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만약 (2)
[기사니이이이임, 이것 좀 보세요. 대족장이 지한테 줬십니다.]
[밥은 먹으면서 하는 거냐? 안 그래도 짧은 수명, 그렇게 굶으면서 하면 진짜 훅 간다.]
현실 도피를 위해 눈 감았다가 그대로 밤까지 자 버린 썰 푼다.
[완전 이쁘지 않습니까. 히히.]
[식량도 받아 갔다는 애가 왜 반쪽이 됐어.]
나는 낮잠을 너무 오래 자서 생긴 두통을 두고 잠시 관자놀이 지압을 했다. 와중에 들린 육귀의 말은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 같아서 웃겼다. 우리 안 본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반쪽은 무슨 반쪽.
“…제가 분명 접촉을 줄이자고 건의하지 않았습니까.”
별개로 얘네는 왜 왔을까. 평상시 둥지에만 있다던 산군이 뺀질나게 외출해 봐야 의심만 살 뿐이다, 대충 그런 논리로 가능한 만나지 말자고 한 게 나흘 전이었는데…….
[아, 괜찮십니다. 다들 대륙 횡단 한 번 해가 바람 든 게 아닌가 여기고 있덥니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나.
하긴, 한평생 숲에만 살던 애가 바깥 바람 좀 쐬고 산책광 되는 루트가 겉보기에 부자연스럽진 않지. 그런 연유에서 늪의 제사장들이 오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싶고.
다만 덕분에 나는 산군의 방문을 거절할 사유가 증발했다. 나는 미묘하게 눈썹을 구겼다.
[저녁은 챙겨먹었고?]
점심도 쌩까고 잤는데 먹었을 리가… 가 진실이나, 그런 걸 전부 보고하는 사람은 하수다.
“안 그래도 먹을 참이었습니다.”
나는 침도 바르지 않은 채 거짓을 늘어놓았다. 오늘 받아 온 식량에 뭐가 있더라. 손은 벌써 인벤토리로 들어가 안쪽을 뒤적이는 중이다.
[그건 불 못 피우는 낮에 먹지?]
다만 그 행위는 육귀의 한마디로 저지되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오늘은 구름도 가득이니까 괜찮잖아.]
참고로 저 말의 근원을 찾으려면 이틀 전 낮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나는 그때 보존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고, 그걸 본 육귀는 ‘왜 요리해 먹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하나 그 자리에서 누가 ‘불도 못 피우고 요리도 못해서요.’라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컨셉을 떠나서 본체 자존심도 그건 용납 못 한다.
해서 나는 머리를 짜낸 끝에 ‘낮에 불을 피우거든 연기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라고 설득을─틀린 논리도 아니었다─했고…….
[너 생선은 먹는다며. 쟤가 생선 잡아 왔어.]
[히히히히.]
그 결과가 이거였다. 나는 사면초가의 사태에 빠졌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을 피우는 건.”
[뭔 소리야. 당연히 나가서 피워야지.]
“…….”
아니, 그. 세상엔 불을 못 피우는 모험가가 존재해서요.
심지어 모닥불로는 요리를 못하는 모험가도 있어서요.
[왜 그래, 요리 못하는 사람처럼.]
…젠장!
“…….”
[……?]
“…….”
[…잠깐. 진짜냐?]
아니, 근데 진짜 들어 봐. 이건 꼭 내 문제만은 아니라니까? 비록 내가 현대에서도 음식을 종종 태워 먹긴 했지만, 그래도 탄다 싶으면 불을 약하게 할 정신머리는 있는 사람이라고!
근데, 근데 이곳은. 이곳은 불 조절이 안 되잖아. 탄다 싶으면 불을 줄여야 하는 게 그게 불가능하잖아.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음식을 새까만 숯으로 만드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내 문제가 아니라 누군들 할 수 있는 실수 아니냐고!
[허미. 기사님, 요리 못하셨십니까.]
[이야… 이건 의외인데.]
그렇지만 내 장렬한 변호는 내 마음속에서만 울려 퍼질 뿐,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창피해 죽겠다.
[너 어떻게 혼자 지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군 거냐.]
“…….”
[이놈 이러다 굶어 죽는 거 아냐?]
[잉, 그라믄 안 되는데. 사람이라도 하나 붙여 드릴까요.]
“…그럴 것까진.”
아니, 그래도 내가 그렇게까지 글러 먹은 인간은 아닌데… 구워 먹는 게 문제지, 삶거나 끓이는 건 그래도 될 텐데. 그릇만 생기면 정말 가능할 텐데. 하.
나는 속으로 말을 잇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나만 추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글픈 일이었다.
내가 매번 미묘하게 간 조절에 실패하고, 미묘하게 물 조절을 못하고, 미묘하게 덜 굽거나 더 삶긴 하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내가 어쩌다 요리치 내지 망금술사 취급을. 혼자 살면 굶어 죽기 딱 좋은 어리숙한 애송이 취급을.
[일단 지가 요기다 과일이라도 좀 피워 드리겠습니다.]
나는 소멸한 내 자존심을 두고 울적해하며, 자라나는 과실수를 감사히 받았다. 안 그래도 보존 식량 다 떨어지면 뭐 먹고 사나 걱정이었다…….
[그보다 지내면서 얻은 건 있냐?]
“…딱히.”
한편, 육귀가 전환한 화제도 문제는 문제였다.
해결할 방안을 찾고자 이곳에 남아 궁구하는 중이지만, 도무지 방법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마기를 마력으로 바꾸는 것도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마력을 마구 쓰다 보면 내가 바라지 않아도 마기가 마력으로 전환되긴 했다. 하나 그걸 내가 의식해서 쓰는 것과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엔 넘을 수 없는 간극 같은 게 있었다.
“부작용은 고사하고 방법 자체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력을 한점에 집중하는 스킬이나 외부에 표출하는 것 정도의 요령은 생겼는데, 딱 거기까지다. 전환은 정말이지 조금도 감이 안 잡힌다.
부작용이고 자시고 시도부터 막혔다.
[이잉… 그라믄 그냥… 봉인밖에 답이 없는 건 아닐까요? 그, 기사님 기를 꺾으려 하는 말이 아니라…….]
“글쎄…….”
그렇지만 내가 모를 뿐, 마기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을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좀 더 해 보고.”
그렇지 않고서야, 보고서를 통해 알게 된 내 행적이 추적 하나 당하지 않는 편안함을 자랑할 리 없다.
* * *
[그 확신은 어디서 나온 거야?]
내 끼니를 챙겨 주고자 산군이 주변에 식용 버섯과 과일, 채소, 곡물 군락지를 만들러 간 사이.
나와 단둘이 남게 된 육귀가 질문했다. 어떤 의미로 한 물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략된 대화에 익숙한 나조차도 뜬금없다란 감상이 먼저 떠올랐다.
[너 봉인 외 방법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
다행히 그 사실을 육귀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확신이란 단어가 그제야 이해 갔다.
“이건 제가 이곳에 오기 전 존재했던… 그러니까 제가 아닌 이 몸의 행적을 기록한 겁니다.”
가타부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인벤토리 한쪽에 고이 간직해 둔 서류 더미를 끄집어냈다.
[몸 원주인?]
“예.”
그러곤 육귀가 읽을 수 있도록 그것을 눈 앞까지 밀어 주었다.
육귀가 인간의 문자를 읽을 수 있을까? 그 의문이 든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이게 기록이라고? 허. 기술 많이 좋아졌네… 석판이나 점토가 아닌, 이렇게 얇고 팔랑팔랑한 거에 기술도 하고.]
“…종이라고 부릅니다. 가격이 비싸,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사용되진 않습니다.”
[그렇구나… 음, 근데 기사야. 약간의 문제가 있어.]
“무슨?”
[나 인간들 글자 몰라.]
역시나 육귀가 고개를 저으며 문맹임을 실토했다. 나는 머쓱함을 감추며 도로 내 앞에 가져왔다.
“몸 원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거긴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띈다 싶은 건 별로 없습니다. 기록 대부분이 악마사냥에 열중했노라 하는 증언이고, 주변과 교류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마저도 5년의 기록이 전부다. 나는 증발한 그 이전 기록을 상상하며 손끝으로 종이 위 글자를 살살 긁었다. 그마저도 종이가 일어날 기미라─종이 질이 너무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지만─당장 그만둬야 한 건 여담이다.
“다만… 그는 도시에 아무런 문제 없이 출입했습니다.”
[음. 그래서였구나? 네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고구하는 건.]
“예.”
[이건 꽤 생각해 볼 문제인데. 그 인간은 어떻게 숨긴 거지?]
다행히 내가 여지를 찾은 부분에서 육귀도 똑같이 골몰해 주었다. 그가 따져 보기에도 이것은 부자연스럽고, 또 가능성이 있는 부분인가 싶다.
[일단 행적에 대해 좀 더 말해 봐. 설마 네가 말한 게 다이진 않을 거 아냐. 기록된 게 그렇게 많은데.]
“음…….”
행적이라. 이걸 다 읊어 주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분명 몇 가질 골라야 할 텐데. 이 중 뭘 말해야 할까?
내가 이것들을 읽어 나갈 당시, ‘얘가 왜 이랬을까?’ 싶은 것들 위주로 말하면 될까? 혹은 자료 말미에 적힌 의문과 추측들?
“일단 기록된 것은 5년간의 일뿐입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외관이…….”
[외관이?]
나는 설명하려던 걸 멈추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외형이 변했는데 그게 수상하다고 고백한다. → 그게 왜 수상하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 변한 외형이 내가 짠 설정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 게임이란 걸 모르고 컨셉질이란 건 더더욱 모르는 갓반인의 의문이 이어진다. → 다 같이 멸망!
식은땀이 등골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꽁꽁 가리고 다니던 차림에서 하나둘씩 장비를 교체하는 것으로 얼굴과 모습을 조금씩 공개하더군요. 마치 빵조각으로 새를 유인하는 것처럼.”
[그거 기이한 일이네… 대체 왜 그랬지?]
여기서 당황한 티 내면 끝이다. 나는 진중한 표정을 필사적으로 가장하며 겨우 생존에 성공한 내 사회적 체면을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죽으면 죽었지 수치스럽게 생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악마나 범죄자 사냥을 주로 했는데 그들의 시신을 죄 챙겨 갔다는군요.”
[뭐?]
“정보를 모은 쪽에선 혹시 사체 애호증이 있는 건 아니냐는 추측을 했는데…….”
[멍청아, 그건 누가 봐도 제물이잖아!]
“그런 추측도 있긴 했습니다.”
내가 용사와 같이 다니게 되며 사그라든 의견이지만. 나는 뒷말을 꾹 삼켰다.
[5년 내내 시체를 빼 갔대?]
“거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빼도 박도 못하게 제물이 맞아.]
정보길드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건 있지만, 그래도 추측 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인정했고, 육귀가 한탄했다.
[그래. 안 그래도 의아하긴 했어. 아무리 대악마라도 다른 차원의 영혼을 빼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복병이 있었을 줄이야.]
“…자신들이 살해한 것들을 바쳐 저를 데려왔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그러지 않고선 널 데려올 방법이 없어. 대악마라고 해서 만능은 아닌걸?]
문득, 내가 들고 있는 서류철이 피 냄새로 묵직해진 듯했다.
“…얼마나 희생됐겠습니까.”
[글쎄다. 내가 뭐 제물을 바쳐 본 적이 있어야 가늠을 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그래도 최소 수천 정도는 바치지 않았을까? 차원의 벽을 허무는 건 그 정도로 힘든 일이니까.]
최소 수천인가… 하긴, 기록지에 적힌 것만 합산해도 거진 천 이상은 나올 테다. 한 달에 스물씩, 5년을 반복했노라 단순 계산만 해 보아도 1천2백이란 숫자가 나오는 지경이니까.
하물며 그는 한 달에 딱 스물만 잡은 수준도 아니다. 적을 때 스물, 많으면 몇백도 잡았다. 이 종이에 나열되지 않은 행적을 고려한다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니 못해도 2천 명, 더 과감히 수를 잡는다면 아마 3천, 4천 명.
여기에 그는 인간만 잡은 게 아니라 악마까지 잡아들였으니…….
나는 무심코 서류를 든 손에 힘을 실었다. 두꺼운 종이 뭉치가 구겨지며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잡은 악마도 제물로 바쳤겠습니까?”
[모르지. 그런데 악마도 결국 생명체니까… 제물로 쓰려 한다면 쓸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너, 아니 네 안의 그것만 해도 그 뭐냐. 저쪽 도시에서 잘만 동족을 제물 삼던걸?]
“……?”
내가 자세히 말하란 의미로 시선을 주자, 육귀가 등껍질을 으쓱이며 해설해 주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지 않아서, 멀쩡한 성벽에 가려져서, 그리고 도망칠 때 딱히 도시 안을 보러 가지 않아서 내가 알 도리 없었던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