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존재한다면 (2)
딱히 도우려 한 건 아니다, 인가… 그렇지만 정말일까? 거슬려서 나섰을 뿐인데 하필 내게 이득이 된 것이 정말 우연이기만 해?
덜컹!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여기 혹시…….”
추적당하는 처지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의혹을 품는 사이, 여관의 문이 제법 거칠게 열렸다. 새로 들어온 건 강아지처럼 넙데데한 귀를 축 늘이고 품에는 긴 검을 든 큐어티족 청년이었다.
키가 조금 작은 것이 십 대 소년이 아닐까 싶은데…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십 대 소년이든 이십 대 청년이든 비단으로 이뤄진 옷을 입은 점에서 깝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건 매한가지니까.
“아, 기사님!”
별개로 지금 막 들어온 이와 나를 구해 준 이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다. 큐어티족 청년이 청록색 머리 여성을 발견한 순간 화색을 띠었다.
그에 반해 청록색 머리의 여성은… 딱히 표정을 바꾸거나 하진 않았다. 하나 그 그려 낸 듯한 미소에선 어쩐지 귀찮음과 짜증이 묻어나는 듯했다. 아마도, 내 추측이지만.
“기사님, 저를 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언성을 낮추거라, 자르딘. 교양 없어 보이니.”
“윽. 그, 그건 잘못했습니다…….”
“…기사?”
다만 여관 주인장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듯, 그들 대화 속에서 약간의 문제 소지가 있는 단어가 발견되었다.
“…기, 기사?”
보통 인물은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기사였나?
…허리든 등이든, 하다못해 허벅지나 팔목 다리에조차 무기랄 게 없는데?
“…좆됐다.”
“닥쳐…….”
일단 감사 인사도 했겠다, 딱히 나설 것도 없겠다. 나는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았다.
내게 압박을 주려던 모험가들도 비슷했다. 책상을 뒤엎어 모욕을 줬다거나 자신들의 작업을 방해했단 이유로 마저 시비를 걸기엔, 저쪽이 너무 거물이라는 것을 자각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기사님, 볼일이 있으시면 있으시다고 한마디 정도는 남겨 주세요. 상점에서 나오니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래. 다음부턴 재고하마.”
뭐, 몇 번이고 쏟아지는 기사란 단어 앞에서 누군들 그 사실을 못 깨닫겠냐마는.
“…그래서 여긴 왜 오신 건가요?”
“아는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아서 왔다.”
“헉, 진짜요? 어디 계신대요?”
“기분 탓이었다. 가자.”
“아, 넵.”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사는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가 기사임을 몰랐던 모험가들이 초반에 대들 뻔했던 사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는 뒤처리에 쓰일 시간마저 아깝다는 양 우리를 깔끔히 무시했다. 그러니까, 모험가들뿐 아니라 나조차도.
딸랑.
종소리와 함께 파란을 몰고 왔던 사람이 떠나갔다.
“걸린 건… 아닌가.”
정말 발각된 거였다면 일이 이렇게 끝나진 않았겠지. 나는 이제 수배령까지 떨어진 범죄자 신분이고, 진짜 기사라면 그런 나를 잡아야 할 의무─그런 게 없다고 해도 눈앞의 범죄자를 굳이 놔줄 이윤 없을 거다─가 있을 테니.
한데 그런 마당에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휙 가 버린다? 결국 그녀는 나를 몰라보고 그냥 도움 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그렇다.
묘하게… 꺼림직하고 찝찝한 느낌이 남기는 해도.
“…으음.”
아무렴, 기사가 사람을 도와주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그 대상이 하필 나인 것도 좀 작위적이지 않나.
…아, 아닌가? 흔한가? 기사 자체를 뭐 볼 일이 있어야지. 도시 성주쯤 되는 사람 만날 때 아니면 영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들이 저렇게 봉사하고 다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가, 가자.”
“그래.”
음.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기사쯤 되는 인물이면 어지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이런 허름한 여관에 괜히 올 것 같진 않은데… 아까 아는 사람 운운하기도 했고……. 으음…….
나는 더 시비 거는 대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떠나가려는─기사가 다시 올까 싶어 떠나는 것 같다─모험가들을 힐끗 보았다.
저들의 시비도 완전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의도된 무언가일까?
“저, 청년.”
이 여관 주인분은?
“음식은 어떻게 할까? 다시 내줄까……?”
…이건 너무 멀리 간 생각이겠지.
나는 사방으로 튀려는 의심병을 도로 잡아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쫓기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모든 걸 불신하는 것도 너무 과한 일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거의 다 먹은 참인걸요.”
이 수준으로 계속 의심하고 불신해 봐야 위험 회피보단 편집증 환자가 되는 것이 더 빠를 터.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의 매일매일은 엄청나게 피곤해질 것이다. 이 도피 행각이 몇 년이나 지속될 걸 생각하면 수명 줄기 딱 좋을 일이란 거다.
“치우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그럴 필요 없는데…….”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걸요. 얻어먹은 것도 있고. 괜찮으니 다른 손님들 보고 계세요.”
하니 확실한 물증이나 정황증거가 없다면 억측은 자제하자.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테이블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굴러간 그릇들을 회수했다.
여관 주인은 조금 미안한 표정이다가, 쌓인 일거리에 결국 자리를 떴다. 모험가들에게 돈을 받아 내야 할 것도 있고, 다른 손님도 눈치 보며 주문 중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달그락.
언제 위장 스킬을 풀어야 할지 몰라, 매양 장갑을 끼고 다니는 내 손이 착착 겹쳐 든 그릇 더미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
.
.
“이런 식으로는 백날 시도해도 못 찾겠군.”
“예?”
한편, 모험가들이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거리.
“네게 한 말이 아니다.”
“아, 예.”
“그보다 자르딘, 내 검을.”
“여, 여기 있습니다.”
제 뒤편으로 주제 모르는 애송이들이 지나가든 말든, 푸른 머리칼의 기사는 본인의 검을 받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전前 기사단장이 남긴 유품이자 그녀 같은 이─마법사가 될 수는 없으나 기사치고는 마력이 너무 많은─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검: 베른슈타인Bernstein은 조금의 빛바램조차 없이 고유의 광채를 은은히 흘리고 있다.
“근데 검은 어째서…….”
“그건 이상한 물음이구나.”
막 타오르기 시작한 장작불처럼 오묘하고, 빛을 쪼개는 대신 투명하게 비추는 호박색 검.
“기사 된 자가 본인의 검을 확인하는 데 이유나 설명이 필요할까?”
“죄, 죄송합니다…….”
그녀의 취향은 아니지만 퍽 아름답긴 하다. 에메랄드는 그런 상념과 함게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1.9m짜리 전임자에 맞추느라 물려받을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1.3m의 긴 검신이 나무 검집 속으로 쏙 들어갔다.
“저, 저 그러면… 아까 말씀하신 건… 정말인가요?”
“…무슨 뜻이지?”
“아까… 그, 기분 탓… 이라고 하셨잖아요.”
그사이 그녀의 종자이자 향사의 직위를 하사받은 자르딘이 또 한 번 우물쭈물 질문했다. 기사를 꿈꾸고 있고, 노력도 하는데도 이상하게 살이 빠지지 않는 소년은 저럴 때마다 참 동그라니 귀여워 보인다.
“그게 문제가 될 만큼 이상한 말이던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평소에 착각 같은 거 잘 안 하시는 분이 기사님이시니까…….”
“그렇긴 하지.”
“…그 아는 분이 누군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지만 매번 면박을 줘도 눈치 없이 계속 질문하는 점이나,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점은 좀 짜증난다.
에메랄드는 조용히 그녀의 종자를 내려다보았다. 옥색 눈동자의 시선이 지긋이 이어지자, 자르딘이 떨리는 눈을 고개 내리는 것으로 감췄다.
“주제를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 알면 됐다.”
그녀는 검집에 넣어 둔 검을 자르딘에게 다시 떠넘기곤 다시 발을 움직였다.
“에메랄드 경!”
얼마 안 가, 저편으로부터 누군가가 달려왔다. 옆의 사람과 통일된 차림이나, 들고 있는 창이나, 옷에 새겨진 마크가 이 도시의 경비병임을 알려 준다.
“악마에 대한 단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아, 발견됐나?”
“드디어!”
병사가 가쁜 숨을 내쉬며 해 준 말에 그녀와 자르딘은 각자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중 자르딘의 반응은 유독 거셌는데, 에메랄드는 그것을 구태여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덕과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으나, 종자에게 그걸 지적해 주는 것조차 귀찮았던 탓이다.
“단서가 발견됐다면 악마도 곧 잡을 수 있겠네요, 기사님.”
“글쎄, 그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지.”
“기사님은 무려 수석기사님이시잖아요.”
무엇보다 악마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그녀에게도 퍽 기꺼운 일이었다. 이 귀찮고 따분하고 지저분한 마을에 오게 된 이유도, 그녀의 외근이 길어진 이유도 저 악마가 지분의 절반쯤은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만 잡으면 파견 임무도 완전 종료고… 1년 만에 뮌문트로 돌아가겠네요.”
“그만. 말을 아꼈더니 네 방만함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구나. 아니면 네가 직접 사냥이라도 해 보고 싶어진 것이냐?”
“아… 그, 죄송합니다.”
그녀는 두 기사학교, 체체바토르와 뮌문트의 전통적인 기사교류를 위해 보낸 1년을 되돌아보았다.
본래라면 2주도 전에 도시 뮌문트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망할 만하펠트의 성주는 이왕 돌아가는 거 마지막 정으로 해 달랍시고 외부 임무를 그녀에게 덤터기 씌웠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그녀가 반 강제적으로 자원했어도 그렇다.
“그리고 자네, 어서 안내해 주게.”
“예, 예!”
언젠가 그 성주도, 그녀가 자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자도 본인들의 선택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출장비도, 외근 수당도 없이 남의 일거리를 떠맡게 된 기사가 조용히 검을 잡았다.
* * *
청산호와 만나도 된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하여 마이스터는 드디어 떨어진 허가를 두고 ‘신전 새끼들이 웬일이래?’ 내지 ‘이 새끼들 이거, 함정 수사 하려는 거 아니야?’라는 의문을 품었다. 마법사라면 쉽게 할 생각이었다.
“뭐지?”
“들어올 거면 끝까지 들어올 것이지, 문 앞에서 왜 껄쩍거리는 거냐.”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다르게 신전은 그들의 대화를 감시하려 들지도, 그것으로 하여금 무언가 꼬투리 잡으려 들지도 않았다.
마이스터의 미간이 구겨졌다.
“꼴통들이 또 꼴통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이곳에 기어 들어와?”
“그러는 댁은 너무 잘하셔서 여기에 잡혀 오셨나 봐요?”
좋아. 영감탱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감시 도구 같은 건 없는가 본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마이스터는 쓸데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본인의 입을 조심하기로 했다. 그사이 딱히 할 말이 없는 청산호가 약한 한숨과 함께 본인의 몸을 돌렸다.
“슬슬 떠날 거라더군.”
“그래요?”
비록 주체에 대한 언급은 빠졌으나, 못 알아들을 이유는 없다. 마이스터는 단번에 지칭 대상을 깨닫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요?”
“따라갈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요?”
더불어, 그는 이어진 말을 두고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그들을? 왜?
“…녀석이 착각한 모양이군.”
“아크메이지님이 그렇게 말하시덥니까?”
“그래.”
“흠.”
사실 그렇게까지 오해는 아니다. 그들 여정에 합류해 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또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을 뒤따르는 것보다 뒤따르지 않는 것이 그에겐 더 나았다. 조금만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떠나는 것보다 남아야 할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였다. 그가 그들과 함께하는 걸 포기한 것은.
“…나 때문이냐?”
“반은요.”
“나머지 반은?”
“배터리 연구랑 의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할아버지 보필 문제도 문제지만 그에겐 다른 일도 제법 산재해 있었다. 예컨대 이번 사태에서 힌트를 얻게 된 배터리 연구라든가, 이번 일로 증발해 버린 의뢰 물품 재제작이라거나 말이다.
“그게 다면 따라가라.”
“……?”
“…신탁에 대해선 너도 들었겠지.”
“듣기야 들었죠?”
용사가 될 인간을 점지해 주되, 그 이상 개입한 적 없던 방관자 신이 오랜만에 일한 사건이 아닌가.
그쪽에 관심을 둔 적은 없지만 사제들이 워낙 술렁거리는 덕택에 듣기는 일찍이 들었다. 그와 영 상관 없는 이야기라 지금껏 무시하고 있었을 따름이지.
“하면 신탁의 뒷부분도 알고 있겠구나.”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가 이것을 언급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이스터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의 검지가 안경을 추슬렀다.
“…당연히, 알죠.”
신탁을 처음 전해 들었을 당시, 그는 단번에 ‘길 잃은 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아무렴, 베뮈르헨 사태조차 예지해 주지 않은 신께서 신탁으로 친히 언급해 줄 정도면 그 대상은 얼마나 큰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겠는가. 못해도 이 이상의 사고를 칠 수 있는 존재거나 용사만큼 중요하거나 뭐 둘 중 하나겠지.
한데 그런 인물들이 뭐 흔한가? 심지어 신은 앞에다가 ‘길 잃은’이란 수식 어구를 붙여 놨는데?
하므로 마이스터가 판단하건대 이 신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하나의 대악마를 품고 있고, 태곳적 짐승 둘과 대악마 둘을 사살했으며, 그 모든 행위를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이뤄 낸 단 한 사람 말이다.
“…만약에요.”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길 잃은’이란 수식어에 완전히 부합하는 건 아니다. 하나 그 대목을 은유라 생각하면 또 그렇게 어긋나는 것 역시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던 그는 어찌 보면 삶이란 길을 잃어버린 채 헤매는 듯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신탁의 대상은 악마기사일 것이다. 아마도 그일 것이다.
“제가 간다고 하면.”
한데 여기서 그것을 그의 할아버지가 이야기한다?
…자격 운운하며 악마기사를 보내 준 할아버지가?
“자격에 대한 거, 알려 주실 겁니까?”
이건 결국 뭔가 더 있단 거겠지. 그것도 그의 할아버지만 아는 무언가가.
마이스터의 자색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