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의미가 있을까 (6)
[됐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이런 이유에서 너는 딱히 마기를 가릴 수단이 없어. 무지의 은폐도 더는 돌이킬 수 없고.]
한참을 속에서 씨근거렸을까. 내가 진정한 기색임을 눈치챈 듯─어떻게 눈치챘는진 모르겠다.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육귀가 말을 돌렸다.
시간이 별로 없는 내게 딱 도움되는 조력이기도 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아니었는데, 육귀 아니었으면 망할 뻔했네.
“하면…….”
별도로 무지의 은폐라는 유용한 패가 사라진 건 조금 아쉬운가. 하나 그게 아깝다고 해서 아까 내린 결정─듣는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아무렴, 상황이 아무리 수라장이어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면 그에 맞는 대비만큼은 할 수 있지 않나. 뼈 빠지게 일해야 할지언정 알고 휘둘리는 것이 모르고 휘둘리는 것보단 백배 낫다. 아니 천배는, 만배는 더 나아!
“산군처럼 마기를 마력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까.”
해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패에 미련 가지지 않고, 다른 방도를 찾았다.
[그건 더 안 되지.]
당연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방금 말했잖아, 네 육신이 인간보다 악마에 더 가까워졌다고. 그건 단순히 악마의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의미가 아니야.]
“……?”
[그러니까… 신체를 구성하는 데 쓰이는 물질이 마력이 아닌 마기가 됐다 이 소리지. 그런데 너는 지금 거기서 마기를 모조리 제거하고 싶어 하는 거잖아? 그게 되겠어?]
“…문제가 생긴단 겁니까.”
[문제가 생긴다란 문장 하나로 정리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무게의 일이라곤 생각 안 하지만, 그래. 굳이 표현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육귀는 그리 말하며 약간의 예시를 들어 주었다. 네가 지금 제시한 행위는, 빵(신체)을 만들 때 밀가루(마기)를 석탄(마력)으로 갈음하는 꼴이라고.
[참고로 말해 두지만, 너와 저 녀석은 처지가 달라. 저 녀석이 부리는 기행은 말 그대로 녀석이 특질을 타고났기에 가능한 일인 거니까. 재능이나 노력을 떠나, 육신 자체가 마기와 마력을 오가도 붕괴하지 않는 성질을 품고 있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거지.]
내가 사고의 범위를 넓히기도 전에 육귀는 선수 쳤다.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건 조금만 고뇌해도 쉽게 닿을 만한 질문거리였다.
[반면 네 몸뚱이는 그런 특성이 하나도 없지. 그러니 마기가 마력으로 뒤바뀌는 순간 마땅한 부작용이 따라올 거야. 작게는 근골이 뒤틀리는 고통부터, 크게는 기형으로 변해 버리는 등등 말이야.]
심지어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 들 것처럼 죄 토해 낸 것이다.
[거기에 마기로 이뤄진 생물들을 떠올려 봐라. 그것들 목숨이 어디 적당히 질기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질… 긴가? 대부분 한 방으로 죽어서 모르겠다. 마기로 이뤄진 생물에 나를 포함한다면 그럭저럭 질기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모르나 본데, 엄청 질겨. 마기가 포함된 애들은 복원력이 강하거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네 신체도 끊임없이 복원되려고 할걸? 단순히 신체 일부에 마기가 고여 있는 수준도 아니고, 마기를 끝없이 발생시키는 핵이 네 안에 있는 상황이니까 정도는 더 심하겠지.]
“그럼…….”
[물론 강대한 힘으로 마기의 핵을 찍어 누르고 마기 발생을 제한해 버리면 신체를 뒤바꾸든 뭘 하든 괜찮겠지만… 처음에 말했다시피 이게 되면 네가 그 꼴이 됐겠니.]
그보다 이렇게 되면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정말로?
…이제 정말 범죄자처럼 도망 다녀야만 하는 거야?
“그럼 결국 봉인밖에 수단이 없는 거군요.”
나는 침울함을 드러내지 않고자 노력하며 내 앞날을 다시 더듬었다. 이곳에 머무는 내내 손으로 더듬고 불을 비췄음에도 여전히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지르물며 눈꺼풀을 잠깐 내렸다. 문득 진짜 ‘영웅전설’이 생각났다.
“…확인 감사합니다.”
거기서도 악마기사의 전직 루트는 두 개였지.
복수에 눈이 멀어 악마와 손을 잡는 비틀린 복수자, 루인Ruin 루트와 제 삶을 대가로 악마를 봉인하는 산 제물, 벤퀴셔Vanquisher 루트.
그중 루인의 길은 이미 진짜 악마기사가 걸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런 명칭으로 불리며 살았다.
하면 내게 남은 건 벤퀴셔 루트인가?
봉인으로 하여금 세상과 자신을 유리시킨, 그것으로 악마를 완전히 억제하는 데 성공한, 하나 부작용으로 오감을 모두 잃는 그런 것이 내가 당도해야 할 미래야?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아서 쉬이 망각되고, 세월조차 그를 찾지 못하여 늙어 죽지도 못하는. 하므로 영원히 쐐기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게 내 미래라고?
극복이란 이름하에 멸망해 가는 그런 것이?
나는 어쩌면 내게 주어진 답안지일지도 모를 기억을 두고 입술을 오므렸다.
난,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어. 답안지 위로 유일한 욕망 하나가 조용히 덧그려졌다. 기존의 답을 온전히 가리는 덧칠이었다.
[…갈 거야?]
내 움직임을 두고 육귀가 물었다. 굳이 답하지 않았다. 한 시간의 질답이면 충분히 오래 끌었다.
스르릉.
대신 미처 챙기지 않았던 투헨더를 손에 쥐고 뱅글 돌렸다. 손잡이 대신 리캇소 부분을 잡으면 등에 끼워 넣기 위한 거리감은 충분히 나왔다. 등에 긴 대검이 매달렸다.
[나간다고 딱히 없는 답이 생기진 않을 텐데.]
“그렇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네게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분명 얻는 것 없이 쫓기게 될걸.]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너, 이곳에 오기 전보다 악마에 훨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고려하고 있는 거지?]
“마땅히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더 챙길 것이 있나. 인벤토리도 정리했고, 푹 쉬는 것으로 몸의 컨디션도 끌어올렸는데 더 챙길 게 있어?
[…혹시 몰라 말하지만, 네가 풍기는 마기는 저 촐랑이 수준으로도 충분히 정화가 돼. 다른 말로는 이 숲에선 걸릴 걱정 없이 방도를 궁구할 수 있다는 거지.]
없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챙길 수 있는 건 정말 없다.
정보는 앞선 문답으로 해결했고, 식량·식수·약품·옷가지는 바깥에서 해결해야 할─아무렴 신세 진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여기서 또 훔쳐 갈 수는 없잖나. 그렇다고 말로 부탁하면 바짓단 잡을 텐데─일이니까.
“교수대에 올라갈 사람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그럼 정말 끝이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앞으로 어딜 가지. 어디에 멈춰 서야 들키지 않고 사색을 이어 나갈 수 있지. 해결할 수 없는 의문들이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고 나를 괴롭혔다.
[저 말하는 싸가지 봐라.]
그리고 내가 두 발짝 움직였을 때, 육귀가 말했다.
[야, 후손아!!! 쟤 도망간다!!!]
“……!?”
[으브… 븝? 에, 예? 뭐, 뭐요?]
상상치도 못한 배신이었다.
* * *
[헤헤.]
결국 붙잡혔다.
[헤헤헤헤.]
물론 깨어난 산군을 두고 처음부터 도망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뜀박질을 시작한 직후 작정하면 도망갈 수는 있겠다 판단이 서기도 했고.
“…웃지 마라.”
하지만 산군이 쫓아오다 말고 멈춰 서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린 게 패착이었다.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그냥 간다고 말을 하지, 우리가 그렇게 싫었냐’라고 울면서 지껄인 말 따위가.
해서 떠나기 전에 오해만 풀고 가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그치만 이렇게 안 하믄 가실 거잖십니까.]
…이렇게 됐다.
나는 내 몸을 꽁꽁 감싼 산군을 보며 골치가 지끈거려 왔다. 얘는 나를 얼마나 봤다고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내가 해 준 게 정말 뭐 있다고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아님 정말루 지가 싫으셨습니까……?]
“…계속 이런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뻥치시네. 그냥 우리까지 악마라는 덤터기 쓸까 봐 자리 옮기려는 거면서.]
“…….”
[엥, 진짭니까.]
[그래.]
진실이긴 한데, 그걸 아는 사람이 산군 편을 들어? 그리고 그걸 여기서 말하는 건 또 뭐야. 알면 오히려 입 다물고 보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애송아, 그냥 인정해. 너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전, 충분히 저만을 고려하고─”
[교수대로부터 도망쳐 나왔으니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 거다, 뭐 그렇게 말할 거면 관둬.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논리는 처음부터 막혔다. 산군의 꼬리 끝에 매달려 있던 육귀가 엉금엉금 기어 내 머리맡에 도달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이 세상에서 너만을 위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너 자신뿐이야. 지금은 네 편인 것 같은 이 숲도, 나도, 한날한시에 돌변해서 네 모든 걸 빼앗으려 들 수도 있다고.]
툭, 하고 이마에 거북이의 머리가 닿았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괜히 서러웠다.
[당장만 해도 여기에 훌륭한 예시가 있잖아? 나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 줬더니만 돌아온 게 배신인 예시가. 그러니 너도 이 꼴을 당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어. 세상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
“…그건, 결국 남을 믿지 말란 이야기입니까?”
[아니지. 그것보단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하란 거지. 다른 말로는 너무 아껴 먹다가 도리어 썩히지 말란 것도 되고. 너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니까.]
너무 서러워서, 나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도움받은 주제에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눈물이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반겨 준 당신들이 저 때문에 피해 입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랬다.
“저로 인해 화를 입고 난 후 당신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정한 이들은 매번 나를 비참한 삶에 매어 두고.
“저는, 그래서…….”
“그렇다면 은공으로 인해 저희가 피해 입지 않도록, 연결 고리를 숨겨 버리면 되겠군요.”
“……!”
그 비참함이 씻겨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렇지요?”
급히 뛰어 나온 듯,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소년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게 될 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따져 물을 수 있는 증거만 없애면 되니까요.”
“…늪의 제사장 전부가 침묵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으음. 저는 그들을 믿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겠지요.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도, 죄송스럽습니다만 검은천둥뱀을 꺼리는 이도 존재하기는 한 상황이니까요.”
물론 그들이 검은천둥뱀을 꺼리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몸으로 산군과 비교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만. 소년이 오해의 소지를 막으려는 양 살짝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천둥뱀이 떠났다고 여긴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
“이 대삼림에도 인적이 드문 구역은 있습니다. 은인께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시되, 모두에겐 떠났다고 고하면 되겠군요.”
“…그래도 문제가 될 거다.”
“글쎄요. 기존에 머무르신 거야 ‘저흰 그런 분인 줄 몰랐다. 그냥 은인이라서 받아들였다.’라고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실제로 저흰 검은천둥뱀께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왜 쫓기는지에 대한 소식을 접한 적이 없는걸요. 은공께서 직접 말하신 것 외에는.”
그러니─ 대족장이 추임새를 넣었다.
“생각이 있다면 거기서 멈추겠지요. 그 이상 의심하는 건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뭣하면 교류 끊는다 협박해도 되고.”
제법… 그럴싸… 한… 가?
잘 모르겠다. 나는 입을 작게 뻐끔거리다가 가까스로 생각난 구멍을 쿡 찔러 보았다.
“…내가 인적 드문 구역에 숨어 있는 것이 걸리면?”
“그때도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억지도 아닌 것이, 저희라고 해서 이 거대한 숲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닌걸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왜 몰랐냐고 하면 그것도 결국 싸움 거는 게 아닐지…….”
놀랍게도 그 역시 대족장의 머리엔 이미 들어 있었나 보다.
“하니 안심하시고 더 머무르시지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볼일이 있으신 거라면 모를까, 이 숲의 안위를 위해 떠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걸 듣고 있던 산군이 꺄악대며 꼬리로 바닥을 콩콩 치고, 육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께선 이미 이 숲을 구하셨고, 이젠 우리가 당신의 집이 되어 줄 차례일 뿐인 거니까요.”
아무래도 내 패배인 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