소리로 가득했던 밤. 그걸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쫓기듯 헤어져야 하는 처지. 아, 큰일 났다. 더 슬퍼졌다.

“아쉽네요.”

나는 시큰해진 코를 찡긋거리며 애써 웃었다. 한데 그리 돌아본 발터 경과 기사후보생들의 얼굴은 더 개판이었다.

“자네에에…….”

“당신…….”

“허으으윽, 너무 슬퍼어…….”

아니, 나는 울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 왜 당신들이 우는 거야. 당신들이 왜 눈물 콧물 질질거리고 있냐고.

나는 황당함에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느끼며─좋은 건가? 좋은 게 맞나?─손수건을 들었다. 아차차. 피가 한가득이었지. 내 손수건이 얼마나 엉망인지 떠올린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올라갔던 손수건이 도로 내려갔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당신 같은 분을 신께서 외면하실 리 없습니다. 분명 기적이 있을 겁니다.”

“흐으으윽. 건강하세요…….”

그, 신의 가호가 있으면 도리어 문제가 될 텐데. 사제들이 나한테 축복 거는 순간 –1,000! 크리티컬! 하면서 피를 꿱 토하게 될 텐데.

나는 안녕을 빌어 주는 그들의 말을 나름 개그로 받으며 입술을 말았다. 공들여 딴죽을 걸었는데도 결국 진심은 닿고 말아서,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제가 만약…….”

뮌문트에 간다고 해서 집으로 가는 길이 뿅 하고 생기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만약 내가 근 시일 내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혼자인 게 싫어진다면… 그땐…….

딸랑딸랑딸랑.

그리고 종소리가 울렸다.

“…다들 갑옷을 챙기고 검을 잡아라.”

처음 듣는 형식의 종소리였고, 그럼에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는 종소리였다.

롱소드도, 투헨더도 더는 들고 있지 않은 내 손이 그대로 말아 쥐어졌다.

* * *

베뮈르헨을 출발하기 전, 데스브링거는 조용히 파티를 돌아보았다.

아크메이지, 데스브링거 자신, 재수탱이 이단심문관, 마이스터. 그리고 지금은 잠깐 자리 비운 인퀴지터까지.

어떻게 두 명이 빠진 자리에 딱 두 명이 더 들어올 수 있는 건지. 덕분에 내부 인원은 변동됐는데 전체 인원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이거 굴러갈 수는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유지된 인원수에 비해 파티의 무력이 확 떨어져 버린 건 확실하다. 데스브링거의 눈에 걱정이 서렸다.

“글쎄… 그거야 차차 알아봐야 할 문제 아니겠나?”

그에 아크메이지도 작게 화답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단어 선택은, 되레 그녀 또한 이 상황에 막막해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악마를 죽일 사람이 아예 없는데요.”

“으으으음.”

지금까지의 여정은 대개 인퀴지터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마기사와 베르세르크가 강적들을 무찌르는 식으로 이뤄졌다.

한 사람이 모든 걸 감당할 수는 없으니, 각자의 강점을 부각하는 쪽으로 역할을 배분해 왔단 소리다.

하나 악마기사와 베르세르크가 동시에 빠져 버린 지금, 강적을 담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가서 곡소리 나오게 될 일이었다.

“용사가 하는 거 아니야?”

“…샌님이 방어랑 공격을 다 할 수는 없거든요?”

물론 정 공격할 사람이 없다면 그땐 인퀴지터를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능력이 방어에 보다 용이할 뿐이지, 그녀가 공격을 못 하는 사람인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건 후방이다. 용사의 보호가 사라진 후방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강적 하나만 출몰하면 차라리 다행인데…….”

만일 이번 베뮈르헨 사태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적이 쏟아지는 상황이 또 찾아오면 그땐 어찌 대처해야 할까. 용사가 적들을 차례차례 사냥하는 동안 그들이 버틸 수는 있을까? 휘말릴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고?

…피해를 감수해서 이겨 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피해를 입고도 실패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댁이 노력해서 되면 참 좋겠네요.”

“…….”

다니엘이 합류했지만 그는 평범한 이단심문관이다. 하급 악마도 한 번에 잡지 못하고, 거대 괴수에겐 대항할 수도 없는 일반인 수준의 실력자.

하니 그의 존재가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울 순 없으리라. 장인으로서 근력만 좀 셀 뿐, 싸움 재능은 없는 마이스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새로 영입하면 되지. 애초에 지금 가려는 곳도 사람 데려올 목적으로 가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그만한 사람 구하는 게 쉽겠냐고요…….”

하니 결국 실력자가 필요하다. 못해도 용사의 반은 할 수 있는 실력자가.

“그런 사람이 널리고 널렸으면 진즉에 악마 다 몰아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뭐 흔한가?

데스브링거가 생각하기에 샌님과 아크메이지가 악마기사를 만난 건, 베르세르크를 영입할 수 있던 건 거의 뭐 일생에 한 번 있을 수준의 행운이었다. 그만큼 그 정도의 실력자들은 드물었다.

“역시 신전을 메워야…….”

그쯤 되어 그는 근시안적인 신전의 행태를 또 한 번 비난했다. 악마기사 한 사람이 파티에 남아 있음으로 줄일 수 있는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알긴 아냐고. 그들은 악마를 잡을 생각이 정말 있긴 한 거냐고. 그런 종류의 비난이었다.

“걔네는 원래 멍청했어.”

“젠장…….”

“…저 아직 여기 있습니다만.”

“어쩔.”

“…….”

졸지에 신전 욕을 듣게 된 다니엘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들의 비밀을 지켜 주는 게 정말 맞는 건가?’ 그의 속내가 어쩐지 읽히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대리인께서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있어도 욕했을 건데.”

“…….”

그러나 이번엔 다니엘에 더불어 데스브링거까지 떫은 표정을 하고 말았다. 저게 어딜 봐서 대명장이지. 그냥 깡패 새끼 아니야? 징글징글한 사이에도 다니엘과 데스브링거가 한마음 한뜻이 돼 버린 순간이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사이, 삭막한 표정의 인퀴지터가 돌아왔다. 썩어 문드러진 낙엽처럼 변해 버린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예,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다른 분들은.”

“…저도 마쳤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샌님이 저런 눈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데스브링거는 텁텁해진 입안에 당장이라도 물을 쏟아붓고 싶어졌다. 가능하다면 저 눈도 마찬가지였다.

저 눈에 담긴 절망을 씻어 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예전처럼 멍청하고 우직한 샌님을 데려올 수 있다면. 데스브링거는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새벽녘 이슬들을 모아다 선물할 마음이 충분했다.

“…나도 뭐. 네.”

그렇지만 고작 그런 걸로 씻겨 내려갈 감정이 아님을 알아서.

데스브링거는 조용히 긍정했다. 그를 힐끗 보았던 인퀴지터가 다시 고개를 틀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목적지는 북쪽이다.

* * *

“자네는 가게.”

“…네?”

“종이 세 번 울렸다는 건 악마들이 당장 쳐들어오는 게 아니라 밀집하는 중이란 뜻이거든.”

당장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기에 도망칠 여지가 있다. 마역을 감싸듯 길게 늘어진 성벽과 돌아서 타격하기 힘든 환경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이 경우 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상인들이 모여서 종종 탈출하려 들 때가 있네. 나름 위험한 행위다 보니 보통은 권하지 않지만… 자네에겐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

거기에 상인들 여럿이 모여 형성한 무리 정도면… 어지간해선 탈출이 가능하다. 지금껏 쌓여 온 사례가 그것을 증명한다.

기사, 발터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하니 나가고 싶다면 얼른 움직이게. 악마들이 진격하려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 문이 완전히 닫힐 거야. 시간이 없어.”

“하지만…….”

철컹.

한편, 그는 청년에게 충고를 하면서도 부인의 도움으로 갑옷을 걸치고, 검을 장비했다. 다른 기사후보생들도 거의 채비를 마친 상태다.

여기서 오직 장비를 하지 않은 건 그의 부인과 저 병약한 젊은이뿐이다.

“무얼 미적거리나? 혹 여기서 뼈를 묻고 싶었던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어서 가게. 지금 아니면 봉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마음과 같아선 붙잡아다 숨긴 모든 것을 털어 낸 후 학교에 집어넣고 싶지만… 피 토하는 것 없이 그냥 마력만 못 다루는 정도면 분명 그랬겠지만.

그냥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시시각각 수명이 깎이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다. 마법 아이템을 구매할 정도의 재력이 있음에도 치료하지 못한 병─어쩌면 체질─이기에 더욱 그랬다.

저 청년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위하는 길이다. 발터는 그런 마음으로 본인의 투구를 쥐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자네가 여기 남아 있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곳의 주적은 모래를 뚫고 온 구울과 스켈레톤이고 자네는 대인전에 퍽 약한 검사니까 말일세.”

철컥. 투구까지 머리에 씌워지자, 출정 준비가 전부 끝났다. 이젠 성벽으로 달려가야 할 시간이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말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자네도 어른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선택할 수 있겠지?”

“…….”

“잘 가게.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발터는 젊은 청년의 어깨를 톡톡 쳐 준 후, 준비를 마친 기사후보생들을 보았다. “간다!” 이런 날들을 위해 있는 힘껏 훈련을 버텨 온 젊은이들이 단단한 눈을 했다. 오늘 혹은 내일, 어쩌면 며칠 안에 죽어 사라질 수도 있는 눈들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다녀오세요.”

하나 가능하면 이들이 스러지지 않길 바란다. 뭐만 하면 피를 쏟는 주제에 싸움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저 청년까지 포함해서, 이 도시에 살아 숨 쉬는 젊은 모든 것이.

“…만약 이유 없는 행운이란 게 찾아온다면.”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건 분명 경의 친절함에 이끌려 온 것일 겁니다.”

밀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추수를 앞둔 풍요의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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