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68화 (268/389)

268화 존재한다면 (6)

“승!”

“다음은 제가!”

“아뇨,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나는 발터 경의 집 앞 공터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머쥔 채 검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말하는 발터 경은 당연하지만 나를 초대한 기사의 이름이다.

“발렌틴이 낫겠군.”

“예.”

“자네도 더 할 수 있겠나?”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앞서 세 명의 기사후보생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HP 자체는 별로 안 닳았다. 공격 자체를 허용한 적이 없고, 검과 검이 부딪치며 이는 반동 정도─어째 등 두드려 맞는 것보다 이게 덜 깎였다─는 자연 회복력으로도 어떻게 커버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초 단위로 깎였다가 자연 회복력으로 다시 차오르는 수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계속 하지. 발렌틴, 자리로.”

“예!”

참고로 일이 왜 이렇게 됐느냐면, 별거 없다.

나는 반강제적으로 초대에 승낙했고,─거절할 건덕지가 없었다─초대된 집에는 기존에 하숙하던 기사후보생 일곱이 있었으며,─가게 주인이 말했던 지원이 이건가 싶었다─발터 경이 식전 대련에 참여해 볼 것을 제안해 보았을 뿐─실력 한번 보자는 의미 같았다─이니까 말이다.

“신의 이름 앞에서 합을 겨루겠다.”

물론 식전 대련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나도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다. 정말 거절했으련가?

“시작!”

나는 상단세로 달려드는 상대를 보며 그의 동작에 집중했다.

내려치기만 가능한 줄 알았던 상단세가 굽혀지는 무릎과, 낮아지는 허리, 각도를 바꾼 손목 이 몇 가지만으로 내 허벅지나 허리를 벨 수 있는 자세가 되어 돌아왔다.

챙!

그걸 막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피지컬이었다. 내게 저걸 대처할 수 있는 기교나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힘이 좀 더 세서, 반사 신경이 좀 더 빨라서 가능한 일이었단 거다.

하나 제대로 배운 이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검이 막히는 순간, 상대는 그것으로 힘겨루기 하는 대신 손목을 반대쪽으로 뒤틀어 검을 회전시켰다. 뱅글 돌아간 검신이 반대쪽으로 나를 베고자 들었다.

까앙!

그렇지만 이건 앞서 세 명한테 당해 본 거라 말이다.

나는 그것도 일단 막아 냈다. 탁.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상대의 손이 본인의 검날 끝부분─포이블Foible─을 휘감았다.

하프소딩. 상대의 검이 내 검과 맞닿은 부분을 축 삼듯 기울어지며, 칼날이 아닌 크로스가드와 그립 부분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저 크로스가드의 끄트머리는 내 목을 찌를 것이다.

퍼억!

하나 그렇게 망연히 당해 줘야 쓰나.

나는 억지로 상대의 팔을 위로 쳤다. 샤기족이라 저쪽이 덩치가 더 컸지만, 힘은 내가 좀 더 셌다. 저들에게 배운 그대로 하프소딩을 위시한 내 검이 칼날의 끝부분을 상대의 목젖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상대도 다급히 허리와 목을 틀고, 팔을 움직였다.

내가 쳐올리는 바람에 위로 붕 떴던 검이 그대로 회전하고, 회전한 포르테 부분이 내 칼날을 옆으로 쳐 냈다. 깡. 금속음이 공기를 찢었다.

그에 다소 헐렁한 튜닉 자락이 흔들리며 내 몸이 뒤로 빠졌다. 휘익! 상대는 내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내려 베다가 다시 칼날을 올린 채다.

다시 상단세. 물러나며 검을 한 손으로 쥔 채 내리고 있는 나와는 많이 다르다.

까앙!

하지만 재차 부딪쳤을 때는 아까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이미 당해 준 걸 굳이 또 당할 필요는 없단 판단하에, 혹은 더 많은 대처 방법을 보고 싶어서 내가 검을 달리 휘두른 탓이다.

내 검이 상대의 검과 맞닿는 순간, 상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내가 먼저 8자를 그리듯 돌아가 그 검을 쳐 내고, 그대로 상체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서걱!

그러자 기묘하게 곡선을 그린 검이 내 머리를 노렸다. 내 검은 본인의 몸을 뒤틀며 피하겠다는 듯했는데, 덕분에 선택지가 없어졌다.

나는 찌르기 위해 안쪽으로 향했던 검을 급하게 당겼다.

검 자루를 쥔 오른손이 내 왼쪽 어깨 위이자 머리 옆에 위치하고, 오른손이 그곳에 오는 동안 칼날 아랫부분을 쓸어내리듯 앞으로 나아간 손이 칼을 받쳤다.

장애물이 된 내 칼이 상대의 검을 튕겨 냈다.

물론 이대로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그는 자세를 고쳐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하나 그걸 그대로 봐줄 필요 있나? 상대의 검이 튕겨 나간 찰나를 노린 내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관성 따위 모조리 씹어 먹는 근력이 앞으로 뛰쳐나가는 검을 도왔다.

단순 무식하지만, 그래서 더 위협적인 검로가 뻗어져 나갔다.

“그만!”

그쯤 해서, 발터 경이 소리쳤다. 상대의 목과 종이 한 장 차를 두고 멈춘 내 칼날이 뒤로 물러났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저도…….”

모든 대련은 대개 이 정도의 길이로 짧게 짧게 끝났지만… 그 잠깐 사이에서도 배울 점이 쏟아진다. 나는 방금 전 상대가 보인 행위를 복기하며 묵례했다.

“자넨 정말…….”

그사이 다가온 발터 경 역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체질만 아니었다면 자넨 역사에 길이 남을 기사가 됐을 텐데.”

“…과찬이십니다.”

“아니, 이건 절대 과장된 게 아니야. 절대 아니지.”

발터 경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내 자세를 툭툭 건드리며─허리 펴게. 여긴 너무 힘이 들어갔어. 다리는 너무 벌리지 말게─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지막에 힘을 얼마나 주었나?”

“엄. 그냥…….”

“멈추지 않았다면 목을 꿰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겠지?”

“…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조차 자네는 멈출 자신이 만만했을 테니까.”

“음…….”

“정말이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근력이야.”

마지막의 내가 힘만 믿고 단순 무식하게 나간 건 맞는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나는 발터 경의 말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그걸 눈치챈 듯 발터 경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아까 피 토한 걸 생각해 준 건지 힘은 별로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냥 닿았다는 느낌만 톡 들었다.

“그럼 예시를 들어 주지. 지금 자네가 상대한 이 중 검을 잡은 기간이 10년 이하인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어. 검에 통달했다곤 할 수 없으나, 힘 조절을 통한 어지간한 기교는 얼추 부릴 수 있단 소리일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한 일을 저들이 따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마력으로 강화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말일세.”

“어…….”

“절대로, 불가능해. 어느 정도의 힘을 한 번에 싣고 회수하는 것은 연습의 영역이나, 그 힘의 총량을 늘리는 건 노력보다 재능의 강역이기 때문이지.”

“그렇… 군요.”

나는 그쯤 되어서 발터 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확실히 근력의 총량을 확 늘리는 건 근력 운동 외에도 재능빨을 약간씩 요구했다.

“더불어 자네 휘두르는 폼을 보면 제대로 배운 기간은 짧고, 나머진 독학으로 때운 것 같은데… 그것까지 포함하면 자네가 타고난 재능은 더 뛰어나네. 센스만으로 그만한 힘 조절을 해낸다는 건, 교육과 연습을 통해 더 큰 기교를 부릴 수 있단 뜻이니까.

“…….”

그런 점에서 나는 신체에 한해서는 그냥 재능충 그 자체인 셈인가……. 적과 싸울 땐 마력이 주가 되다 보니 신체 그 자체마저 사기일 줄은 몰랐다. 뭔가 기분이 묘하다.

“물론 신체 능력이 뛰어나단 거지, 기교나 기술이 뛰어나단 건 아닐세. 그 미친 반사 신경과 근력이 아니었다면 자넨 후베한테도 밀렸을 게야. 알았나?”

“옙.”

후베라면 내가 맨 처음으로 상대했던 사람일 거다. 흔치 않은 녹색 머리카락의 소유자였지…….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는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뒤쪽에서 눈을 빛내는 기사후보생들을 힐끔 보았다. 기술의 문제로 진 게 아니라서 그런가, 그들은 생각보다 내게 적대적이진 않다.

“오늘부터 근육 단련 시간을 더 늘린다.”

“크읏. 나는 왜 슬랜드족이라서…….”

“고기, 고기가 답이다.”

아, 대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들 근육 늘릴 생각이 가득한 것 같긴 하다. 나는 이십 대부터 삼십 대에 골고루 걸쳐진 얼굴들이 열정으로 물드는 걸 보며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무튼, 자 앉아라. 각자 실수한 점을 알려 줄 테니.”

“넵!”

그렇지만 지금은 나 또한 배워야 할 게 잔뜩이다.

나는 발터 경의 하숙생들이 전부 자리를 잡고 나서야, 그들 맨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우연찮게도, 마지막에 대련했던 발렌틴의 옆자리였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의 붉은 털이 내 시선을 계속해서 비껴 나가도록 했다. 부디 그가 이 미묘한 엇나감을 눈치채지 않기를.

“정말 힘이 세시군요. 힘 싸움으로 져 본 건 처음입니다.”

“저도… 버겁다 싶은 분은 발렌틴 경이 처음이었습니다.”

대신, 나는 그에게 경이란 호칭을 붙여 주었다. 처음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기사 후보생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한 끝에 그냥 붙이기로 한 쪽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은근 기분 좋았는지, 털로 뒤덮여 있는 발렌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둘 다 돌려 전하는 칭찬에 약하다 싶었다. 내 입장에선 썩 나쁜 일은 아니다만.

“후베, 네가 뭘 잘못했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예…….”

“너보다 체격 좋은 상대가 꼭 샤기족이란 보장은 없다. 또한 미들족과 샤기족은 검에 힘을 주는 방식이 많이 다르지. 다음부턴 꼭 고려하도록.”

“예!”

각설하고 우리가 약간의 교분을 다지는 사이, 발터 경의 지적이 이어졌다. 잘한 것, 잘못한 것, 개선 방향이 있는 것. 가르치는 데 꽤나 재능이 있는 분이셨다.

“발렌틴, 너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테고.”

“예.”

“마지막으로 자네는…….”

발터 경이 나를 힐끔 보더니 잠시 말을 아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자네, 왼손잡이인가?”

이어지는 건 의외의 물음이었다.

“…오른손잡이에 가까운 양손잡이입니다.”

“그래? 그런데 왜 검 휘두르는 폼이 묘하게 어색하지…….”

와, 이걸 걸리네? 나는 발터 경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등골이 다 서늘해졌다. 내가 오른손잡이에 가까운 양손잡이인 것과 별개로, 지금껏 왼손으로만 검을 휘둘러 왔다 보니 오른손은 상대적으로 어색한 게 맞던 까닭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실전 경험이 있나?”

“예… 뭐.”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악마 사냥이 주였겠지?”

거기에 내가 상대해 온 주적들마저 발각당했다. 나는 눈 뜨고 코 베인 사람의 심정으로 이번 사실을 인정했다.

가능한 싸움과 동떨어진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들킨 마당에 숨겨 봤자 뭔 의미겠나. 그런 판단에서 나온 수긍이었다.

좀… 무섭긴 했지만.

“역시.”

그사이 발터 경의 고개가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그런 것들을 잡아 왔는진 묻지 않겠네. 뭐, 마력만 못 쓸 뿐이지 자네 하는 걸 보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이랄 게 있다면 발터 경이 나에 대한 의문을 크게 갖지 않는단 점이려나. 나는 속으로 그의 이해에 엄청난 감사를 표했다.

“다만 아까 말했다시피 자네는 기술적인 면이 다소 부족해.”

“네.”

“그러나 그게 자네 잘못은 아니야. 교육을 못 받은 것도 못 받은 거지만… 독학할 때의 방향성 자체가 다른 쪽으로 나아가버렸거든.”

“…방향성?”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걸세.”

한편,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발터 경은 손가락으로 기사후보생들을 가리켰다.

“우리들의 검술은 인간형 적을 상정한 검술인 거고.”

그리고 그 손가락은 말이 이어짐에 따라 내게로 향했다.

“자네는 자네보다 더 큰 적을, 그것도 인간형이 아닌 적을 상정한 검일세.”

바로 이해가 됐다.

“이러니 동작이 하나같이 큼직하고 기교가 부족할 수밖에.”

하긴 여태껏 해 온 전투에서 인간형 적이 주였던 적은 별로 없었지. 기껏 튀어나온 인간형도 대개 원샷원킬로 끝나서 기량 싸움까지 간 적이 없고.

그런 점에서 이런 평가가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의 논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면 이제 어찌해야겠습니까?”

하나 받아들이는 것과 개선점을 찾는 건 별개다. 내 물음에 발터 경이 본인의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솔직한 마음으론… 내 아래서 검이라도 몇 년 배워 보라 하고 싶네.”

“…그렇게 문제입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세. 내가 배워 보라고 하는 건… 그냥 자네 재능이 아까워서 그런 거고. 지금 검이 문제가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상정하는 적이 다른데 기술을 논해서 뭐하나? 적이 거대하면 기량 같은 건 별 의미 없네. 가죽을 벨 수 있냐 없냐의 문제지.”

“그렇다면…….”

“물론 이런 자잘한 기술을 배워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살다 보면 악마보단 사람과 싸우는 일이 더 잦기도 하고. 뭐, 자네 피지컬쯤 되면 기사랑 싸우는 게 아닌 한 대부분 기술의 의미가 없겠지만.”

힘과 반사 신경으로 찍어 누르면 어지간한 인간은 다 죽을 피지컬이라며 발터 경은 또 한 번 내 재능을 탐냈다. 마력 못 쓰는 체질이라고 둘러대지 않았다면─실제로 그래서 마냥 변명도 아니지만─당장 학교까지 끌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내 집에 묵게 된 것, 그동안은 대인 기술을 좀 배워 가게.”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고, 그도 그것을 알기에 이 정도 타협안을 내주었다. 내겐 하나도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위장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마음에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네.”

나는 발터 경의 제안을 감사히 받으며 일어섰다. 이제 모든 평가가 끝났으니 저녁 먹으러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였다.

“저, 정말로 악마를 잡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스켈레톤이나 구울이 아닌, 정말 커다란 짐승 내지 악마를 잡아 보신 것 같은데… 정말인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실 수 있는지…….”

다만 내 예상은 조금 빗나갔다. 식사 시간은 식사 시간인데, 식사를 가장한 토론과 교류의 시간이었다.

“이것 좀 들게. 우리 부인께서 만든 사과파이가 참 일품이거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키가 커질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먹어도 키가 안 크던데…….”

“운동은 뭐 하십니까? 저도 근력 운동을 좀 더 해야겠다 싶어서…….”

이유 없는 중년의 호의와 재잘거리는 녹색 머리카락, 열정 넘치는 붉은 털 사이에서 나는 미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데 이상하게 혼자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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