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만약 (6)
간신히 산군을 떼어 낸 후, 나는 전달받은 보따리를 은신처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피가 조금 크긴 했으나 그러려니 넘겼다. 내가 주문하긴 했지만 이 물건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다.
스르륵.
“……!”
하나 풀어 헤친 보따리 천 사이로 머리카락 뭉치가 보인 순간, 나는 내 해이한 태도를 반성했다. 저급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에 괜히 숨이 멎었다.
“아… 깜짝아…….”
그리고 2초 후, 나는 늦지 않게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가발… 이지? 가발 맞지? 무의식적으로 동작 정지했던 몸에 천천히 힘이 돌아오고, 내 손이 멋쩍게 그것을 집었다. 가죽 대신 망에 머리카락을 올올이 심어 둔 것이 아무래도 가발이 맞는 듯했다.
아, 겁나 놀랐네. 나는 안도의 숨을 흘리며 그것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식물섬유나 양털이 아닌 진짜 사람 머리카락을 쓴 듯한 머릿결. 금처럼 반짝이진 않으나 부드러운 밀빛 색상. 어깨는 넘지만 날개뼈에는 안 닿는 미묘한 길이. 크게 굽이치는 대신 자잘하게 구불구불 곱아 펑퍼짐해 보이는 곱슬기까지.
전체적으로 무난무난한 느낌이었다. 평범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 진짜 머리는 비싸다 들었는데……?
나는 보따리에 실려 있던 것 때문인지 살짝 찌부가 된 가발을 요모조모 만져 보았다. 그때마다 손끝 사이로 흐트러지는 머리칼은 아무래도 인모가 맞는 것 같다. 샴푸와 린스가 만연한 현대보다야 푸석거리지만 그래도 부드럽고 찰랑거린다.
…근데 진짜 왜 들어 있는 거지? 나는 가발 주문 안 했는데? 내가 주문한 건 염색약인데?
나는 의아함을 품은 채 보따리를 더 휘적여 보았다. 데구루루. 돌돌 말아 둔 대나무 발과 염료를 담은 유리병 몇 개가 굴러 나왔다.
“……?”
유리병 안에 든 염료야말로 내가 주문한 염색약인 듯하다. 그런데 이 대나무 발은 또 뭘까.
나는 그것을 묶은 실을 풀고 내용을 확인했다. 약간의 삐뚤거림이 있지만 그래도 번듯한 글씨가 음각으로 이어진 게 보였다. 글씨를 이루고 있는 문자는 대삼림의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을 수 있는─시스템이 해석 가능한─바깥쪽 것이다.
⌈(전략) …부탁하신 것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반 염료는 효과가 좋지 않고, 마법 염료는 지속력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앞으로 있을 은공의 여정을 고려해, 주신 돈으로 다른 것을 구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구하신 게 아닐 수도 있으니 염색약도 몇 병 동봉… (중략) … 가발 구매로 저희가 의심받을 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탈모 제사장이 본인의 것을 구매하는 과정에 하나가 남아 얻어 온 것이니……. (후략)⌋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내 속이 은은한 감동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생각 없이 구매 대행만 해도 될 텐데, 내 앞일까지 고려해 더 나은 대체품을 구해 온다……? 심지어 꼬리가 잡힐 걸─이 기간에 가발을 구매했다는 이유로 딴지 걸려 올 수는 있으니까─고려해 마땅한 변명까지 준비했다?
똑똑하다 못해 현명한 일 처리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감격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불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염료가 비싸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 백만 갈을 넣어 놓긴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두 배, 아니 세 배를 집어넣었을 거라고.
“그간 돈 쓸 일 없었어서 망정이지…….”
지난 몇 달간 여관비니 식비니 기타 제반 비용을 내 스스로 부담하긴 했으나 그래 봤자다. 어느 도시에 복구하라고 쾌척한 비용에 비하면 그건 사소한 소비에 불과했다.
반면 비류호의 사체를 팔아 치우고 얻은 돈이나 베뮈르헨에서 일을 뛰며 번 돈의 합계는 내가 소비한 금액과 자릿수가 다른 상태니.
여기서 가발비를 추가로 치른다 해도 문제 생기진 않을 것이다. 나는 추가로 내줄 금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백만 갈이면 얼추 되려나?”
마음 같아선 정확히 얼마 들었는지 묻고 싶으나, 대족장이 그걸 말해 줄 리 없다. 해서 나는 멋대로 시세를 측정했다. 부디 이 금액이 대족장이 쓴 돈보다 많기를 빌 뿐이다.
사륵.
하면 가발값에 대한 생각은 이걸로 마치고. 나는 가발 착용 후 모습을 확인하고자 그것을 머리에 얹었다.
여기도 고정할 땐 핀을 쓰는구나. 대학 시절, 연극한답시고 몇 번 써 봤던 경험이 있어서인가 착용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망 안쪽 핀이 달칵 소리를 내며 진짜 머리카락과 망을 단단히 얽었다.
“…으음.”
괜찮나? 티 안 나나?
나는 졸지에 갈발인남캐가 돼 버린 내 모습을 두고 인상의 차이를 확인했다. 회&흑발 조합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표정을 풀고 있어서인지 느낌이 사뭇 다르긴 했다. 안대나 입가의 상처 그리고 미처 바꾸지 못한 눈썹 색상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이 나오면 바로 들킬 것 같긴 하다만.
“눈썹 색은 그렇다 쳐도 눈은 어떻게 안 되나…….”
눈썹과 속눈썹이야 염료를 쓰면 어떻게 커버가 되긴 할 것이다. 머리카락 전체라면 몰라, 눈썹과 속눈썹 정도면 염료가 많이 들지도 않을 테고, 조금 얼룩덜룩해진대도 티가 많이 안 날 테니까.
그러나 눈은 다르다. 머리색과 눈색, 장애 요소는 사람의 인상착의 중 유난히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안대도 오드아이도 너무 눈에 띄는데.”
안대를 벗자니 오드아이고, 쓰자니 눈에 띈다. 그나마 사람들의 오해와 다르게 내 오른쪽 눈은 완전히 먼 게 아니지만… 그 점을 이용해 오른쪽 안대를 벗고 왼쪽 안대를 끼는 식의 장난을 칠 수는 있겠지만…….
그 얄팍한 혼동이 어디까지 가겠나. 역시 가장 좋은 건 눈 색을 바꾸는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템이 있을지 한번 고민해 보며 입가의 상처를 더듬었다. 설정 짤 때는 재밌었는데 정체를 숨겨야 할 때가 되니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눈도 그렇고, 입가의 상처도 그렇고. 이걸 어떻게 가려야 잘 가렸다고 칭찬을 듣지?
“…상처를 더 낼까?”
분을 쓰기엔 내가 화장 기술이 별로 좋질 못해서. 차라리 화상 자국 같은 걸로 덮어 버리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이제 문제는 그 상태로 걸리거든 도망 다닐 때 더 난처해진다는 점과 지금껏 이 육신에 흉터 남는 꼴을 본 적이 없단 것이지만.
“…….”
결국, 나는 돌아다니는 내내 이런 불안감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 건가? CCTV도 없는 세계에서조차 정체를 숨기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현대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인 척하는 사람들은 무슨 배짱이었을까?
나는 산 넘어 산뿐인 상황에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마기를 숨길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은 어디로 가고 다시 막막함만 차올랐다.
“…일단, 왼쪽 안대랑 옷을 사자.”
그래도 이것 하난 확실했다. 이 고개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나는 보다 편하게 정보를 모을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애써 희망찬 미래를 그렸다.
* * *
【그 많고 많은 물건 중 하나만 쏙 잃어버리는 것이 말이 됩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말 대신 제대로 된 변명을 내놓으란 말입니다, 변명을!!】
에쿠아는 그와 산군이 은인에게 가발 하나 구해 주겠다고 나서며 벌어진 소동을 지켜보았다.
【바깥에서 사 온 물자가 몇 개고 그것을 호위하기 위해 붙은 인원이 몇인데 거기서 가발만 쏙 빠지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요!】
【저희도 영문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호송대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네?!】
대머리 제사장이 실망을 금치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이나, 이번 물자 호송을 맡았던 전사장이 궁쥐에 몰려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 모습이나.
보기 썩 나쁜 광경은 아니었다. 대머리 제사장은 그가 대족장이 된 후에도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서 온갖 꼬장을 부리던 사람이고, 호송을 맡았던 전사장은 그 제사장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심복이었으니까.
【자, 자. 진정들 하시지요.】
물론 약간… 아주 약간 불쌍하단 감상은 들긴 한다.
아무렴 저 전사장이 어디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가발을 잃어버렸겠는가?
단지 그는 상대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이쪽에서 가발을 훔쳐 오라 보낸 건 무려 산군─나나나나나. 내가 할란다. 내가 할래. 나 그거 로망이다 아이가─이었으니까.
하니 이번 호송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분명 가발만큼은 잃어버리게 되었으리라. 뭐,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저 전사장을 호송 책임자로 임명한 건 바로 에쿠아 자신이었지만.
【다른 물건들엔 아무 이상이 없건만, 가발만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사람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것을 숲이 경멸한다든가 하는…….】
【그것이 말이 됩니까?! 차라리 외부 물건을 전부 경멸한다고 하시지요!】
【다른 물건들은 안 사라졌잖습니까.】
그러게 누가 이 시기에 가발을 사래? 평상시처럼 바깥과의 교류는 안 된다, 숲이 노할 거다, 절대 안 된다 하며 아무것도 안 샀으면 이렇게 피해 볼 일도 없었을 텐데.
【그, 그럼 호송대가 빼돌린 건 아니겠습니까!? 호송대의 인원들을 조사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건 모함입니다!】
【흐음…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은데…….】
에쿠아는 그런 연유에서 이 사건이야말로 숲이 그를 가호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암, 가발 하나로 은인도 돕고, 보수 세력 간에 분열도 일으키고, 심지어 금전적 손해까지 입혔으니─듣자 하니 가산을 엄청나게 썼다던데─이것이 숲의 가호가 아니면 뭐가 가호겠는가?
[대족장아! 큰일 났다!!]
【…산군이시여?】
한데 회의─보단 문초를 위한 모임에 가깝겠지만─가 지속되던 무렵, 산군이 머리를 슉 내밀었다. 무려 산군의 입에서 튀어나온 ‘큰일’에 제사장들이 가장 먼저 혼비백산해 했다. 가발 증발 사건 따위는 순식간에 뇌리에서 잊힌 모양이다.
【산군이시여, 저희가……!】
[아, 고건 아니고. 대족장만 오면 된다.]
【산군이시여, 어찌 대족장만 데려가십니까! 저희도!!】
[내가 안 된다 카믄 안 되는 거다. 아니면 니 뭐 되나. 지금 제사장이 말대꾸하는 긴가.]
하나 산군의 몇 마디에 제사장들은 다시 찌그러져야만 했다. 대족장은 회의를 내일로 미룬 채 홀가분한 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나갈 때 보니 대머리 제사장과 전사장이 머리채 잡고 싸울 듯하여─아, 이러면 한쪽이 절대로 못 잡을 테니 멱살 잡고로 정정해야 할까?─무언가 기분이 좋았다.
【어찌 부르셨습니까?】
[기사님이 가신단다. 이거 어캐 해야 되겠나.]
별도로 산군이 제사장들을 모조리 떨어트린 점에서 검은천둥뱀의 일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벌써 때가 됐나.
에쿠아는 뭐만 하면 가려는 이를 두고 생각에 잠겼다. 안타깝게도 이번엔 잡을 만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무엇으로 그분을 더 잡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분을 이곳에 머무르게 할 명분은 이미 끝이 난 듯한데.”
악마기사의 사정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나 그가 대삼림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마음 편히 쉴 수 없게 되리란 것은 알겠다. 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보내드려야만 하는 기가…….]
“어쩔 수 없지요. 그분의 앞날이 평탄하길 기도하는 수밖에는.”
에쿠아는 혹시 모를 귀를 대비해 달리한 언어를 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분과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눴는데, 벌써 보내야 하다니.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과 별개로 속상한 건 그도 매한가지였다. 역시 잡을 수 있다면 잡고 싶다.
[기도캐도 내는 못 이뤄 준다…….]
“그것도 그렇군요.”
와중에 기도를 두고 산군이 툴툴거렸다. 대삼림의 신앙은 산군이 중심이나 산군에게 그런 권위적인 능력이 있는 건 아니므로 나오는 말이었다.
산군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내리고 에쿠아는 도리어 올렸다.
[하믄 조상님에게……?]
[나도 기도 들어주는 능력은 없어. 창조주라면 몰라도.]
그러다 잠깐. 요 며칠 힘을 회복하며 혼자의 힘으로도 허공을 유영할 수 있게 된 육귀가 끼어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뭐, 그분은 능력이 있어도 들어줄 분이 아니다만…….]
[잉?]
“…창조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육귀의 난입이 아니다. 육귀의 발언이지.
산군과 에쿠아의 고개가 들렸다. 창조주. 그건 바깥에서 득세하고 있는 신전의 교리에서나 나오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