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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56화 (256/389)

256화 만약 (4)

하.

기사의 가슴팍에 칼날이 꽂히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에 맞춰 흔들리는 백발은 그의 새까만 옷과 대비되어 더욱 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감히 목숨으로 날 협박해?

그는 하늘로부터 떨어져,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 붉은 액체들을 보며 어금니를 지르물었다.

감히, 나를?

이것이 다 차오르면 이 육신은 죽겠지. 죽어 바스라지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계약으로 인해 묶인 그의 영혼도 비슷한 처지가 되어 오랜 시간을 헐떡거리게 될 테다. 망가지고 부서져, 그 실금이 메워질 때까지 비참하게 바닥을 기게 될 거란 말이다.

빌어먹을 간나 새끼가…….

그건 싫다. 그것만은 싫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제가 육신을 빼앗길 적의 무력감을 떠올렸다. 영혼이 박살 나는 건 그에 비견될 충격일 터, 그런 건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이 결벽적으로 몸을 감싼 옷소매를 또 한 번 당겼다.

쾅!

동시에 그의 발이 심상의 대지를 내려쳤다. 아래쪽에 고이기 시작하던 액체들이 붕 떠오르며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죽음은 결코 이 육신을 씹을 수 없을 것이다.

「의미 없는 짓이야.」

그때, 심상의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가 말했다. 몇년의 세월에 걸쳐 쪼그라든 영혼은 외양과 다르게 낡고 지친 목소리만을 겨우 낸다.

누가 그걸 정하지?

하나 알 바 아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동정 대신 짜증을, 긍정 대신 분노를 내뱉었다. 사실 저 말이 맞다. 이대론 그가 진다. 그런 심정은 꼭꼭 가려져 단 한 점도 바깥에 공개되지 않는 채다.

기만과 거짓. 그것은 그가 움켜쥔 첫 번째 찬사였다.

「…네가 졌어.」

그러니까, 그걸 누가 정하느냔 말이다.

동시에 그는 미묘하게 느린 상대의 말소리로부터 숨겨진 진실을 캐냈다.

미련한 것. 본인의 승리조차 확신하지 못하는군. 그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있어 꽤 좋은 소식이었다.

좋아. 잘만 이용하면 손쓸 도리 없이 죽어야만 하는 미래도, 망할 그레트헨에게 그의 약점을 잡혀 번번이 이용당하는 결말도 어떻게든 피할 수 있겠어.

끅끅끅. 소리를 뱉지 않고 도리어 삼키는 형태의 웃음이 텅 빈 세계에 울려 퍼졌다. 상대가 움찔거리며 그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었다.

꼬마야, 혹시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죽게 될 거라고,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가게 될 거라고?

「…넌 그를 살릴 수 없어.」

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좀더 몰아붙이면 되겠군. 메피스토펠레스는 그것을 확신하며 대충 의자를 형상화했다.

무너지고 재생되길 반복하는 옥좌가 곧 생겨났다.

정말로?

「…그래.」

거짓말.

그는 나긋한 몸짓으로 그 의자에 걸터앉았다. 망토처럼 길게 늘어졌던 두루마기가 접히며 무릎께까지 당겨 올라가고, 바짓단에 가려진 가는 발목이 드러났다.

맨살이라곤 보이지 않으나, 까닥거리는 발은 여유가 가장된 것인지 진실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한다. 메피스토의 패를 읽어 내지 못한 상대가 또다시 몸을 굳혔다.

이 싸움이 지속된다면 오래가지 않아 패배할 건 그인데, 그걸 모르고 불안해하는 꼴이라니. 멍청하긴.

메피스토는 그 꼬라지를 속으로 비웃었다.

너도 이미 알잖아. 그레트헨은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는걸.

「…….」

하나 이리 멍청한 상대기에 사기를 칠 수 있는 거다.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게… 내가 진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렇지?

「……!」

모든 힘을 끌어 쓸 수 있다면 몰라, 대부분의 힘이 계약에 묶인 지금. 심장 구멍을 메꾸긴커녕 흐르는 피와 부족한 산소를 보충하는 데만도 급급한 수준이란 걸 상대가 몰라서.

그 대삼림에서조차 주위의 인간들이 해 준 후속 조치가 아니었다면 살리는 건 실패했을 거란 사실을 알지 못해서.

무지의 은폐가 덜어짐으로써 개입할 여지가 늘긴 했지만, 그건 그저 30분 버틸 거 1시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불과하단 걸 모르기에!

그래서 이리 기만할 수 있는 거란 말이다.

메피스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또다시 웃음소리를 삼키듯 흘렸다.

자, 그러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자고. 끝없이 이어질 이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이길 사람은 대체 누굴까? 죽을 때까지 스스로의 심장을 찔러야 할 저 녀석? 아니면 녀석이 포기할 때까지 그 심장을 회복시켜야 할 나?

「…네놈.」

과연 누가 더 버티기 힘들지?

「……!」

자, 그러면 이 어리석고 무지한 것을 요리해 먹어야겠지. 메피스토는 그런 생각과 함께 노래하듯 속삭였다.

물론 너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좀 오래 걸려도 죽기만 한다면 저분께 더 이득일 거야. 저분도 잠깐 괴롭고 집에 가는 걸 더 바라실 거야……. 그런데 정말 그럴까? 스스로의 심장을 여러 번 찌른 사람이 돌아가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리란 보장이 있어?

「…큿!」

아아, 가엾고, 불쌍한 그레트헨. 어쩌다 이다지도 잔인하고 냉혹한 자에게 걸렸을까.

「…닥쳐.」

어쩌다… 스스로 목을 매도 말리는 사람 돕는 사람 하나 없는 처지까지 내몰렸을까.

「닥쳐!」

하하, 꼬맹아. 스스로의 혐오감을 남에게 풀어내면 안 되지……. 이건 순수히 네가 한 선택이라고?

정말이지, 살살 긁자마자 튀어 오르는 게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자… 결단을 내리지 그래. 방치하는 것으로 도박을 할지, 혹은 그의 고통을 덜어 줄지…….

이래서 어리고 미숙한 것들은 안 돼. 메피스토펠레스는 입술을 매끄럽게 올리며 답을 기다렸다. 찰박찰박.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발버둥 친 결과, 붉은 물은 이제 발목을 건드리고 있다.

「…조건이 있어.」

…이런.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그레트헨을 천대할 줄 몰랐는데.

「받아들이기 싫으면 말아. 누가 먼저 지치는지 보면 되니까.」

…….

하지만 이조차 30, 40분쯤 지나면 티나게 불어나겠지. 그 전까진 저 망할 애송이를 구슬려, 힘을 쓸 권리를 얻어야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한 채 ‘들어 주는 척’했다.

「돌려줘. 육귀가 마땅히 가졌어야할 그 힘.」

빌어 처먹을 꼬맹이가 선을 넘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장갑에 가려진 손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러지 않고서는 허락하지 않겠어.」

들켰나? 들킨 건가? 메피스토펠레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니, 녀석도 확신은 없다. 없지만….…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말했잖아. 싫다면 거절하면 돼.」

저쪽도 수십 일 내내 자해를 시도해야 될지도 모를 그레트헨의 처우와 차후 자신이 육귀의 힘을 가지고 벌일 수 있는 일을 저울질해 냅다 질러 보았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었다.

체결하지.

「좋아.」

메피스토펠레스의 옷깃 끝에서 불꽃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

육귀는 차분한 표정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찌른 자를 가만 응시했다.

딱히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힘이 없어서,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묵묵히 있을 뿐.

[…지금이라도 부를까.]

아니다. 사실 하나 정도는 방법이 있었다. 아무렴, 그가 능력이 없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러란 법은 없지 않은가.

더불어 그에겐 지금 당장이라도 산군에게 이 현장을 전달할 능력이 있었다. 그저 바라면 됐다. 산군을 인지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말을 전하는 것 따위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즉, 이 미친 행위에 진실로 개입하고자 한다면 육귀는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말년에 이딴 거나 보고 있어야겠니, 정말…….]

동시에 그럴 수 없었다. 서글프게도, 육귀에겐 근본적으로 기사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도 되노라 설득할 힘이,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해야만 하는 모순을 해결할 힘이 그에겐 없단 이야기다.

하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대안도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건 옳지 않다’라고 하는 건 또 하나의 가해일 뿐이다. 그는 저 기사의 도박을 막을 자격이 없다.

[…산군아.]

[예?]

[이따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먹을 것 좀 더 구해 와라. 기력 회복에 좋은 걸로다가.]

[오. 알겠십니다.]

또한, 이 미친 모습을 후손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육귀는 자신의 선택이 진정 옳을지 고민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되르푸마인에 살고 있는 다니엘 이단심문관인가…….]

와중에 그는 기사가 남긴 부탁을 기억하려고도 노력했다. 이 시도가 기사의 소망대로 이뤄진다면 다행이나, 아닐 가능성도 없진 않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부탁마저 들어주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죽는 날까지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었다.

[되르푸마인… 다니엘 이단심문관… 되르… 아오 인간들은 왜 이렇게 혀 꼬이는 발음을 쓰는 거야?]

그런데… 잊지 않고자 곱씹는 과정에서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맥락상 되르푸마인은 도시 명칭일 테고, 다니엘은 사람 이름인 듯한데… 대체 무슨 사이길래 시신을 전해 주라고 한 걸까? 뭐, 본 육신의 친지라도 되는 존재인가? 그렇지만 이단심문관이면 신전 소속일 터. 친지라고 해도 신전 사람이 마기로 물든 이의 시신을 대우해 줄까?

[…참 나.]

모르겠다. 보내 달라면 보내 주는 거지. 그리고 아직 죽은 것도 아니고.

육귀는 그리 뇌까리며 우울한 태도로 몸을 좀 더 웅크렸다. 5분. 10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또각또각 흘러갔다.

[하.]

그리고 기사의 심장에 상처가 새겨진 지 딱 20분이 흘렀을 때, 심장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묾과 동시에 기사가 눈을 떴다.

쓰러지기 전만 해도 약간의 음울함과 얄팍한 희망, 체념 따위로 물들어 있던 눈은 분노로 천천히 달궈지는 중이다.

[인간 따위가.]

단순히,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에 화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불씨의 근본 자체가 다른 화. 세상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어 하는 지독한 염.

[감히 나를 능멸해……?]

[…미친.]

인간의 도시에서 봤던 그 빌어먹을 불꽃.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그러나 그것은 갇혀 있었다. 불을 잡을 수 있는 사슬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리 없음에도 그것은 쇠사슬에 묶여 억압받는 중이었다.

그것이 육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뭐, 뭐래. 갑자기 왜 깨어나서 지랄이야?]

육귀는 느껴지는 힘의 격차에 미묘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목과 다리에는 힘을 주었다. 아무렴, 구속된 맹수에게까지 겁을 먹어 움츠리는 건 그의 영혼에 새겨진 세월이 용납하지 않았다.

우뚝.

회적색으로 물든 왼쪽 눈이 그를 정확히 응시했다.

[이름을 건 거래를 하자, 퀴퀴한 짐승아.]

[…이 미친 악마 새끼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뭔 소리야.]

혹시 이렇게 될 걸 알고 그 기사는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 걸까? 근데 이걸 알았으면 도리어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강제되고 있다지만 악마를 이 숲에 풀어 버리는 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 아니냐고!

[네게 손해는 아닐 거다.]

육귀가 온갖 상상을 하며 울부짖는 동안, 깨어난 악마는 손가락을 튕겼다. 근처에 고이 세워 두었던 투헨더가 그 신호에 맞춰 슬라임처럼 녹아내렸다.

쩌억. 바닥에 고인 하얀 그림자가 입을 쩍 벌린 건 그다음 일이었다.

[그건…….]

차원의 경계에서 졸고 또 졸아, 순수한 힘만이 남은 것이 흰 그림자의 입구멍 사이로 쑥 튀어나왔다.

육귀의 눈이 부릅 뜨였다. 저건 그의 힘이었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이 인간이 잠든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침묵하고, 동시에 이 인간이 어떤 말을 하거든 그것에 동조해 주면 된다.]

그사이, 악마는 단검을 갈무리하고 건틀릿을 벗으며 조곤조곤 고했다. 신경질적인 말투는 그것이 이 행위를 얼마나 탐탁잖아 하는지 알려 준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못 믿겠는데.]

하나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육귀는 경계를 멈추지 않은 채 악마를 노려보았다. 짓이겨진 연꽃처럼, 물 빠진 분홍색 천처럼 흐린 색감의 회적색이 잇따라 그를 직시했다.

뚝, 뚝. 검은 불꽃이 그것의 옷자락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네 믿음이 중요할 것 같나?]

저 새끼, 눈이 돌아 버렸는데. 육귀는 으르렁대는 악마를 두고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화르르륵.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악마가 손끝에 불꽃을 모았다. 곧 생성된 건 하나의 계약서였다.

[중요한 건 상호 간의 신뢰가 아니야. 이 거래로 하여금 서로가 얻을 것들이지.]

오래된 마법이 주관하는 계약은 글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고, 눈이 먼 자도 볼 수 있다. 그런 특징 덕에 육귀는 내밀어진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 악마가 말한 것들이 보다 세밀하게, 허점을 노릴 수 없도록 상세히 풀어 적혀 있었다.

특별한 독소 조항은 없었다.

[…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네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하여간 저 몸뚱이에 든 놈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어. 육귀는 악마의 말을 두고 눈을 가늘게 접었다.

[선택해.]

본래 그의 것이었던, 그러나 약탈당한 힘의 구슬이 악마의 손아귀 안에서 데굴 굴렀다.

[…받아들이겠어.]

이 거래의 의미는 모르겠으나, 이 가엾은 자가 또 하나의 단서를 잃어버릴 거란 확신은 든다.

하나 어쩌겠는가? 그는 기사에게 분명 말했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우군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스스로뿐이라고. 당장은 아군인 것 같은 이들도 언제 너의 뒤통수를 때릴지 모른다고.

[좋아.]

[…….]

하므로 육귀는… 기사보다 그에게 좀 더 이익이 될 선택을 골랐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구슬이 그의 앞에 떨어지고 악마가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졌다.

[…악마 새끼들이랑 엮여서 끝맛이 좋은 적이 없다니까, 정말.]

육귀는 제 것이었던 힘을 입으로 물어다 껍질 안으로 날랐다. 쪼그라든 그릇으로 이 힘을 섭취했다간 몸이 터져 나갈 게 분명하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흡수할 요량이었다.

[어휴.]

물론 그러는 내내 이 기사가 눈에 밟히겠지. 빌어먹게도.

[나를 탓해라…….]

하지만… 하지만…….

하. 육귀는 한탄과 함께 속으로 변명을 주절거리는 일조차 포기했다. 대신 기사가 눈뜨는 것을 기다렸다.

한참 뒤 회색빛을 되찾은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살금 튀어나왔다.

“…제가 언제 쓰러졌습니까?”

그러면서 묻는 말은 차마 답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계약으로든, 그냥 지금 심정으로든.

[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하나 그 기사는 자신이 기절한 것을 두고 오래 연연해하지 않았다.

…뭐지? 무어라 말도 못한 채 뻐금거리던 육귀가 이상함을 느낀 건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미숙해서.”

그렇지만 그 기사는 그에게 사고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으니.

“이젠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악마가 건틀릿을 벗겨 두고 간 오른손이 시선에 맞춰 들어 올려졌다. 흘러내린 붕대 사이, 드러난 까만 살갗에는 마기가 가득하다.

“어떻습니까? 마기가 가려졌습니까?”

아니, 가득했다.

그것이 다른 곳의 피부처럼 허여멀겋게 변하기 전까진.

“제가 성공한 게 맞습니까?”

육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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