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존재한다면 (1)
“드디어 떠납니까?”
여정 중 이렇게까지 길게 머무른 도시가 없으나, 정작 그 알맹이는 파멸적인 기억뿐이다. 하여 데스브링거는 베뮈르헨을 떠날 거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반색했다.
“아마도.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 말일세.”
정확히 따진다면, 남아 있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무렴 몇 달이 흘렀다고 날아간 도시가 그새 복구됐겠는가. 이번 사태로 인한 상처는 최소한 십 년 단위의 시간이 흘러야 완전히 아물 터였다.
“성 사람들도 뭐라 하진 않을 걸세.”
“당연히 그래야죠. 그동안 얼마나 해 줬는데…….”
다만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빠지는 순간 무너지는 단계는 지났다. 그들이 손을 떼면 위태위태해지는 정도도 이젠 아니었다. 몇 개의 도시에서 보낸 지원군이 이곳에 머물며 복구도 절찬리에 진행 중이다. 하면 된 것 아니겠는가?
데스브링거는 그런 마음을 기반 삼아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해 줬는데’란 말에 그의 지분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건 별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최소한 인퀴지터는 이런 말을 해도 될 정도로 헌신했고, 데스브링거에겐 동료란 이름으로 대신 투덜거릴 자격 정돈 있었다.
“…정말 데리고 가는 겁니까?”
마찬가지로 완강한 거절이 아닌 선에서 하는 볼멘소리도 나름 허용선일 것이다. 이 반발심이 사생결단할 만큼 성장하거나 사보타주를 저지르는 수준으로 격상되면 또 모르지만.
“그가 그러길 바랐고, 그쪽 교구에서도 허락을 내린 마당인데 뭐 어쩌겠나.”
“쳇…….”
신전이 싫으면 사제가 떠나라 했던가. 그러나 떠날 수 없다면 그땐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데스브링거는 결국 다니엘의 합류를 인정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네만, 너무 그러지 말게. 그가 아니었더라도 인원 보충은 필연적으로 이뤄졌을 게야.”
기실 그렇다. 무력 쪽 쌍두마차나 다름없던 악마기사와 베르세르크가 빠진 이상, 인원 벌충은 필요한 일이었다. 악마기사와 베르세르크가 강대한 무력 외에도 근접직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지금 전투원이 필요하다. 그것도 근접 전투를 맡아 줄 전투원이.
“그 정돈 압니다요.”
그런 점에서 다니엘은 있어서 나쁠 게 없다. 그가 빠진 두 사람만큼 활약해 주진 못하더라도, 숙련된 이단심문관으로서 최소한의 기대치는 충족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전… 그게 하필 저 사람이란 게 싫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필요하다는 이유로 휙휙 접히지는 않는지라. 데스브링거는 본인의 머리를 벅벅 긁고는 휙 일어섰다.
그가 ‘인정할 수 없다’란 의미로 저렇게 말한 것이 아님을 아는 아크메이지는 어깨만 그저 으쓱일 따름이다.
“어딜 가나?”
“떠나기 전에 준비할 거 해야죠.”
아직 시장이라 할 만한 건 안 열렸으나, 물건을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제대로 준비하는 건 어렵더라도 완전히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샌님도 상태가 영 멜랑콜리하다는 듯하고…….”
덩달아 그에게는 보러 갈, 그러니까 형편을 확인해야 할 사람도 있었다. 데스브링거의 말버릇을 아는 아크메이지가 눈 끄트머리를 내렸다.
“…뭐가 문제인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일세.”
데스브링거는 그녀의 수긍을 두고 언짢다는 모양새로 눈을 접었다. 아크메이지를 향한 질타의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최근 샌님이 보이는 꼬라지를 떠올리니 자동으로 그런 표정이 나왔을 뿐이다.
그의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망토와 허벅지를 툭툭 쳤다.
“…신탁 때문이겠죠.”
“역시 그런가…….”
샌님이 고민하는 부분이야 뻔하다. 정녕 악마기사를 구할 방법 따윈 없는가. 신탁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런 것들이 아니고서야 저 단순명쾌한 샌님에게 고뇌거리가 되기란 쉽지 않으므로.
“됐고, 진짜 갑니다.”
그러나 평소 명쾌히 답을 구하던 사람이기에 이번 난제는 더욱 고되고 힘겨울 것이다. 꺾이고 좌절하는 데 익숙한 그조차 이렇게 힘겨우므로, 최초의 패배이고 실패를 겪은 그녀는 더욱 그럴 것이다.
『만약 신탁이 그분을 뜻하는 게 맞고, 죽이라는 해석이 올바른 것이라 한다면. 나는 그분을 정말 죽여야 하나?』
아니, 어쩌면… 최초의 실패라서가 아니라…….
『그분에게 구함받은 목숨으로, 그분 덕에 성히 존재하는 이 팔다리로 그분을?』
데스브링거는 턱턱 막히는 숨을 두고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저리 말하던 샌님은 정작 그에게 답을 바라지 않았고, 그 또한 차마 대답할 자신이 없어 듣지 못한 척 물음을 넘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참 잔인한 이야기였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책망이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힐난만 하면 그만이지만, 샌님은 그조차 불가능한 입장이니까.
“…빌어먹을.”
평생을 지켜 온 신앙인가, 짧지만 강하게 쌓은 유대─설사 그게 일방적인 연결일지라도─인가.
그는 신이란 걸 별로 섬기지 않기에, 그 둘을 비교하면 반드시 후자가 되겠지만 신의 위치에 에밋을 넣는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치열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을 택하든… 아마 지독하게 후회하겠지. 에밋이든 나리든 그에게 큰 가치를 가진 건 동일하고, 그중 어느 한쪽을 버리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테니까.
“젠장.”
하므로 데스브링거는 인퀴지터가 이도 저도 택하지 못하는 걸 두고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덜어 줄 수 없는 이상 그는 함부로 말을 얹어선 안 됐다.
천막 바깥까지 나왔던 그의 무릎이 다시 접히고 두 손이 그의 머리를 감쌌다.
너무 괴로운 날이었다.
* * *
“아이고, 청년 잘 먹네에! 한 그릇 더 줄까?”
갑자기 다가온 여관 겸 식당 주인이 깔깔대며 외친 말에, 나는 막 들어 올리던 스프를 내려 두었다.
팡팡! 어째 다가오는 폼이 불길하다 싶어서였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녀의 두툼한 손이 내 등짝을 후려쳤다.
“복스럽게 먹어서 좋아.”
“하하하…….”
남이 함부로 하는 스킨십을, 특히 어색한 사이에서 친근감을 표하고자 멋대로 하는 종류의 스킨십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고 넘겼다. 터프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서 이 정도 두들김에 정색해 봐야 나만 예민하단 소리 듣는 까닭─사실 현대에서도 아직까지는 그런 느낌이지만─이다.
무엇보다 나는 남이 나를 함부로 때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법 기꺼웠다. 맞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함부로 굴 수 있을 만큼 공포감을 덜 느끼고 있다는 게 확 체감이 돼서였다.
이 정도면 최소한 사람들에게 녹아들지 못해 위화감 사는 일은 없을 터. 맞는 것 자체는 껄끄러울지언정 이만한 메리트를 두고 참지 못할 것까진 없다.
팡팡!
“더 먹어, 더 먹……!”
“잠, 잠─ 우엑.”
참지 못할 것까진 없지만, 디버프가 덕지덕지 발린 몸이 등 몇 번 맞았다고 피 토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주르륵. 내 입에서 피가 튀어나온 순간 주인장이 눈꺼풀을 몇 번 감았다 떴다.
“우와아악!? 청년,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아무리 디버프 영향이 크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민간인이 한 등짝 스매시 일곱 번 맞았다고 피 토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나는 그런 불만을 주절주절 삼키며 손수건으로 피를 주섬주섬 닦았다. 파리하게 질린 주인장이 헝겊을 가져다준 덕에 좀 더 깔끔하게 닦을 수 있었다.
“그, 병에 걸렸다거나 한 건……?”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당연하지만 탁상에 묻은 피도 꼼꼼히 처리했다. 음식에 피가 안 들어간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섭취하면 그래도 철분 일부는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이고, 그랬구나…….”
어쨌거나 병균을 보유한 사람으로 곡해받는 것만은 피했다. 나는 그 사실에 기뻐하며─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염병에 걸렸다고 오해받는 순간, 도시에서 쫓겨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마저 음식을 들었다.
여관 주인장도 더는 나를 방해하지 않아, 마음 편히 숟가락을 움직여도 됐다.
“이거라도 더 먹을 텨?”
“아,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대신이랄지, 나중에 가서 약간의 동정과 적선이 추가되었다. 복잡미묘한 감상이 들긴 했으나, 굳이 분류하자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새롭게 주어진 감자 샐러드를 감사히 받아 입에 쑤셔 넣었다. 으깬 감자에 옥수수알을 섞고 소금으로만 간한 샐러드는 입가심용으로 제법 괜찮았다.
“어이, 샌님. 그렇게 피 토하는 몸으로 여행이나 다닐 수 있겠어?”
다만 그것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나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건들거리는 모험가 무리였다.
“제가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은 되는지라…….”
나는 세 명의 모험가를 두고 모호하게 웃었다. 내가 강하단 걸 설명할 수도, 그렇다고 약하단 걸 인정할 수도 없기에 택한 세 번째 대답이었다.
아무렴, 악마기사와의 연관점을 없애기 위해 검 따위 없는 척하고 다닌단들 기존에 있던 무력마저 증발했겠나? 또 내가 위장 스킬을 썼다 한들 고양이 하나 제압 못 할 수준으로 약해졌겠고?
“에이, 그러지 말고. 호위 같은 거 필요하지 않아?”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걸 몰라서 저렇게 나온다.
애석한 일이었다.
“글쎄요.”
나는 내 콧잔등에 얹어진 안경을 쓱 고쳐 쓰며 그들이 하는 양을 보았다.
악마기사를 연기할 땐 이런 똥파리들이 꼬인 적 없건만, 위압감 없는 평범한 인상으로서의 변장이 너무 잘돼도 문제인가 보다. 뭔가 웃기고 슬프다.
“지금까진 필요 없었어요.”
별개로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저들을 어떻게 달래 보낼지 고민하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지금까지 필요 없었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단 건 아니지이. 그래서 말인데, 우리한테 의뢰할래? 하겠다고 하면 이번은 특별히 반값에 해 줄 수 있는데.”
“그래애. 이런 기회 잘 없다?”
“참고로 현금이 없다면 돈 대신 현물도 괜찮아! 귀걸이나 안경 같은 거 말이지.”
그에 맞춰 건들거리며 협상을 시도하던 모험가 하나가 내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합석을 허락한 적은 없는데. 그 이전에 귓구멍이 선택적으로 뚫리는 병이라도 있나?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말은 내 성격과 사뭇 동떨어진 것이다.
“자, 응? 반값에 해 줄 테니까─”
아, 내가 성격 더러운 컨셉을 너무 오래 연기하긴 했나 보다. 척수반사적으로 성깔 있는 문장이 튀어나오네. 이거 조금만 더 오래 했으면 아예 발까지 나갔겠어.
퍼억!
“우와악!”
“혀, 형님!”
한데 내가 그런 생각을 머금은 순간,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이 상대 쪽으로 뒤집어졌다. 탁자 위에 즐비하던 음식 그릇이 비상하며 모험가에게 와장창 엎어진 건 덤이었다.
비산하는 음식물─뭉개진 감자─과 날아가는 나무 그릇이 내 시야에 느리게 잡혔다.
…뭐지? 나 발 안 썼는데? 진짜 안 썼는데? 손도 안 썼는데? 설마 나 이제 상상만으로 책상 뒤엎기가 가능해진 건가? 그런 건가!?
“정말 경이롭구나. 생명이 이렇게까지 천박하고, 지저분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천만다행히도, 책상 엎기를 시도한 건 나의 발이나 본능이 아니었다. 물빛, 아니 그보다 더 청명한 티파니블루 빛깔의 머리카락이 사르륵 나부꼈다.
“찬미하마. 너흰 내가 본 것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더럽다.”
마치 취옥이 실타래의 형태로 변해 흔들리는 양했다.
“넌 또 뭐─”
“주인장.”
나를 대신해 책상을 엎어 준 이는 발끈하여 일어선 모험가들을 내버려 둔 채 빙글 돌아섰다. 그에 맞춰 희디흰 옷자락이 팔랑 흩어졌다.
드레스라기엔 하의가 치마가 아니고, 제복이라 하기엔 장식이 많은 옷은 도저히 일반인들이 입을 만한 것이 아니다. 최대 귀족, 못해도 그에 준할 재력가다.
“변상하겠다. 돈을 가져가라.”
여관 주인에게 동전을 던져 주는 동작도 마찬가지였다. 은화를 저리 흔쾌히 쾌척한다? 최소한 돈에 절절매는 일반층은 아니다.
“가,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필요 없다.”
“예, 옙.”
다만 의문인 것은 저 사람이 왜 나를 돕느냐는 건데…….
나는 도와줘 놓고 일언반구도 없는 이를 가만 응시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챈 상대방도 나를 돌아보았다.
햇빛 아래서 일해 본 적 없다는 듯 뽀얗기만 한 얼굴에는 깨진 살얼음처럼, 벽개가 생겨 빛을 묘하게 투과시키는 에메랄드처럼 오묘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감사한 건 감사한 거지.
나는 상대가 움직인 연유를 추측하기 이전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도자기로 빚어낸 인형처럼 곱다랗게, 하나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형태로 미소 짓던 이가 도로 몸을 돌렸다.
“감사는 필요 없다. 돕고자 한 행위가 아니니.”
장식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블루큐라소 빛깔 앞머리 사이에 섞여 있는 검은색 브릿지가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