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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66화 (266/389)

266화 존재한다면 (4)

나는 간신히 도착한 도시 만하펠트를 두고 먼저 숨부터 돌렸다.

위장 스킬 푼 채로 가도를 걷다가, 악마를 잡겠답시고─내가 아니라 그 길목에 출현했다는 그놈이 목적이다─파견되었던 토벌대와 마주쳤을 때는 정말 식겁했지…….

그들이 나를 보기 전에 위장 스킬을 발동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바로 수배령 떨어질 뻔했다. 그들이 내 마기를 기존에 추적하던 악마의 것으로 오해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왔으니까 됐나…….”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안경의 무게를 느끼며 그것을 고쳐 썼다. 사르륵. 반묶음으로 묶어 둔 머리카락(가발)과 망토가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흔들렸다.

“으악.”

하지만 그 바람이 꼭 좋기만 하진 않았다. 헤어 라인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굉장히 곤란해지는 까닭이다.

내 손이 서둘러 앞머리와 정수리 부근을 눌렀다. 벗지 못하는 장갑과 두피 사이로 고정 핀 몇 개가 느껴졌다.

“다음!”

그사이, 내 바로 앞사람이 검문소로 들어갔다. 어디 마역과 인접한 도시 아니랄까 봐 경비병과 함께 서 있는 사제가 눈에 띄었다. 경비병이 사람의 신분이나 안전성을 검사한다면 그는 부정함을 검열하는 역할이었다.

“부정함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좋아. 다음!”

다른 도시에서 몇 번 일이 있어서인가. 사제는 굉장히 꼼꼼하게 짐을 수색했고, 수상하다 싶으면 사람에게 신성력을 쬐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침이 절로 꼴깍 삼켜졌다.

“다음!”

그렇지만 여기서 겁 너무 먹어 봤자 도리어 수상해 보일 뿐이다.

나는 두 손으로 가방끈을 단단히 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를 실천하는 악마기사와 차별점을 주기 위해 허리와 어깨는 일부러 구부정하게─부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냥 삐뚤게 산 일반인 수준만큼만 했다─만든 채다.

“…키가 꽤 큰데.”

“좀 그럼 편이죠?”

여기다 운 좋게도 성격 좋아 보이는 경비병이 내 담당으로 걸렸다.

해서 나는 최대한 서글서글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내 키나 체격이 미들족 중에선 굉장히 드문 편임을 알기에 그 연기는 더 필사적이 되었다.

“어디서 왔지?”

“슈부르켄에서 오는 길입니다.”

“방문 사유는?”

“이곳에 기사학교가 있대서…….”

별개로 이런 자잘한 질문들을 답하다 보면 꼭 공항의 출입국 관리소가 생각난단 말이지…….

나는 몇몇 성을 통과하며 다져진 실력으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다른 도시보다 더 엄격한 심문 덕에 아찔해질 때도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무난하게 심사가 진행되었다.

인간들의 신원이 제대로 등록된 세계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너무 허술해서 이래도 되나 싶은 곳도 가끔 있긴 했지만서도.

“손.”

그때, 검문소의 구석에서 모두를 지켜보기만 하던 이가 다가왔다. 풀플레이트와 검, 발언 한 번으로 경비병들이 좀 더 빠릿빠릿하게 굴도록 하는 권위. 아마도 기사인 양했다.

“장갑을 벗고 손을 보여라.”

한데 그런 기사가 왜 하필 내게 주목한 걸까.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삼키며 장갑을 주섬주섬 벗었다. 위장 스킬 덕에 하얘진 피부가 드러났다.

“검을 잡은 손이군. 그것도 아주 오래.”

하나 피부가 하얘졌다고 해서 내 손에 박인 굳은살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 그리고 손가락, 손바닥. 손 곳곳에 특징적으로 새겨진 굳은살과 상처가 내… 아니, 악마기사의 인생을 슬쩍 내비쳤다. 미처 가리지 못한, 혹은 숨길 수 없던 부분이었다.

나와 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더 할 말 있나?”

“…저는 드릴 수 있는 답을 전부 드린 상태입니다만.”

그러나 이것에 굴할 수는 없다. 나는 오른손으로 조용히 안경을 빼내, 그것에 묻은 먼지를 닦아 냈다.

이조차 내 손에, 즉 살갗에 접촉한 것으로 판명되기에 내 눈은 여전히 녹색이다. 기사의 청색 눈동자가 내 눈을 반사하며 청록빛으로 빛났으니 확실하다.

“단순히 보고 싶어서 온 게 맞나?”

“으음…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십니다만.”

근데 이분은 정말 뭐 때문에 나를 의심하는 거지. 칼밥 몇 년 먹은 듯한 놈이 기사학교 보러 오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아, 그냥 무력을 숨긴 것 자체가 수상해서?

“제가 검을 오래 잡았다고 해서…….”

그러면 그 의심의 기반을 무너트리면 되겠지.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안경을 도로 썼다. 마력이 몸 안에서 몇 차례 돌다가, 그대로 역류했다.

“지금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쿨럭.”

아, 마력 역류 만세!

나는 피를 주륵 토하며 최대한 애처롭게 웃었다. 내가 마력을 움직이는 걸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검 자루로 손을 옮기던 기사가 당황했다. 뒤의 병사도, 막 다른 사람을 검사하여 보내던 사제도 매한가지였다.

“그, 그건?”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마력을 다룰 때마다 속이 뒤집어져서요.”

“아, 아니, 그걸 알면 왜…….”

그거야 직접 보여 주는 게 효과가 더 좋으니 그렇지.

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쓱쓱 닦으며 표정을 슬쩍 고쳤다. 가질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체념이 묻어나는, 그리하여 고소가 묻어나는 그런 얼굴이었다.

“마력을 쓰지 않아도 문제가 되는 건 똑같거든요.”

물론 그 상태로 내는 목소리에는 절대 물기를 담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에 매달려 감정적인 사람보다는 오래전 포기하여 담담해진 사람의 말투가 더 절절하게 느껴질 듯해서였다.

“마력을 쓰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고……?”

“잘은 모르겠는데… 지나가는 마법사님 말로는 체내에 마력이 있는 한 꾸준히 몸이 망가질 거라 하시더군요. 체질 문제라 고칠 수도 없을 거라고.”

좋아. 기사의 눈빛을 보니 이건 제법 먹힌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못을 박기 위해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치만… 불가능할 걸 알아도 눈에 담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뭡니까.”

자, 체질 때문에 기사가 되기는커녕 지난 노력까지 부정당할 청년이, 그럼에도 남은 미련을 포기 못 해 오른 여행길이다. 이 서사 앞에서도 과연 의심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냐!

“자네…….”

나는 치료해 주고자 다가오는 사제에게 정중히 거절─이곳에서 계속 수고하셔야 할 분이 함부로 힘 쓰셔야 되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의 메시지를 날리곤 기사를 다시 보았다.

차마 포기할 수 없어 눈에라도 담고자 왔다는 대목에서 절절한 공감을 해 버리고 말았는지 기사의 눈은 어째 촉촉해진 상태였다. 참으로 감수성 넘치는 기사님이 아닐 수 없었다.

“힘내게.”

“젊어 보이는데, 참…….”

그렇지만 의심을 벗고 통과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거면 된 거 아니겠는가?

나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짠한 시선을 받으며 검문소를 나왔다. 이제 여관방만 잡으면, 드디어 추적의 시간이다.

* * *

결국 용사에게 협력하는 척하다가 악마기사 편의 봐주란 거네. 마이스터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돌려 돌려 전한 부탁을 요약했다.

의뢰받은 물품이 물품이고, 전달받아야 할 사람이 사람인 걸 고려하면 오해할 여지조차 없었다. 이건 명백하게 악마기사를 도우라는 뜻이었다.

“참 나…….”

네 인생에 좀 더 나을 선택? 못 해 본 세상 구경?

명분은 참 좋지. 그것도 결국 이 심부름을 보내기 위해 짜낸 구실이겠지만.

“…….”

…그러니까, 순도 높은 진실과 진심을 포함한 핑곗거리겠지만.

“하.”

마이스터는 없는 담배를 찾으며 쪼그려 앉았다. 자신이 지금 떠올린 생각이 어린애 투정과 진배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아니, 사실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굳이, 부득불 불만 어린 생각을 해 본 게 방금 행위였다.

“애새끼도 아니고…….”

동생을 질투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게 뭐람. 그는 화끈거리려는 볼을 손바닥으로 문대며 입술을 비죽였다.

근데 솔직히, 이건 할아버지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닌가? 순서를 바꿔서 말했으면 악마기사보단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잠깐의 창피함은 적반하장 좋아하는 성질머리를 거쳐 어느새 할아버지를 향한 짜증으로 발현된 상태다.

“그 망할 놈은 대체 뭘 했길래…….”

더불어 악마기사를 향한 의문도 또다시 피어올랐다.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뭐기에 제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는가? 악마를 품은─심지어 제어 불가 가능성을 내보인─녀석에게 신성력 여과기를 준다는 건 결국 그만한 위험을 각오하겠단 것인데. 당최 얼만큼 가치 있는 존재여야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겠단 판단이 나오는가?

“야유 나온 신이라도 되나…….”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모르겠다. 마이스터의 얼굴이 미묘한 짜증을 머금었다.

“마이스터님!”

하지만 그런 짜증조차도 이곳에 남아 얻을 스트레스보단 적겠지.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그는 이 도시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는 편이니까.

“마이스터님, 여기 계셨군요! 지금 임시 성주님께서 마이스터님의 협조를…….”

“아, 그거 말인데요.”

“예?”

“못 도와드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예에?”

하여 마이스터는 상큼하게 웃었다.

“어, 어째서…….”

“할 만큼 했겠다, 그냥 도시 뜨려고요. 어차피 공방도 다 망가졌고.”

할어버지의 도움이 약간, 그러니까 약간 좀 많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자유였다.

* * *

“크다…….”

체체바토르 기사학교를 눈에 담는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기껏해야 중고등학교 건물 크기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커서였다.

아니, 어쩌면 담과 건물이 바짝 붙는 형태로 지어져서 더 커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담 - 운동장 - 건물 순으로 짓는데 여긴 운동장을 하나도 보여 주지 않고 있으니까.

“싸다 싸, 거기 청년도 하나 먹을려?”

“아, 채소절임으로 하나만 주세요.”

나는 성과 결합하여 지어져 있는 거대한 학교─어찌 보면 병영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를 구경하다가, 그 앞에 놓인 가판대에서 간식거리를 구매했다. 빵의 속을 파내고 과일 및 채소절임을 넣은 빵이었다.

와삭.

오, 좀 신데. 나는 한 입 베어 물자 올라오는 신맛에 생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억지로 버틸 필요가 없다는 점이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신맛 뒤에 올라오는 단맛은 혀를 즐겁게 해 줌으로써 그 행복의 크기를 좀 더 부풀려 준다.

헤헤, 맛있다.

“청년, 잘 먹네.”

“엄청 맛있어서요.”

“그으럼! 여기는 맛없으면 망해.”

“그래요?”

기사학교 구경하러 오는 손님 때문이라도 쉽게 망할 것 같진 않은데. 내 눈빛에 가판대 주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뜨내기 손님보다는 병사랑 기사 나리분들이 사 가는 게 더 많거든.”

“아…….”

하긴, 여기 학교 앞이지. 맛없으면 주 고객층들이 올 리가 없겠네.

“건물이 엄청 크네요.”

나는 얼른 빵 하나를 해치운 후, 새것을 사며 은근히 말을 붙였다. 손님이 오긴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가, 상점 주인도 좋다고 말을 받아 주었다.

“병사 양성소도 같이 있거든.”

“아하.”

“그래서, 청년도 저기에 관심 있나?”

“…관심이 없지는 않죠.”

“그렇구만. 그렇지만 지금은 모집 기간이 끝나서… 좀 기다려야 할 거야.”

“기다리면 자리가 나나요?”

“악마들이 얼만큼 쳐들어오냐에 따라 다르지.”

악마? 나는 뜬금없이 등장한 단어에 그것이 무슨 상관인지 가늠해 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빈자리가 생길 수밖에 없지. 깨달음이 찾아온 건 반 박자 뒤의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병사 자리는 자주 자리가 나니까… 정착할 생각 있으면 한번 시도해 봐. 어디서 굴러먹었든, 뭘 하고 살았든. 사고 치지 않고 병사로 5년 이상 살아남으면 시민권 주는 도시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역시 마역과 맞닿은 도시답다.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간다는 게 제도에서부터, 사람들의 말투에서부터 고스란히 보였다.

“병사가 아니라 기사가 되고 싶은 거라면 딱히 기다릴 필요가 없긴 한데… 대신 거긴 돈이 좀 많이 들어.”

그사이 주인이 주절주절 말을 더 이어 나갔다. 힐끗. 그의 시선이 내 귓가에 닿았다가 곧장 떨어졌다.

“뭐. 돈이 부족할 일은 없어 보이지만…….”

“……?”

“혹시 부족하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발터 기사님이라도 찾아가 봐. 재능은 있지만 학교 갈 형편이 안 되는 청년들을 종종 지원해 주시거든. 물론 그분도 나름의 기준이 있는지 전부 받아 주는 건 아닌데…….”

“그런 훌륭한 분이 계시군요.”

“훌륭한 분이시지. 뭐어… 그런 걸 어떻게 소일거리 삼는지 나 같은 사람은 잘 이해 못 하겠지만.”

별도로 기사학교를 내버려 두고 그렇게 받아도 되는 건가? 나는 약간의 의문을 품다가 대충 넘겼다. 되는 거니까 되는 거겠지.

“사정상 그런 건 어렵겠고……. 혹시 여기서 얼만큼 장사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무엇보다 나는 학교 다니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내 진짜 용건은 따로 있다.

“한 이십 년 했지?”

“이십 년, 전통 있네요.”

“전통이랄 것까지야.”

“그래도요. 거의 여길 주름잡는 터줏대감이실 것 같은데.”

“크흐흐흠. 내가 좀… 그런 편이긴 하지.”

나는 쥐고 있는 빵의 겉면을 엄지손톱으로 살살 긁어 내며 조용히 물었다. 앞서 추켜세워 준 것 때문인가. 표정이 제법 좋은 상점 주인은 내가 뭘 물어도 대답해 줄 듯하다.

“근데요, 이십 년이나 이곳에 계셨으면…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도 많이 아시겠네요?”

“알 만큼은 알지?”

그럼 당장 그 기회를 잡아야겠지.

나는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프닝 영상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면… 기사가 셋이나 소속된 일가족이 하루아침에 죽거나 실종된 사건도 들어 본 적 있으신가요?”

말을 내뱉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스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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