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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65화 (265/389)

265화 존재한다면 (3)

“자격에 대한 거, 알려 주실 겁니까?”

본래의 색은 기억도 나지 않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마이스터는 그의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그의 두 눈은 약간의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

그러나 그 감정을 전부 읽어 냈음에도 청산호는 단칼에 쳐 냈다. 고대하던 마이스터의 표정이 단박에 식으며 싸함을 몰고 왔다. 다정한 갈빛이나 폭신한 분홍빛 머리칼조차 그의 겨울 같은 표정을 가릴 순 없었다.

“염병, 그럼 왜 가라고 하는 건데요.”

마이스터는 중지로 안경의 브릿지 부분을 눌러 올렸다. 다른 손가락은 다 접은 채 중지로만 안경을 올리는 모양새가 퍽 노골적이었다.

“공경하는 마음은 어디다 두고 온 거냐.”

“이미 옛저녁에 팔아 치웠죠.”

“…….”

하지만 제 손자의 성질머리야 익히 아는 바다. 청산호는 콧바람을 길게 뱉고는 그의 친우가 가져다준 찻물을 따라 마셨다. ‘저는 안 줍니까?’ 손자가 눈으로 욕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안 알려 줄 거다.”

“네에. 그러시겠… 죠.”

근데 그건 그의 알 바 아니고.

청산호는 판단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머리 하난 비상한 녀석이니 이 정도까지 말해 줬으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라고.

“…….”

실제로 그의 손자는 무언가를 깨달은 양 말을 잇다 말고 목구멍을 닫았다. 과연, 치명적인 결점을 두 가지 장점─머리와 나름 대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으로 겨우 덮어 내는 녀석다웠다.

쪼르륵. 찻잔에 찻물이 리필되는 동안 청산호의 입술이 마저 움직였다.

“그렇지만 이게 네게 손해 되는 제안도 아닐 거다.”

“…왜요?”

“여기 남아 있어 봐야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느냐.”

따끈따끈하니 좋군. 청산호는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온기에 만족하며 찻물을 조금씩 들이켰다.

“공방도, 재료도, 돈도 모조리 증발한 마당이다. 네 성격상 저축을 해 뒀을 리도 없으니 급하게 자금 끌어올 곳도 없을 테고.”

당연하지만 예전에 마시던 것에 비하면 향도, 맛도 형편없었다. 취향이다 아니다를 떠나 찻잎의 질이 너무 낮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 연구는 할 수 있겠느냐? 연구 이전에 주문 제작 들어왔던 제품들은 어찌할 거고? 주문자의 배려로 기한 연장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전액 환불을 요청하는 자에겐 치를 대금도 없을 텐데.”

하나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고려하면 이조차 사치에 속한다.

하므로 청산호는 불만을 표하기보다, 본인의 혀가 이 저급품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뭐, 지금 보니 혀의 까다로움이 깎여 나가는 것보다 차를 마시지 않는 버릇이 더 먼저 들 것 같지만 말이다.

“…제가 지금 그런 문제를 겪을 상황인 건 맞는데, 그게 저들을 따라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나요?”

“용사의 협력자가 되는 건 양해를 구할 구실로 제법 쓸 만한 편이지. 거절하는 순간 이단자로 의심받을 수 있는데 그 누가 거절하겠느냐.”

“그건 양아치잖아요.”

“뭘 새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거냐.”

“…….”

청산호의 말에 마이스터가 미간을 구겼다. 차마 부정은 못 하겠고, 그런데 기분은 또 나쁘고. 그런 심정이 미간 주름 사이사이에서 느껴졌다. 하여간 웃긴 놈이었다.

“양해를 구해도 생기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 할아버지 된 도리로서 그 정돈 해 줄 수 있으니.”

“피해는 그쪽이 더 크면서?”

“내가 너처럼 한곳에 몰아 두고 살 것 같으냐?”

별개로 이건 진심이었다. 아무렴 그들 마탑이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곤 하지만, 설마 개인 사업자보다 돈이 없겠는가? 청산호 그가 일평생 쌓아 온 재산이 얼만데, 사건 한 번으로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털이가 됐겠어?

“다른 도시에 투자해 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회수하고 다른 마탑주들에게 돈을 빌리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테지.”

“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던가. 청산호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주축이 되는 재산은 사라졌을지언정 그에겐 아직 분산투자해 둔 자산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저들을 따라가라.”

“그래도…….”

“무엇보다 너, 이곳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 아니냐.”

그러나 마이스터가 가장 놀란 대목은 그에게 돈이 남아 있다는 쪽이 아니라 가장 뒤의 발언이 나왔을 때였다.

올라간 눈썹이 약간의 놀라움을 표현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단언하시네요?”

“모두를 위한 희생이다, 라는 주장을 네가 얼만큼 싫어하는지 안다. 그런 네가 이 상황을 내켜 할 리 없지. 그 불호를 이길 만큼 이 도시를 사랑하던 것도 아닐 테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이스터의 호불호는 제법 명확한 편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청산호는 전부까진 아니더라도 손자의 대략적인 기호 정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정돈 놀랄 것도 없는 예측이다.

“희생까진 안 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멋대로 책임을 얹어 주고는 있을 테지? 네가 잘났으니까, 네가 가장 빠르게 해치울 수 있으니까.”

더불어 밖의 사람들이 마이스터를 어떻게 써먹을지도 대충 감이 왔다. 그의 손자는 정말 쓸데없이 재능이 많은 편이었다.

“하니 싫은 일 할 바에야 그냥 가라고 하는 거다. 여기에 남든 저길 따라가든 연구하기 힘든 건 똑같을 거고, 그럴 상황이라면 차라리 자유 시간이라도 넉넉하게 줄 쪽이 나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많은 재능을 이 도시에만 써야 할까?

청산호는 고개를 들어, 손자의 자색 눈동자를 보았다. 한때 얼룩덜룩했던, 그렇지만 실험의 여파를 지우고 나니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된 그 눈을 보았다.

그는 저 아이가 마음대로 살기를 바라서 이 도시에 데려온 것이지, 이 도시에 묶어 두기 위해 이곳에 둔 게 아니었다.

그가 이 도시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손자까지 이 도시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능력이 있으면 모두를 위해 쓰라고들 하지. 그런데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치고, 능력을 가진 자 또한 한 명의 인간임을 기억하는 자들은 드물다.”

“인간의 어리석음이죠.”

“…네가 진심으로 이 도시를 걱정해서 남겠다고 하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눈치 보지 말고 네 인생에 더 나을 선택을 해라. 이곳은 너 하나 빠진다고 망할 수준이 아니고, 얄팍한 선의로 남는다 한들 저임금으로 부려 먹히며 실망밖에 못 얻을 테니.”

“저들을 따라가도 노동값은 못 받을 텐데요.”

“대신 못 했던 세상 구경은 할 수 있겠지. 저들이 악마를 중점으로 잡는 걸 고려하면 그 부산물도 제법 주울 수 있을 테고.”

“…도시 사람들이 욕할 것 같은데.”

“그래서 그게 신경 쓰여 못 가겠나?”

“그럴 리가요.”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청산호는 사람이 비난을 하든 비방을 하든 귀만 후비적거릴 손자를 흐뭇하게 보았다. 저것이 객관적으로 좋지 않은 성격이란 건 별 의미 없었다. 조부된 자로선 손자가 편히 살 수 있다면 손자를 대할 사람들의 복장 같은 건 알 바 아니었다.

“근데 제가 용사 따라가서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을 것 같은데.”

“글쎄.”

다만 그래도… 저 성질 더러운 손자가 누구 한 명의 복장만큼은 터트리지 않고 도리어 도와주길 바란다. 청산호는 손자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려 했던 가장 큰 이유를 두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쪽에 의뢰받은 게 있지 않느냐.”

“…잠깐, 그건.”

“너는 이미 돈을 받았고, 그 의뢰만큼은 기필코 전달되어야만 한다.”

아크메이지가 주문 제작을 부탁했던 신성력 여과기는 전해져야만 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도리였다.

* * *

도와줄 필요도 없는 것을 도와줘서 그런가. 여관 주인은 내가 지내는 하루간 제법 편의를 봐주었다.

음식을 조금 더 담아 준다든가, 본래라면 돈 받고 파는 레몬 물을 서비스로 준다든가. 그런 소소한 레벨의 편의였다.

그런데 그런 걸 받고 가만히 있으면 그게 난가? 컨셉이지?

해서 나는 서비스를 받는 족족 청소를 돕거나 무거운 물건을 날라 주는 것으로 보답했고… 그 결과 당신의 딸을 소개받을 처지에까지 몰렸다. 그녀의 딸이 병영으로 출근하지만 않았어도 꼼짝없이 그리되었을 것이다.

“하루만 더 머물고 가지… 내가 반값에 받아 줄 수 있는데.”

“하하…….”

반값에 하루를 더 머무를 수 있다는 건 제법 매혹적인 이야기지만 그 대가로 선을 봐야 한다면 그건 좀…….

“꼭 소개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야. 청년, 만하펠트로 갈 거라며? 지금 거기 가는 길이 얼마나 난린데. 그쪽으로 빠지는 골목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문 못 들었어?”

“아, 그 소문이요.”

거기에 위장 스킬의 디버프가 슬슬 위험 수준까지 올라왔다. 방어력과 저항력 감소, 받는 피해량 증가는 뭐 그렇다 치더라도 초당 들어오는 도트 대미지가 더는 경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올랐단 이야기다.

이젠 정말 떠나야 한다.

“듣긴 들었습니다만… 도시에서 토벌대를 보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어제 돌아다니며 듣기로, 이 도시에서 준비한 병사 스물과 도시 만하펠트에서 보내 준 기사 한 명─악마 출현 장소가 만하펠트보다 이곳에 더 가까워, 이쪽으로 보낸 모양이다─이 악마 사냥에 나선다고 했다.

하면 괜찮지 않을까? 저 토벌 병력에 사제들이 껴 있고, 내가 그들을 지나쳐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렇지만…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기엔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대삼림에서 시험해 본바, 닷새까지는 어거지로 위장 스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딱 죽지 않는 선에서, HP가 아슬아슬하게 반절 남는 선에서 말이다.

한데 그 닷새 안에 저들이 악마를 잡고 돌아올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아니라고 본다. 악마 수색할 시간도, 악마를 잡을 시간도, 도시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에도 전부 시간이 소요될 테니 말이다.

하니 그렇게 될 바에야 일찍 출발해서 그들을 지나치는 게 더 낫겠지. 어차피 내가 악마에게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고집 피우기는…….”

“하하. 죄송합니다.”

“웃지 마, 정 들어.”

“이 도시에 오게 될 일이 있으면 또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가능하면 일찍 오라고. 우리 딸내미 시집보내기 전에.”

나는 마지막까지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여관 주인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여기에 다시 올 일은 아마 없을 것이나, 어떤 건 모르는 게 약인 법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건강해야 해!”

“네에.”

나는 주인분께 목을 살짝 숙여 보이곤, 흘러내린 안경을 추슬렀다.

동부의 동쪽 끝 해안선에 위치한 베뮈르헨과 다르게, 동부의 가장 서쪽 부분에 위치한 도시 만하펠트로 향할 시간이었다.

* * *

[잘도 숨었구나.]

수십 개의 샹들리에가 서로를 잇고 이어 만들어진 은하수 아래.

드넓은 홀 속 옥좌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눈을 떴다. 왕관처럼 자라난 뿔과 색 없이 하얀 살갗은 그것이 결코 보통 인간이 아님을 외치고 있다.

[숨었다면 영원히 나오지 마라. 네 화에 순순히 죽어 주지는 않으리니.]

그는 푸른 숨을 내뱉으며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내었다. 그의 키보다도 높게 솟은 옥좌의 등받이에는 금성의 문양이 마치 헤일로처럼 보이도록 조각된 채다.

그가 손을 얹고 있는 팔걸이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벽으로부터 튀어나온 조각상의 손이 의자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대리석에 주름과 핏줄 하나하나까지 불어넣어 만든 손은 마치 시체를 장식해 둔 것만 같다.

아아아아아─

옥좌 뒤편, 벽에 새겨진 수천 개의 천사상들은 오직 입만을 뻐끔거리며 홀 내부를 성가로 곱게 채우는 중이다.

[아담.]

그는 울려 퍼지는 노래를 감상하며 품고 있던 왕홀을 한 손으로 쥐었다. 퉁. 왕홀을 살짝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찍자, 바닥을 대신하던 호수가 왕홀을 튕겨 냈다. 약간 인 파문은 동심원을 그리며 홀 전체로 서서히 퍼지다 사그라든다.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호수의 안쪽,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부르셨습니까.

더불어 호수의 표면이 부글부글 끓더니, 그때 인 거품으로 하여금 어떤 생물을 묘사했다. 거품의 낮은 내구도로 인해 무너지고 재생산되기를 반복되는 형상은 늑대와 사자 그 어드메를 가리키고 있다.

[오래된 마법을 준비하라.]

그는 천천히 두 다리를 꼬았다. 한쪽이 트인 치맛자락이 여러 번 접힌 채 사르륵 늘어지고, 드러난 흰 다리 위로 인간의 것이 아닌 언어가 나돌아다녔다.

보호, 점령, 주인. 오래된 언어가 겹겹이 쌓일 때마다 홀에 장식된 휘장이, 휘장에 새겨진 마법들이 희미한 빛을 뿜었다.

[멈춘 세상에 변화의 돌을 던지리라.]

교만. 마지막 마법이 흐드러지듯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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