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의미가 있을까 (5)
딱히 이 세계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아니다. ‘악마기사’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기억되고 싶을 만큼 이 세상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니까.
같은 맥락에서, 내 사정을 밝히는 것으로 괜한 동정을 사고 싶지도 않다. 나를 향한 공감이 이익을 바랄 그들의 욕망보다 더 가벼워질 수 있음을, 그것도 굉장히 쉽게 이뤄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나, 내 처지를 말함으로써 산 적선이 귀한 단서를 가져온다면?
나를 죽이려 들 생각은 없는, 그러나 무언갈 알 수도 있는 이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말할 수 있다.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자존심보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더 큰 사람이었다.
[그으러니까아…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세상의 영혼을 끌고와?! 악마가 껴 있다고 해도 이건 선을 단단히 넘었잖아!]
별개로… 너무 진심으로 화내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그냥 적당히 충격받거나 ‘너 좀 불쌍하구나, 쯔쯔.’ 하며 동정표만 좀 주겠거니 싶었는데.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내가 널 악마의 그릇 1호기쯤으로 오해했을 때고!]
“지금도 딱히 다르진 않을 텐데.”
[달라! 다르다고! 아무튼 달라!]
그도 그럴 것이, 지난날 육귀가 내보인 모습은 퉁명스러움과 까칠함, 탐탁지 않음, 적대적으로 정의될 수 있었다.
나를 직접 죽일 힘이 없고, 남을 부채질하면서까지 죽이려 들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내버려 뒀을 뿐, 그 개인은 나를 굉장히 싫어했다 이거다.
[차아아암 나.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는. 뭐, 다른 세상의 영혼을 가져와? 내기? 장난해!? 자기가 입을 피해 아니라 이거지?! 이미 악마 소리 듣는 상황이다 이거지!? 아주 그냥 못돼 처먹었어! 정말 못돼 처먹었다고!!]
당장만 해도 깨작거리는 게 밥맛 떨어지니 죽이나 먹으라는 둥 빌빌거리는 게 보기 싫으니 누워서 잠이나 자라는 둥 육귀가 걸어온 시비들이 기억에 선명한데…….
나는 그 순간들과 대조되는 문장의 나열에 뒤통수가 간지러워졌다. 뭐랄까, 기대도 안 한 반응이 나오니 공연히 멋쩍어지는 느낌이다.
[그 몸의 원주인은 또 뭐야! 악마야 악마했다 쳐도 걔는 또 뭐냐고!!]
그보다 그, 목소리가 너무 크지 않아? 이러다 애들 다 깨겠는데?
나는 높아진 육귀의 목소리 톤을 두고 주변을 쓱 돌아봤다. 혹시라도 산군이나 제사장들─일부는 동굴 입구에 머물더라─이 일어날까 싶어서였다.
[악마라는 똥을 치울 자신이 없어서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좋아. 좋은데! 최소한 같은 세상 사람을 골랐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하필 다른 차원의 사람인데?!]
하나 불행 중 다행히도, 깨어난 자는 아직 없었다. 육귀의 말이 내게만 크게 들릴 뿐, 실제론 병아리가 삐약삐약 하는 수준이라 그런가 싶다. 진짜 경행이다.
[그리고 너! 너어어어도 문제야! 왜 그걸 혼자만 떠안고 있어? 꾹 참고 기다리면 남들이 알아서 대우해 줄 줄 알아?! 말은 안 했지만 이심전심입니다, 뭐 그렇게 될 줄 알았냐고! 너 호구야?!]
정말 경행인데, 지금 불똥이 나에게까지 튀고 있지 않아?
[내 말 듣고는 있는 거냐, 이 답답아!!]
“…듣고 있습, 있다.”
빼액 소리를 지르다 못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주변을 팍팍 두드리는 꼴이 꼭 돌아가신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오려는 존대를 겨우 억눌렀다.
그 과정에서 나온 약간의 실수는… 뭐, 일단 눈치 못 챈 듯하니 상관없을 것 같다.
[그럼 왜 말 안 해!]
“말해도 내 처지가 우선되진 않을 테니까……?”
[그건……!]
아니, 근데 진짜 반말하기 힘드네.
나는 사정을 토로하자마자 무심코 풀어지려는 컨셉을 두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탁탁. 말문이 막힌 육귀가 분하다는 듯 바위를 두드렸다.
[…그건, 그렇지.]
저러다 상처 나는데.
나는 육귀가 자리 잡은 바위 표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둥지에는 잘 마른 갈대가 쌓여 있고, 그 아래 장소엔 이끼가 폭신하게 깔려 있건만 왜 그런 데를 두고 딱 저길 때리는지 모르겠다. 두드릴 때 안 아픈가?
[세계 하나와 생명 하나분의 안타까움은 무게가 다른 법이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육귀가 침울하게 고개를 내렸다. 그러모은 지느러미 사이에 파묻힌 머리는 쪼그려 앉아 무릎에 손 올린 아이와 사뭇 닮았다.
[…도망친 건, 그래서?]
“…그래.”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거북이가 저러니 귀엽다.
나는 그런 상념을 하다가, 뒤늦게야 대화가 삼천포로 새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러다 애들 기상하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대답은?”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 정말 처지와 상관없이 싸가지 없게 말한다.]
“…….”
[그리고 너, 질문이 뭔지 정확하게 안 말했어.]
나는 서둘러 길을 가기 위해 답을 채근했다. 그리고 팩트로 얻어맞았다.
그래, 확실히 육귀는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였지. 그에 비해 나는 오십 년도 다 못 산 새파란 어린놈이고.
인간도 아닌 이가 인간의 예법에 집착하는 건 좀 신기하지만, 아무튼 그가 불쾌히 여길 이유로는 충분하다. 나는 육귀의 눈치를 살금 보았다.
“봉인 이외의… 마기를 가릴 수 있는 방도를 알고 싶습니다.”
여기서 딱히 존대를 하지 않아도 답을 줄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높여 불러도 상관은 없겠지. 진실을 어느 정도 밝힌 마당에 계속 싸가지 없게 구는 것도 고역이었고.
[…네가 쓸 수 있는 건 없어.]
무엇보다 내가 그러고 싶었다.
나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어낸 기분으로 육귀의 말을 경청했다. 존대 하나로 기분이 썩 누그러졌는지, 육귀가 아까보단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봉인을 하거나, 악마를 죽이거나, 강한 힘으로 완전히 짓누르거나, 마기를 마력으로 바꾸거나 해야 하는데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네가 여기 있을 리도 없잖아?]
“정화는…….”
[안 돼. 정화란 건 악마가 육체에서 분리되어도 기존 개체가 살아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고, 지금의 너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하나의 비유를 들었다.
[밀가루 포대에 사과 한 알이 들어갔다고 쳐 봐. 그걸 꺼낼 때 밀가루를 손상시킬 일은 거의 없겠지. 꺼내는 과정에서 사과가 으깨지거나, 원래 사과가 으깨져 있거나, 사과가 너무 오랫동안 들어 있지 않는 한.]
대충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바로 감이 왔다. 그러니까… 나는 밀가루 포대에 사과가 너무 오래 있었던 건가?
[근데 너는 그냥… 밀가루에다가 오래된 사과와 으깬 사과를 넣고 흙 한 줌까지 솔솔 뿌린 격이야. 도저히 밀가루만을 분리해 낼 수 없다고.]
아니네. 그것보다 더 심했네.
“그럼……?”
[사실 이쯤 되면 악마를 죽여도 문제일 거라 생각해. 너는, 그러니까 네가 지금 쓰고 있는 육체는 악마와 너무 오랫동안 결합해 있었어. 이젠 더 이상 인간의 범주가 아닐 정도로. 솔직히 말하면… 음.]
악마가 죽으면 이 육신도 죽는단 이야기인가.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차분히 기다리며 복잡해지는 속을 내리눌렀다.
[아, 잠깐잠깐. 설마 그래서인가?]
육귀가 갑자기 탄성을 흘렸다.
“……?”
[왜 하필 다른 차원의 영혼을 가져왔나 했더니… 그런 거라면 말이 되네.]
“…하나의 문답을 더 해 드려야 합니까?”
[아니, 그건 괜찮아. 아니, 물론 해 주면 좋긴 한데, 이건 공짜로 대답해 줄게. 따지자면 너는 이 세상의 사정에 휘말린 피해자니까.]
추가 질문 교환 없이 대답해 준다면 다행인데… 대체 뭐기에 저러는 걸까.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대신 말해 주기 전에 경고할 게 있어. 첫 번째는 이게 내 예상일 뿐이라 틀릴 수도 있다는 거고─ 아 물론 맞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두 번째는 듣고 나서 네가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렇게 심각한 내용입니까.”
[아, 음. 내용도 내용이지만 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거든. 어떤 건 모르는 게 약이라잖아? 한번 알아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본론이 나오기 전 주어지는 유예가 곧 찾아올 참담함의 효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들을래?]
“…….”
하지만 그 경고에 몸을 떨며 물러나련가? 미지의 공포가 두렵다며 안대 낀 채로 헤매는 행위를 답습하련가?
“듣겠습니다.”
그건 싫다. 그건 싫었다.
나는 충분히 허덕일 만큼 허덕였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알고 후회하는 게 낫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건 지쳤다.
[그래, 각오했다면 됐어.]
꾹 감긴 눈꺼풀이 공연히 뜨거웠다.
[악마와 몸의 원주인이 굳이 다른 차원의 영혼을 끌어들인 건, 아마 무지의 은폐를 노리기 위해서였을 거야. ‘인지가 존재를 증명한다’란 규칙을 이용한 일종의 편법인데… 일단 이 세상엔 적용되지 않은 법칙이라 이쪽 질서에 속한 존재들은 쓰고 싶어도 못 써. 너처럼 그쪽 질서에 속한 존재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그래. 인간에겐 좀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
육귀는 인간이 턱을 쓰다듬듯 지느러미로 제 아래쪽 입을 살살 쓸더니 삐옥삐옥 울었다.
[이 규율은… 말 그대로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안 하면 없는 게 돼.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은 없는 것이 되고, 악마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면 악마가 없어지는 거지. 물론 이것도 더 많이 공유되는 사상이 우선된다는 등의 세부 사항이 있긴 한데…….]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이 몸으로 처음 깨어났을 때 이 신체에 악마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악마가 사라지지 않은 건 왜입니까? 이것도 그 세부 사항을 따른 겁니까?”
[아, 그건 아니야. 그건 그냥 세상이 달라서 그래.]
“…어떤 의미입니까?”
[그으러니까아… 편법 자체는 ‘네 영혼’ 덕에 발동이 되지만, 악마는 다른 질서에 속하다 보니 그 규칙이 완벽하게 반영되진 않는단 거야.]
나는 그 모든 말을 듣고 생각했다.
뭔 소리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답답함을 알아차린 듯 육귀가 지느러미로 땅을 툭툭 쳤다.
[너의 세상은 인지를 존재의 규정으로 써먹는 세상이야. 우리는 아니고. 이게 1번.]
“예.”
[또, 앞서 말한 법칙에 따라 네가 인지 못 한 건 없는 게 돼. 우린 아니고. 이게 2번.]
“예.”
[그러면 이제 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막는 방패의 대결 같은 모순이 남지? 이 지점에서 바로 ‘무지의 은폐’가 탄생하는 거야. 없지만 존재하는 무지의 은폐가.]
“…없어진 것 같지만 있다는 뜻입니까?”
[정확해. 네가 인지하기 전까지 이건 없는 게 돼. 그렇지만 아예 없어진 건 아니야. 네가 가림막이 되어서 ‘없는 척’하고 있을 뿐.]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 듯했다.
“…하지만, 제가 이것의 존재를 완전히 모를 때에도 누군가는 제게서 마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육귀의 말이 정말이라면, 나와 인퀴지터의 첫 만남은 어째서 그런 형태를 띠었는가? 그때의 나는 오른팔의 악마를 설정으로만 생각할 뿐 실존한다고는 추호도 여기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인퀴지터가 내게서 마기를 느낀 건 대체 왜야?
[그건 격이 달라서 그래. 세계의 규칙을 이용했다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건 결국 너, 그러니까 하나의 영혼이잖아. 그거에 대악마가 전부 가려지면 그거야말로 문제 아니겠어? 도리어 나는, 네가 이 정도까지 가려낸 게 놀라울 정돈데.]
내 의문은 그 뒷말로 대충 해결이 되었다. 불만이 쌓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세상의 법칙이 저렇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무지의 은폐를 쓰려고 널 데려왔단 건 거의 확실해졌네. 너야 잘 모르겠지만… 네 육신, 방금 사실을 듣고 난 후 한층 더 악마에 가까워졌거든. 갈무리하지 않으면 백 리 밖에서도 발각될 수준인데?]
“…그건, 좋지 않은 소식이군요.”
[말했잖아. 알면 돌이킬 수 없다고.]
염병. 호기심이 해결된 건 좋지만 그게 독으로 이어지는 것도 좀 환장할 일인데. 이게 맞나? 나 집으로 정말 갈 수 있는 건가?
“…하면 저를 이곳에 끌고 온 존재가 제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까?”
그러다 문득, 나는 내가 애걸복걸해도 한 마디 얹지 않던 시스템을 떠올렸다.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곱씹었다.
지금까진 잔인하고 이기적이며 비정하게 사람 엿먹이는 개새끼라 여기고 넘겼는데… 혹시 그 고요에도 이유는 있었을까?
[그럴 확률이 농후하지. 설마 설명도 안 해 놓고 자기가 싼 똥을 치워 달라 하는 부류겠어? 정말 그거라면 그 새낀 맞아 죽어도 싸.]
“…그렇군요.”
나는 지독한 답답함 속에서 숨을 뱉었다. 한 올 한 올 흐트러지는 호흡의 실타래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래서였군요.”
다만, 다만 확실한 건…….
시스템 뒤에 숨어 있을 이에게 신랄히 붙이던 꼬리표 중 냉정하다는, 비정하다는 비난은 어쩌면 도로 회수할지도 모르겠단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끝난 후 만약 그와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로 내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오직 나를 위해서─오, 물론 위하는 방법이 글러 먹어도 한참 글러 먹었다고 개쌍욕은 하고 싶다. 시발, 멋대로 납치해서 아가리 끝까지 여무는 게 어딜 봐서 나를 위한 건가. 정말 나를 위했으면 아예 데리고 오질 말든가 최소한 동의를 구하든가 했어야지, 이 개같은─참았던 거라면… 최소한 ‘이기적이고 잔인한 데다가 비정한 씹새끼’에서 ‘여전히 이기적이지만 나를 생각해 주려고는 했는데 그 방법이 틀려 먹은 씹새끼’로 여겨 줄 순 있을 것 같다고.
어디까지나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온다면.
[…설마 널 불러온 새끼가 측은해진 거야?]
“그렇게까지 호구는 아닙니다.”
나는 그저…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선로를 튼 사람이 희생된 나에게 사과를 해 온다면, 그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해와 용서는 별개지.
아무렴, 내 인생이 제대로 좆됐는데 내가 걔를 용서해야겠는가? 다섯 사람을 구했을지언정 내가 희생됐는데?
희생은 스스로가 자원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남이 결정한 희생은 희생이라 할 수 없다. 산 제물이지.
“반 죽여 버려야죠.”
그러므로 그 새낀 좀 처맞을 것이다. 아니, 존나 처맞게 될 것이다. 방금 말했지만, 이해와 용서는 별개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사이, 내 단호한 반응에 육귀가 등딱지를 으쓱였다.