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만약 (1)
대족장의 설득에 못 이겨, 상황을 타개할 비책을 찾기 전까진 머물기로 했다. 그가 짜낸 계책을 따라, 떠나는 척하며 인적 없는 구역에 자리도 잡았고.
“예서 지내실 동안 쓰실 만한 물건을 준비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거나 불편한 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한데… 장난해? 야, 증거 안 남긴다며!
“이건 약속과 다른데.”
“근심 마십시오. 티 안 나게 빼돌린 것들이고, 절대 걸리지 않을 겁니다. 편히 쓰셔도 됩니다.”
지금 뭐라는 거야. 있어야 할 게 없어진 건데 그게 어떻게 티가 안 나냐고. 아무리 공을 들여 가무려도 빼먹은 시점에서 발각될 가능성은 반드시 있다고.
“받지 않겠다. 가져가라.”
지금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이 대족장의 심복중 심복뿐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얘네 너무 과감한 거 아니냐?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부터가 모험이라는 생각 안 들어?
나는 나만 이렇게 걱정이 많은 건가 하며, 복장이 뒤집어지는 심정으로 거부권을 사용했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다면, 그땐 이곳을 떠나겠다.”
“…알겠습니다.”
다행이랄지, 상대는 내 으르렁거림에 순순히 양보해 주었다. 동공 없는 여덟 개의 눈이 찡그려졌다.
“하나 전부는 아닐지언정 조금만큼은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부 거절당했음을 아시면 산군께서도 대족장께서도 상심하실 것입니다.”
아니다. 이게 정말 양보해 준 걸까?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걸 노린 건 아닐까?
나는 이마저도 쳐내야 하나, 아니면 산군이 와서 징징댈 게 선명하니 이 정돈 받아 줘야 하나 고민했다. 답은 하나였다.
“…식량과 약만 받겠다.”
이건 받자. 산군이 와서 왜 안 받았냐고 칭얼거리는 건 너무 귀찮으니까.
“치료약은 필요 없다.”
“…그럼.”
“…이거면 된다.”
더불어 이 수락엔 식량과 약 같은 소모품은 빈자리를 뭉개기 편하지 않을까 하는 약은 계산이 있으니.
또, 말은 안 했지만 지금의 내게 가장 간절한 것들이 바로 이 둘이다. 젠장할, 내 처참한 불 피우기 실력은 그렇다 쳐도 이 숲은 벌레가 너무 많다.
“예.”
나는 상대가 갑자기 싱글벙글해지는 걸 보며 ‘이거 당한 것 같은데…….’라는 미심쩍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 이미 받겠다고 한 것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건네주는 것을 일일이 받아 챙겼다. 비어 있던 인벤토리가 다시 차올랐다.
“문제가 생기거든 언제든 불러 주시지요.”
“다신 찾아오지 마라.”
안 불러. 절대 안 불러.
내가 미쳤다고 부르냐?
나는 그렇게 궁시렁대고는 걸음을 돌렸다. 혹시 몰라 만남의 장소는 야영지와 거리가 있는 곳으로 잡았던 까닭이다.
참고로 만나는 방식도 한쪽이 약속 날짜를 적은 쪽지를 남기면, 남은 한쪽이 그걸 읽고 그날 서 있거나 하는 식이다. 즉, 확인 타이밍을 놓치면 못 만난다. 앞으로의 내가 그럴 예정이듯이.
파삭.
각설하고.
흙 대신 밟은 나무의 표피가 살짝 으스러졌다. 내가 딱히 강하게 밟아서는 아니고, 이 근처 나무들이 워낙 오래돼서 이렇다. 뿌리 지름만 2m를 넘길 거목들이니 말 다했다.
문제는 그것들이 제멋대로 자라는 과정에서 얽히고설키며 내 키만 한 굴곡들을 굽이굽이 만들었다는 건데. 여기에 나무 사이사이로 흐르는 샘물이나 폭포, 미끄러운 이끼가 더해지면 이곳을 오가는 사람이 왜 적은지 이유가 나온다.
정말이지, 길이 더럽게 험하다. 약초나 버섯 얻자고 들어올 만한 구역이 못 된다.
“후우.”
물론 그런 곳이기에 의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험악한 산세에 감사하며 썩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180대 성인 스물이 둘러싸면 간신히 닿을까 싶은 이 거목은, 무슨 연유에선지 몸뚱이가 부러진 채로 썩어 가고 있다.
하나 이 썩은 나무의 진가는 장엄한 외관이 아니다. 나무 안쪽, 오묘하게 난 틈새로 들어가면 탁 트인 동굴과 이어진다는 효용성이지.
“…산군은 여길 어떻게 찾았나 몰라.”
나는 장소를 주선해 준 산군을 찬양하며 나무 안쪽으로 몸을 넣었다. 벽 부분을 손으로 짚을 때마다 폭신한 이끼와 그 사이로 흐르는 작은 수렴이 느껴졌다.
“드디어 집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두웠던 통로가 청색빛으로 물들었을 때.
나는 긴장을 풀었다. 야광이끼와 발광버섯의 영역이 동굴의 범위와 정확히 겹치는 탓이다. 다른 말로는 내가 드디어 은신처에 도착했다는 의미도 된다.
“아,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네.”
해서 나는 마감에 치일 적이면 달고 살던 말을 버릇처럼 지껄였다. 내 다리는 우습게도 동굴 한구석에 마련해 둔 침대에 착실히 다가가는 중이다.
뭐, 말이 침대지 실상은 이끼와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가죽을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런 환경에서 이 정도 수준이면 호사일 것이다.
떠날 때─떠나는 척할 때─제사장들이 바리바리 싸 준 짐을 염치 불고하고 받길 잘했다.
사사사삭.
“…아.”
덤으로 오늘 벌레 퇴치약도 받아 오길 잘했다.
나는 지친 몸을 일으킨 후 인벤토리에 손을 넣었다. 노린재나 바구미, 집게벌레, 바퀴벌레 같은 건 둘째 치고 쇠파리나 진드기, 개미, 갯벼룩 때문에 못 살겠다.
이 세상에 모기가 없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죽어라, 이 사탄의 자식들.”
나는 작게 피운 불─피우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에 벌레 퇴치용 풀들을 마구 쑤셔 넣었다.
벌레들아, 제발 나와의 동거를 포기해 다오. 내 소망을 반증하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큽, 푸흡.”
으, 각오는 했지만 제법 맵네.
나는 컨셉을 지키고자 억지로 참는 대신, 마음껏 기침하며 손을 휘저었다. 숨구멍이 많은 동굴인데도─당연하다. 돌로 이뤄진 동굴이 아니라 나무뿌리들이 만든 동굴이었다─매캐함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이러다 질식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생리적 눈물을 동그랗게 매단 채 다리를 긁으려는 손가락을 억지로 접었다.
경험상, 건드리지만 않으면 한 시간 이내에 붓기와 가려움증이 사라진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참고로 이건 내가 회복력이 좋아서 가능한 일이지, 이쪽 벌레가 약해서는 아니다. 아무렴, 가도를 따라 여행할 때만 해도 인퀴지터랑 데스브링거가 얼마가 고생을 했는데.
그래. 한쪽은 벌레를 예방하는 기술이 없어서, 다른 한쪽은 한번 물리면 단번에 나을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맨날 전쟁이었다. 그 꼴에 질린 나머지 나중에 가선 서로 힘을 빌려주자며 타협도 봤지만…….
“음.”
나는 간만에 떠오른 추억을 두고 침음을 삼켰다. 내 사정에 급급하여 까맣게 잊었던 것치고, 지금 느껴지는 그것들의 무게가 너무 묵직했다.
“…잘 지내려나.”
도로 침대에 누우며 상념에 잠겼다.
예를 들어, 네 사람이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내가 떠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많이 받은 건 아닐지. 그들이 나를 쫓기로 결정 내렸을지. 그렇다면 그 결정의 근간이 된 심정은 무엇일지 등등… 그런 상념이었다.
“나도 빠졌겠다, 고기도 좀 먹고 다녀야 할 텐데.”
약간의 걱정도 들었다.
인퀴지터랑 데스브링거가 또 싸우면 그땐 누가 말리지. 앞으로 열릴 레이드에서 딜은 또 누가 하고? 베르세르크랑 웨폰마스터의 딜이면 커버가 과연 될까? 아니면 마이스터라도 영입해서 어떻게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나?
대충 그런 유형의 걱정이었다.
“아, 맞아. 대현자랑 마이스터.”
그 과정에서 내가 깜빡했던 부분도 종종 생각났다. 대표적인 게 청산호와 마이스터였다.
“둘이 별 피해 없었으면 좋겠는데…….”
둘이 직·간접적으로 나를 도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손해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이스터라면 특히 더 그렇다.
그가 나를 도운 건 사실이나 그게 도주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면 그건 모호한 감이 참 많았으므로.
“…뭐야, 나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잖아.”
하나 그들이 고초에 처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아가 과거의 나는 그들이 타격을 입을 걸 알아도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나를 어찌 생각하건, 결국엔 나보다 대의를 우선시할 그들처럼. 그래. 어쩔 수 없이 대의가 우선인 누군가처럼.
나도 끝의 끝에선 내가 먼저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혐오스럽진 않다. 반대의 일을 두고 야속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암,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도 일생의 목표와 상대를 두고 골몰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내가 뭐라고 걔들이 뭐라고 타인을 더 높은 곳에 올려 두겠나. 심지어 우리 사이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
하지만.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남기고 올 걸 그랬나.”
이렇게 말 한 점 없이 비정하게 떠날 사이도 아니었지 않을까, 따위의 후회는 들었다.
내가 너희의 우선도를 낮게 잡은 것이나 망설임 한 점 없이 떠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정말로 ‘말 한마디 정돈 남기고 올걸’ 딱 그 정도의 후회였다.
그 하나를 남긴다고 해서 내 행적이 해명되는 것도, 내 죄책감이 덜어질 것도 아닌데.
“…….”
젠장.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봐야 시간이 되감기는 것도 아니고.
나는 한참을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몸에서 힘을 탁 풀었다. 꼬르륵. 지난 몇 주간 너무 잘 챙겨 먹었던 배가 시간에 맞춰 울었다. 우울했던 기분이 어이없음으로 바로 전환되었다.
“이런 순간에도 배는 고프네… 하긴, 다리 으스러졌을 때도 그랬지…….”
그렇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다.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닐 때야말로 제일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정말로, 먹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난로가 없어서 그런가, 조금 추웠다.
* * *
“인퀴지터.”
아크메이지가 생각하기에, 단체 생활에 있어서 서열이란 제법 중요했다. 해당 단체가 수직적 분위기든 수평적 분위기든 매한가지였다.
최소한 최종 결정권자만큼은 서열의 정점으로서 걸맞는 권위를 지녀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해당 단체는 오래 존속될 수 없다. 그녀의 오랜 경험이 준 깨달음이었다.
“그가 그런 조건으로 부탁을 내걸어 오긴 했습니다만… 인퀴지터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런 이유에서 아크메이지는 겨우 휴식 시간을 보장받은 이에게 조심히 물었다. 이 질문이 청년의 게휴를 방해할 건 아나,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렴 연장자란 이유로 존중받고, 현자란 이유로 조언할 권리를 하사받았다곤 하지만 그게 어찌 그녀에게 월권할 권리마저 주겠는가?
인선을 고르는 것은 오직 리더의 몫이며 이 파티의 중심은 오직 용사뿐일진대. 간언할 수는 있을지언정 여정의 선장은 될 수 없는 아크메이지가 어떻게 그것을 멋대로 결정짓겠어.
“그의 요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하므로 그녀는 인퀴지터의 마른 뺨을 두고 억지로 답을 요구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가라앉은 녹색 눈이 조금의 시간을 부탁했다.
아크메이지가 최대한 요약했음에도 제법 길어진 이야기가 여즉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했다.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신께서 얼마전에 신탁을 내려 주셨습니다.”
“…예?”
그러나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아크메이지가 당황하고, 인퀴지터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딘가 망연해 보이는 움직임에 올라가려던 아크메이지의 목소리가 다시 꺾여 내려왔다.
“어떤… 신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북쪽으로 가서 답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북쪽…….”
“또한 마지막으로 길 잃은 자를… 음. 돌려 보내라… 고 하시더군요. 이걸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진 의문입니다만.”
신탁을 들었다면 신전에게 알려야 함이 맞다. 하지만 이어진 인퀴지터의 말에 아크메이지는 반사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죽여라… 구해라…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의 단어로도 번역될 수 있을 만한 뜻이었습니다.”
이건… 혹시 그들이 아는 누군가를 겨냥하여 내려진 신탁인가? 물론 그와 관련된 단어라곤 조금도 없지만, 아닐 확률이 좀 더 높지만. 그래도.
“…신께서 모호한 말씀을 주신 건 오랜만이로군요.”
별개로 단어가 여럿 요구되는 신탁은 처음이다. 아크메이지는 그 사실에도 제법 주목을 주었다.
“보통의 신탁은 어떤 단어로 꾸며도 요약만 하면 한 가지 뜻으로 귀결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신탁이 내려지는 일이 굉장히 드물 뿐, 신탁 자체는 해석의 여지가 달리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악마의 침략을 통보하셨을 때나 9개뿐이던 계명을 10계명으로 늘리던 때, 하다못해 용사를 발탁할 때만 봐도 그러했다.
이 세상의 신은 당신의 뜻이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걸 즐기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된 ‘길 잃은 자’도 애매하군요. 길을 잃었다는 수식어도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은데…….”
전혀 다른 뜻의 세 가지 단어로 나뉘는 것도 그렇고, 듣자마자 누군지 딱 알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번 신탁은 참 이례적이다.
아크메이지는 그 사실을 두고 본인의 턱을 잡았다. 자르는 걸 깜빡해 삐죽 튀어나온 손톱이 그녀의 뺨을 눌렀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전 아크메이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듣자마자 대상의 정체를 직감했는데요.”
털 속에 숨어 있던 살갗이 손톱에 긁히며 핏방울을 살금 흘려 냈다.
“…인퀴지터.”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면 북쪽으로 가겠습니다. 다니엘 이단심문관의 합류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소속된 신전에서 문제가 일지 않도록 하는 건 본인 몫이라 해 두십시오.”
“…….”
아크메이지는 인퀴지터의 메마른 목소리를 두고, 따끔거리기 시작한 제 뺨을 더듬었다. 이것을 돌이킬 수 있을까?
“신전에 신탁을 고하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하니 그 전까진 아는 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쪽에서 듣는다면 서둘러 떠날 것을 채근할 게 분명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나아질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또다시 실패하게 되는 걸까?
아크메이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곳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