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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59화 (259/389)

259화 만약 (7)

“…태곳적 짐승들은 세계와 함께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까?”

[맞아. 세계와 함께 태어난 거.]

“하면 창조주란 것은…….”

[신이 세계를 만들 때 우리도 같이 만들었으니까.]

갑작스럽게 들이밀어진 사실에 에쿠아는 잠시 침묵했다. [신이 진짜 있었십니까?] 조상님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산군도 비슷했다.

“그건 바깥 인간들이 부리는 억지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럴 수 있지. 너희가 신화시대를 겪은 것도, 그때의 기록이 제대로 전해진 것도 아니잖아.]

“그럼 저희 신앙은 지금껏 불경을…….”

에쿠아는 한 사람을 배웅하다 말고 터진 폭탄에, 최대한 차분히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 쉽지는 않았다. 침착함은 어디로 가고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가까스로 흐려졌다.

[그런 걱정은 마라. 그분은 공평한 죽음이고 불공평한 삶이며 자애로운 숲이자 가혹한 바다시니. 그런 것에 일일이 관심 가지시며 불경함 딱지 붙일 일은 없어.]

“하지만…….”

[괜찮대도.]

그것을 눈치챈 육귀가 지느러미로 그의 팔을 톡톡 쓰다듬었다.

[애초에 그분이 신경 쓰는 건 오직 세상의 존립뿐이야. 세상 생명체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무엇을 숭배하고 따르든 세상을 멸망시키려고만 안 하면 조금도 신경 안 쓰신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 사서 걱정하는 것도 안 좋아.]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 쓰다듬은 에쿠아의 복잡한 심정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했다. 아이의 눈이 사뭇 가라앉았다.

“바깥을 이해하고자 교단의 경전을 읽을 당시, 우상숭배를 내버려 두는 이유 부분을 두고 어이가 없었는데… 그것도 나름 근거가 있긴 했나 봅니다.”

[응? 걔네가 뭐라 적었는데?]

“그들의 경전이 서술하길 ‘이 세상 전부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그분의 창조물을 숭배하는 것조차 결국 신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이다.’라더군요. 그러니 우상숭배를 박대할 필요 없다고.”

막 읽었던 당시엔 ‘바깥 놈들은 존중이란 걸 모르나? 남의 신앙을 후려치네?’라고 생각했지만… 육귀가 신의 실존을 단정지어 준 지금은 좀 다르다.

[어… 틀린 말은 아니야. 틀린 말은.]

그건 놀랍게도 사실에 기반한 저술이었나 보다. 에쿠아는 묘하게 분해졌다.

[보다 정확히는 세상이 존속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신앙의 대상이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하기만 한다면 누구를 믿든 누구를 존숭하든 알 바 아니다 쪽이긴 한데… 결국 그게 그거니까.]

“그렇군요…….”

[잉, 신인데 그래도 되는 깁니까?]

[왜 안 되겠어? 인간들의 믿음과 그분의 실존은 별개의 문제잖아.]

육귀의 말에 에쿠아도, 산군도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육귀의 말이니 부정은 않겠지만… 삶의 기반이 되던 무언가가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했다.

[하믄 악마가 박해받는 것도……?]

[걔넨 이 세상 생명체가 아니니까.]

[흐으으음. 그카믄요, 조상님. 기사님은 악마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구 계시니까 신전에서 허용해 줘야 하는 거 아입니까? 앞서 나온 관대함이면 이것도 허용 선일 것 같은데.]

그래도 산군은 곧장 충격에서 벗어났다. 모심을 당하는 위치였고 신앙의 주체였을지언정 군림하는 데 고집하는 마음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대해선 할 수 있는 답이 몇 개 있긴 한데… 그 전에 고칠 건 고치고 가자.]

[으잉?]

[우리의 신께선 관대한 게 아니야. 우상숭배나 신을 부정하는 건 그저 응대할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넘겨 주는 거지, 그게 진짜 자비로워서 넘어가 주는 건 아니란 말이야.]

[어……?]

[아까도 말했지만, 그분은 공평한 죽음이고 불공평한 삶이며 자애로운 숲이자 가혹한 바다야. 다른 말로는 ‘자연’이라고도 부르지.]

하나 계속해서 쏟아지는 진실은 좀 더 무거웠다.

[한데 생각해 봐. 자연에게 자비를 요구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또 있겠어? 세상은 자연이 생명체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가 자연에 맞춰 사는 것인데.]

육귀가 기어코 두 사람을 완전히 침묵시켰다. 본인도 썩 기분 좋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신이 악마기사를 박대한다? 그것도 틀렸어. 그분에겐 눈과 귀가 없으니, 질서에 속해 있다면 품으시고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외부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 내치실 뿐이야. 열심히 발버둥 치며 살아온 비렁뱅이에게 죽음을 하사하고, 타인을 짓밟으며 살아온 부자에게 긴 수명을 선사하는 불평등처럼 그분은 개개인의 행보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다고. 애초에 우릴 봐 봐. 그분이 우릴 신경 썼으면 걔네가 타락이나 했겠니?]

그도 그럴 게, 육귀가 아는 신은 이런 존재인 이상 악마기사는 더더욱 스스로를 챙겨야만 했다. 오직 그만이 스스로를 챙길 수 있으므로, 그는 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 교단 애들 기도는 듣지 않습니까? 강하게 빌면 신성력 더 주든데.]

[멍청아. 그건 우리처럼 귀로 듣고 답하는 식의 메커니즘이 아니야. 신이란 우물이 있다면 인간들이 기도라는 물통을 내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신성을 퍼 가는 거지.]

“…그러면 그들은 속설에 퍼진 대로 신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닌 겁니까?”

[그분이 직접 선택하고 꾸준히 지켜보는 존재는 용사뿐이야. 나머진 후천적으로 혹은 선천적으로 그런 특질을 개화한 것뿐이고.]

“그런…….”

[각설하고, 신에게 기도할 바에야 차라리 행운을 빌어. 그분은 절대로 기도를 들어줄 분이 아니니까, 운명에 기대란 거야.]

이 세상에 악마기사의 절대적 우군은 오직 본인뿐이다.

[이 세상에 있어, 운명은 신조차도 건들 수 없는 영역이니까.]

그래,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신뿐이다.

“…기사님께 좀 더 머물러 달라고 고집을 피워야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만 그 전에 아오리 좀 보고 가겠습니다. 챙길 게 좀 생겼습니다.”

그를 구하진 못하더라도 돕는 것 정돈 할 수 있으리라.

* * *

인퀴지터는 기계적으로 손발을 움직이며 사람을 치료하고, 주위 사람들을 도왔다.

빛 한 번에 외상이 아물고, 빛 한 번에 내상이 나아지며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가 대행하여 베푼 신의 이적이었다.

『그리─ 길 ─은 자를 구해라.』

그래. 그것은 그녀가 대행한 힘이다.

『길 ─은 자를 돌려보내라.』

동시에 그녀가 대행해 온 힘이다.

『죽여라.』

그리고 대행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어째서?”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인퀴지터는 자신의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부족해서도,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도 아니었다.

“사제님?”

“신이시여, 어째서…….”

꺾인 것은 단 하나.

“어째서…….”

그녀의 마음뿐이었다.

* * *

“딱 2주만, 2주만 더 머물러 주시지요!”

[2주! 2주!]

파격 변신을 위해 입에 상처도 내보고 문신도 그려 보며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을까. 산군 타고 몰래 찾아온 대족장이 내 바짓단에 매달리듯 부탁했다. 산군은 심지어 꼬리로 내 몸뚱어리를 휘휘 감은 상태다.

“…1주.”

“안 됩니다, 2주! 타협 못 봅니다!”

“나는 타협을 볼 것 같나.”

“…2주!”

얘네 진짜 왜 이래. 나는 질척거리는 소년과 뱀을 두고 이번에야말로 강경하게 쳐 내고자 고개를 내렸다.

“…….”

“…….”

울망울망한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초, 초롱초롱눈동자를 쓴다고 내 공격력이 떨어질 것 같아? 젖살 안 빠진 뺨으로 애교부리기를 쓴다고 내 공격이 2랭크 떨어질 것 같냐고!

“…뭐, 뭐냐.”

…이 간교하고 간악한 어린이 같으니라고! 평상시엔 대족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더니 왜 나한테만 아이의 특권을……!

“더는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딱 2주만 더 머무르시면 안 됩니까?”

하나 모든 아이들은 이런 식의 어리광을 부릴 정당한 권리가 있다. 나는 어른이기에 그것에 마땅히 휘둘려 줘야 할 의무가 있고 말이다.

“…약속해라. 2주, 그 이후엔 어떤 고집도 피우지 않겠다고.”

“네!”

[와아아!!]

“그리고 갈 때 이것을 가져가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가서 보아라. 너는 꼬리 좀 놓고.”

[앗, 알겠십니다.]

나는 조건부 허락이 내려지는 듯하자 발그레 달아오른 대족장의 뺨을 보며 약하게 한숨을 뱉었다.

가발값 3백만 갈─그간 신세 진 걸 고려해 좀 더 넣었다─은 드디어 전달했다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맞는 일인가? 아이가 먼저 매달렸다곤 하나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맞아?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들이 휘말릴 위험성도 점차 커지는데, 그걸 알면서도 눈감는 게 정말로?

“아, 그리고… 오늘 산군님과 함께 숲을 돌아보고 오겠노라 제사장들에게 일러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른으로서 아이와 어울려 주는 것이 맞는지, 어른이기에 아이가 겪을지 모를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해 보았다.

“오늘… 이곳에 같이 있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답은 쉬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른도 외로움을 느낄 줄 알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이잉. 지가 그라믄 맨날 가라고 타박하시드만, 얼라는 왜 봐주신답니까. 이거 차별 대우 아입니까.]

“시끄럽다.”

[히이잉.]

“하하… 아, 그렇지. 은공이시여, 제사장들이 싸 준 도시락이 있는데, 함께 드시겠습니까?”

나는 대족장의 외침을 두고 바싹 마른 입술을 오므렸다.

대삼림을 떠나면, 이 숲의 바깥으로 나가면. 나는 저런 뉘앙스의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위장 스킬의 페널티로 인해 도시나 마을에 오래 머무를 수도, 가도를 걸을 때 동행을 구할 수도 없는 내가, 저런 말을 또 한 번 마주할 수 있을까.

“아, 지금 먹자는 게 아니라… 은인께서 평소 식사하는 시간에 같이 먹자는 의미였습니다. 제사장에게 부탁해서 평소보다 많은 양을 싸 왔거든요. 정말 많이 싸 왔으니 모자라진 않을 겁니다… 아마도……?”

어렵겠지. 아주 어렵겠지.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그리고 그때의 저들이 아직 내게 베풀 정이 남아 있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니.

“…싫으십니까?”

하므로 결과가 이 꼴일 수밖에 없는 거다. 고달픈 길을 필연적으로 걸어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최대한 미루고라도 싶은 게 보편적인 심리인 법이니까.

“아니. 같이 먹지.”

나는 차마 웃지도 못한 채로 아이의 정수리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일대를 이끄는 존재에게 이래도 되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함부로 쓰다듬는 건 무례가 아닌가? 순간 든 생각이 내 손을 멈칫거리도록 했다.

툭. 애매하게 공간을 남기고 멈춰 선 손에 까치발을 든 아이의 정수리가 닿았다. 에쿠아가 대족장이란 지위는 벗어던진 채 평범한 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히이이잉.] 자신이 차별당했다고 생각하는 뱀 하나만 공연히 불만을 토하는 중이다.

“…아침은 언제 먹었지?”

그사이, 잠시 굳었던 내 손가락이 쓱쓱 머리를 쓰다듬었다. 멈출라치면 아이가 먼저 비비적거리는지라 먼저 떼기가 좀 그랬다.

“해가 막 뜰 즈음에 먹었습니다.”

그보다 참 일찍도 일어났네…….

나는 중천에 뜰락 말락 한 해를 힐끗 보았다. 참고로 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보니 빛이 눈을 찌르는 일은 없다.

“지금 먹지.”

“네!”

나는 아침을 좀 늦게 먹었지만… 내 직업은 육체파다. 다른 말로는 섭취 칼로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해서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식사할 준비를 했다. 아까부터 반쯤 패싱당한 산군이 왕삐짐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사과 하나 던져 주니 금방 풀렸다. 자기가 만든 사과란 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점심 도시락입니다.”

“…점심?”

“저녁 것도 따로 있습니다.”

아니… 내 물음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나는 큼지막한 도시락 일곱 개를 보며 반사적으로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족장이 조금 더 싸 달라고 부탁이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싸 줄 일인가……? 저 조그만 아이가 먹어 봤자 얼만큼 먹는다고?

“산군께서 맛 좀 보고 싶다 말하셔서.”

[진짜 먹을 생각은 없십니다. 저 코딱지만 한 걸로는 입가심도 안 되가.]

다행히 내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의문을 눈치챈 아이와 산군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둘러 해명했다. 그건 제법 설득력 있었다. 평균적 식사량을 가진 어른조차 하나 다 못 먹을 것 같은 크기의 도시락이지만, 저 덩치엔 못 비비지.

“이건 볶음밥이고, 이건 죽, 이건…….”

그사이 에쿠아가 도시락 뚜껑을 차례차례 개봉했다. 수프와 탕, 채소볶음, 볶음밥, 카레, 볶음면, 몇 개의 구이 요리 등 이곳에서만 쓰는 향신료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고기는 뺄 명분이 없어서 못 뺐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무슨 소리야. 한창 자라날 아이가 있으면 죽어도 고기 넣어야지. 내 호불호와 아이가 섭취해야 할 필수영양소를 붙이면 반드시 후자 승이다. 그들이 내 존재를 알고 있더라도 나는 넣으라 했을 거다.

“항상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자연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그보다 볶음밥이랑 리조또… 보기만 해도 침 고이네.

나는 한국 쌀보다는 안남미에 가까운 쌀 요리를 두고 숟가락을 들었다. 아이도 마침 기도를 다 올린 상태라, 주저할 필요 없었다. 근 몇 주간 혼자 지내며 쪼그라들었던 위장이 오랜만의 호사를 받아들였다.

날아갈 듯 가벼운 쌀이 혀 위를 먼저 구르고 고추 향이 물씬 풍기는 코코넛밀크 기반의 카레소스가 채소와 함께 입안에서 톡톡 터졌다.

위장 스킬을 연습하느라 빠져나간 피가 보충되는 기분이었다. 짱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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