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만약 (3)
“…이러니까 신전이 발작하며 죽이려 들지.”
[뭐라고?]
“아닙니다.”
됐다, 이미 지난 일 가지고 허탈해하는 것도 의미 없고. 알았다 해도 도망 안 가거나 하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넘기며 조용히 질문했다.
“동족을 제물로 바치는 게 가능하다면, 그 놈들은 왜 서로를 내버려 두는지 궁금하군요.”
[그거야 뭐어… 인간도 상대를 죽이면 그 사람 소유의 재물을 얻을 수 있고 그 사실을 알지만 굳이 죽이진 않잖아? 그런 맥락 아닐까?]
“…그건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규범이 존재해서라고 생각합니다만. 악마에게도 질서 유지를 위한 법률이나 관습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동의하여 제정한 사회적 기준은 나도 없을 거라 생각해. 그렇지만 그쪽은 그게 있잖아?]
스스로를 쐐기 삼았다지만, 차원과 차원을 잇는 데 성공한 미친 왕이.
[그런 놈이 동족상잔을 금지시켰다면 다들 따라야지.]
“그런 논리입니까…….”
나는 악마들을 불러 놓고 ‘서로 싸움 금지’를 공표하는 사탄을 상상해 보았다. 이건 좀 웃겼다.
[각설하고 몸 원주인이 마기를 숨김 채 다닌 건 여전히 의문이네. 5년 내내 제물용 시신을 긁어모은 걸로 보아 계약은 그 이전에 이뤄진 것 같은데… 그게 되나? 악마와 계약을 해 놓고 마기는 숨기고 다닌다고? 그게 됐으면 악마계약자들은 진즉에 살판 났을 텐데?]
그렇지만 그것을 두고 웃자니 내 현실이 너무 각박한지라.
우리는 샛길로 새던 화제를 원주제로 돌렸다. 여전히 답이랄 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악마 스스로가 숨겼나?]
“잘 못 들었습니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인간 혼자서 마기를 감추는 건 거의 불가능해. 하지만 악마가 스스로 마기를 숨기고자 했다면…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래. 악마가 직접 마기를 숨기면 말이 달라져!]
육귀가 말을 잇다 말고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퍼득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그래 이거네! 이게 답이네!]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진정 좀 하고 해설을 해 봐라. 그걸 에둘러 말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 악마가 협조해서 얻을 이익이 있나?]
“…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만.”
[아, 아 미안.]
그래도 한 번 더 직접적으로 말하니, 그땐 먹혔다. 사과한 육귀가 위풍당당하게 들었던 고개를 내리곤 지느러미로 이끼를 툭툭 쳤다.
[대악마쯤 되면 신체 구성을 바꾼다고 해서 부작용에 시달리진 않아.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것처럼 신체가 기형으로 변하거나 마기의 복원성으로 인해 고통받을 일은 없다 이거지. 마기는 애초에 그들의 것이니까.]
물론 외부 공격에 취약해지고 오래 지속할수록 반작용으로 내상을 입게 되는 둥 부작용이 아예 없진 않다며 육귀는 말을 덧붙였다.
[해서 악마가 직접 나섰다면 마기를 감추는 것도 영 불가능하진 않아. 다만…….]
“그에게 나설 이유가 있느냐 이거로군요.”
[그거지.]
나는 그가 제시한 의문을 두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까지 오니, 어딘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단 제 몸의 원주인과 악마의 계약은 5년도 전에 이뤄졌습니다. 맞습니까?”
[계약을 한 게 아니고서야 제물 모을 생각을 할 리는 없을 테니… 아마도 그렇겠지?]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모은 제물로 하여금 저를 데려왔습니다. 여기까지가 확실한 진실이죠.”
[그렇지?]
“…왜 그랬을까요?”
[……?]
“왜 하필 나였냐고 한탄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그건 그놈들에게 물을 일이니까. 단지 지금 제가 말하고픈 건… 왜 그들끼리 일을 결론짓지 않고 저라는 타인을 데려왔느냔 겁니다.”
계약이란 건 결국 당사자 간의 협의다. 그리고 협의는 보통 타협과 교섭을 통해 이뤄진다. 즉, 그들은 서로의 동의 끝에 ‘제3자를 데려온다’라는 결정을 내렸단 말이다.
“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기엔, 저는 어떤 지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애당초 이 몸에 들어오게 된 이유조차도 듣지 못했죠.”
메인스토리야 내가 행동하고 나서 떴으니 지시라고 보기엔 좀 어려운 감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건… 이곳이 현실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용도에 가깝지. 내가 정말 사탄을 죽이길 바랐다면 대놓고 사탄 죽이기란 메인퀘스트를 띄웠을 테니까.
“반면 저는 생존에 쓸 만한 몇 가지 편의는 받았습니다. 예컨대 보이는 것 이상의 물건이 들어가는 가방이나, 망가지지 않는 장비 같은.”
설명하기 어려워 말은 안 하지만, 상태창이나 스킬 같은 것도 그렇다. 그건 이 세상을 게임이라 속이는 수단임과 동시에, 명백히 나의 생존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도움이었다.
하면 이것은… 어쩌면 이것 자체로 의미 있는 단서이진 않을까?
[하지만 네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이득을 산출할 수 있지?]
나는 파고 들어가던 땅에 무언가 묻혀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막고 있는 돌덩이들을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했다. 이 모든 돌들을 치우고 나면 답이 보일까? 얄팍한 희망이 내 입술을 멋대로 움직였다.
“일단 제가 악마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악마에 대한 억제제가 될 테니… 인간 쪽은 이걸 노린 걸지도 모르죠. 베뮈르헨의 사태로 대충 아시겠지만, 날뛰었을 때의 여파가 너무 크잖습니까.”
[너무 짜 맞추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야. 계속해 봐.]
짜 맞춘다? 아니. 이건 아마 정답일 것이다. 나는 이젠 희미해진 오프닝 영상을 떠올렸다. 그것마저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악마 쪽은…….”
그에 반해, 악마 쪽은 달리 감 잡을 만한 게 없다. 제3자에게 신체 제어권을 넘겨주고, 본인은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뭐, 내 특수성─무지의 은폐─을 통한 가림막?
그런데 그거 완전히 안 가려지는 바람에 온갖 오해도 받고 별 사달도 나고 다 했잖아. 도리어 내가 악마 취급을 받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도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전전긍긍 지켜봐야만 하는 게 그네들 입장이고.
이거 과연 이득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득이 있긴 할 겁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데 이런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또 협조했을 리는 없으니.”
[그건 그렇지?]
“다만 그 내용이 문제인데…….”
나는 악마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알아내고자 머리를 쥐어짜다가, 문득 원안을 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이득을 산출한다면…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잘못 생각했습니다.”
[……?]
“악마가 저로 하여금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흰바람과 같이 연구했던, 내 끈질긴 목숨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내 생존을 유리하게 만드는 온갖 편의도 사색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손해 볼지가 중요한 것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죽으면 너희가 곤란해질 수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만일 제가 죽는다면.”
[어, 어?]
하면 이것으로 거래를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시신은 되르푸마인에 살고 있을 다니엘 이단심문관께 보내 주십시오.”
나는 단검을 잡았다.
* * *
베르세르크는 거북이가 주고 간 금속조각을 매만졌다. 거북이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계로 눈치껏 감사 인사겠거니 하며 받아들이긴 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차가워.”
하나 지식이 없다고 해서 물건의 가치까지 못 알아볼 이유는 없다. 이 금속조각이 결코 가시지 않는 냉기와 바람을 두르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 금속은 마치 그녀의 고향, 결코 녹지 않는 그 빙하의 대지를 형상화한 것만 같다.
“…흠.”
그러고 보니 고향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 그녀는 오랜만에 떠올린 추억을 두고 눈을 느릿하게 내리떴다.
그녀가 살 적에는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 결코 변하지 않던 것이 그 설원이었다.
하면 그곳은 지금도 맹렬한 추위와 널리고 널린 죽음과 서서히 다가오는 몰락으로 가득할까? 살기 위해 죽는 전사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의미 없는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나?
약자들은 도태되고 강자들은 꺾여 부러지며 끝없이 피가 흐르는, 그럼에도 오직 희기만 한 그 땅은 여전히.
『…빙하의 시련을 스무 번 통과할 것. 그것이 우리가 네게 내린 형벌이었지. 그리고 넌 그것을 훌륭히 통과했다. 넌 이제 자유다.』
여전히.
『떠난다고? 뭐, 그래. 더 이상 너를 옭아매는 것은 없으니 원한다면 그래도 되긴 하지. 막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으니까.』
여전히 그녀의 자매를 품고 있을까.
『하지만 명심해. 죽는 것에 실패한다면, 너는 분명 돌아오게 될 거다. 갈수록 땅이 마르고 사냥감이 줄어듦에도 우리가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너 역시 결국은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될 거야.』
베르세르크는 들고 있을수록 도리어 차가워지는 금속을 강하게 쥐었다.
“노르다 전사들에겐 주박이 걸려 있다더니.”
현명한 비르기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녀의 자매가 그곳에 묻혀 있는 한 베르세르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의 도피는 언젠가 끝이 날 수밖에 없음을.
“그 말이 맞았군.”
그러나 그것에 괜한 반항심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기 싫다며 고개 저어 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힘겨워지는 건 되레 이쪽임을 깨달은 이후기에 당연했다.
“그 말이 맞았어.”
하니 남은 선택지라곤 단 하나.
이제 돌아갈 때가 됐다.
베르세르크는 몸을 일으켰다. 남쪽을 전전해 가며 갈구하던 이유를 잃어버린 가슴에 냉기가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 * *
칼날로 스스로를 찌르기 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이란 걸 해 보았다.
예컨대 죽음의 위기에 처하거든 악마가 다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내 예상과 다르게 이 육신의 생사가 저들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 만약 내가 정말 죽어 버리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의문 등.
대부분이 그런 것들이었다.
[잠, 야, 어!]
그러나 이미 풀 끝에 앉은 새 몸,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내겐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악마가 이 몸을 장악하는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아무렴, 지금까지의 전적을 돌아보거든 악마가 이 몸을 장악하는 데는 몇 가지 제한이 있는 게 분명했다.
예를 들어 격노가 켜지고 광기 게이지가 다 차야 한다든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에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출격이 가능하다든가. 뭐, 그런 제한이 있어 보인단 말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안 될 것 같은 상황’은 내 목숨을 기준선 삼지 않는다. 내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적이 그렇게나 많음에도 악마가 등장한 전적은 단 두 번에 불과하니 이는 당연한 판단이다.
하면 악마는 언제 강림하는가.
그건 단순히 내 목숨만 걸린 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렸을 때. 그들을 구하고자 진짜 악마기사가 악마와 타협하여 대신 내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베뮈르헨에서 채증한 단서─솔직히 악마가 인간을, 용사를 구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강제된 게 아니고서야─들만 해도 거의 확실한 부분이었다.
“방금 한 부탁만 부디 지켜 주십시오.”
각설하고 그런 이유에서 이 도박은 그렇게까지 손해가 아니다. 내 죽음조차도 그렇다.
죽으면 귀환되는 게 가장 베스트긴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 채 죽는대도 뭐… 그게 그거 아닐까? 어차피 마기를 숨기지 못하면 평생 쫓기고 적대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난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그럴 바에야 희망이라도 붙들고 죽는 게 낫지.
[넌 진짜…….]
“죄송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이런 수단까지 동원하는 건 결코 과한 게 아니다.
『…다신 하지 마십쇼.』
미안해. 영영 닿지 않을 사과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